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빈당
자정. 체육관 뒤편. 빈 창고.
문이 삐걱거렸다.
녹슨 경첩 소리가 뒷마당의 풀밭 위로 퍼졌다.
바람이 없는 밤이었다. 소리가 생각보다 멀리 갔다.
가로등 불빛이 창고 앞까지 닿지 않았다.
학교 외곽의 사각지대.
은명이 장소를 고른 이유가 있었다.
은명이 먼저 와 있었다.
태블릿 빛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떠 있었다.
바닥에 기름때 묻은 작업 매트가 깔려 있었고,
구석에 쌓인 낡은 훈련용 쿠션이 먼지 냄새를 풍겼다.
여름 장마 때 한번 젖었다 마른 모양이었다.
곰팡이 냄새가 먼지 속에 섞여 있었다.
은명은 쿠션 하나를 등받이 삼아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태블릿 화면에는 이미 조직 구조도가 완성되어 있었다.
어젯밤 새벽 3시까지 만든 것이었다.
발소리.
운동화 밑창이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
무거운 발걸음. 조용히 걷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걸음걸이.
전태산이 들어왔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 체력 훈련복 차림.
자정에 그 옷을 입고 나온 건 순전히 습관이겠지만,
은명은 그것이 태산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든 몸을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놈.
"왔어."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블릿 화면을 돌려 태산에게 잠깐 보여줬다가 다시 가져갔다.
미리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아직 다 모이지 않았으니까.
뒤이어 위노나.
발소리 없이 들어왔다.
문이 움직인 것으로만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문이 열린 동안 밖의 공기가 잠깐 들어오면서
먼지 냄새의 농도가 옅어진 것으로.
말없이 구석에 앉았다.
토템 드론이 어깨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옷에 밤이슬이 묻어 있었다.
외곽 경로로 온 모양이었다. 정문이 아닌 체육관 뒤편 울타리 쪽.
은명이 안내하지 않았는데도 최적 루트를 찾아온 것이었다.
드론이 창고 안을 한 바퀴 스캔하고
불빛 하나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위노나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위노나가 드론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리오.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파티"
전태산이 리오의 입을 막았다. 반사적이었다.
손이 정확히 리오의 입 위에 떨어졌다.
은명이 움직이기 전에 태산이 먼저 반응했다.
현장 대응 능력.
은명이 태산에게 그 역할을 맡기려 한 이유가 바로 이런 순간에 있었다.
"자정이야."
리오가 눈만 깜빡이며 끄덕였다.
전태산이 손을 뗐다.
리오가 속삭였다.
"……파티 시작~?"
전태산이 한숨을 쉬었다.
위노나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드론이 리오를 한 번 스캔했다.
위협 판정 0. 당연한 결과.
은명이 태블릿을 세워놓았다.
화면에 조직 구조도가 떠 있었다.
네 개의 박스와 화살표. 역할별 색 구분.
은명(파란색), 전태산(빨간색), 위노나(초록색), 리오(노란색).
개인 성향 분석, 전투 스타일 메모, 약점 항목까지 적혀 있었다.
태산의 약점란에는 '소음 관리'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역할 분담.
나는 전략과 정보 분석.
전태산은 현장 대응.
위노나는 정찰과 네트워크.
리오는 기동 타격."
리오가 손을 들었다.
"기동 타격? 좋아~! 근데 뭔 소리야?"
전태산이 리오를 봤다.
"빨리 뛰어가서 때리는 거."
리오의 눈이 반짝였다.
온몸이 반짝였다고 해야 맞을 정도였다.
카포에라 전사에게 '빨리 뛰어가서 때리는 것'은
존재의 목적에 해당했다.
"오, 그거면 나지~!"
위노나가 토템 드론을 날렸다.
드론이 창고 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천장 구석의 거미줄이 드론 바람에 흔들렸다.
드론이 돌아온 뒤 위노나의 손바닥이 한 번 진동했다.
보고 완료를 뜻하는 햅틱 피드백.
"정찰은 이미 하고 있었어.
기숙사 CCTV 사각지대 17개 확보."
은명이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바뀌었다.
평소의 무표정이 아닌, 계산하는 눈이었다.
동시에 약간의 경쟁심이 섞인 눈.
"17개? 나도 12개밖에 못 찾았는데."
"바람이 가르쳐줬어."
은명이 봤다.
진짜인지 농담인지 판단하려는 시선이었다.
위노나가 씩 웃었다.
"……농담이야. 드론이야."
전태산이 하하 웃었다. 소리가 컸다.
은명이 눈으로 '조용히'라고 말했다.
태산이 입을 웅크렸다.
은명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은명이 태블릿에서 전자부적 시연을 켰다.
화면 위로 푸른 부적 문양이 흘러갔다.
창고 안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먼지가 빛의 궤적을 따라 원을 그렸다.
벽에 푸른 그림자가 일렁이고,
기름때 묻은 바닥에 빛이 반사되면서 천장에도 물결 무늬가 번졌다.
위노나의 표정이 변했다.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드론이 은명의 태블릿을 향해 렌즈를 돌렸다.
"그거 전기 쓰는 거 아니야?"
