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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자격 일러스트

선배의 자격

점심 종이 울리자,

A반 교실 뒤쪽 창문으로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은명은 자리에서

태블릿 창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전 수업 로그,

활빈당 메모,

그리고 지우지 못한 알림 하나.

왜 인간인 채로 살아야 하나요?

은명은 그 문장을

화면 구석으로 밀어둔 채

분석 보고서 폴더를 열었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뛴다.

탁.

탁탁.

탁탁탁.

문이 열리기도 전에

보자기 끝이 먼저 보였다.

전서린이었다.

양손에 도시락 보자기를 들고

숨도 안 고른 채

은명 책상 앞으로 돌진한다.

"은명 선배!"

"도시락 만들어왔어요!"

"같이 드실래요?!"

말 끝나기도 전에

은명 맞은편 의자가

드르륵 당겨졌다.

전서린은 정확히 앉았다.

허락은 생략했다.

은명이 눈을 깜빡였다.

"……나한테?"

"왜?"

전서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존경하니까요!"

은명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했다.

"존경으로 도시락을

만들어 오는 경우는

처음 보는데."

전서린이 보자기를 풀었다.

"처음이면 기념이잖아요!"

뚜껑이 열렸다.

계란말이, 멸치볶음,

작게 빚은 주먹밥,

그리고 종이쪽지 하나.

'염도 0.8%,

은명 선배 체력 고려.'

은명이 쪽지를 보고

잠깐 멈췄다.

……대체 왜 이런 데서

정확한 건데.

그때,

교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소리보다 먼저

차가운 공기가 들어온다.

제갈린이었다.

한 손엔 태블릿,

다른 손엔 얇은 보고서 파일.

걸음은 전서린과 정반대였다.

빠르지 않은데,

망설임이 없었다.

"홍은명."

"1학년 배치 분석

최종본. 확인해."

전서린과 제갈린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딱 1초.

아주 짧은 침묵이었는데,

복도 소음이 멀어졌다.

전서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제갈린 선배."

제갈린이 고개를 아주 조금만 기울였다.

"……점심시간에

바쁘네."

표정은 무표정.

그런데 미간이

한 밀리 정도 좁아졌다.

……왜 이 1학년이

여기 있지.

도시락까지 들고.

업무 방해야.

은명은 손을 뻗었다.

"잠깐만."

"보고서 줘."

제갈린이 파일을 넘겼고,

은명은 첫 장부터 빠르게 넘겼다.

표, 주석, 리스크 분류.

읽는 속도가 빨랐다.

맞은편에서

전서린 눈이 커졌다.

"……선배?"

"저한테 먼저

말하고 계셨잖아요!"

제갈린이 보고서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당연한 우선순위지."

전서린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갈린 선배."

"방해하지 마세요."

"지금 은명 선배랑

식사하려고 했거든요!"

제갈린 눈빛이 조금 낮아졌다.

"방해?"

"업무야."

전서린이 바로 받아쳤다.

"점심은 업무보다

중요해요!"

"몸 상하면

전략도 못 짜잖아요!"

제갈린이 한숨 비슷한 호흡을 냈다.

"그건 동의해."

"하지만 방금 건

감정 우선이었지.

업무는 시간민감도가 있어."

"…그리고 난

홍은명의 시간을

낭비할 생각 없어."

전서린이 눈썹을 세웠다.

"저도요!"

"낭비하러 온 거 아니에요!"

"선배 체력 약하니까

밥 먹이러 온 거예요!"

복도 쪽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야, 저거 뭐야."

"은명이 삼각관계냐?"

"도시락이랑 보고서가

동시에 박네."

"와, 점심이 제일 재밌다."

위노나가 복도를 지나가다

유리창 너머 상황을 봤다.

입꼬리가 아주 얇게 올라간다.

"……흥미로운

역학 관계네요."

그 말을 남기고

위노나는 그대로 지나갔다.

은명은 보고서 4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전서린 쪽을 보더니,

다시 제갈린을 봤다.

"둘 다 진정해."

"서린,

이건 지금 확인해야 돼."

"린,

표 2-3은 기준치가

너무 보수적이야.

이건 내가 수정할게."

