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의 대가
방과 후. 학교 뒷산.
은명이 올라갔다.
태블릿을 들고 익명 게시판 글의
데이터 유출 패턴을 분석하며 걸었다.
가을 바람이 교복 깃을 흔들었다.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내부 데이터 구조와 일치하는 분석 패턴.
경우의 수는 둘.
내부자가 정보를 빼냈거나, 외부에서 해킹했거나.
벤치가 보였다.
누군가 앉아 있었다.
빨간 머플러. 갈색 곱슬머리. 호박색 눈동자.
산토스 볼리바르.
먼저 말을 걸었다.
"¡Hola! 홍은명."
미소가 있었지만,
평소의 태양 같은 밝음이 아니었다.
입꼬리에 그늘이 묻어 있었다.
"좀 앉아봐. 할 얘기가 있어."
은명이 멈칫했다.
산토스 선배가 찾아온 게 아니다.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우연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앉았다.
산토스가 물었다.
머플러를 한 번 여미며.
"요즘 활빈당 내부에서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은명의 손이 태블릿 위에서 멈췄다.
"……알고 계셨어요?"
산토스가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호박색 눈동자에 빛이 줄었다.
"알지. 이 냄새, 잊을 수가 없거든."
한 박자.
"나도 겪었으니까."
은명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이에요?"
산토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10월의 하늘. 해가 짧아지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빛이 차가워졌다.
"2학년 때 얘기야.
나도 빅토르에 맞섰어."
한 박자.
"자유파를 모아서 학생회에 반기를 들었지."
목소리가 낮아졌다.
머플러 위로 뿜는 숨이 짧아졌다.
"결과가 뭐였는지 알아?"
은명이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굳어 있었다.
산토스가 말했다.
"빅토르는 나를 직접 치지 않았어."
한 박자.
"대신, 내 동료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지."
은명의 눈이 좁아졌다.
"어떻게요?"
"지금이랑 똑같아."
산토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손가락이 벤치 팔걸이를 쥐었다.
"익명 게시판에 의혹 글을 올려.
진실에 독을 섞어서.
'네 동료가 배신했다'는 증거를 만들어.
그때도 교내 게시판을 통해
자유파 내부 데이터가 유출된 것처럼 꾸며졌어.
IP 세탁까지 똑같았어."
한 박자.
산토스가 벤치에서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처음엔 다들 무시했어.
우리는 서로 믿으니까."
산토스의 주먹이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증거가 쌓이니까."
산토스가 호박색 눈을 은명에게 돌렸다.
거기엔 오래 품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마지막엔, 내가 동료를 의심했어."
침묵.
바람이 불었다.
낙엽 하나가 두 사람 사이 벤치를 가로질러 날았다.
은명이 입을 열었다.
"……선배가?"
"그래.
의심은 전염이거든.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
산토스가 빨간 머플러를 여몄다.
목을 감싸는 동작이 습관처럼 보였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감추려는 것 같았다.
"내가 의심한 순간, 자유파는 끝났어."
한 박자.
"빅토르는 손가락 하나 안 움직였는데도."
은명이 입을 다물었다.
빅토르가 직접 부수지 않았다.
안에서부터 무너지게 했다.
'출발은 내부에서부터가 좋겠지.'
그 말이 이런 뜻이었다.
은명이 물었다.
"선배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산토스가 웃었다.
씁쓸한 미소. 호박색 눈이 멀리를 봤다.
"못 극복했어."
한 박자.
"자유파는 해체됐고.
동료들은 흩어졌어."
바람이 불었다.
빨간 머플러가 흔들렸다.
산토스의 시선이 먼 산등성이에 머물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한테 경고하는 것뿐이야."
한 박자.
"빅토르를 조심해, 홍은명."
산토스의 호박색 눈이 진지해졌다.
장난기도, 여유도 없었다.
이 사람이 이런 눈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경고였다.
"그는 직접 싸우지 않아.
그게 더 무서운 거야."
한 박자.
"네가 가장 믿는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 게, 그 녀석의 진짜 무기야."
은명이 서 있었다.
산토스의 표정을 봤다.
후회. 아직도 짊어지고 있는 무게.
이 사람은 경고가 아니라 고백을 하고 있었다.
같은 날 저녁. 훈련장.
올가가 혼자 수련하고 있었다.
방패를 든 채 허공을 쳤다.
동작이 거칠었다.
평소의 정밀함이 없었다.
수호벽을 전개했다가 해제하고,
다시 전개하기를 반복했다.
랭킹전에서 태산에게 깨진 3타의 감각이
아직 몸에 남아 있는 듯했다.
카이가 지나가다 멈췄다.
넥타이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야, 올가. 너 소문 들었어?"
올가가 멈추지 않았다.
방패를 한 번 더 내리치며 대답했다.
"뭐."
"모르겠다, 이상한 소리가 돌아.
올가 볼코바가 활빈당에 합류한 진짜 이유는."
카이가 머리를 긁었다.
시선이 올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체제파 내 자기 입지를 위한
보험 아니냐는."
