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
B반 훈련장. 오후 실전 수업.
남궁현이 매칭을 읽었다.
"다섯 번째 스파링.
전태산, 핫토리 렌."
전태산이 일어섰다.
핫토리 렌. B반. 선도부 부부장.
과묵하고 냉소적인 닌자 소녀.
전태산은 렌과 직접 붙어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교칙 위반으로 렌이 전태산을 쫓아다닐 뿐이지,
전투는 처음이었다.
링 위에서 마주 서자 분위기가 달랐다.
렌의 눈동자에 감정이 없었다.
쫓아다닐 때의 짜증도, 교칙을 들먹일 때의 냉소도,
전부 사라진 자리에 고요만 남아 있었다.
"잘 부탁해."
전태산이 웃으며 말했다.
렌이 대답하지 않았다.
훈련장 중앙에 섰다.
손은 몸 옆에 자연스럽게 내려져 있었다.
전투 자세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전투 자세였다.
호루라기.
렌이 사라졌다.
전태산이 눈을 크게 떴다.
분명 3m 앞에 있었다.
그림자가 흔들렸고, 다음 순간 시야에서 없어졌다.
네오 인술. 광학 위장.
빛이 몸을 감싸며 완벽한 투명으로 전환.
전태산이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공기만 맞았다.
왼쪽? 없다. 오른쪽? 기척이 스쳤다.
돌아서는 순간. 팔에 가느다란 압력.
와이어.
전태산의 오른팔을 얇은 특수 와이어가 감았다.
잡아당겨졌다. 균형이 무너졌다. 왼쪽 무릎이 꺾였다.
그때. 등에 손바닥이 닿았다. 가벼운 터치.
하지만 실전이었으면 그 자리에 날이 있었을 거다.
삐이
"승자, 핫토리 렌. 3초."
주변이 술렁였다.
"3초? 전태산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전태산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손도 못 댔다.
보이지 않았다.
빠른 게 아니야. 안 보이는 거야. 그게 다른 건데.
렌이 시야에 나타났다.
광학 위장이 해제됐다.
와이어를 감아 손목에 되돌리고 있었다.
동작이 정확했다. 버릇처럼 몸에 밴 손놀림.
표정이 없었다.
전태산이 올려다봤다.
"안 보이는 건 어떻게 때려?"
렌이 전태산을 내려다봤다.
"보이는 것만 때리니까 지는 거야."
돌아서며.
"……시끄러워."
전태산이 바닥에 앉은 채 하늘을 봤다.
텅 빈 천장.
주먹을 쥐었다 폈다.
주먹이 닿을 곳이 없었다는 게
단순히 졌다는 것보다 더 불쾌했다.
쁘아카오가 뛰어왔다.
"형제, 괜찮아? 저 여자 진짜 빠르네!"
"빠른 게 아니야."
전태산이 일어섰다. 교복에 흙이 묻어 있었다.
무릎의 먼지를 털지 않았다.
"안 보이는 거야. 그게 다른 건데."
쁘아카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거야?"
"빠르면 눈이 쫓아가.
안 보이면 눈이 쫓아갈 게 없어."
전태산이 오른팔을 봤다.
와이어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이 몸이라 상처는 안 났지만, 자존심에는 상처가 났다.
……단단한 몸은 안 보이는 적 앞에서 소용없다.
저녁 무렵. 기숙사 앞 광장.
해가 기울어서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전태산이 혼자 권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좌권. 우권. 하단 차기.
반복할 때마다 발밑의 먼지가 일었다.
기분 전환이 되지 않았다.
손도 못 대고 졌다는 게 머릿속에서 빠지지 않는다.
주먹을 뻗을 때마다 렌이 사라지던 순간이 겹쳤다.
공기만 맞았던 그 감각.
발소리가 들렸다.
테무진. 선도부장.
가죽 전투 조끼 위로 초원의 바람이 묻어 있는 것 같은 남자가
광장을 지나갔다.
전태산이 테무진을 봤다.
교칙 7조. 벌점. 장석현 사건. 규율의 화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안 보였다.
보이는 건 오직 한 가지였다.
테무진의 걸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강한 놈의 걸음이었다.
