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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문 일러스트

돌아온 문

율도고 교문 위로

영목의 꽃이 흔들렸다.

꽃잎이 철문 상단을 스치고,

아침 햇살에 잠깐 멈추듯 떠올랐다.

1년 전에도 같은 장면이었다.

같은 문, 같은 꽃, 같은 봄.

다른 건 단 하나.

문 앞에 선 사람의 위치였다.

홍은명은 교문 아래에서

발끝을 한 번 고쳐 섰다.

1년 전에는 이 문이 크고 차가웠다.

지금은 구조를 안다.

어느 복도에서 바람이 세게 부는지,

어느 계단이 점심시간마다 막히는지,

누가 어디쯤에서 사람을 지켜보는지.

아는데도 낯설었다.

선배.

머릿속에서 그 단어를

두 번쯤 굴려봤다.

아직 입에 붙지 않았다.

전태산은 멈추지 않았다.

문기둥을 툭 치고 지나가더니,

은명 어깨에 팔을 올린 채

익숙하게 교정을 가로질렀다.

"야, 작년에 여기서

쁘아카오 처음 만난 거 기억나냐?"

"기억 안 날 리가.

넌 그날도 시끄러웠어."

"시끄러운 게 아니라

활기찬 거지."

"그래. 네 사전에선 그렇겠지."

은명의 답은 건조했다.

그런데 태산은 그 미세한 온도를

정확히 읽었다.

"방금 웃었지?"

"안 웃었어."

"웃었어.

입꼬리 오른쪽 2밀리."

"수치로 놀리지 마."

"너한테 배웠지."

둘 사이에 짧은 웃음이 오갔다.

1년 동안 수백 번 싸우고,

수천 번 티키타카를 주고받은 호흡.

태산은 은명의 무표정을 읽고,

은명은 태산의 과장을 걸러낸다.

교정 중앙 참도 쪽에서

누군가 양팔을 크게 흔들었다.

리오였다.

"은명 형! 태산 형!

2학년 첫날이다아아!"

올가가 리오 뒷목을 잡아당겼다.

"볼륨 줄여.

아침부터 에너지 낭비하지 마."

카이는 벚나무 둥치에 기대

캔커피를 흔들고 있었고,

아르준은 태블릿에

이미 입학식 동선을 정리 중이었다.

위노나는 드론 하나를 접어 들며

은명 쪽으로 다가왔다.

"신입 명단 1차 정리 끝.

표시한 네 명, 우선 관찰 대상이에요."

은명은 패드를 받자마자

손가락으로 화면을 빠르게 넘겼다.

이름, 가문, 예상 계열,

기본 성향 요약.

위노나식 보고서는 늘 정확했다.

스크롤이 멈춘 지점.

홍천무.

홍씨세가 본가.

은명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태산도 옆에서 고개를 들이밀더니

다른 줄에서 멈췄다.

전서린.

전씨세가 방계.

태산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와. 우리 둘 다

가문 후배가 붙네?"

"정확히는 뒤집힌 가문 후배지.

넌 전씨, 나는 홍씨."

태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더 재밌지.

운명치고는 취향 확실하네."

"취향이라고 부르기엔

대가가 컸어."

은명 말끝이 짧아졌다.

500년 맹약,

교환된 핏줄,

그리고 아직 열리지 않은 문.

아침 공기가 잠깐 무거워졌다.

태산은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가 있잖아.

무거우면 반으로 나눠 들면 돼."

은명은 대답 대신

패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말보다 빠른 동의였다.

리오가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중요 공지!

2학년 첫날 기념 점심은

선배님들이 쏘는 걸로!"

"네가 지금

선배한테 삥 뜯는 거 아냐?"

"미화하지 마.

이건 전통 계승이지."

올가가 한숨을 쉬었다.

카이는 웃음을 참다가 컥 소리를 냈다.

아르준은 태블릿에서 눈도 안 떼고

덧붙였다.

"예산 항목상

오늘은 각자 계산이 합리적이다."

"배신자!"

아침의 긴장이 한 번 풀렸다.

은명은 멤버들을 보며

속으로 숫자를 맞췄다.

누가 전투축,

누가 정보축,

누가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줄지.

