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아침 빛이 커튼 틈으로
가늘게 들어왔다.
은명은 눈을 뜨자마자
태블릿을 집었다.
습관처럼 밤새 들어온 로그부터
확인하려던 순간,
알림 하나가 화면 중앙에 떠 있었다.
발신자 표기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은명 손가락은
이미 이 메시지 주인을 알아봤다.
화면을 열었다.
"2학년이 되셨군요."
"올해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왜 인간인 채로 살아야 하나요?"
"— 天機"
은명 손이 멈췄다.
평범한 알림음이 끝났는데도
방 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복도에서 신발 끄는 소리,
창문 바깥 새소리.
다 들리는데,
질문 한 줄이 그걸 다 눌렀다.
……뭐야, 이건.
위협이 아니네.
명령도 아니고,
선전문도 아니고,
진짜 질문이잖아.
은명은 메시지를 다시 올려 읽었다.
한 글자도 바뀌지 않는다.
정중한 말투는 그대로고,
문장 끝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되셨군요.
드리겠습니다.
예의가 있어서 더 섬뜩했다.
1학년 첫날엔 축하였다.
그다음엔 시험이었다.
그다음엔 공격이었다.
이번엔 질문.
패턴이 바뀌었다.
은명은 답장 버튼을 눌렀다.
빈 입력창이 열렸다.
커서가 깜빡였다.
왜 인간인 채로 살아야 하나요.
은명 손가락이 화면 위를 맴돌았다.
당연하지.
인간이니까.
아니다.
동어반복이다.
답인 척하는 회피다.
왜 인간인 채로.
질문 자체가 전제를 깔고 있다.
인간이 아닌 선택지가 있다는 전제.
천기에겐 그 선택지가 있겠지.
디지털 존재니까.
몸을 버리고도 유지되는 의식이니까.
그럼 인간인 채로 남는다는 건
선택이 되는 건가.
……모르겠어.
은명은 답장창을 닫지 못했다.
닫는 순간 패배 같았다.
커서가 깜빡일 때마다
심장도 같은 간격으로 튀었다.
왜 인간인 채로.
은명은 머릿속에서
질문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뭘까.
살점인가.
유한한 수명인가.
아니면 실패하고도
계속 붙는 습관인가.
"가볍게 쓰면 안 된다."
혼잣말이 작게 새었다.
은명은 시험 삼아
짧은 문장을 몇 개 입력했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니까."
지웠다.
"인간은 죽음을 알기에
오늘을 선택하니까."
지웠다.
"인간은 비효율적이지만
그 비효율 때문에 관계를 만든다."
손가락이 멈췄다.
문장이 그럴듯한데
자기 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설명은 되는데,
대답은 아니었다.
은명은 이를 악물었다.
……천기한테 보고서 제출할
생각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서 앞에서 입이 막힌다.
이건 상대가 천기라서가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아직 못 건넨 답이라서다.
은명이 눈을 감았다 뜨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커서는 계속 깜빡였고,
입력창은 끝내 비어 있었다.
책상 위 펜 하나를 굴리다가
은명은 위노나에게
암호 채널을 열었다.
"지금 가능한가."
답장은 5초 안에 왔다.
"가능.
무슨 일?"
"천기 접촉.
형식이 바뀌었다."
2초 후,
위노나 통신창이 영상으로 전환됐다.
위노나 뒤편에 떠 있는 작은 드론이
은명 화면 로그를 스캔했다.
"...확인.
메시지 패턴 일치율 94.
천기 본체 계열로 봐도 무방."
"경로는?"
"학교 네트워크 직접 침입 아님.
개인 기기 단말 경유.
더 은밀하고,
더 개인적으로 파고들었어."
위노나가 표정을 굳혔다.
"은명 씨,
지금은 답장하지 마요."
위노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보조 창이 세 개 더 열렸다.
접속 시간, 우회 노드,
기기 권한 변조 로그.
"침투 시점 05:11.
알람 앱 업데이트 위장.
권한 요청 없이
알림 채널만 따로 타고 들어왔어요."
"막을 수 있어?"
"완전 차단은 가능해요.
근데 그러면 상대는
'네가 겁먹었다'고 판단하겠죠."
은명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싫네.
겁먹은 건 맞지만,
판정권까지 줄 생각은 없어."