전서린 어깨가

툭 떨어졌다.

"……아."

"네. 알겠어요."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이

하나도 안 괜찮았다.

은명이 그 표정을 보고

속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왜 저렇게

상처받은 얼굴이지.

존경이라며.

제갈린은 보고서 메모를

받아 적으면서도

전서린 도시락 쪽을

흘낏 봤다.

"반찬 구성은

균형적이네."

전서린이 눈을 크게 떴다.

"칭찬인가요?"

"데이터 코멘트야."

"……흥."

은명이 보고서를 덮고

이번엔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먹자."

전서린이 젓가락을 건넸다.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거부터 드세요.

달걀은 식으면 맛없어요."

은명이 한 조각을 집어

천천히 씹었다.

간이 세지 않았고,

기름기가 과하지도 않았다.

"……진짜

염도 계산했네."

전서린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네!"

"지난번에 선배가

짠 거 먹으면

오후 집중 깨진다고 했잖아요."

은명이 눈을 깜빡였다.

……내가 저걸

기억도 못 하는데,

쟤는 외우고 있었네.

제갈린이 그 장면을 보다가

파일 끝을 다시 세웠다.

"좋아.

식사는 합격."

"그러면 업무로 돌아가서,

표 2-3 하단 가설은

왜 삭제했지?"

은명은 입 안의 음식을 삼키고

바로 답했다.

"가설이 아니라 편견이라서."

"1학년 변수를

평균치로 묶으면

오판이 커져."

제갈린 눈빛이 가늘어졌다.

불쾌해서가 아니라,

흥미가 꽂혔을 때의 표정.

"근거?"

은명이 도시락 뚜껑 옆에

손가락으로 세 점을 찍었다.

"전서린. 홍천무. 무사."

"이 셋이 평균에서

제일 멀어.

근데 영향력은 제일 커."

"평균이 아니라

극값 중심으로 봐야 해."

전서린이 자기 이름이 나오자

젓가락을 꽉 쥐었다.

"저도 영향력 큽니다!"

"사고 영향력."

은명이 바로 말했고,

전서린은 잠깐 입을 삐죽였다가

곧 웃었다.

"그것도 영향력이죠!"

제갈린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반박 불가."

전서린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네!"

그 타이밍에

교실 문 앞에서

익숙한 웃음이 들렸다.

전태산이 빵 봉지를 들고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오오~"

"은명아,

도시락 맛있겠다~"

은명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또 왜."

태산이 손을 흔들었다.

"지나가다 봤지."

"나도 한 입 줄래?"

전서린이 벌떡 일어났다.

"태산 선배!"

"선배 것도

내일 만들어올까요?!"

은명이 거의 즉시 잘랐다.

"만들지 마."

교실 공기가

순간 멈췄다.

태산 눈이 동그래졌고,

전서린은 입을 반쯤 벌렸다.

제갈린 펜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태산이 먼저 웃었다.

"어라?"

"질투냐?"

은명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니.

네 것까지 만들면

이 후배 아침 수련 다 망가져."

"그리고 너는

급식 먹어도 잘 산다."

태산이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인정."

"나 잘 살아."

전서린이 금방 되살아났다.

"알겠어요!"

"은명 선배 전용만

만들어올게요!"

은명이 젓가락을 들다 말고

잠깐 굳었다.

……전용이라는 단어를

왜 저렇게 당당하게 쓰는 거야.

제갈린이 파일을 정리해

팔에 끼웠다.

"홍은명.

오후 수업 끝나고

수정본 회수하러 올게."

"그리고 식사,

제때 해."

짧은 문장.

업무 보고처럼 건조했는데,

마지막 한 마디만

톤이 달랐다.

전서린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제가 챙길게요!"

제갈린이 눈을 돌렸다.

"업무적으로

환영한다."

태산이 결국 못 참고

소리 내 웃었다.

"야 은명.

넌 점심시간에도

전장이네."

은명이 한숨을 길게 뱉었다.

"……뭐야 이 소란은."

태산은 복도로 물러나며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맛있으면

나중에 후기 줘~"

"그리고 내일은

나도 보고서 들고 간다!

제목은 '은명 점심 분석서'."

"꺼져."

