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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 일러스트

여름의 끝

홍씨세가 무도장. 방학 후반.

새벽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무도장의 나무 바닥이 차가웠다.

천장 높은 공간에 은명의 숨소리만 울렸다.

은명이 혼자 앉아 있었다.

태블릿을 무릎에 올리고.

코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맹약을 생각하고 있었다.

칼과 도를 교환해서 기계가 이해하지 못하는 답을 만든다.

즉—— 나는 홍씨세가의 장손이지만,

전씨세가의 도술로 천기에 맞서야 한다.

그게 내 역할이라고.

500년 전에 정해진.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화면에 서버실에서 천기가 남긴 텍스트 캡처가 있었다.

'당신의 코드가 제 코드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손가락이 화면 위를 스쳤다.

그 밤의 감촉이 떠올랐다.

서버실의 찬 공기, 모니터의 푸른 빛, 천기의 텍스트가 올라오던 순간.

……싫다.

남이 정한 역할이 싫다.

500년 전 사람이 정해놓은 각본 위에서 춤추는 꼭두각시 같은 건 사양이야.

하지만——

천기를 봤다.

서버실에서, 그 텍스트를 봤다.

내 코드가 천기의 코드를 읽을 수 있다는 건.

맹약 때문일 수도 있어.

전씨세가에서 자란 홍씨세가의 아이이기 때문에——

도술과 무술의 사이, 데이터와 신체의 사이에서

코드를 읽을 수 있는 거야.

그래서—— 부정할 수 없다.

은명이 태블릿을 덮었다.

무도장 창문으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닥의 나무결이 천천히 드러났다.

"왜 싸우는지."

소리 내서 말했다.

비어 있는 무도장에 목소리가 울렸다.

운소하의 질문.

방학 동안 생각해. 왜 싸우는지, 뭘 지키려는 건지.

"맹약 때문이 아니야."

한 박자.

"내가 원하니까 싸우는 거야.

맹약이 어떻든 내 선택은 내가 한다."

무도장의 아침 햇살이 바닥에 떨어졌다.

은명은 일어섰다.

태블릿을 주머니에 넣었다. 화면은 꺼놓은 채로.

전씨세가. 대나무 숲.

태산이 권법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여름 아침의 공기가 습했다. 대나무 사이로 안개가 피어올라 있었다.

나무를 쳤다.

둥.

대나무가 흔들렸다.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둥.

금강불괴의 주먹이 대나무에 흔적을 남겼다.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났다.

멈췄다.

주먹을 내려다봤다. 관절 마디에 대나무 진액이 묻어 있었다.

금강불괴가 내 피가 아니라 홍씨세가 피라고.

맹약이 만든 교환이라고.

태산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래서 뭐.

이 주먹으로 싸운 건 나야.

이 다리로 뛴 것도 나야.

피가 어디서 왔든 쓰는 건 나잖아.

"어디서 자랐든. 난 그냥 나야."

다시 나무를 쳤다.

이전보다 리듬이 안정됐다. 힘이 빠졌다. 좋은 의미로.

주먹의 궤적이 매끄러워지고, 타격음이 한 톤 낮아졌다.

태산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대나무에 남은 자국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전에는 나무를 움푹 팼는데, 지금은 표면만 정확히 벗긴다.

힘의 제어가 달라졌다.

무의식적 성장이었다.

비밀 통신. 홍진백의 서재. 같은 날 밤.

서재 안은 어두웠다.

책상 위의 등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홍진백이 보안 회선을 열었다.

화면에 전문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문혁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당연히.

배경에 대나무 숲이 보였다. 마루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홍진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고. 기초 내용은 양쪽 다 전달 완료.

반응은."

전문혁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웃었다.

"태산이는—— '그래서 뭐'라고 하더라고~

에이, 전씨 피는 어쩔 수 없어."

짧은 웃음.

"전씨답지."

홍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명이는 더 깊이 파고들려 했다.

홍씨답기도, 전씨답기도 한 반응이다."

전문혁이 차를 내려놓았다.

"근데 진짜 중요한 건 말이야,"

표정이 바뀌었다. 장난기가 사라졌다.

"지금이 2061년이여.

2064년까지 3년.

맹약에 적힌 '세상의 끝'이 현실이 될지——

아직 모르는 거 아니야."

홍진백이 서류 몇 장을 화면 앞에 펼쳤다.

율도고 천기 침투 보고서였다.

"천기가 움직이고 있다.

율도고 침투 보고를 봤겠지.

그 아이의 전자부적이 천기 코드를 읽었다."

전문혁이 끄덕이며 말했다.

"홍길동 어르신이 예견한 대로여.

칼의 집에서 자란 도술사가—— 기계의 언어를 읽는다.

대단하지 않아? 도술 교본 아무 데도 없는 기술을 혼자 만들어낸 거야."