2학년의 첫날은

이미 운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대강당으로 향하는 복도는

신입들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교복 깃을 만지는 손,

명찰을 다시 붙이는 손,

옆 사람 이름을 슬쩍 훔쳐보는 눈.

1년 전 자기 모습이

프레임처럼 겹쳐졌다.

태산이 관객석 끝줄에 앉으며

단상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나도 저기서

저렇게 얼었나?"

"넌 얼지 않았어.

혼자 과열됐지."

"오, 표현 세련됐다.

한 해 사이에 많이 컸네?"

"너 관리하느라 컸지."

"영광이다, 선배님."

강당 조명이 낮아졌다.

무대 중앙에 이자벨라가 올랐다.

흠잡을 곳 없는 자세,

정확한 호흡,

마이크를 잡는 각도까지 계산된 움직임.

"율도고에 온 걸 환영한다.

이곳은 힘의 크기보다

힘의 이유를 먼저 묻는다."

짧은 문장이었는데

강당 전체가 조용해졌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질서는 세워졌다.

그 옆, 테무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1학년 쪽 공기가

눈에 보일 만큼 굳었다.

"저분이 테무진 선배야?"

"숨소리 크게 내면

혼날 것 같아..."

"눈 마주치면 바로

훈련장 끌려간다던데."

수군거림이 번졌다가

테무진 시선이 한 번 스치자

칼로 자른 듯 멈췄다.

태산은 그 시선을 받으면서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세웠다.

1년 전에는 저 위압이 부담이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저 자리를 완전히 알 순 없어도,

왜 저렇게 서 있는지는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다.

소개 순서가 넘어가자

은명은 단상 아래 신입들을

한 줄씩 훑었다.

그때 태산의 시선이

고정되는 지점이 보였다.

홍천무.

정자세.

견갑과 골반, 발끝 각도,

중심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긴장한 신입의 자세가 아니었다.

평소 자세가 이미 실전 자세인 몸.

태산이 낮게 중얼거렸다.

"저건... 기본기가 아니라

생활이 무예인 타입인데."

"홍씨세가 본가. 은명이 사촌이네?.

순수 기술형 무투가."

"설명 듣기 전에도

그 냄새가 난다."

태산은 왼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경계라기보다 반가움에 가까웠다.

좋은 상대를 발견했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는 버릇.

아래줄 신입 둘이

홍천무를 보며 속삭였다.

"자세 봤어?

교본이 걸어다녀."

"같은 신입 맞아?

저건 이미 선배급인데."

홍천무는 주변 시선을

아예 듣지 않는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고,

호흡도 일정했다.

자기 박자 안에 세계를 끌어들이는 타입.

은명의 시선은

다른 축으로 움직였다.

전서린.

두리번거리던 눈이

갑자기 위쪽 관객석으로 튀었다.

누군가를 찾던 표정이

은명과 눈이 맞는 순간

햇빛처럼 확 열렸다.

전서린이 양손을 번쩍 들어

작게 흔들었다.

망설임도 계산도 없는 인사.

반갑다는 감정이 그대로 튀어 나왔다.

은명이 아주 잠깐 굳었다.

"...왜 나를 보고

저렇게 반가워하지?"

태산이 바로 옆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팬 1호 확보.

축하드립니다, 홍 선배님."

"시끄러."

"아니, 이건 사실이잖아.

표정 봐. 거의 라이트 켠 눈인데?"

은명은 대답 대신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런데도 시야 한쪽에서

전서린의 반짝이는 눈빛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소개가 이어졌다.

엘레나 카지미르.

고개 각도와 시선 이동이

정교한 격자처럼 움직였다.

누가 누구를 보고,

누가 누구를 피하는지,

입학식 첫 분포를 읽는 눈이었다.

무사 이브라힘.

신입 중 가장 큰 체구.

그 거대한 몸을 접어 앉은 채

단상의 테무진만 바라봤다.

존경,

혹은 목표 설정.

둘이 섞인 단단한 시선.

은명은 머릿속에서

네 이름을 나란히 놓았다.

홍천무, 전서린,

엘레나, 무사.

앞으로 부딪힐 벡터의 각도가

대충 그려졌다.