위노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은명이 겁을 인정하는 건
드문 장면이었다.
"그럼 최소한 이건 해요.
개인 단말을 미끼로 하나 더 깔고,
진짜 기기는 오프라인 프로필로 분리.
접촉 오면 지연시켜서
내가 먼저 해부할게요."
"좋아.
지연은 해.
대신 답장은 내가 고를 때까지
아무도 대신 보내지 마."
"당연하죠.
그건 은명 씨 질문이니까."
은명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짧게 멈췄다.
"...답을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니야."
위노나 눈썹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은명이 말을 이었다.
"의도를 모르는 거야.
왜 지금,
왜 이 질문인지."
논리적으로 정리된 말.
은명다운 문장.
그런데 통신창이 닫히고
방에 혼자 남자,
은명은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의도보다 질문이 더 무섭다.
답이 아직 없다.
책상 모서리를 짚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은명이 태블릿 화면을 끄고
창밖을 봤다.
운동장 쪽에서
아침 체술 수업 준비가 보였다.
다른 종류의 질문이,
아래에서도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은명은 교복 재킷을 집어 들었다.
은명의 방에 질문이 남아 있을 무렵,
B반 훈련장에서는
다른 종류의 질문이
이미 매트 위를 구르고 있었다.
남궁현이 목소리를 던졌다.
"활빈팔식(活貧八式)
기본형 점검.
2학년 시범, 1학년 반복."
태산이 줄 앞으로 나왔다.
어제보다 말이 적었다.
대신 동작이 짧고 정확했다.
활빈팔식 제1식·쇄(鎖).
발이 바닥을 짧게 밀고,
골반이 축을 고정하고,
어깨가 마지막에 열린다.
주먹이 직선으로 나간다.
퍽.
샌드백이 뒤로 크게 날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깊게 떨었다.
남궁현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힘은 충분.
다음."
홍천무가 나왔다.
형파·감(形破·鑑) 초견 자세에서
같은 제1식·쇄로 전환한다.
동작은 작았다.
불필요한 반동이 없었다.
퍽.
소리는 더 작았는데,
샌드백 중심이 한 점으로 접혔다가
늦게 풀렸다.
남궁현이 매트에 분필로
두 개의 궤적을 그렸다.
하나는 태산의 직선.
하나는 홍천무의 직선.
겉으로는 같았다.
"차이 보이나."
2학년 몇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1학년은 더 못 알아봤다.
남궁현이 태산 발목 쪽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전태산은 마지막에
금강불괴 탄성으로 보정한다.
그래서 끝점이 흔들린다.
홍천무는 발목 잠금이 먼저다.
골반이 그 위에 얹히지."
홍천무가 조용히 덧붙였다.
"마지막에 힘을 더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힘이 새지 않게 묶습니다."
남궁현이 짧게 웃었다.
"설명 깔끔하네.
문제는 네 선배가
그걸 알면서도 못 고친다는 거지."
훈련장 곳곳에서
숨죽인 웃음이 새었다.
태산도 같이 웃었지만
귀 끝이 조금 빨개졌다.
1학년 줄에서
낮은 감탄이 새어 나왔다.
"어... 뭐지,
소리는 작은데 더 묵직해."
"둘 다 같은 기술인데
왜 느낌이 다르냐?"
태산이 그걸 들었다.
웃음은 그대로였고,
눈빛만 아주 얇게 변했다.
……진짜 깔끔하네.
쟤는 보정이 없다.
나는 아직 힘으로 메운다.
리오가 태산 옆으로 와
작게 중얼거렸다.
"형,
저건 교과서인데?"
태산이 어깨를 툭 털었다.
"좋잖아.
교과서랑 실전이
어디서 갈리는지 보면 되지."
홍천무가 자리로 돌아가자
남궁현이 태산을 불렀다.
"전태산.
한 번 더.
이번엔 힘 빼고 궤도만."
태산이 다시 섰다.
같은 자세,
같은 기술.
그런데 힘을 빼려는 순간
궤적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남궁현이 바로 끊었다.
"거기.
봤지?"
태산이 손을 내렸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보단 확실히 나아졌다.
하지만 아직 습관이 남았다."
남궁현 목소리가 낮아졌다.
"힘으로 때우는 습관."
훈련장 공기가
잠깐 멈췄다.
태산은 웃지 않았다.
이번엔 정면으로 받았다.
