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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일러스트

제안

점심시간. 기숙사 옥상.

은명이 먼저 와 있었다.

태블릿을 무릎에 놓고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햇볕에 달궈져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옥상에 라면 냄새는 없었다.

발소리.

전태산이 올라왔다.

철문을 등 뒤로 닫으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라면 없어?"

"오늘은 라면 아니라고 했잖아."

"습관이야."

전태산이 옆에 앉았다. 다리를 쭉 뻗었다.

교복 바지에 흙이 묻어 있었다. 아침 훈련의 흔적이다.

"그래, 진지한 거. 뭔데."

은명이 태블릿을 켜고 파일 하나를 열었다.

'비공식_조직_구상.txt'

전태산이 화면을 봤다.

"뭐야 이거."

"3월부터 지금까지.

비명문가·편입생 피해 보고 23건.

학생회 조치 0건. 선도부 조치 0건. 교관 조치 0건."

전태산이 숫자를 봤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젯밤 벽에 남긴 균열이 떠올랐는지 주먹을 폈다 쥐었다.

"……알고 있어. 장석현이 맨날 와서 말해."

"데이터로 잡으려 했어.

체제 안에서 해결하려 했어."

은명이 태블릿을 내렸다.

화면에 비친 0이라는 숫자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졌다.

"안 돼."

전태산이 은명을 봤다.

"그래서?"

"규칙이 못 지키면, 규칙 밖에서 지킨다."

전태산의 눈이 변했다.

"비공식 조직을 만들자."

바람이 불었다.

전태산이 옥상 바닥을 보며 손가락으로 콘크리트를 두드렸다.

둥, 둥. 어젯밤 샌드백을 치던 리듬이었다.

"……그게 뭔데?"

"학생회도, 선도부도 안 하는 걸 우리가 하는 거야.

사각지대 보호. 약자 지원.

체제가 못 보는 곳을 메우는 팀."

전태산이 고개를 긁었다.

"은명아."

"응."

"그냥 쉽게 말해."

은명이 입을 다물었다 열었다.

"……어려운 놈 도와주자는 거야."

전태산이 씩 웃었다.

"아, 그거면 됐지."

은명이 눈을 깜빡였다.

"……뭐?"

"하자."

"이렇게 쉽게?"

전태산이 일어서며 말했다.

"어려운 놈 보면 못 참아.

그게 다야.

복잡하게 생각할 거 뭐 있어."

은명이 전태산을 봤다. 한 박자 멈칫했다.

"……그래, 그것도 전략이야. 단순한 게."

"전략 아니야. 그냥 나야."

바람이 옥상을 스쳤다.

은명이 태블릿을 접으며 작게 웃었다.

전태산은 그 웃음을 못 봤다.

하늘을 보고 있었으니까.

"근데 둘이서만 해?"

"아니. 더 필요해. 정찰이랑 기동 타격."

"아, 그거 알아. 사람이 있어."

"……벌써?"

"리오. 걔 빠르고 나랑 죽이 맞아."

"기동 타격은 리오면 되고.

정찰은 위노나. 이미 이야기 시작했어."

전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빠르네. 역시 은명이야."

"칭찬으로 안 들려."

"칭찬인데?"

"그럼 더 안 들려."

전태산이 하하 웃었다.

은명은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지만 돌린 쪽이어서 전태산은 모른다.

방과 후. 전산실.

모니터 빛이 푸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위노나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손가락 끝에 작은 토템 드론이 떠 있었다.

드론의 깃털 문양이 모니터 불빛에 일렁였다.

은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를 한번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위노나."

"왔어."

"시간 있어?"

위노나가 드론을 손등에 내렸다.

"지금 들어."

은명이 옆에 앉았다. 태블릿을 보여주지 않았다.

"약자 피해가 외부에서 조장되고 있다는 거, 너도 확인했잖아."

"응. IP 추적도 해봤어.

교내가 아니야. 외부 경유 서버를 통해 피해자 정보가 유입되고 있어."

"그걸 막으려면 체제 안에서는 안 돼.

체제가 규칙 뒤에 숨거든."

위노나가 은명을 봤다.

손가락 위에서 드론이 한 바퀴 돌았다.

"비공식 조직?"

은명이 끄덕였다.

"체제 밖에서 움직이겠다는 거지."

"그래."

위노나가 잠시 침묵했다.

드론이 손끝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모니터 화면에 로그 데이터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위노나의 시선은 화면이 아니라 은명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재밌잖아."

은명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건 옳은 일이야."

"옳은 일이라서?"

위노나가 드론을 날렸다.

천장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제로니모의 피가 그렇게 시키거든.

억압받는 쪽에 서는 게.

우리 가문은 그래왔어."

은명이 작게 웃었다.

"의적끼리 통하는 게 있네."

위노나도 웃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바뀌었다.

"한 가지 조건."

"말해."

"네 전자부적. 그거 뭔지 정확히 알려줘.

