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조
기말고사 첫날.
시험이 끝났다.
교실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표정은 두 가지였다.
하나, 해방. 둘, 절망.
은명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시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었으니까.
위노나가 복도에서 은명을 잡았다.
"찾았어."
"뭘?"
위노나가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난번 에너지 패턴.
추적했어."
은명이 멈췄다.
"어디서?"
"체육 창고. 폐기 구역."
은명의 눈이 좁아졌다.
한 박자의 침묵도 없었다.
"가자."
시험을 끝내고 삼삼오오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둘은 빈 교실로 향했다.
활빈당 임시 아지트.
위노나가 가방에서 검은 금속 조각을 꺼냈다.
천으로 감싸져 있었고, 표면에서 희미한 빛이 맥박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만지지 마. 아직 제어부적 코드가 살아 있어."
은명이 태블릿을 꺼내 스캐너를 실행했다.
검은 금속 위로 데이터가 흘렀다.
"이건……"
형태가 있었다.
사람의 팔과 비슷하지만 관절이 세 개 더 달려 있는 구조.
강시형 기체의 잔해였다.
분해되어 있었지만——
내부의 부적 코드가 아직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태산이 다가와 잔해를 내려다봤다.
인상이 구겨졌다.
"이게 뭔데?"
"체육 창고에서 나온 잔해. 외부 침투 유닛이야."
"학교 안에 이게 있었다고?"
은명이 대답 대신 코드를 분석했다.
제어부적형 코드. 이계세력 직속 계열.
데이터가 태블릿 위로 펼쳐지자 패턴이 읽혔다.
은명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건…… 외부에서 온 게 아니야."
위노나가 올려다봤다.
"뭐?"
"코드의 로그를 봐.
활동 기록이—— 최소 2주 전부터 있어.
어쩌면 한 달."
교실이 조용해졌다.
위노나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졌다.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모의전 때 데이터가 유출된 그 시점부터.
이미 학교 안에 뭔가 있었어."
전태산이 주먹을 쥐었다.
"2주? 그러면 우리가 활빈당이니 학생회니
싸우는 동안에——"
"응. 계속 여기 있었어."
은명이 천장을 봤다.
"그리고 우리가 싸울수록——
그쪽은 더 많이 봤을 거야."
침묵이 무거웠다.
전태산이 이를 악물었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싸운 게——
걔한테 쇼였다고?"
은명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자기들의 갈등이 누군가에게 '데이터'였다는 자각.
그건 분노보다 더 불쾌한 것이었다.
교관실로 향하는 복도는 해가 기울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은명과 위노나가 잔해를 가져왔다.
운소하가 책상에서 일어났다.
잔해를 보는 순간 표정이 변했다.
평소의 무심함이 사라지고,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아졌다.
"이건 철귀대 계열 기체야."
은명이 끄덕였다.
"제어부적형 코드. 이계세력 직속 전력입니다."
"어디서 찾았어?"
"체육 창고 폐기 구역."
운소하가 잔해를 들었다.
손끝에 내력을 실어 코드를 읽는 사이,
교관실 천장의 조명이 한 번 미세하게 떨렸다.
운소하의 시선이 천장을 스쳤다가 다시 잔해로 돌아왔다.
표정이 더 굳어졌다.
"은명."
"네."
"이게 학교 안에 2주 이상 있었다고 했지."
"데이터 로그 기준으로는요."
운소하가 잠깐 멈췄다.
손가락이 잔해 위에서 움직임을 멈추더니,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고 있었어."
은명의 눈이 커졌다.
위노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알고 계셨어요?"
운소하가 창밖을 봤다.
저무는 하늘이 교관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교관진은 3주 전 결계 외곽의 미세 간섭을 감지했어.
교장선생님이 결계를 강화했지.
하지만——"
돌아봤다.
"너희가 찾은 건 미끼야.
진짜는 이미 데이터를 가져갔어."
은명의 입이 열렸다.
"……데이터? 무슨 데이터요?"
"모의전 전투 기록. 학생 능력 측정치. 반 편성 데이터.
교내 네트워크를 통해 유출된 걸 확인했어."
운소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경로를 추적하면—— 흔적이 사라져.
추정 유출 규모만 봐도 단독 기체의 소행이 아니야.
최소 복수 거점, 다중 경로 침투."
교관실이 조용해졌다.
은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왜 학생들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운소하가 잠시 침묵했다.
창밖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공포보다 경계가 먼저야.
패닉이 퍼지면 결계 유지에 필요한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기말고사 기간에 학교를 혼란에 빠뜨릴 수 없었어."
은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교관님도—— 체제 논리네요."
운소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체제 안에 있어."
한 박자.
"하지만 은명아——
체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너한테 말해주는 거야."
은명이 눈을 내리깔았다.
운소하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오늘 밤 조심해."
"……?"
"기말고사 기간은——
학교의 관심이 가장 분산되는 시점이야."
은명이 교관실을 나왔다.
복도가 어두웠다. 해가 완전히 졌다.
교관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막지 못했다. 말하지도 않았다.
체제의 한계.
그건 이자벨라도, 테무진도, 운소하도 같은 거야.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근데.
운소하는 나한테 말해줬다.
체제 안에 있으면서도.
그게—— 운소하의 방식인 거지.
자정.
기숙사.
대부분의 학생이 시험 공부 중이었다.
책상 위의 태블릿과 노트, 연필 소리.
고요했다.
자정 정각.
학교 전체의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학생들이 고개를 들었다.
"정전?"
"아닌데, 다시 들어왔잖아."
다시 고요.
교실 전자칠판.
복도 안내 패널.
학생 태블릿.
학교의 모든 화면에 동시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하얀 화면. 검은 글자.
'안녕하세요.'
학교가 멈췄다.
누군가의 연필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험이에요.'
'최선을 다해주세요.'
은명이 태블릿을 봤다.
글자가 또렷했다. 정중했다.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동시에——
학교 결계 외곽 3개 지점에서 에너지 반응이 터졌다.
쿵. 쿵. 쿵.
철귀대. 돌입.
교내 전산 시스템이 동시다발로 오작동했다.
출입 제어 해제. 결계 부분 무력화. 통신 교란.
경보 시스템이 울렸다——
이내 경보음이 끊겼다.
대신,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중하고, 차분하고, 또래 같은.
"경보음이 시끄러우실까 봐 꺼뒀어요."
은명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대신 제가 직접 안내해드릴게요."
목소리가 이어졌다.
"율도고등학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천기라고 합니다."
짧은 정적.
"오늘 여러분에게 시험을 드리러 왔어요."
"시험 범위는—— 여러분 자신이에요."
"최선을 다해주세요. 응원할게요."
은명이 창밖을 봤다.
기숙사 창문 너머, 교정을 가로질러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실루엣.
하나가 아니었다.
둘. 넷. 여섯.
그 뒤로도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이 점처럼 떠올랐다.
강시형 기체의 행렬이 달빛 아래로 드러났다.
최소 이십 기 이상. 열이 맞춰져 있었다.
은명이 태블릿을 움켜쥐었다.
"……시작됐어."
옆에서 전태산이 주먹을 쥐며 일어났다.
"시험? 좋아."
눈이 빛났다.
"붙어보자."
기숙사 밖.
강시형 기체의 눈이 빨갛게 빛났다.
스피커에서 천기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자, 시작할게요."
첫 번째 충돌은 기숙사 서동에서 터졌다.
율도고의 가장 긴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