"기(氣)야. 전기랑 달라."
"……비슷해 보이는데."
전태산이 끼어들었다.
"야, 그거 진짜 도술이야. 내가 보증함."
위노나가 전태산을 봤다.
차갑게. 온도가 내려가는 시선이었다.
"네 보증이 왜 신뢰가 되는데."
"……어?"
리오가 박수를 쳤다.
"하하! 이 팀 재밌다~!"
은명이 부적을 껐다.
먼지가 다시 가라앉았다.
창고 안이 어둠으로 돌아갔다.
태블릿 빛만 네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위노나. 이건 차차 보여줄게. 판단은 그때 해."
위노나가 잠시 봤다.
드론이 은명의 태블릿을 한 번 스캔했다.
에너지 잔류 분석. 결과가 위노나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좋아. 일단은."
결론을 유보하는 사람 특유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것이 답이었다.
은명이 태블릿을 돌려 다음 화면을 보여줬다.
피해 데이터.
현재까지 파악된 교내 폭력 사건. 23건.
장석현이 의무실에서 기록한 치료 데이터를 은명이 정리한 것이었다.
피해자 이름은 코드로 처리했다.
실명 대신 번호. P-01부터 P-23.
각 항목 옆에 가해자 추정, 발생 장소, 시간대, 목격자 유무가 적혀 있었다.
네 사람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전태산의 표정이 굳었다.
주먹이 무릎 위에서 쥐어졌다.
태산은 이런 데이터를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의무실에서 장석현이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된 형태로 보니 다시 분노가 올라왔다.
리오의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입술이 한 줄로 다물려 있었다.
농담을 치지 않았다. 농담을 칠 수 없는 데이터였다.
위노나가 드론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23건 중 조치된 건?"
"0건."
창고 안이 잠깐 침묵에 잠겼다.
먼지가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고요.
전태산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작업 매트의 기름때가 바지에 묻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야, 은명아."
"뭐."
"이름이 필요하지 않아?"
은명이 끄덕였다.
"맞아. 조직에는 이름이 있어야 해."
전태산이 먼저 말했다.
"정의의 주먹."
은명의 얼굴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의 거부.
"……거부."
리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솔라 스쿼드! 태양의 전사들!"
"거부."
위노나가 조용히 말했다.
"레지스탕스?"
"무겁지 않아?"
전태산이 뒤통수를 긁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야, 은명아.
너네 집, 홍씨세가잖아. 홍길동."
은명이 멈췄다.
태블릿을 두드리던 손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홍길동. 홍씨세가의 시조.
활빈(活貧). 가난한 자를 살리는 의적.
은명은 어릴 때부터 그 이름을 듣고 자랐다.
집안의 가훈에도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은명은 한 번도 자기가 그 이름을 이을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홍길동이 뭐 했어?
가난한 사람 도와줬잖아.
활빈. 가난한 자를 살린다."
창고 안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발소리가 지나갔다.
네 명 모두 입을 닫고 귀를 세웠다.
리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위노나의 드론이 출입구를 향해 렌즈를 돌렸다.
은명이 태블릿 밝기를 최저로 낮췄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야간 순찰이었다.
은명이 밝기를 다시 올렸다.
전태산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은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 안에서 이름을 한 번 되뇌고 나서 소리를 냈다.
"……활빈당(活貧黨). 가난한 자를 살리는 무리."
위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의적의 이름이잖아."
리오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활빈당! 소리도 좋은데~!"
전태산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번에는 작게.
"내가 지은 거야? 내가 지은 거지?"
은명이 태블릿을 딱딱 쳤다.
"……네가 힌트를 줬을 뿐이야.
이름은 내가 정리한 거야."
"인정 안 하는 거 또 시작~"
은명이 대답 대신 태블릿에 적었다.
타이핑하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빨랐다.
'활빈당(活貧黨)
— 강함은 약자를 살릴 때만 정당하다.'
전태산이 화면을 봤다.
"그건 뭐야?"
"우리의 원칙이야. 홍씨세가 가훈에서 빌려왔어."
빌려왔다고 했지만, 은명은 알고 있었다.
이 문장을 가훈에서 꺼내 쓴다는 건
홍씨세가의 이름을 걸겠다는 뜻이라는 걸.
홍진백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
아마 아무 말 안 하겠지.
대신 차 한 잔 따라주고 긴 침묵을 보내겠지.
그게 홍진백의 방식이니까.
전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근데 한 가지 더 넣자."
"뭔데."
"규칙이 못 지키면, 규칙 밖에서 지킨다."
은명이 전태산을 봤다.
"……그건 내 메모인데."
"좋은 말이니까 공유하는 거지~"
은명이 타이핑했다. 그리고 두 줄을 더 추가했다.
'강함은 약자를 살릴 때만 정당하다.
규칙이 못 지키면, 규칙 밖에서 지킨다.
단, 살상 금지. 민간 피해 금지.
우리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끝이다.'
마지막 줄은 은명이 처음 쓰는 문장이었다.
태산의 에너지를 존중하면서도 선을 긋는 문장.
은명은 홍씨세가에서 배운 게 있었다.