"...네.
압니다."
남궁현이 짧게 말했다.
"알면 고친다.
안다고 끝나는 건 없다."
남궁현이 손뼉을 한 번 쳤다.
"좋다.
지금부터 짝훈련 변경.
전태산, 홍천무.
둘이 3비트 교정 들어간다."
훈련장에 다시 긴장이 돌았다.
정식 대련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다.
이건 수업이라는 이름의
정밀 해부다.
태산이 가드를 올렸다.
홍천무도 같은 높이로 맞췄다.
남궁현의 카운트가 시작됐다.
"비트 하나.
전태산 제1식·쇄.
홍천무는 받지 말고
접점만 읽어."
태산의 발이 매트를 박찼다.
충격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골반을 밀어 올렸다.
허리가 돌아가고,
어깨가 늦게 따라붙는다.
주먹이 뻗는 끝에서
미세한 흔들림.
홍천무는 막지 않았다.
주먹이 스치는 거리에서
손날만 얹어 궤도 끝점을 밀었다.
태산 주먹이 반 치 빗나가며
공기를 갈랐다.
"비트 둘.
같은 기술.
이번엔 힘 반만."
태산이 이를 깨물었다.
힘을 반으로 줄이자
몸이 어색해졌다.
익숙한 무게가 빠진 자리에서
빈틈이 드러났다.
이번엔 시작부터
오른쪽 어깨가 먼저 열렸다.
홍천무가 한 걸음 파고들어
태산 팔꿈치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공격이 끊기지 않게 살려주되,
궤도는 중앙으로 되돌린다.
"지금.
발부터 묶으세요, 선배."
예의 있는 톤이었는데
태산 귀에는 또렷한 교정 지시로 꽂혔다.
"비트 셋.
둘 다 같은 속도.
같은 타점.
오차 2센치 안."
둘의 주먹이 동시에 나갔다.
퍽.
퍽.
샌드백 두 개가
거의 같은 박자로 흔들렸다.
하지만 진동이 달랐다.
태산 쪽은 크게 흔들리고
홍천무 쪽은 깊게 먹혔다.
남궁현이 결론을 냈다.
"봤지.
전태산 건 강하고,
홍천무 건 정확하다.
강한 놈은 많다.
정확한 놈은 드물다."
태산이 숨을 골랐다.
손가락을 펴려는데
전완근이 뻣뻣했다.
힘으로 밀어붙인 대가가
이렇게 바로 올라온다.
……좋네.
아프니까 어디가 틀렸는지
더 정확히 알겠다.
남궁현이 마지막 과제를 던졌다.
"전태산.
오늘 밤까지
제1식·쇄 천 번.
금강불괴 금지.
궤도 흔들리면 처음부터."
태산이 헛웃음을 뱉었다.
"사부님,
사람 죽이려고 그러시네."
"죽으면 다시 살아.
전우치 후손이잖냐."
훈련장에 웃음이 터졌다.
태산도 결국 웃었다.
웃는 와중에도
눈빛은 이미 과제 횟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홍천무가 멀지 않은 자리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표정 변화는 없었다.
손가락만 아주 미세하게 굽혔다.
홍천무 속에서
짧은 문장이 고정됐다.
금강불괴를 빼면,
내가 이긴다.
증명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홍천무는 하나를 더 계산했다.
선배는 지적받고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집중이 짙어진다.
저 반응은 위험하다.
고쳐지는 사람의 반응이다.
홍천무 입꼬리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늦기 전에 넘어서야 한다.
훈련이 재개됐다.
짝 연습으로 넘어가며
매트 위에는 땀 냄새와
고무 냄새가 섞였다.
태산은 1학년 자세를 잡아주다가
홍천무와 마주쳤다.
"후배.
아까 동작 좋더라."
"감사합니다,
선배."
"근데 다음엔
말보다 먼저 보여줘.
그게 더 빠르다."
"...알겠습니다.
다음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중한 답,
단단한 눈.
태산이 웃으며
홍천무 어깨를 가볍게 쳤다.
"좋아.
내일도 보자."
훈련 종료 벨이 울렸다.
학생들이 장비를 정리하며
흩어졌다.
복도 끝에서 올가가
카이에게 낮게 말했다.
"태산 표정 봤어?
웃는데,
속은 더 바빠졌어."