그때 옆자리가

조용히 흔들렸다.

제갈린이 앉아 있었다.

드론 두 대가 어깨 위에서

소음 없이 정지했다.

"홍천무 데이터,

이미 1차 파싱 끝.

생각보다 흥미롭네."

"입학식 전에

다 조사한 거야?"

"당연하지.

정보가 늦으면 선택권이 줄어."

"여전하네."

"너도 여전해.

표정은 안 바뀌는데,

눈은 다 말하잖아."

은명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제갈린은 변함없이 빠르고,

변함없이 정확했다.

그리고 그런 정확함 뒤에

굳이 말하지 않는 감정이

아주 얇게 깔려 있다는 것도,

이제는 조금 읽혔다.

신입 선서가 시작됐다.

"우리는 율도고 학생으로서

힘의 이유를 잊지 않겠습니다!"

수백 개 목소리가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관객석 바닥이

미세하게 울렸다.

태산이 팔짱을 풀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장면은 똑같네.

1년 전이랑."

"응."

"근데 느낌은 완전 다르다."

"위치가 바뀌었으니까."

"그래도 하나는 같네."

"뭔데?"

"앞으로 바쁠 거라는 거."

은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박수가 터졌다.

환호가 이어졌다.

강당 바깥 복도까지

밝은 소음이 넘쳐흘렀다.

의자가 접히는 소리,

신발 밑창이 바닥을 미는 소리,

긴장 풀린 웃음이

층층이 겹쳐 올라왔다.

2학년 관객석에서 내려오는 길은

작년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때는 위를 보며 올라갔고,

지금은 아래를 보며 내려간다.

사소한 동선 하나가

위치 변화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태산이 난간에 손을 얹고

아래 복도를 내려다봤다.

신입들이 조별 안내를 받으며

각 반 라인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얼굴이 다 다르네."

"당연하지.

나라가 다르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눈빛이 다르다고."

태산의 말투가

순간 진지해졌다.

"작년 우린 솔직히

살아남는 데 급했잖아.

쟤들은... 준비하고 온 눈이야."

은명이 잠깐 태산을 봤다.

평소라면 농담을 던질 타이밍인데,

이번엔 고개만 끄덕였다.

"맞아.

1학년 전체 평균 긴장도는 내려갔고,

개인 단위 완성도는 올라갔어."

"번역하면?"

"쉽게 말하면

초반부터 빡세다는 뜻."

"오케이, 그건 좋네."

복도 아래쪽에서

홍천무가 같은 반 안내 라인에 섰다.

주변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짧게만 답하고

시선을 앞에서 떼지 않았다.

리오가 슬쩍 귓속말했다.

"형, 저 신입 무섭다.

웃질 않는데?"

올가가 팔짱을 끼고

홍천무를 관찰했다.

"무서운 게 아니라

낭비를 안 하는 타입 같아."

아르준이 태블릿에

짧게 메모를 남겼다.

"감정 표현 최소형.

지시 이행 속도 상위 예상."

태산은 그 반응들을 들으며

난간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곤 계단을 절반쯤 내려가

홍천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일부러 부딪치지는 않았고,

일부러 피하지도 않았다.

홍천무가 먼저 멈춰 섰다.

각이 잡힌 인사였다.

"2학년 전태산 선배님이죠."

"맞아.

너는 홍천무."

"예. 오늘부터

B반 소속입니다."

목소리의 떨림이 없었다.

표정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태산은 느꼈다.

겉은 정적이어도

안쪽 리듬은 빠르게 돈다.

언제든 계산을 꺼낼 준비가 된 몸.

"첫날인데

너무 각 잡지 마.

여긴 생각보다 오래 달려야 돼."

홍천무가 아주 짧게

눈을 들어 태산을 봤다.

"오래 달리기 위해서

초반에 기준을 세웁니다."

"좋네.

기준 높은 놈 좋아해."

태산이 웃으며 손을 내밀자,

홍천무는 잠깐 멈췄다가

정확한 각도로 악수를 받았다.

힘은 과하지 않았다.

힘을 숨기는 방식이 오히려 또렷했다.

은명은 몇 걸음 뒤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짧은 악수 하나에도

두 사람 성향이 드러났다.

