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
10월 넷째 주. 월요일.
랭킹전이 끝나고 사흘이 지났다.
활빈당 아지트.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아니, '구경꾼'이 많았다.
카이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눈썹이 들뜬 표정으로 올라가 있었다.
"은명아, 또 왔어.
1학년 B반 애들이
'활빈당 가입 절차' 묻는다는데."
은명이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면 위로 교내 여론 수치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가입 절차 같은 거 없다고 했잖아."
"근데 자꾸 와."
카이가 양손을 벌리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문틈 너머로 복도에 서성이는 학생 두 명이 보였다.
리오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아까 2학년 선배도 와서 물어봤어.
'활빈당이 뭐 해주는 데냐'고."
한 박자.
리오가 머리카락을 한 가닥 감으며 덧붙였다.
"나 사인 연습 해야 하나?"
은명이 한숨을 쉬었다.
미간이 좁아졌다.
관심이 늘어난다는 건 노출이 커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카를 선배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르준이 태블릿을 정리하며 말했다.
안경을 한 번 올리고 화면을 은명 쪽으로 돌렸다.
"분석 결과입니다.
랭킹전 이후 교내 여론 반응을 봤어요."
은명이 고개를 돌렸다.
"어때?"
"우호적 반응이 약 80%.
하지만 나머지 20%는 경계, 혹은 적의입니다."
카이가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의 들뜬 기색이 살짝 가라앉았다.
"적의? 왜?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아르준이 안경을 올렸다.
태블릿의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잘못한 게 문제가 아닙니다.
눈에 띄는 게 문제예요."
아르준의 손가락이 가리킨 수치는
'부정 반응 증가 추세' 그래프였다.
완만하지만 확실하게 기울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놨다.
카를 선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활빈당이 규율을 넘으면, 내가 직접이야.'
그리고 그 뒤의 존재. 빅토르.
'게임 시작.'
은명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적도 우릴 보고 있다.
아니,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방심하지 마.
이번 성과로 체제파가
더 강하게 압박할 수 있어."
올가가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시선만 은명을 향하고 있었다.
"홍은명 말이 맞아.
이길수록 적은 늘어. 당연한 거야."
은명이 올가를 봤다.
올가의 눈이 평소보다 어두웠다.
랭킹전 4강에서 태산에게 벽이 깨진 뒤로
무언가를 곱씹고 있는 표정이었다.
같은 날 오후. 교실.
위노나가 태블릿을 두드렸다.
평소의 느긋한 리듬이 아니었다.
손끝에 긴장이 묻어 있었다.
"은명 씨."
목소리가 낮았다.
은명이 다가갔다.
"뭐야?"
위노나가 화면을 돌렸다.
교내 익명 게시판.
글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제목: '활빈당의 진짜 목적은 뭘까?'
은명이 읽었다.
읽는 동안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활빈당은 약자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홍은명의 정치적 야심을 위한
도구 아닌가?'
한 줄 더.
'활빈당 데이터 분석.
보호 대상 선별 기준이
홍은명의 인맥 위주라는 의혹.'
은명의 눈이 좁아졌다.
이건 소문이 아니야.
익명 게시판에 떠도는 뒷담화와는 결이 달랐다.
주장에 구조가 있고, 데이터에 근거를 달았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글이다.
위노나가 말했다.
화면을 한 번 더 스크롤하며.
"글의 출처를 추적해봤는데."
한 박자.
"IP가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어요.
교내 게시판은 접속 로그가
7일간 보존되는데,
이 글의 접속 기록만 깔끔하게 비어 있어요.
학생 계정이 아니라 게스트 레벨로
우회 접속한 흔적이에요."
은명이 물었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져 있었다.
"일반 학생이 할 수 있는 수준이야?"
위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운 거예요."
한 박자.
위노나의 손가락이 태블릿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흔적을 지운 건 실력이 아니라 습관이에요.
이걸 자주 하는 사람의 솜씨예요."
아르준이 옆에서 글을 분석하고 있었다.
태블릿 두 개를 나란히 놓고
게시글 데이터와 활빈당 내부 분석 로그를
대조하고 있었다.
"데이터 분석 방식을 봤습니다."
은명이 돌아봤다.
"어때?"
"사실과 다릅니다. 하지만."
안경을 올렸다.
렌즈 너머 눈빛이 날카로웠다.