올가가 방패를 내렸다.
돌아봤다. 무표정.
"……소문은 소문이야.
신경 쓸 가치가 없어."
카이가 반 걸음 물러섰다.
양손을 들어 보이며.
"아, 응. 그래. 뭐,
나도 안 믿는다, 당연히."
올가가 다시 방패를 들었다.
카이가 떠났다.
올가의 손이 방패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알고 있었어. 이런 소문이 나올 줄.
러시아 가문에서 버림받은 여자가
반체제 조직에 합류하면
이유를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하지만 이 타이밍은 우연이 아니야.
올가가 방패를 내려다봤다.
반투명한 수호의 잔상이 손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으면 끼어준다고 했어.
그 말은 바뀐 적 없다.
하지만 그걸 증명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겠다.
올가가 다시 방패를 들었다.
전보다 더 세게 내리쳤다.
수호벽이 전개되며 공기가 울렸다.
이번에는 균열이 없었다.
기숙사 복도. 밤.
올가가 복도를 걸었다.
혼자. 표정이 어두웠다.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바닥을 비추고,
발소리가 긴 복도에 메아리쳤다.
복도 모퉁이에서 2학년 학생 둘이 나왔다.
"어, 올가 볼코바 아냐?"
올가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있잖아,
러시아 가문에서 버림받은 거 사실이래?"
올가가 발걸음을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2학년이 웃었다.
"활빈당에서도 곧 버림받겠네.
보험이었으니까."
빠른 발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Uy, 밤에 어딜 가?"
마리아 산토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밝은 웃음을 머금고 두 학생 사이에 섰다.
작은 체구지만 복도를 가로막은 존재감은 컸다.
"내가 같이 가줄까?
밤 산책 좋아하거든."
2학년들이 굳었다.
3학년 에이스. 수중 전투 성적 역대 1위.
"아, 아닙니다. 그냥."
"그냥?"
마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동그란 눈 안에 강철 같은 빛이 있었다.
"다음엔 더 재밌는 산책을 해볼까?"
2학년들이 물러났다. 급하게.
슬리퍼 소리가 복도 끝에서 사라졌다.
마리아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슬리퍼를 끌며 돌아갔다.
올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올가가 마리아의 등을 봤다.
빨간 슬리퍼. 느긋한 걸음.
아까까지의 날카로운 기운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마리아의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직접 가르칠 수는 없어.
이 아이들은 스스로 깨달아야 하니까.
하지만 뒤에서 미는 건 막을 수 있다.
빅토르, 예전에도 이렇게 시작했거든.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거.
익명 글로 씨를 뿌리고,
의심이 싹 틔울 때까지 기다리는 거.
올가가 기숙사로 들어갔다.
뒤돌아봤지만 마리아는 이미 없었다.
활빈당 아지트. 밤.
위노나가 들어왔다.
평소의 조용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문을 여는 손이 빨랐다.
은명이 혼자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스탠드 불빛만 켜져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은명 씨."
위노나의 목소리가 낮았다.
은명이 고개를 들었다.
"분석 끝났어?"
위노나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짚고 있었다.
"익명 게시판 글, 분석 끝났어요."
은명이 물었다.
"출처는?"
위노나가 한 박자 멈췄다.
입술이 떨렸다.
"……출처 IP가."
한 박자.
위노나가 화면의 라우팅 로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활빈당 아지트 네트워크에서
경유된 흔적이 있어요.
타임스탬프를 보면
아지트 공유기를 거쳐 나간 건 맞는데,
발신 디바이스 ID가 등록된
멤버 기기와 일치하지 않아요.
프록시 경유일 가능성이 높아요."
은명의 표정이 굳었다.
내부에서 나갔다는 건.
내부자가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누군가 내부 네트워크에 침입한 건가.
산토스 선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네가 가장 믿는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 게
그 녀석의 진짜 무기야.'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놨다.
천천히. 화면이 책상에 닿을 때까지.
이 순간이 바로 빅토르가 원하는 순간이다.
내가 동료를 의심하는 이 순간.
산토스 선배도 이 자리에서 무너졌을 것이다.
은명이 위노나를 봤다.
위노나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혹시 나를 의심하는 건가'라는 빛이
눈동자 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은명이 입을 열었다.
"위노나."
한 박자.
"수고했어."
위노나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은명이 다시 태블릿을 들었다.
화면을 켰다.
의심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의심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거다.
안이 아니라, 밖으로.
화면 구석에 새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방금 수신. 자동 보안 로그.
'아지트 네트워크 접속 기록:
미확인 디바이스 1건. MAC 주소 미등록.
접속 시간: 22:41. 접속 해제: 22:43.
접근 파일: 보호 대상 기록 폴더. 열람 실패(권한 부족).'
은명의 눈이 좁아졌다.
2분.
누군가 2분 동안 아지트 네트워크에 붙었다가 빠졌다.
미등록 기기로.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놓지 않았다.
화면의 푸른 빛이 굳은 얼굴을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