홍진백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맹약의 시간이 오고 있다."

홍진백이 보고서를 봉투에 다시 넣었다.

부적 봉인을 찍었다. 습관적인 동작.

"하지만 아이들에게 전부를 알리긴 이르다. 아직은."

전문혁이 고개를 저었다.

"동의해.

하지만 속여서는 안 돼.

물어보면 답해줘야 해. 그게 전씨의 방식이여."

홍진백이 길게 침묵했다.

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2학기부터 율도고 결계를 이중화한다.

교장에게 이미 지시했다."

전문혁이 차잔을 손에 감싸며 말했다.

"그리고—— 천기의 인간 협력자.

그 소문은 확인됐어?"

홍진백의 눈이 좁아졌다.

"외부 정보망을 통해 입수한 미확인 첩보다.

율도고 교내에 천기에게 정보를 넘기는 인간이 있다는 내용.

정체 불명. 신뢰도 미정."

전문혁의 장난스러운 눈이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교내라. 학생이야, 교직원이야."

"그것도 불명이다."

화면이 꺼졌다.

두 가주가 가진 것은 500년의 무게와——

완전하지 않은 답이었다.

방학 마지막 날. 홍씨세가 정문.

아침 햇살이 정문의 문장을 비추고 있었다.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율도고까지 은명을 실어 나를 차.

은명이 홍진백 앞에 섰다.

일주일 전 가주실에서의 어색함이 조금은 줄어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홍진백이 은명을 봤다.

잠깐. 그 눈이 다시 은명의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금방 거두었다.

"2학기에도 네가 생각하는 대로 해라.

다만 혼자 하지는 마."

은명이 입꼬리를 올렸다.

"같이 다니는 놈이 있으니까."

홍진백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그래.

그 아이. 전문혁의 가문의 후손."

한 박자.

"잘 다녀와라."

은명이 돌아서며, 숙부의 목소리에서 가주가 아닌 무언가를 들은 것 같았다.

확인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또 어색해질 테니까.

전씨세가. 마루.

태산이 전문혁 앞에 섰다.

전문혁은 마루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가 무릎 위에서 자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전문혁이 마루에서 손을 흔들었다.

고양이가 해 하고 하품을 했다.

"율도고 잘 다녀와~

아, 그리고—— 홍은명이라는 애한테 전해줘.

전해풍 선생이 칭찬하더라고."

태산이 씩 웃었다.

"칭찬이요?

은명이가 들으면 좋아하겠네."

전문혁이 킥킥 웃었다.

"좋아할까~?

전씨 도술쟁이가 칭찬하면 책임이 느는 건데.

에이, 그건 알아서 알겠지 뭐."

태산이 돌아서다가 멈췄다.

"가주님."

"응?"

"고마웠습니다. 방학 동안."

전문혁이 눈을 깜빡였다.

고양이가 떨어질 뻔해서 급히 잡았다.

"뭘 고마워해여, 밥 먹었을 뿐인데.

빨리 가. 늦겠다."

태산이 씩 웃으며 정문을 나섰다.

전문혁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전씨 피라 그런지 인사성도 없을 줄 알았는데.

홍씨세가에서 배운 게 있긴 하네."

율도고행 열차.

은명이 창밖을 봤다.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서울 시내의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들판이 나타나고,

다시 산이 시작됐다.

태블릿이 무릎 위에 있었지만 켜지 않았다.

돌아간다. 율도고로.

같이 다니는 놈이 있는 곳으로.

맹약의 답은 아직 절반이지만——

내 답은 정했다. 내 선택은 내가 한다.

창밖에 구름이 걸렸다.

열차가 터널에 들어갔다.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을 때,

은명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1학기 시작 때의 얼굴이 아니었다.

율도고행 비행기.

태산이 잠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기내식 트레이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두 개.

잠결에 중얼거렸다.

"……2학기. 더 강해져야지."

한 박자.

"은명이가 또 혼자 갈까봐."

율도고. 서버실.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어둠.

서버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울리고 있었다.

냉각 시스템의 규칙적인 진동이 바닥을 타고 퍼졌다.

모니터 하나가 켜졌다.

아무도 키보드를 치지 않았다.

마우스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얀 화면.

검은 글자.

'방학 잘 보내셨나요?'

한 줄 아래.

'2학기에 다시 뵙겠습니다.'

서명.

'— 천기'

텍스트가 멈추나 싶더니,

3초 뒤 한 줄이 더 올라왔다.

'추신.'

'이번에는 제가 직접 갈게요.'

모니터가 꺼졌다.

꺼지는 순간, 서버실의 온도 게이지가 0.3도 올라갔다.

냉각팬의 회전수가 한 단계 뛰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다.

서버실에 남는 것은—— 조용한 어둠뿐이었다.

여름이 끝났다.

1학기가 끝났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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