"교묘하게 진실 30%에 거짓 70%를 섞었어요.
반박하기 까다로운 구성입니다."
한 박자.
은명이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위노나의 태블릿에서 알림이 울렸다.
화면을 켰다.
얼굴이 굳었다.
"은명 씨, 새 글이 올라왔어요.
방금. 지금요."
화면에 새 게시글이 떠 있었다.
'활빈당 훈련 일지 유출?
멤버별 약점 데이터가
돌고 있다는 소문의 진위.'
은명의 눈이 좁아졌다.
이건 단발이 아니다.
연속으로 터뜨리고 있어.
불을 하나 끄면 다음 불이 붙는 구조다.
진실을 섞었다는 건 우리 내부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이야.
활빈당 멤버들 사이로 소문이 번졌다.
카이가 복도에서 들은 말을 전했다.
평소의 장난기가 빠져 있었다.
목소리가 묘하게 조심스러웠다.
"야, 나한테 애들이 물어봐.
'활빈당에 내부자 있는 거 아니냐'고."
리오가 눈을 둥글게 떴다.
"우리 중에? 말도 안 돼!"
하지만 아지트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혹시 우리 중에' 라는 생각이
한 번이라도 스친 사람은 시선을 피했다.
같은 날 밤. 3학년 기숙사.
빅토르의 방.
촛불이 흔들렸다.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검은 말과 흰 말 사이에
방금 움직인 폰 하나가 새 위치에 서 있었다.
빅토르가 와인잔을 기울이며
체스 말을 내려다봤다.
와인의 표면에 촛불이 작은 점으로 흔들렸다.
첫 번째 수는 정보.
진실에 거짓을 섞으면,
사람들은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시킬 필요가 없다.
의심은 전염병처럼 번지니까.
와인잔을 입에 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카를은 직선이야.
규율 위반, 경고, 처벌.
효과적이지만 예측 가능하지.
빅토르가 체스 말을 옮겼다.
검은 비숍이 대각선을 가로질러
백의 진영 깊숙이 들어갔다.
직접 부수는 건 카를의 방식이야.
나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게 만들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 올라갔고, 눈은 웃지 않았다.
"홍은명."
한 박자.
와인잔을 돌렸다.
촛불이 잔의 곡면을 타고
빛의 띠를 그렸다.
"너의 가장 큰 강점은 동료에 대한 신뢰야."
잔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체스 판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 신뢰를 흔들면 되는 거야."
체스 말 하나를 더 옮겼다.
검은 나이트가 백의 퀸 옆에 섰다.
두 번째 수는 기억.
사람들은 자기가 잊고 싶은 과거를 꺼내면,
현재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와인잔을 내려놨다.
입꼬리의 미소가 깊어졌다.
"흥미롭군."
한 박자.
"좋아. 한 수 더 두지."
밤. 활빈당 아지트.
은명이 홀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아지트의 불은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위노나가 보내온 분석 데이터.
익명 게시판 글의 데이터 분석 패턴.
은명이 숫자들을 넘겼다.
하나씩, 천천히.
그래프의 기울기, 분류 코드, 배열 순서.
멈췄다.
이 분석 구조.
활빈당 내부 데이터의 배열 방식과 일치해.
그것도 운영 로그나 일반 기록이 아니다.
전술 메모와 보호 대상 기록의 배열 순서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구조다.
은명의 손이 태블릿 위에서 멈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분석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 내부 데이터에 접근한 사람이어야 해.
누군가 활빈당의 데이터를 외부로 빼냈다.
내부자인가. 해킹인가.
은명의 눈이 좁아졌다.
태블릿의 푸른 빛이 얼굴을 비췄다.
그림자가 눈 아래서 짙어졌다.
태블릿 구석에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시간은 12분 전.
'아지트 공유 폴더 접속 로그: 비인가 접근 시도 1건. 자동 차단됨.'
은명이 그 알림을 길게 눌렀다.
로그 상세가 펼쳐졌다.
접속 시각, 접근 시도 경로, 차단 사유.
경로가 익숙했다.
교내 네트워크 내부에서 시도된 접근.
외부가 아니다. 안이다.
은명이 태블릿을 껐다.
화면이 꺼지자
아지트가 한순간 어둠에 잠겼다.
어느 쪽이든, 이건 시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