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서지는 깃발
다음 날 아침. 활빈당 아지트.
은명이 긴급 회의를 열었다.
아지트의 의자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평소와 같은 배치인데, 오늘은 달랐다.
사이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서 있었다.
위노나가 밤새 잡아낸 경유 패턴을 화면에 띄운다.
태블릿을 프로젝터에 연결했다.
벽에 데이터가 퍼졌다.
위노나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하지만 손은 떨리지 않았다.
새벽까지 작업하면서 떨림은 이미 소진한 뒤였다.
"경유 패턴에 외부 침입 흔적이 있어요."
화면을 가리키며.
레이저 포인터 대신 손가락을 썼다.
"여기, 이 지점에서 패킷이
교내 게스트 네트워크를 통해 외부로 우회했다가
다시 들어왔어요.
프록시 3단 경유.
1단: 교내 게스트 네트워크.
2단: 외부 VPN 서버.
3단: 학생회 서버 내부 포트."
위노나가 화면의 경유 경로를 짚었다.
빨간 선이 세 개의 노드를 연결하고 있었다.
"누군가 제 서명을 복제한 뒤
이 경로를 통해 데이터를 전송한 거예요.
마치 제가 한 것처럼 보이도록."
멤버들의 시선이 화면에 모였다.
"하지만 최종 증거는 아직 못 찾았어요.
경유 패턴까지는 잡았지만,
발신자 특정까지는 20% 남았어요."
카이가 말했다.
팔짱을 풀며. 앞으로 몸을 숙이며.
"외부 침입?
그건 네가 만든 알리바이 아니야?"
아지트의 공기가 얼었다.
위노나의 입술이 한 번 떨렸다가 멈췄다.
리오가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바닥에서 긁히는 소리가 났다.
"야 카이! 진짜 선 넘는다!"
올가가 차갑게 말했다.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낀 채.
"리오."
시선이 리오를 찔렀다.
바다의 수호벽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감정으로 사실을 덮으면 안 돼."
리오가 올가를 봤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올가의 눈빛 앞에서는 리오도 멈춘다.
올가가 계속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벽에서 등을 뗐다.
"내가 소문에 시달렸을 때,
아무도 사실을 먼저 확인하지 않았어."
멤버들의 시선이 올가에게 모였다.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올가가 빅토르의 소문에 시달리며
아르준과 떨어져 앉았던 그 날들을.
"이번엔 사실을 먼저 확인하자."
침묵.
올가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이 피해자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르준이 말했다.
태블릿을 들며.
화면에 검증 절차가 나열되어 있었다.
"기술적으로 위노나 씨의 주장을 검증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로그 원본 대조, 시그니처 체인 복구,
타임존 교차 검증.
세 단계를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하고,
각 단계마다 데이터 무결성 확인이 필요해요.
최소 3일이요."
카이가 반박했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3일 동안 위노나가 증거를 없앨 수도 있잖아!"
아르준이 카이를 봤다.
안경 너머 눈빛이 단정했다.
"그래서 위노나 씨의 시스템 접근 권한을
검증 기간 동안 제 태블릿으로 미러링합니다.
모든 활동이 실시간으로 기록돼요.
투명하게."
위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이.
"좋아요. 그렇게 해주세요."
카이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위노나가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리오가 의자를 밀었다.
일어났다.
얼굴이 붉었다.
목까지 올라온 분노가 눈에 차 있었다.
"나 이 회의 못 하겠어.
동료를 의심하는 회의가 뭔 의미야."
나갔다.
문이 세게 닫혔다.
아지트에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벽에 걸린 활빈당 깃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올가가 일어섰다.
조용히.
"나도.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거리를 두겠어."
나갔다.
이번엔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그게 오히려 더 무거웠다.
리오는 감정으로 떠났지만,
올가는 판단으로 떠난 것이니까.
아지트에 은명, 위노나, 아르준, 태산, 카이만 남았다.
은명이 빈 의자들을 봤다.
리오가 앉았던 자리. 올가가 기대던 벽.
화이트보드에 어제 쓴 '활빈당 2.0' 계획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먼저 떠났다.
갈라졌다.
이 아지트가 이렇게 넓었나.
일곱 명이 앉으면 좁던 공간이
다섯 명이 앉으니 아주 컸다.
태산이 은명의 옆에서 한마디 했다.
낮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점심. 옥상.
은명이 올라왔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아침 회의의 잔상이 발목을 잡았다.
옥상 문을 밀었다.
태산이 먼저 와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라면도 없었다. 장난도 없었다.
평소의 태산이 아니었다.
바람이 교복 깃을 흔들고 있었다.
넥타이가 바람에 날렸다.
매지 않은 넥타이. 태산답지 않게 축 늘어져 있었다.
은명이 옆에 섰다.
난간에 팔꿈치를 올리며.
"여기 있었어."
태산이 대답했다.
"어."
침묵.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들렸다.
자동차 경적. 공사장 소리.
옥상은 조용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11월 초의 하늘은 회색이었다.
은명이 물었다.
"태산아."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너는 위노나를 어떻게 생각해?"
태산이 답하지 않았다.
5초. 긴 침묵.
태산에게 5초의 침묵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1초 안에 대답하는 사람.
'이기면 되잖아.' '같이 다니는 놈이 있잖아.'
모르겠다는 말은 이 녀석의 사전에 없는 단어였다.