의(義)를 주장하는 자가 폭력을 통제하지 못하면
의적이 아니라 도적이 된다는 것.
리오가 읽었다.
"멋있다~! 근데 마지막 줄 무섭다."
위노나가 읽었다.
눈이 멈췄다. 마지막 줄에서. 오래 봤다.
"……마지막 줄 좋아.
이건 말에 그치면 안 돼. 지켜야 의미가 있어."
은명이 태블릿을 닫았다.
화면이 꺼지면서 네 사람의 얼굴이 어둠에 잠겼다.
잠깐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적응하기 전의 완전한 어둠.
"당연하지."
네 명이 서로를 봤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하지만 무겁지도 않았다.
창고 안에 먼지 냄새와 기름때 냄새가 섞여 있었지만
그 사이로 뭔가 새로운 게 시작되는 공기가 끼어들었다.
심장 박동이 미세하게 빨라지는 공기.
시작이었다.
은명이 시계를 봤다.
새벽 1시 40분. 이미 두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순찰 패턴상 2시에 한 번 더 체육관 쪽을 돌 것이었다.
"해산. 오늘은 여기까지."
전태산이 먼저 일어났다.
바지에 묻은 기름때를 대충 털었다.
털어도 안 지워지는 건 알았지만 습관이었다.
리오가 창고 문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했다.
풀밭에 이슬이 가로등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 없음. 리오가 엄지를 들었다.
위노나가 드론을 먼저 내보냈다.
드론이 창고 주변 반경 50미터를 스캔하고 안전 신호를 보냈다.
네 명이 한 명씩, 2분 간격으로 나갔다.
은명이 정한 규칙이었다.
같이 나가면 목격자에게 4인조로 기억된다.
한 명씩 나가면 아무 관련 없는 개인이 된다.
은명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창고 문을 닫으면서 안쪽을 한 번 돌아봤다.
기름때 묻은 매트, 먼지 쌓인 쿠션, 거미줄.
아무것도 아닌 공간.
하지만 오늘부터 이 공간은 의미가 생겼다.
활빈당의 본거지. 첫 번째 장소.
은명이 문을 닫았다.
경첩이 다시 삐걱거렸다.
같은 밤. 기숙사 옥상.
산토스 볼리바르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빨간 머플러가 밤바람에 나부꼈다.
머플러 끝자락이 닳아 있었다.
1학년 때부터 감고 다닌 것이었다.
고향에서 가져온 유일한 물건.
세탁은 하지만 헤진 곳은 직접 기웠다.
기운 바느질 자국이 바람에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래쪽. 체육관 뒤편.
창고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태블릿 화면빛.
미약하지만 옥상에서는 보였다.
산토스는 옥상의 모든 각도에서
학교의 어떤 구역이 보이는지 외우고 있었다.
직업병이 아니라 생존 습관이었다.
산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놈들."
발소리.
마리아가 올라왔다. 3학년. 산토스의 동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지만 손으로 잡지 않았다.
마리아는 항상 그랬다. 바람에 맡기는 타입.
산토스와는 정반대였다.
"또 여기야?"
"재밌는 게 있어서.
1학년 네 명이 뭔가 만들려고 해."
마리아가 난간 옆에 섰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창고의 빛을 확인하고, 다시 산토스를 봤다.
"또 반항? 2학년 때처럼?"
산토스가 머플러를 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어졌다.
2학년 때.
혼자 반기를 들었던 때.
편입생 보호를 외치며 선도부와 맞섰던 때.
결과는 선도부의 강제 제압.
혁명은 삼일 만에 끝났다.
삼일 후 산토스의 선도 기록에 경고 3개가 추가됐다.
"아니야.
저 놈들은 달라.
파괴가 아니라 보호를 하려고 해."
마리아가 산토스를 봤다.
"어떻게 알아?"
산토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머플러 끝이 바람에 잠깐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개강 초부터 봐왔어.
홍은명이라는 놈.
데이터를 모으는 방향이 달라.
고발용이 아니야.
보호 루트를 짜고 있어."
마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도와줄 거야?"
산토스가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밤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갔다.
"……아직은.
내가 끼면 저 놈들의 것이 아니게 돼."
마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산토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때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산토스가 고개를 숙였다.
머플러 안으로 턱이 묻혔다.
"……그래.
그때는 혼자 다 하려고 했으니까."
바람이 불었다.
옥상의 안테나가 미세하게 울렸다.
금속이 바람에 진동하는 소리.
산토스가 머플러를 여미며 옥상을 내려갔다.
계단에서 발을 멈췄다.
아래쪽 창고를 한 번 더 봤다.
혁명은 한 번에 안 돼.
살아남아야 다음이 있어.
그건 내가 배운 거다. 뼈로 배운 거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옥상에 마리아만 남았다.
아래쪽. 창고의 불빛이 꺼졌다.
마리아가 중얼거렸다.
바람에 섞여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목소리.
"이번엔 좀 잘 되라, 이 바보들아."
내일 아침이면 장석현이 또 의무실로 누군가를 데려갈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무실까지 가기 전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활빈당의 첫 번째 밤이 끝나고 있었다.
✦ 작가의 말
3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