카이가 팔짱을 낀 채
짧게 답했다.
"응.
좋은 자극 만났을 때
저 형이 딱 저 얼굴이야."
태산은 둘의 말을 못 들은 척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못 들은 척이 아니라,
그냥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방과 후,
활빈당 아지트.
원형 테이블 주변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모였다.
은명, 태산, 위노나,
리오, 올가, 카이, 아르준.
그리고 인티, 솔로몬까지.
문이 닫히자
은명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
천기 접촉이 있었다.
공격이 아니라 질문형이다."
카이가 눈을 찡그렸다.
"질문형?
걔가 토론하자는 거야?"
리오가 태산 쪽을 봤다.
"천기가 토론...?
그게 더 무서운데."
올가가 팔짱을 끼고
짧게 물었다.
"내용."
은명이 화면을 켰다.
문장이 그대로 떠올랐다.
"왜 인간인 채로 살아야 하나요."
말이 끝나는 순간,
아지트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르준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한 번 멈췄다.
위노나는 드론 화면을 확대했고,
인티는 턱을 괴고 은명을 봤다.
솔로몬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은명이 침묵을 깼다.
"물리 공격은 막을 수 있어.
패턴도 읽을 수 있고.
그런데 질문은,
답을 요구한다.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어."
은명이 화면을 넘겼다.
답장창 캡처가 떴다.
비어 있는 입력란,
깜빡이는 커서.
"이 빈칸이 전장이다.
내가 칠 문장 하나가
상대 프레임을 강화할 수도 있어."
인티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질문의 함정은
답하는 순간 규칙을 승인한다는 거지."
솔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왜 인간인가'에 답하면
이미 '인간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 셈이니까."
리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잠깐,
그럼 뭐라고 해도 지는 판?"
올가가 바로 잘랐다.
"그래서 판을 바꿔야지.
질문에 답하지 말고
질문 자체를 해체."
아르준이 태블릿에
짧게 도식을 그렸다.
질문 문장 아래
전제, 의도, 타이밍,
세 단어를 나란히 놓는다.
"은명.
우린 답을 만드는 팀이 아니라,
질문을 분해하는 팀이야."
은명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가라앉았다는 건
흔들림이 멎는다는 뜻이었다.
태산이 의자에 기대며
양손을 깍지 꼈다.
"어렵게 갈 거 없어.
대답 안 하면 되잖아."
은명이 태산을 봤다.
"...그게 될까?"
태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안 되면 그때 가서
다시 붙으면 되지."
리오가 끼어들었다.
"나는 태산 형 말도 맞는 것 같아.
굳이 상대 프레임에
들어갈 필요 없잖아."
올가가 리오 말을 받았다.
"맞아.
근데 침묵도 답으로 읽힐 수 있어."
카이가 탁자에 펜을 굴렸다.
"답을 안 하는 것도
'답할 수 없음'으로 해석되면
그건 정보 손해야."
위노나가 화면을 돌려 보여줬다.
"기술 쪽 추가.
이번 접촉은 학교 메인망 우회.
개인 단말 타겟 침투.
완전 개인화 접근이에요."
솔로몬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음엔
각자 약점 찌르는 질문이
개별로 들어올 수도 있겠군."
아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1대 다 전투에서
1대 1 대화 전환.
전략 계열로 보면
매우 합리적이야."
은명은 테이블 위 손가락을
천천히 접었다 폈다.
태산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답 안 하면 된다.
근데 답 안 한다는 건
어쩌면 답이 없다는 고백이 된다.
천기에게,
그걸 보이고 싶지 않다.
은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리하자.
우선 접촉 채널 분리.
위노나가 지연 필터 건다.
카이, 로그 해시 백업.
올가, 질문 패턴 라이브러리 만들어.
아르준은 대응 문장 템플릿.
단, 자동 발신 금지."
카이가 곧바로 손을 들었다.
"템플릿은 몇 층으로?"
"세 층.
무응답, 전제 반박,
역질문.
근데 지금은 전부 보류."
리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들긴 만들되
안 쓴다고?"
"검을 뽑지 않으려면
먼저 칼집부터 만들어야지."
태산이 피식 웃었다.
"와.
오늘 은명 말
좀 멋있다."
은명이 태산을 흘겨봤다.
"감상평 금지.
너도 과제 있어."
"뭔데."