전태산이 입을 열었다.
"선배."
테무진이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한 수만 가르쳐주세요."
테무진이 돌아봤다.
매의 눈이 전태산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권법 자세. 발의 위치. 땀에 젖은 교복.
"……가르침이 아니라 확인이다.
맞고 일어서는 놈인지, 맞고 드러눕는 놈인지."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테무진의 발이 땅을 찼다.
초원의 질주. 지면이 갈라졌다.
전태산이 반응하려 했다. 늦었다.
충격파가 몸을 관통했다.
전태산이 3m 밀려났다. 등이 바닥을 쓸었다.
이 체질이 아니었으면 뼈가 부러졌을 거다.
전태산이 일어났다. 다시 섰다.
주먹을 올렸다.
다리가 떨렸지만 무릎은 꺾지 않았다.
테무진이 봤다.
"일어서는 건 인정한다."
돌아서며.
"하지만 서는 것과 서 있는 것은 다르다."
걸어갔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전태산이 광장에 서 있었다.
주먹을 내리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졌다. 광장에 가로등이 켜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주먹을 내렸다.
주저앉았다. 하늘을 봤다.
렌한테 안 보여서 졌고.
테무진한테는 보여도 졌어.
그러면 뭘 해야 해.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교복 위의 땀이 식으며 피부가 서늘해졌다.
……내일은 눈 감고 연습해보자.
보이지 않는 걸 몸으로 느끼는 법을 찾아야 해.
눈 말고 다른 걸 써서.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전태산이 일어서서 기숙사 옥상 계단을 올라갔다.
같은 밤. 도서관.
은명과 위노나가 교내 서버 경유 노드를 추적하고 있었다.
위노나의 독수리 드론이 서버실 주변을 순찰 중이고,
은명이 태블릿으로 원격 접속 경로를 추적했다.
커서가 화면 위를 탔다.
로그 라인이 밀려 올라갔다.
노드 하나를 찾았다. 접근. 자동 차단.
은명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다음 노드를 특정하고, 경로를 우회해서 접근했다.
차단. 이번에는 더 빨랐다.
방어 시스템이 접근 패턴을 감지하고 있었다.
IP, 접근 주기, 시도 횟수까지 읽히는 것처럼
대응 속도가 매번 줄어들었다.
처음 차단에 걸린 시간이 세 번째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위노나가 말했다.
"이건 사람이 한 게 아니야.
뭔가가 자동으로 방어하고 있어."
은명이 이마를 짚었다.
"접근하면 트리거가 발동하고, 트리거가 점점 학습해.
추적할수록 방어가 정교해져."
위노나의 드론이 돌아왔다. 어깨 위에 앉으며 날개를 접었다.
"서버실 물리 접근도 막혔어.
잠금장치가 교체된 것 같아.
이전 토큰 방식이 안 먹혀."
은명이 파편의 제어 코드를 다시 분석했다.
세 번째 레이어. 암호화 패턴이 바뀌어 있었다.
어제와 달라져 있었다.
마치 코드 자체가 살아서 형태를 바꾸는 것 같았다.
은명이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데이터가 있는데 읽을 수 없어. 이건 처음이야.
위노나가 은명의 손을 봤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태블릿 화면에 전태산의 메시지가 떴다.
'야, 내일 옥상에서 라면 먹을 거야. 올래?'
은명이 잠깐 봤다. 답장을 치지 않았다.
태블릿을 닫았다.
위노나가 드론을 접으며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다음 접근법을 바꿔야 해.
정면이 안 되면 옆문을 찾는 거지."
은명이 끄덕였다.
기숙사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갔다. 불을 끄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에 달빛이 줄을 그었다.
추적이 막힌 건 처음이 아닌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상대가 단순히 강한 게 아니라 이쪽을 보고 있다는 감각.
전태산의 메시지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올래?'
답하지 않았다.
답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없는데.
벽에 부딪힌 날.
추적이 막힌 날.
데이터가 처음으로 읽히지 않은 날.
그런 밤에 '라면 먹자'는 메시지가 오면.
은명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태블릿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은명의 손이 태블릿을 집었다.
입력창을 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몇 시.'