태산은 체온으로 거리를 줄이고,

홍천무는 규격으로 거리를 잰다.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날아오듯 목소리가 튀었다.

"홍은명 선배님!"

전서린이었다.

안내 라인을 잠깐 이탈해

거의 달리다시피 다가왔다.

담당 교사가 손짓으로 제지하자

그제야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근데 인사만 하고 갈게요!"

전서린이 숨을 고르며

은명 앞에서 반듯하게 섰다.

눈빛은 여전히 반짝였다.

"저 전서린입니다.

전씨세가 방계.

도술 계열로 지원했고,

선배님 논문... 아니,

전술 메모 엄청 많이 봤습니다!"

은명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내 메모를

어디서 봤다고?"

"공개된 것만요!

비공개는 안 봤어요!

아마요!"

태산이 옆에서

웃음을 삼켰다.

"마지막 단어가

좀 불안한데?"

전서린이 태산을 보더니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전태산 선배님도

영상으로 많이 봤습니다!

활빈멸쇄 진짜 멋있어요!"

"오, 고맙다.

근데 여기선 뛰지 마.

첫날에 벌점 먹으면 아깝잖아."

"넵! 안 뛰겠습니다!

빠르게 걷기만 하겠습니다!"

전서린은 정말로

빠르게 걸어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리오가 중얼거렸다.

"와, 에너지 뭐야.

충전기 없이 사는 타입인가?"

"저런 축은

폭주와 성장이 같이 온다.

관리 못 하면 터지고,

잡으면 크게 오른다."

은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분석 모드가 켜진 톤이었다.

복도 맞은편 벽에는

엘레나가 서 있었다.

아까부터 이쪽을

직접 보지 않는 척하며

계속 관찰하던 시선.

은명이 눈을 맞추자

엘레나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A반 엘레나 카지미르입니다.

환영사,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선배님들 반응이."

"내 반응이?"

"네.

정보를 듣는 얼굴이 아니라

정보를 배치하는 얼굴이었거든요."

은명이 짧게 웃었다.

칭찬인지 견제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문장.

그래서 더 엘레나다웠다.

"관찰 빠르네.

첫날치고는."

"첫날이라서 더요.

첫날 데이터가

가장 덜 가공돼 있으니까."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엘레나는 다시 자기 라인으로 돌아갔다.

짧은 문장만 남기고

필요 이상은 남기지 않는 방식.

무사 이브라힘은

복도 끝에서 테무진에게

정중한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가 접히는 각도는

의외로 정교했다.

테무진은 짧게 턱을 끄덕였고,

무사는 그 한 번의 허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태산이 그 장면을 보고

낮게 감탄했다.

"저 체격에 저 절도면

맞붙으면 피곤하겠는데."

"네가 피곤하다고 말하면

진짜 피곤한 거지."

"응. 재밌게 피곤할 듯."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간 뒤,

제갈린이 다시 옆으로 왔다.

드론 화면에

방금 수집한 로그가 떠 있었다.

"첫날 관찰값 정리 끝.

홍천무, 전서린,

엘레나, 무사.

예상보다 빠르게 판에 적응해."

"너도 오늘

유난히 바빠 보이네."

"바쁜 게 아니라

늦지 않으려는 거야."

제갈린 시선이

은명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너도

이번 학년엔 늦지 마.

질문이 오면 답을 미루지 말고."

은명이 반응하기 전에

제갈린은 이미 뒤돌아섰다.

남겨진 문장이

귓가에 얇게 걸렸다.

질문이 오면 답을 미루지 말 것.

은명은 그 문장을

속으로 한 번 더 읽었다.

태산이 옆에서

손가락으로 가볍게 난간을 두드렸다.

"오늘 느낌 어때?"

"사람은 많고,

변수는 더 많아.

근데 방향은 보여."

"그럼 됐다.

우린 방향만 맞으면

밀어붙이면 되잖아."

은명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에도 그렇게 가자."

복도 창문 너머로

신입 대열이 운동장 쪽으로 이동했다.

봄빛이 교복 어깨 위에 얇게 내려앉았고,

각 나라 문장이 서로 다른 색으로 반짝였다.

