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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없는 집 일러스트

돌아갈 수 없는 집

홍씨세가 본가.

서울 중심부.

거대한 복합단지가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재단, 교육원, 무도장, 행정동.

전부 하나의 도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콘크리트와 강화유리, 그 사이사이에 전통 기와가 엇물려 있었다.

500년 역사를 현대의 외피로 감싼 형태.

은명이 정문에 섰다.

17년 만의 '본가'.

전씨세가에서 자란 은명에게——

여기가 '집'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정문은 높았다.

사람을 맞이하는 문이 아니라, 사람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문이었다.

양쪽에 홍씨세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낡지 않았다. 관리가 완벽했다.

안내 무인이 다가왔다.

정장에 검은 넥타이. 표정이 없는 얼굴.

"도련님. 임시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련님.

전씨세가에서는 '은명아'였는데.

여기서는 도련님이군.

복도를 걸었다.

대리석 바닥이 발소리를 울렸다.

어디선가 향이 피워져 있었다. 백단향.

공기까지 관리되는 곳이었다.

벽에 역대 가주들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초대 홍길동.

그 옆으로 2대, 3대, 12대까지.

초상화의 양식이 수묵에서 유화로, 다시 디지털로 바뀌어 있었다.

500년의 시간이 벽 하나에 압축되어 있었다.

……맨 끝에 빈 자리.

은명의 자리.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공백이 액자 크기만큼 남아 있었다.

은명은 그 빈 자리를 잠깐 보고 지나쳤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무언가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은명아."

목소리. 따뜻한 목소리.

돌아봤다.

전해풍.

은명의 어린 시절 도술 스승.

흰 수염이 조금 더 길어져 있었다.

한복 위에 가벼운 겉옷을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대나무 부채를 쥐고 있었다.

"잘 컸구나. 태블릿 아직도 들고 다니니?"

은명이 웃었다. 진짜 웃음.

본가에 와서 처음으로.

"선생님. 왜 여기 계세요?"

전해풍이 함께 걸으며 말했다.

걸음이 느긋했다. 이 복도의 엄숙함이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주님이 부르셨어.

아마—— 너한테도 할 말이 있으실 거야."

은명이 멈추지 않고 물었다.

"……맹약 이야기요?"

전해풍이 잠시 침묵했다.

부채를 접었다 폈다.

"그건 가주님이 직접 말씀하실 거야.

나는——선생이야. 그 이상은 아니란다."

은명의 독백.

운소하 교관님도 그랬고.

전해풍 선생님도 그렇고.

어른들은 다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이 뭔지는——

아무도 안 알려줘.

전씨세가 본가. 담양.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소박한 저택.

홍씨세가와 대조적이었다.

콘크리트도 없고, 강화유리도 없었다.

나무와 흙과 기와. 바람이 불면 대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마당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태산이 정문에 섰다.

문이 열려 있었다. 경비도 없었다.

"……이게 본가? 문도 안 잠겼는데?"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돌길을 밟으니 신발 밑에서 자갈이 굴러갔다.

어딘가에서 닭이 울었다.

가문 사람이 마루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맨발에 반바지. 선풍기가 옆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어, 왔어? 밥 먹었어?"

그게 전부였다.

인사도, 예법도, 안내 무인도 없었다.

태산이 마루에 걸터앉자, 옆에서 고양이가 다가와 다리에 머리를 부벼댔다.

홍씨세가에서는 인사할 때 허리를 90도 굽히고,

식사 때 자리 순서가 있고,

복도에서 선배를 만나면 벽에 붙어 지나간다.

여기는—— 아무도 그런 거 안 해.

자유롭다.

근데——

이 자유로움이 왜 이렇게 낯설지?

"태산아!"

큰 목소리. 마당 반대편에서.

홍무영.

태산의 어린 시절 체술 스승.

덩치가 큰 남자. 팔뚝이 태산의 허벅지만 했다.

땀에 젖은 운동복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커졌구나!

잘 자라고 있어.

어깨가 넓어졌어. 지난번보다 한 뼘은 더 크잖아."

홍무영이 태산의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태산이 환하게 웃었다.

"무영이형! 오랜만이에요!"

홍무영이 태산의 어깨를 툭 쳤다.

힘 조절을 한 건데도 태산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이 사람의 힘은 아직도 무섭다.