보내자마자 답장이 왔다.
'지금도 됨.'
은명은 화면을 한 번 더 봤다.
그리고 태블릿을 챙겨 방을 나섰다.
옥상 문을 열자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기숙사 환풍기 소리, 멀리 운동장 조명 잔광,
가로등 아래 길게 늘어진 그림자.
전태산은 난간 옆에 앉아 있었다.
휴대용 버너 위에서 물이 끓고 있었고,
컵라면 두 개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왔네."
태산이 웃었다.
평소처럼 크게 웃진 않았다.
그냥 반가운 사람 봤을 때 나오는 짧은 웃음.
은명은 말없이 옆에 앉았다.
"매운 거 괜찮아?"
"먹을 만하면 돼."
태산이 물을 부었다. 김이 올랐다.
둘 사이에 잠깐 뜨거운 증기가 벽처럼 섰다.
아무 말 없이 1분.
은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렌한테 졌다며."
태산이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응. 3초."
"기록이네."
"최단 패배 기록이면 인정이지 뭐."
말은 가볍게 했지만 목소리 끝이 가라앉아 있었다.
태산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안 보이니까 답이 없더라.
세게 치는 건 자신 있는데,
보이지 않으면 힘이 갈 데가 없어."
은명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테무진한테도 붙었다며."
"붙은 건 아니고, 일방적으로 맞았지."
태산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벽 같더라.
렌은 안 보여서 벽이고,
테무진은 보여도 벽이고."
은명은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벽은 종류가 다를 뿐 결국 같은 질문이야.
어떻게 지나갈 건지."
태산이 웃었다.
"또 데이터식으로 말한다."
"넌 또 몸으로 답할 거고."
"맞아."
이번에는 둘 다 웃었다. 짧게.
라면이 불어가기 시작했다.
태산이 컵을 하나 밀어줬다.
"너는 오늘 뭐 했어?"
은명이 라면을 젓다가 멈췄다.
"막혔어."
"뭐가?"
"추적. 노드 접근하면 자동 삭제.
잠금 교체. 코드 패턴 변형.
계속 한 수 늦어."
태산은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핵심은 이해했다.
"그러니까 네가 밀렸다는 거네."
"응."
"처음이야?"
은명이 아주 작게 대답했다.
"거의."
태산이 라면을 한 입 먹고 젓가락 끝으로 컵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그럼 다음엔 다른 방식으로 하면 되지."
"말은 쉽지."
"쉽다고 한 적 없어.
그냥 방법은 늘 여러 개라고."
은명은 태산을 봤다.
이 사람은 정교한 분석을 못 한다.
대신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 멈추지 않는 쪽이 정답보다 먼저 문을 연다.
은명이 라면을 한 입 먹었다.
국물이 뜨거웠다. 생각보다 맵지 않았다.
"내일 밤, 뒤편 숲 다시 간다."
태산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도 가."
"위노나도 온다."
"좋지. 셋이면 덜 놓치겠네."
"이번엔 준비해서 간다.
정면 추적 말고 유도 로그 먼저 뿌리고
트리거 반응 시간 본다."
태산이 웃었다.
"무슨 말인지 반은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번엔 네가 먼저 때린다는 거지?"
은명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정도로 번역하면 맞아."
바람이 한 번 세게 불었다.
컵라면 뚜껑이 흔들렸다.
옥상 난간 아래로 기숙사 창문 불빛이 드문드문 보였다.
은명은 통신기를 꺼내 위노나에게 짧게 보냈다.
'내일 21:40. 변경 없음. 유도 로그 먼저.'
곧 읽음 표시가 떴다. 답장은 없었다.
그게 위노나식 동의였다.
태산이 컵을 비우고 일어섰다.
"좋아. 그럼 내일은 벽 말고 문 찾자."
은명이 난간 밖 어둠을 봤다.
보이지 않는 벽. 바깥에서 보는 눈.
그리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상대.
질문은 늘었는데, 이상하게 숨은 조금 편해졌다.
은명이 빈 컵을 접으며 말했다.
"문 없으면 부숴."
태산이 씩 웃었다.
"그건 내가 잘하지."
✦ 작가의 말
3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