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자의 짐
학생회실. 방학 전날.
창밖으로 여름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학생회실 안은 에어컨 소리만 낮게 울렸다.
이자벨라가 책상에 앉아 1학기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학생회장의 일.
보고서, 결산, 교관 보고, 선도부 활동 기록.
책상 위에 쌓인 서류가 벽돌처럼 두꺼웠다.
그리고—— 천기 침투 대응 보고서.
펜이 멈췄다.
'비공인 조직 활빈당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서버실 방어 성공.'
자발적 참여. 공식 기록의 단어.
깔끔하고 중립적이고,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문장.
하지만 이자벨라는 알고 있었다.
활빈당이 없었으면 서버실은 뚫렸다는 것을.
펜을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에 잉크가 묻어 있었다.
닦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제갈린.
교복을 깔끔하게 입은 채로, 태블릿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표정은 평소의 그것—— 감정을 데이터로 변환한 얼굴.
"학생회장님.
서버실 합동전 데이터 분석 끝났습니다."
태블릿을 내밀었다.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수치와 그래프가 공중에 떠올랐다.
선명한 파란색 라인이 합동 전술 구간에서 급등하고 있었다.
"홍은명과의 합동 전술 효율.
제가 계산해봤는데—— 단독보다 186% 높았어요."
이자벨라가 눈썹을 올렸다.
"186%?"
한 박자.
"……인상적이네."
제갈린이 태블릿을 거뒀다.
홀로그램이 접히면서 학생회실이 다시 어두워졌다.
"인상적인 건 숫자예요.
홍은명 본인이 인상적인 건—— 아직 인정 안 해요."
이자벨라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네."
잠시 침묵.
에어컨 바람이 서류 한 장을 살짝 밀었다.
이자벨라가 의자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봤다.
교정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걸어다니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 일주일 전의 밤이 거짓말 같았다.
"제갈린. 2학기에는 상황이 달라질 거야."
"달라진다니요?"
"천기가 보여준 건——
우리끼리 싸울 여유가 없다는 거야."
제갈린의 눈이 좁아졌다.
"그래서 활빈당을 인정하자는 건가요?"
이자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인정이 아니야."
한 박자.
"활용이야."
딱 잘라 말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화법. 감정은 빼고, 전략만 남기는.
"차이를 기억해."
제갈린이 끄덕이고 복도로 나왔다.
복도의 햇살이 눈부셨다.
태블릿을 정리하며 걸었지만,
서버실에서 은명과 호흡을 맞추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진법을 돌리고, 은명이 코드를 읽고,
서쪽 축이 잠기던 그 호흡.
고개를 저었다.
……숫자야. 186%. 그냥 숫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생각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학교 뒤편 정원. 같은 날 오후.
은명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경고 처분, 운소하의 말, 방학, 본가.
전부 정리가 안 됐다.
정원의 산책로는 자갈이 깔려 있었다.
발밑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어딘가에서 벌레가 울고 있었다. 여름의 입구.
큰 나무 아래.
누군가 누워 있었다.
갈색 피부, 곱슬머리, 키 185.
산토스 볼리바르.
나무 그늘에 팔을 베고 졸고 있었다.
가슴 위에 펼쳐놓은 책이 바람에 한 장씩 넘어가고 있었다.
은명이 머뭇거렸다.
지나칠까 하다가, 산토스의 눈꺼풀이 먼저 떨렸다.
"오."
산토스가 눈을 떴다.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홍은명. Hola!"
일어나 앉으며 활짝 웃었다.
풀잎이 머리카락에 붙어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천기 대응 때 서버실 들어간 1학년이 있다고 해서
좀 궁금했거든. 방학 전에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네."
은명이 멈췄다.
"산토스 선배. 저를 아세요?"
"활빈당이잖아.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웃음이 깊었다. 걱정이 없는 사람의 웃음.
"앉아. 잔디 좋아."
은명이 옆에 앉았다. 잔디 위.
바람이 불어 나뭇잎 그림자가 두 사람 위에서 흔들렸다.
잠시 침묵.
편한 침묵이었다.
산토스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옆에 있으면 긴장이 풀리는 종류의 기운.
산토스가 먼저 말했다.
"나도 2학년 때 비슷한 걸 했었어.
빅토르 선배에게 반기를 들었지."
은명이 올려다봤다.
"어떻게 됐어요?"
산토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풀잎을 하나 뽑아 손가락에 감았다.
"졌어. 아주 깨끗하게."
한 박자.
"그리고 같이 싸운 애들이——
나 대신 벌을 받았어.
정학. 벌점. 기여도 삭감.
나는 무사했는데, 걔들은 아니었지."
산토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이후로 3학년까지
혼자 다녔어."
은명이 아무 말 못 했다.