"율도고에서 잘 하고 있다며?

전태산이 싸웠다는 보고가 왔어."

"보고요? 여기까지?"

"네가 어디서 뭘 하든——

지켜보는 사람은 있어."

씩 웃었다.

"본가주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으실 거야."

태산이 물었다.

"맹약이요?"

홍무영이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대신 마당 너머 서재 쪽을 가볍게 턱짓했다.

"가주님이 직접. 나는——선생이야."

홍씨세가 가주실. 귀향 3일 후.

방은 넓었다.

하지만 가구는 적었다.

오래된 원목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벽면 서가.

장식이 없는 방.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권위 자체인 공간.

은명이 문 앞에서 멈췄다.

손이 문고리에 닿기 직전에 굳었다.

이 문 안에 있는 사람은—— 피가 이어진 숙부.

하지만 기억 속에 그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두 살 때 헤어진 사이에 '기억'이라 부를 것이 있을 리 없으니까.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열었다.

홍진백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앉아 있지 않았다. 서 있었다.

은명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임시가주. 은명의 숙부.

직선적인 얼굴에 무거운 눈.

허리가 곧았다. 앉아 있어도 서 있는 것 같은 자세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진짜 서 있었다.

은명이 멈칫했다.

어떤 인사를 해야 할지 몰랐다.

전씨세가식 인사? 홍씨세가식 인사?

아니면 숙부에게 하는 인사?

그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은명입니다."

결국 가장 무난한 말을 골랐다.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얼마나 굽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홍진백이 움직이지 않았다.

은명이 고개를 들었다.

홍진백의 눈이 은명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오래. 너무 오래.

뭔가를 찾는 눈이었다. 기다렸던 것을 확인하는 눈.

홍진백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한 번.

그리고 다시 열렸다.

"……닮았구나."

작은 목소리였다.

가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네 아버지를 닮았다."

은명이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사진으로만 봤다.

그 사진 속 사람과 닮았다는 말을

처음 보는 숙부에게 듣고 있었다.

홍진백이 눈을 내리깔았다.

책상 위의 찻잔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앉아라."

은명이 의자에 앉았다.

등이 뻣뻣했다. 어디에 손을 놓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결국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침묵이 흘렀다.

홍진백이 먼저 깨야 할 침묵이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홍진백이 차를 따랐다.

두 잔. 하나를 은명 앞에 놓았다.

찻잔을 놓는 손이 정확했지만, 그 정확함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이 사람도 긴장하고 있다는 걸 은명은 알아챘다.

"장손이 돌아왔으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가주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했다.

'장손'이라는 단어 앞에서 잠깐 멈칫한 것을 은명은 놓치지 않았다.

홍진백이 서가에서 금속 상자를 꺼냈다.

잠금장치는 부적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손끝에 내력을 실어 봉인을 풀었다.

안에 고문서 하나.

500년 전. 홍길동의 친필.

낡은 종이. 하지만 보존 상태는 완벽했다.

부적 봉인 덕이다.

은명이 손끝을 가까이 댔다가 멈췄다.

종이에서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500년 전 사람의 내력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홍진백이 읽었다.

"'500년 뒤, 세상은 한 번 더 뒤집어진다.

그때를 위해 내 자손과 전우치의 자손을 바꿔 키워라.'"

한 줄 더.

"'칼과 도가 하나의 몸에서 피어나야,

그 아이가 세상을 잡을 수 있다.'"

은명이 숨을 참았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바꿔 키워라……"

목소리가 떨렸다. 스스로도 놀랐다.

"그래서 저를 전씨세가로 보낸 겁니까."

홍진백이 문서를 내려놨다.

처음으로 은명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시선이 문서 위에 머물렀다.

"……그래."

한 박자.

"맹약이 이유다."

홍진백이 찻잔을 잡았다. 마시지 않았다.

잔의 온기를 손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살짜리 조카를 다른 가문에 넘겼다.

그 판단이 옳았는지는. 17년이 지난 지금도 답을 못 냈다."

은명의 손이 무릎 위에서 꽉 쥐어졌다.

이 사람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미안함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랐다.

화를 내야 하는 건지. 괜찮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어느 쪽도 진심이 아닐 것 같았다.

홍진백이 몸을 바로 세웠다.

가주의 자세로 돌아왔다. 의무가 감정을 눌렀다.