태산 웃음이 멀어졌다.

교실 안엔 도시락 향과

종이 냄새가 동시에 돌았다.

은명은 젓가락을 들고,

보고서 옆에 도시락을 놓았다.

도시락과 보고서.

오늘 점심의 전선은

이상하게 균형이 맞아 있었다.

점심의 소란이

오후 수업 종소리에 묻힐 무렵,

방과 후 아지트에는

또 다른 얼굴들이 모이고 있었다.

활빈당 아지트 중앙 테이블 위로

형광등 빛이 둥글게 떨어졌다.

익숙한 멤버들,

그리고 문가에서 머뭇거리는

1학년 몇 명.

리오가 의자를 돌려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들어와, 들어와!

신발만 안 던지면

다 환영이야!"

올가가 바로 머리를 쳤다.

"기준을 왜

거기다 두냐."

카이가 웃으며

종이컵을 정리했다.

"첫 인상 중요하니까

리오 발언은 무시해."

문이 다시 열리더니

전서린이 당연하다는 듯 들어왔다.

"은명 선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은명이 눈을 감았다 뜨며

마른 한숨을 흘렸다.

"……넌 활빈당에

관심 있는 거야,

나한테 관심 있는 거야."

전서린이 1초도 안 쉬고 답했다.

"둘 다요!"

리오가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고,

카이는 박수를 쳤다.

"직진 미쳤다!"

올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심장 튼튼하네.

저 후배."

은명은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결국 웃음을 아주 조금 흘렸다.

"좋아.

그럼 둘 다 책임져.

활빈당은 구경하러 오는 곳 아니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은명이 테이블 앞에 섰다.

평소보다 말수가 줄었고,

눈빛은 더 또렷했다.

"활빈당은

누구의 편도 아니야."

"약자를 지키는 쪽에 선다."

"그게 전부야."

짧았다.

짧은데, 끝이 무거웠다.

카이가 먼저 손뼉을 쳤다.

"멋있게 말했다!"

리오가 주먹을 쥐었다.

"역시 은명~!"

올가가 팔짱을 끼고

무심하게 덧붙였다.

"시끄러.

근데 맞는 말."

아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결하군.

그래서 강하다."

은명은 멤버들 얼굴을

한 명씩 훑었다.

……1년 걸렸다.

이 문장 하나를

가볍지 않게 말하게 되기까지.

태산이 의자 등받이에

양팔을 걸치고 웃었다.

"나는 더 단순해."

"싸워야 할 때 싸우고,

지켜야 할 때 지키고.

끝~"

1학년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긴장이 약간 풀렸다.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그 정도로 충분해."

문가에 서 있던 1학년 남학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질문 있어도 됩니까."

"활빈당 들어오면

학생회랑 대립하는 겁니까?"

은명이 바로 답했다.

"누구와 대립하려고

모인 게 아니야."

"사람이 밟히는 상황이 생기면

거기서 멈추게 하는 쪽.

그게 우리 기준이다."

다른 1학년이

작게 물었다.

"그럼 위험한 일도

많겠네요."

이번엔 태산이 말했다.

"많지."

"그래서 재밌어.

아, 오해하지 마.

사람 지키는 건 진지하고,

내가 웃는 건 원래 습관이다."

리오가 옆에서 키득거렸다.

"형은

맞기 전까지 웃어."

"맞고 나서도 웃잖아."

카이가 받자,

태산이 엄지를 들었다.

"그게 장점이지."

은명은 태산을 한 번 째려보고,

다시 1학년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긴 의무 가입 없다.

명단보다 기준이 먼저야."

"오늘 바로 들어오지 않아도 돼.

구경하고,

질문하고,

싫으면 안 와도 된다."

"대신 들어오면

뒤로 빠지는 건 없다."

문가 쪽에서

또 다른 질문이 올라왔다.

"활빈당이 실패하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은명은 잠깐 침묵했다가

자기 가슴 쪽을 손끝으로 짚었다.

"우선 내가 진다."

"리더니까."

태산이 곧바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옆에서 같이 진다."

"혼자 지게 둘 생각 없어."

카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리오도 따라 손을 들었다.

"나도!"

올가는 혀를 차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소란스럽네.