은명은 대열 끝을 보며

마음속 체크리스트를 펼쳤다.

수업 적응, 전력 분류, 위험도 측정,

그리고 사람 사이 거리 조정.

2학년의 첫날은

이미 운영표가 되어 굴러가기 시작했다.

태산은 은명 얼굴을 옆에서 보더니

피식 웃으며 손등으로 툭 쳤다.

"또 머릿속으로

표 짜고 있지?"

"응."

"좋네.

넌 판 깔고,

난 밀어붙이고."

"역할 고정이네."

"효율 좋잖아."

둘의 대화가 끝나자

뒤에서 작은 소란이 났다.

신입 몇 명이 라인 정렬 중에

서로 순서를 착각해 멈춰 섰다.

담당 교사가 다가가려는 순간,

홍천무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좌측 두 줄,

표식 기준으로 반 칸 이동.

그대로 서 있으면 통로가 막힙니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지시가 정확했다.

신입 둘이 본능적으로 움직였고,

막히던 라인이 바로 풀렸다.

리오가 감탄하듯 눈을 크게 떴다.

"와, 저 신입

첫날부터 지휘하네."

아르준이 즉시 덧붙였다.

"지휘라기보다

구조 복원에 가깝다.

패턴 인식 속도가 빨라."

은명은 난간에 손을 올린 채

홍천무를 잠깐 바라봤다.

조용한 타입이지만

필요할 때는 망설임 없이 끼어든다.

말보다 구조를 먼저 보는 사람.

그 옆줄에서는

전서린이 담당 교사에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받아 적고 있었다.

필기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고,

중간중간 질문도 바로 던졌다.

"실전 기초반은

주당 몇 시간인가요?"

"도술 실습 중

보조 파트너 지정되나요?"

"선배 멘토링 신청은

언제 열리나요?"

교사가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전서린은 답을 듣자마자

다시 노트에 적었다.

밝은 에너지에 가려져 있었지만,

집중력만큼은 날카로웠다.

태산이 턱으로 홍천무 쪽을 가리켰다.

"저쪽은 칼같고,

이쪽은 불꽃같네."

"둘 다 다루기 어려운 축이야."

"그래서 재밌지."

그때 홍천무가

자기 라인으로 돌아가며

태산 쪽을 한 번 스쳤다.

말이 들릴 듯 말 듯,

짧은 속도로 떨어졌다.

"순수 기술로도

넘을 수 있습니다."

태산 눈이 가늘어졌다.

도발인지 선언인지,

아직은 구분하기 어려운 톤.

그런데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태산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좋다."

은명이 바로 옆에서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첫날부터 불붙이지 마."

"안 붙였어.

저쪽이 성냥을 보여줬지."

은명은 대답 대신

태산 팔꿈치를 가볍게 밀었다.

태산은 그 신호를 읽고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복도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입 대열이 체육관 방향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은 건 봄빛과 소음,

그리고 시작 직전의 정적이었다.

리오가 양손을 머리 뒤로 깍지 끼며

계단 쪽으로 먼저 걸었다.

"형들, 결론만 말해.

올해도 우리 바쁘지?"

은명이 짧게 답했다.

"작년보다 더."

태산은 계단 첫 칸에 발을 올리며

뒤도 안 보고 웃었다.

"좋아.

심심한 학년은 재미없거든."

올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말, 제일 무서운 말이야.

태산이 심심해하면 꼭 사고가 나."

카이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서 은명이 있는 거지.

사고를 사건으로 바꾸는 사람."

아르준은 태블릿을 닫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럼 판은 완성됐네.

밀어붙이는 주먹 하나,

정리하는 머리 하나."

은명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걸음이 아주 조금 빨라졌다.

태산은 그 보폭에 맞춰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췄다.

말하지 않아도 맞물리는 리듬.

그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지하 서버실.

무인 공간.

형광등 하나가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서버 팬 소리만 도는 어둠 속,

모니터 한 대가 켜졌다.

흰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2학년이 되셨군요."

"올해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 天機"

작년 같은 시각,

같은 화면엔 축하가 있었다.

이번에는 질문이었다.

모니터가 꺼졌다.

팬 소리만 남았다.

어둠이 다시 서버실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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