"맹약에는 더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갑자대란 때 본가가 습격당하면서 봉인 보관소가 불탔다.

절반 이상 소실됐지."

한 박자.

"이 친필 원본은 비상 반출용 복제본이다.

원본이 남아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건 이것뿐이다."

은명이 올려다봤다.

"……가문도 다 모른다는 겁니까."

홍진백의 표정이 무거웠다.

"그렇다.

500년 전 홍길동이 무엇을 봤는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완전한 답은 없다."

한 박자.

홍진백이 은명의 눈을 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17년 만에 처음으로 이 아이와—— 아니, 이 청년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은명아."

은명이 움찔했다.

'장손'도 '도련님'도 아닌, 이름.

이 사람의 입에서 자기 이름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모든 걸 알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불완전한 그림이라도 네가 채워라."

은명이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움직이려 했다.

습관이었다. 분석해야 할 것이 있으면 손이 먼저 움직이는.

하지만—— 이건 태블릿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주실을 나오며, 은명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홍진백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등이 곧았지만, 어깨가 내려가 있었다.

가주의 등이 아니라—— 숙부의 등이었다.

전씨세가 본가주 서재. 같은 시각.

서재는 작았다.

벽면 전체가 두루마리와 고서로 채워져 있었고,

나무 냄새와 먹 냄새가 섞여 있었다.

창문 너머로 대나무 숲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사각 울렸다.

태산이 전문혁 앞에 앉았다.

본가주.

나른한 눈. 느슨한 자세.

차를 따르고 있었다. 잔이 작았고, 동작이 느렸다.

급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같았다.

"어~ 태산이구나. 앉아앉아. 차 한 잔 할래?"

태산이 앉지 않고 말했다.

"가주님. 맹약에 대해 알려주세요."

전문혁이 웃었다.

차를 따르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허~ 직구네.

에이, 전씨 피는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어."

전문혁이 서가 아래 칸에서 낡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세월의 무게가 손에 전해졌다.

"전우치 어르신의 마지막 유서여.

구전이 아니라 직접 남기신 육필이고.

홍씨 쪽 문서보다 시기가 늦은 대신, 해석이 덧붙여져 있지.

맹약 이야기가 여기 있어."

태산이 앉았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지만 참았다.

전문혁이 읽었다.

"'홍길동이 본 것은—— 세상의 끝이었다.

그것을 막으려면,

칼의 몸에 도의 감각을,

도의 몸에 칼의 힘을 심어야 한다.'"

한 줄 더.

"'그래야—— 기계가 이해하지 못하는 답이 나온다.'"

태산이 주먹을 봤다.

"기계가 이해하지 못하는 답……"

전문혁이 차를 마셨다.

창밖의 대나무가 흔들렸다. 빛이 서재 안에서 춤을 추었다.

"천기 말이여.

홍길동이랑 전우치 어르신이 500년 전에 이미——

데이터로 설명 안 되는 존재를 만들려 한 거야.

대단하지 않아?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태산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한테 금강불괴가 온 거예요?

도술사 집안 아이한테 무인의 몸을?"

전문혁이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홍은명한테는 도술적 영감이 갔지.

서로의 본질을 교환한 거여.

칼의 집안에서 도를, 도의 집안에서 칼을."

한 박자.

"근데 진짜 중요한 건 말이야,

이것도 맹약의 일부만이라는 거여.

유서 뒤편에 더 있었을 텐데, 훼손이 심해서 읽을 수가 없어."

태산이 창밖을 봤다.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렸다.

한 그루가 굽었다가 다시 펴졌다.

부러지지 않았다.

칼과 도가 하나의 몸에서.

기계가 이해하지 못하는 답.

뒤집어보면—— 500년 전의 두 사람도

전부를 확신한 건 아니었을 거야.

미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자손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500년 전의 약속이 지금의 주먹을 만들었지만——

그 주먹을 쓰는 건 태산 자신이었다.

서재를 나서려는 태산의 등 뒤로

전문혁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태산아."

"네."

"……방학 중에 조심해라.

몇몇 가문에서 움직임이 이상해."

태산이 돌아봤다.

전문혁의 나른한 눈이 처음으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 마당으로 나왔다.

주머니 속 태블릿에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발신자 불명. 텍스트 한 줄.

'재미있는 방학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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