산토스의 눈이 잠깐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풀잎을 놓았다. 바람이 가져갔다.
"혁명은 한 번에 안 돼, 은명.
살아남아야 다음이 있어."
은명을 봤다. 눈이 진지했다.
"네가 잘한 건——
이번 학기에 살아남은 거야.
경고 1회 받고, 동료 하나 안 잃고,
학교 전체가 침투당한 밤에 서버실을 지켰잖아."
"살아남은 거요? 경고 처분 받았는데요."
산토스가 눈을 반짝였다.
"경고? Perfecto!"
완벽해!
"경고는 기록이야. 기록은——증거야.
활빈당이 여기 있었다는 증거. 그게 중요해."
은명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선배 특이하시네요."
"Vamos! 우리 같은 놈들은 다 특이해.
특이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키가 크니까 그림자가 길었다.
"2학기에 봐, 후배.
그때는—— 내가 좀 더 도울 수 있을지도."
씩 웃고 갔다.
발소리가 자갈 위로 멀어졌다.
은명이 잠시 앉아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얼굴에 떨어졌다.
경고는 기록이고, 기록은 증거다.
……좋은 말이다. 머릿속에 넣어두자.
활빈당 아지트. 빈 교실. 방학 전날 저녁.
창밖으로 석양이 들어와 교실 바닥에 주황색 사각형을 그렸다.
칠판에는 지우지 않은 수학 공식이 남아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4인 모임. 은명, 태산, 위노나, 리오.
리오가 가방에서 과자를 꺼냈다.
새우깡, 빼빼로, 초코파이.
책상 위에 정렬하더니 양손을 벌렸다.
"경고 1회 기념 파티다~!"
위노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파티 음식이 아니라 그냥 과자야."
"과자가 파티를 만드는 거지.
파티가 과자를 만드는 게 아니야."
은명이 눈을 깜빡였다.
"……뭔 소리야."
태산이 턱을 긁었다.
"리오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태산 너까지?!"
위노나가 양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초코파이를 하나 뜯고 있었다.
과자를 먹으면서,
은명이 태블릿에 1학기 활빈당 활동 기록을 띄웠다.
홀로그램이 과자 봉지 사이에 떠올랐다.
"1학기 활동.
약자 보호 12건. 편입생 서포트 8건.
경고 처분 각 1회."
한 박자.
"그리고—— 천기 침투 대응 1건."
위노나가 새우깡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천기 대응은 공식 기록에 안 남았지만.
학생회 내부 비공개 로그에는 남아 있어. 내가 확인했어."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에 남든 안 남든. 우리가 했으니까."
과자가 바스라졌다.
잠시 조용해졌다.
석양의 주황빛이 네 사람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리오가 빼빼로를 입에 물고 중얼거렸다.
"2학기에도 이거 할 거지?"
은명이 리오를 봤다.
"당연하지."
리오가 씩 웃었다.
"좋아. 그럼 과자값은 회비에서 빼자."
"회비 없어."
"……만들자."
위노나가 다시 한숨을 쉬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태산이 입을 열었다.
"방학 어디 가?"
은명이 잠깐 멈췄다.
과자를 씹던 턱이 멈추더니, 천천히 삼켰다.
"……홍씨세가. 본가."
태산도 과자를 내려놨다.
"나도. 전씨세가."
은명의 주머니에서 태블릿이 진동했다.
화면에 짧은 통지 한 줄——
'홍씨세가 본가, 귀성 일정 확인 요망.'
사무적인 문장. 가족의 언어가 아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다 '본가'라는 말이 입에 맞지 않는 표정이었다.
태산이 빼빼로를 하나 집더니, 부러뜨렸다. 아무 이유 없이.
리오가 공기를 깼다.
"나는 브라질 가서 축구나 할 거야~
상파울루에 사촌이 있거든."
위노나가 웃었다.
"나는 북미. 할머니네.
디트로이트. 드론 부품 싼 데 있어서 쇼핑할 거야."
분위기가 다시 풀렸다.
하지만 은명과 태산의 표정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태산이 일어서며 과자 부스러기를 털었다.
"그럼—— 재밌는 방학 보내라."
돌아서며.
"같이 다니는 놈들아."
은명이 피식 웃었다.
"……그래. 같이 다니는 놈들."
위노나가 손을 흔들었다.
리오가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태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하지 마."
"애정 표현이야~"
교실 문이 닫혔다.
웃음 소리가 복도에 잠시 맴돌다 사라졌다.
은명은 기숙사로. 태산은 반대편 복도로.
복도의 석양이 두 사람의 등을 길게 늘여놓았다.
한쪽으로 걸어가는 두 개의 그림자가 점점 멀어졌다.
'본가'로 돌아간다.
아직 낯선 집.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500년 전에 쓰인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