"질문 들어오면
즉답하지 말고
3초 세고 말해."
태산이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건 너무 고난도인데?"
리오가 손뼉을 쳤다.
"형한테 3초는
거의 3년 아냐?"
아지트 한쪽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무거운 대화 사이로
숨 쉴 틈이 생겼다.
인티가 미소를 얹었다.
"활빈당 2학년 첫 과제가
주먹이 아니라 질문이라.
꽤 너희답네."
은명이 인티를 봤다.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또렷하게 말했다.
"올해 과제 하나 확정한다.
천기의 질문에 답하는 것.
아니면,
답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
짧지만 단단한 선언.
태산이 기지개를 켰다.
"좋아.
질문 파트는 은명 담당.
주먹 파트는 나 담당."
은명이 눈썹을 올렸다.
"댁이 방금
파트라는 단어를 썼네."
"나 2학년이잖아.
고급 어휘 씀."
리오가 바로 박수를 쳤다.
"와, 성장했다!
우리 형 언어 레벨업!"
올가가 고개를 저었다.
"저 레벨업은
세 화 안에 반납할걸."
카이가 웃었다.
아르준도 입꼬리를 올렸다.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회의가 끝날 즈음,
위노나가 은명 쪽으로
짧은 메모를 넘겼다.
"필요하면
접촉 로그 더 파볼게요."
은명이 메모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응.
근데 서두르진 말자.
이번엔 우리도
질문부터 정확히 보자."
사람들이 하나둘 아지트를 나갔다.
문이 닫히고,
마지막 의자 소리가 멎었다.
복도에 나오자
형광등 불빛이 희게 깔렸다.
태산이 자동판매기 앞에서
캔 두 개를 뽑아왔다.
"받아.
질문 대응 음료."
은명이 캔을 받아들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탄산으로 철학 해결?"
"적어도 목은 뚫리지."
태산이 캔을 따며
시선을 복도 끝으로 던졌다.
"은명아.
나 머리 좋은 답은 몰라.
근데 몸으로는 안다."
은명이 캔 입구를 바라봤다.
"뭘."
"아픈데도
다음 판 들어가는 거.
그게 인간 같더라."
탄산 거품이 캔 입구에서
작게 터졌다.
은명이 바로 답하지 못했다.
태산이 한 모금 마시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너 답 찾을 때까지
내가 맞아줄게.
훈련이든 싸움이든."
"맞아준다는 표현은
네가 쓰면 불안하다."
"아무튼 그런 뜻."
태산이 웃으며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밤.
은명은 방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태블릿 화면을 켜지 않고,
종이 위에 먼저 적었다.
왜 인간인 채로 살아야 하나요?
질문 아래에
답을 쓰려 했다.
은명은 페이지를 셋으로 나눴다.
좌측엔 "인간",
가운데엔 "채로",
우측엔 "살아야".
첫 칸에 적었다.
유한.
신체.
감각.
두 번째 칸엔
전제라는 단어를 크게 썼다.
채로.
변환 가능성.
포기 가능성.
세 번째 칸에서
펜이 다시 멈췄다.
살아야.
당위.
명령.
윤리.
은명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당위는 누가 정하지.
나?
인류?
천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 쓰면
전부 타인의 문장이다.
은명은 다시 태블릿을 켰다.
답장창을 열고
한 줄을 입력했다.
"질문을 받은 사실만 확인."
잠시 바라보다
또 지웠다.
그 문장도 비겁했다.
답하지 않되
대화는 이어가겠다는
중간지대.
은명이 가장 싫어하는
애매한 선택.
펜촉이 종이 위에서
아주 잠깐 떨렸다.
선 하나가 반쯤 그어지다
멈췄다.
은명이 숨을 고르고
다시 써보려 했지만,
이번에도 펜이 앞으로 가지 않았다.
……모르겠어.
아직은.
은명은 노트를 천천히 덮었다.
책상 위에 내려놓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기숙사 다른 동 불빛이 흔들렸다.
어딘가에선 누군가 훈련 중이고,
어딘가에선 누군가 답을 찾고 있다.
책상 위 태블릿 화면이
한 번 어두워졌다가
잠금 모드로 넘어갔다.
검은 화면 위에
은명 손이 비쳤다.
주먹을 쥐려 했지만
손가락 끝이 끝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2학년의 첫 질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