근데 나도."

아르준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다.

위험 분산."

은명은 웃음이 날 뻔한 얼굴로

다시 진지해졌다.

"좋다.

그럼 원칙 하나 더."

"활빈당은 영웅 놀이 금지.

혼자 빛나는 행동 금지.

작전 밖 돌진 금지."

태산이 바로 손을 들었다.

"잠깐.

마지막 항목은

나 저격이네?"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맞췄다."

리오가 큭큭 웃었고,

올가는 태산을 훑어보며 말했다.

"문장에 이름만 안 넣었지,

사실상 실명 공지."

방 안이 한 번 웃음으로 흔들렸다.

그때 위노나가

벽 쪽 단말을 켰다.

아지트 스크린에

간단한 표가 떴다.

활빈당 기본 운영

1) 약자 보호

2) 정보 공유

3) 단독 돌파 금지

4) 책임 공동 부담

위노나가 화면을 가리켰다.

"이건 오늘 회의록으로

암호 채널에 올릴게요."

"신입 참관자는

읽고 동의하면

다음 세션부터 참여."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린 느리게 가도 돼.

대신 틀리게는 가지 말자."

전서린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이미

뒤로 안 빠질 준비 완료예요!"

은명이 마른 표정으로 봤다.

"너는 앞이 너무 빨라.

속도 좀 줄여."

"네!"

"못 줄여요!"

"……그럴 줄 알았다."

사람들 웃음이

짧게 터졌다.

회의가 이어지는 동안,

아지트 바깥 복도 끝을

누군가 지나갔다.

홍천무였다.

걸음은 일정했고,

시선은 정면이었다.

그런데 아지트 창문 앞에서

딱 한 걸음 멈췄다.

유리 너머로,

은명이 말하고 있었다.

태산은 팔짱을 낀 채 웃고,

서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리오와 카이는 떠들고,

올가는 혀를 차면서도

종이컵을 채워주고 있었다.

홍천무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활빈당.

……관심 없어.

그가 다시 걸음을 떼려다가,

한 번 더 안을 봤다.

……관심 없어야 해.

손목의 가죽 권갑을

조용히 조여 잡고,

홍천무는 복도 그림자 쪽으로

사라졌다.

아지트 안에서는

아무도 그 멈춤을 못 봤다.

은명은 마지막 정리를 했다.

"이번 주는 여기까지.

다음 주부터는

신입 참관 세션 열겠다."

"질문은 기록해.

우리도 답을

연습해야 하니까."

전서린이 손을 들었다.

"질문 하나 더!"

"오늘 도시락,

반응 어땠어요?"

은명이 0.5초 멈췄다.

"……괜찮았다."

전서린 눈이 반짝였다.

"좋았어요!"

제갈린이 없는 자리였는데도,

은명은 이상하게

보고서 얘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보고서도

좋았다."

리오가 팔꿈치로

카이를 툭 쳤다.

"형,

균형 잡힌 답변 장인이네."

카이가 웃음을 삼켰다.

"활빈당 리더 스킬

레벨업 중."

은명이 서류를 접었다.

"시끄러.

정리하고 나가자."

점심의 소란은 웃음으로,

방과 후의 무게는

작은 결의로 정리됐다.

밤.

기숙사 복도 불이

하나둘 꺼지고,

긴 그림자만 남았다.

전태산은 B반 훈련장에서

늦게 올라오는 길이었다.

전완근이 뻐근했다.

남궁현이 던진 과제,

제1식·쇄 천 번을

겨우 채운 참이었다.

모퉁이에서 은명과 마주쳤다.

은명은 태블릿을 옆구리에 끼고,

물병 뚜껑을 닫는 중이었다.

태산이 먼저 웃었다.

"첫 주 끝."

"어때,

선배 생활?"

은명이 어깨를 돌렸다.

"……생각보다 시끄러워."

태산이 바로 킥킥댔다.

"전서린이?"

"너 인기 많네~"

은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그냥 열정적인 후배지."

태산이 난간에 기대

고개를 갸웃했다.

"열정…이라."

"근데 은명아,

제갈린도 좀 이상하던데?"

은명이 눈썹을 올렸다.

"…뭐가."