"은명아."
바람이 불었다.
태산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흩어졌다.
"나는 너를 믿어.
그건 변하지 않아."
태산의 목소리가 낮았다.
평소의 거칠고 직선적인 톤이 아니었다.
무게를 실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위노나는."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의 힘줄이 선명해졌다.
랭킹전에서 테무진에게 맞았던 손.
붕대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손이었다.
"솔직히, 모르겠어."
은명의 표정이 굳었다.
태산이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너가 믿는다고 하면
보통은 그냥 믿어."
태산이 말했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근데 이번엔 증거가 있잖아.
99%라고 했잖아.
해시 값. 시그니처. 기기 ID.
세 개가 다 일치하잖아."
은명이 말했다.
"태산아. 네가 모르겠다고 하는 건 처음이야."
태산이 고개를 숙였다.
교정에서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웃고 떠들고. 평범한 점심시간이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잔인해 보였다.
"나도 알아."
괴로운 표정.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이 녀석에게 주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근데 거짓말은 못 해.
모르겠는 걸 안다고 못 해."
태산이 흔들린다.
의심이 무기라면, 이건 핵무기다.
방패마저 흔들리니까.
빅토르가 노린 게 바로 이거다.
증거를 만들어 신뢰를 깨는 것.
물리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내부에서 부수는 방법.
하지만 태산이 말했다.
"그래도 네 옆에 있는 건
변하지 않아."
은명을 봤다.
시선이 단단했다.
흔들리지만 떠나지 않는 눈.
"모르겠어도 여기 있을게."
은명이 태산을 봤다.
이 녀석의 신뢰는 논리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옆에 있겠다고 하는 것.
그게 이 녀석이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신뢰다.
"……고마워. 같이 다니는 놈."
태산이 대답했다.
웃지 않았다.
"어. 같이 다니는 놈."
이번엔 웃음이 없었다.
같은 말. 다른 무게.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구름 사이로 빛이 잠깐 비쳤다가 다시 사라졌다.
밤. 불 꺼진 아지트에 은명만 남아 있었다.
열린 태블릿엔 '활빈당 2.0' 계획서가 떠 있었다.
화면의 푸른 빛이 빈 의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활빈당 2.0.
제갈린의 28%를 줄이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활빈당 자체가 28%다.
멤버의 28%가 떠났다.
신뢰의 28%가 무너졌다.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조직 자체가 위험하다.
화이트보드의 글씨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정보 체계 강화. 데이터 기반 우선순위. 즉응팀.'
세 가지 계획.
계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할 사람이 갈라졌다.
은명이 태블릿을 닫으려 했다.
문이 열렸다.
위노나가 서 있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선명했다.
무너진 사람의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잡은 사람의 눈이었다.
태블릿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은명 씨."
태블릿을 들어 보이며.
"역추적 80%까지 했어요."
화면에 경유 서버 분석 그래프가 떠 있었다.
진행도 바가 80%를 가리키고 있었다.
프록시 체인의 세 노드 중 두 개가 녹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 하나만 아직 빨간색이었다.
"내일이면 마지막 노드를 역추적해서
발신자 특정이 가능해요."
은명이 물었다.
"위노나. 밤새 한 거야?"
"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하니까."
위노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도,
데이터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은명이 일어섰다.
태블릿을 내려놓고.
위노나 앞에 섰다.
"미안해, 위노나."
위노나가 멈췄다.
태블릿을 안은 손이 조여졌다.
"1초."
은명의 목소리가 낮았다.
"내가 멈춘 그 1초."
위노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터지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알아요."
눈물을 닦지 않았다.
"1초."
숨을 들이쉬고.
목소리를 다잡고.
"하지만 은명 씨.
그 1초 다음에 '믿는다'고 했잖아요."
미소.
울면서 짓는 미소.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미소.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이 사람을 지키지 못하면
활빈당의 의미가 없다.
72%도, 2.0도, 계획도.
이 사람 한 명을 지키지 못하면
전부 의미 없다.
은명이 의자를 당겼다.
"같이 하자. 역추적."
위노나가 눈을 닦았다.
소매로.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태블릿 앞에 앉았다.
불 꺼진 아지트에서
태블릿 두 개의 푸른 빛만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벽에 걸린 활빈당 깃발이 어둠 속에서
아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새벽.
아지트 문에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문틈 사이에 정확하게 꽂혀 있었다.
누군가 조용히 다녀간 것이다.
은명이 열어봤다.
접힌 종이. 볼펜으로 쓴 글씨.
단정하지만 약간 경사진 필체.
글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쓴 사람이 망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활빈당 대표에게.
진짜 적은 안에 없습니다.
밖을 보세요.
내일 오후, 뒷산 벤치.'
서명 없음.
은명이 쪽지를 봤다.
이 필체. 학생의 것이다.
성인의 글씨도 아니고, 급하게 쓴 것도 아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접촉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지.
위노나가 쪽지의 종이를 봤다.
손으로 만져보며.
종이의 두께를 느끼고,
표면의 질감을 확인했다.
"이 종이, B반 전용 노트예요.
재질이 달라요. 코팅된 재생지.
학교에서 B반에만 지급하는 거예요.
일반 노트보다 0.2mm 두꺼워요."
은명의 눈이 좁아졌다.
"2학년 B반."
은명이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위노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일 오후. 뒷산 벤치.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