인공적인 힘은 싫어하거든."

은명이 태블릿을 열었다. 전자부적의 코드 구조를 보여줬다.

"기술이 아니야. 부적이야.

도술의 연장이지, 기계가 아니야.

부적문의 도형을 디지털로 옮긴 것뿐이야."

위노나가 코드를 봤다.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도술 기반이면 봐줄게. 일단은.

다만 기계가 도술을 넘는 순간이 오면 빠질 거야."

"알았어."

"고마워하지 마. 마음에 안 들면 빠진다고 했어."

"……안 할게."

위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터 옆 알림등이 한 번 깜빡였다.

선도부 야간 순찰 일정 공지.

'금일 22시~02시, B동·체육관 구역 집중 순찰.'

은명이 그 알림을 봤다. 위노나도 봤다.

둘의 시선이 화면 위에서 겹쳤다.

"체육관 구역이네."

"……내일 집결 장소 변경해야겠어."

위노나가 문 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근데 은명."

"응."

"다른 멤버는?"

"전태산이 리오한테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

"전태산이 설득?

설득이라는 걸 할 줄 알아?"

"……그건 나도 걱정이야."

같은 시각. 체육관 뒤편.

삼바 리듬이 들렸다.

리오가 헤드셋을 끼고 카포에라 연습 중이었다.

춤추듯 움직였다. 킥, 회전, 착지. 다시 킥.

풀밭 위에 발자국이 원형으로 찍히고 있었다.

전태산이 다가갔다.

"야, 리오."

듣지 못했다. 헤드셋 볼륨이 너무 컸다.

전태산이 리오의 어깨를 잡았다.

리오가 반사적으로 킥을 날렸다.

전태산이 피했다. 간신히. 바지 끝이 스쳤다.

"야!"

리오가 헤드셋을 한쪽만 빼며 환하게 웃었다.

"오~! 태산! 스파링?"

"아니. 잠깐 얘기 좀."

리오가 음악을 끄고 풀밭에 앉았다.

전태산도 앉았다.

"같이 할 거 있어."

"뭔데~?"

전태산이 설명했다. 단순하게.

"약한 놈들 도와주는 팀.

은명이가 머리 쓰고, 나는 몸 쓰고.

너도 같이 해."

리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 편이야?"

"약한 쪽."

리오의 눈이 빛났다.

평소의 장난기와 다른 빛이었다.

벌떡 일어났다.

"좋아~! 축제를 시작하자!"

전태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축제는 아닌데."

"뭐든 재밌으면 축제야.

그리고 태산이랑 하면 재밌잖아.

맨날 사고 치니까~"

"사고 치는 거 아니거든!"

리오가 하하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진지해졌다.

장난기가 빠진 얼굴은 처음 봤다.

"있잖아, 태산."

"응."

"줌비의 피가 말하거든."

전태산이 봤다. 리오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

"억압하는 쪽에 서지 마라.

해방하는 쪽에 서라."

전태산이 끄덕였다.

"오, 멋있다. 그거 입으로만 하는 거야?"

리오가 씩 웃더니 카포에라 킥을 한 방 시연했다.

바람이 갈렸다.

"입으로만은 안 하지~!"

전태산이 피식 웃었다.

"좋아. 내일 자정.

체육관 뒤편 빈 창고.

시간차 진입. 3분 간격으로 와.

선도부 순찰이 B동 쪽이니까, A동 경유해서 올 것."

리오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파티다~!"

"파티 아니거든."

"4명이 모이면 파티야. 2명이 모이면 데이트고."

전태산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면 오늘 점심에 나랑 은명이는 데이트한 거야?"

리오가 눈을 크게 떴다.

"와, 진도 빠르다~"

전태산이 리오의 머리를 쳤다.

웃음소리가 체육관 뒤편에 울렸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둘 다 입을 닫았다.

리오가 풀밭에 찍힌 자기 발자국을 봤다.

카포에라 킥의 궤적이 선명한 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 위에 전태산의 발자국이 겹쳐져 있었다.

"첫 번째 대상은 누구야?"

전태산이 대답했다.

"장석현이 알 거야. 다음 타깃이 될 놈을."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웃고 있었지만 입꼬리는 단단히 다물어져 있었다.

자정. 빈 창고.

네 개의 그림자가 모였다.

3분 간격으로,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은명이 태블릿을 열었다.

화면의 불빛이 네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아직 이름도 없고, 작전도 없고, 실적도 없다.

하지만 체제가 메우지 못한 사각지대를 메울 네 명이

여기 있었다.

리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티"

전태산이 리오의 입을 막았다.

은명이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장석현이 보내온 정보가 떠 있었다.

다음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편입생 1명.

이름, 시간표, 위험 시간대.

"첫 번째 작전이야."

위노나가 드론을 손끝에 올렸다.

드론의 눈이 빨갛게 점멸했다.

"시작하자."

작가의 말

3차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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