태산이 씩 웃었다.

"모르면 됐어~"

"아,

그리고 내일

홍천무랑 교정 스파링 잡혔다."

"몸이 먼저 배운 거

정리해보려고."

은명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번엔 힘으로

때우지 마."

"알아.

요즘 그 말

하루에 다섯 번 듣는다."

태산이 손을 흔들며

자기 방 쪽으로 돌아섰다.

"잘 자라,

A반 리더님."

은명이 대꾸했다.

"너도, B반 문제아 선배님."

복도엔 발소리 둘이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태산의 방.

문을 닫자마자

태산은 침대에 털썩 앉았다.

손등 핏줄이 아직 불룩했다.

책상 위 수첩엔

오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제1식·쇄

1000회 완료.

오차 다수.

내일 재교정.

태산이 펜을 들고

마지막 줄을 덧붙였다.

홍천무 스파링.

힘 말고 기술 먼저.

잠깐 글자를 본 태산은

피식 웃었다.

"야, 전태산.

이 문장 네가 쓰니까

좀 웃기다."

그래도 지우진 않았다.

전서린의 방.

침대 위에 엎드린 전서린이

베개를 끌어안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약자를 지키는 쪽에 선다.

은명의 목소리가

귀 안쪽에 남아 있었다.

"역시 은명 선배…

멋있어."

전서린은 벌떡 일어나

노트를 펼쳤다.

내일 도시락 계획.

단백질 보강,

염도 유지,

디저트 추가.

"이번엔 완벽해요!"

작게 붙인 보온 부적이

퍽, 하고 터졌다.

"아, 또 터졌다!"

그런데도 전서린은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한 번 더 하면 되죠!"

제갈린의 방.

책상 위엔 데이터 창이

네 겹으로 떠 있었다.

1학년 배치표,

아지트 동선,

그리고 은명의

수정 메모 캡처.

제갈린은 펜 끝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혼잣말했다.

"이건 감정이 아니야."

"전술적 흥미.

데이터상 관심."

한 줄 입력.

분석 폴더명 저장.

interest_data_only

제갈린 손이 멈췄다.

문자열을 한참 보다가,

백스페이스를 길게 눌렀다.

지웠다.

다시 입력했다.

interest_data_only

"……그래.

데이터상 관심."

같은 문장을

두 번 말한 순간,

제갈린은 스스로도

조금 웃음이 났다.

태블릿을 덮었지만,

손은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열었다.

은명이 낮에 남긴 수정 메모,

'평균 말고 극값'이라는 줄을

확대해 한참 바라봤다.

제갈린이 낮게 중얼거렸다.

"변수 취급이 아니라

핵심 취급."

"……이런 발상은

정석 교본엔 없지."

손끝이 펜을 돌리다 멈췄다.

"그래도 인정은

내일 하지 말자."

말은 그렇게 했는데

메모창엔 이미

홍은명 모델 참조가

저장되어 있었다.

홍천무의 방.

조명 아래,

그림자가 벽에 곧게 섰다.

활빈팔식(活貧八式)

제1식·쇄.

발이 바닥을 누르고,

골반이 축을 고정한다.

허리가 돌고,

어깨가 닫혔다 열리며

주먹이 일직선으로 뻗는다.

동작은 작고,

호흡은 짧았다.

한 번.

두 번.

백 번.

홍천무는 멈추지 않았다.

금강불괴 없이도.

내 기술로 증명한다.

벽의 그림자가

처음과 끝이 같은 궤적으로

반복됐다.

동작을 멈춘 홍천무는

거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깨선, 발끝 각도,

주먹 끝 높이.

오차를 하나씩 지웠다.

"활빈당."

낮에 창문 너머로 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웃고 떠드는 얼굴들,

그리고 중앙에 선 은명.

홍천무가 짧게 숨을 뱉었다.

"관심 없다."

잠시 후,

같은 입으로 한 번 더 말했다.

"…지금은."

은명의 방.

불을 끄기 전,

은명은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깨우자

남아 있는 문장 하나.

왜 인간인 채로

살아야 하나요?

은명 손가락이

답장창 근처에서 잠깐 멈췄다.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았다.

화면을 껐다.

방이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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