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깃발탈환전
야외 훈련장.
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넓은 필드 위로
학생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A반과 B반, 합해서 60여 명.
교복 위에 보호대만 걸친 차림.
"함정이라니, 진짜야?"
"운소하 교관이면 농담 같은 게 진짜인 거지."
필드는 축구장 네 개를 합친 크기.
군데군데 콘크리트 구조물과 바리케이드가
불규칙하게 세워져 있고,
나무 사이로 수풀이 우거진 구간도 보였다.
전날 밤 내린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아
바닥 흙은 군데군데 미끄러웠다.
육안으로는 평범한 흙바닥인데,
열화상 렌즈를 켜면
일부 구역이 미세하게 온도가 높았다.
함정 회로가 묻힌 자리라는 뜻.
눈썰미 좋은 학생들은
시작 전부터 발끝 각도를 바꾸고 있었다.
한쪽 끝에 깃발. 반대쪽 끝에도 깃발.
붉은색과 푸른색.
두 개의 깃발 사이, 약 400미터.
운소하가 필드 중앙에 서 있었다.
느릿하게 하품을 하면서.
"잘 잤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잘 못 잤겠지. 나도 못 잤어.
함정 까는 데 세 시간 걸렸거든."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누군가 보호대 끈을 한 번 더 조이는 소리가 났다.
남궁현이 운소하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표정 없이.
"자, 파트너 발표한다."
운소하가 손가락을 튕기자
홀로그램 명단이 공중에 떠올랐다.
2인 1조. A반 한 명, B반 한 명.
이름이 줄줄이 지나갔다.
제갈 린 — 킹야치나.
앙코르 제국의 후손이자 B반 상위권.
드론 전술가에게 침착한 근접전 파이터라면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아르준 싱 — 마르쿠스.
위노나 — 항진.
홍은명의 이름이 지나갈 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3일 전에는 웅성거렸던 이름. 지금은 조용했다.
말을 안 하는 애. 뭘 하는지 모르는 애.
장손이라는데, 그래서?
그리고.
홍은명 — 전태산.
은명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옆에서 환한 목소리가 터졌다.
"오! 야, 꼬맹이, 또 만났네!"
태산이 어깨를 치러 다가오는 걸
은명이 반 보 옆으로 비켰다.
태산의 손바닥이 허공을 스쳤다.
"……불운이겠지."
"하하, 운명이라고 해."
운소하가 느릿하게 걸어왔다.
"서로 마음에 안 들어?"
은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산은 씩 웃었다.
"더 좋지."
운소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전쟁터에서 파트너를 고르는 사치는 없거든."
태산은 그 말을 흘려듣는 척했지만
눈은 은명의 태블릿 화면을 힐끔거렸다.
선이 촘촘했다.
화살표와 숫자가 빽빽했고,
자기 발이 들어갈 칸은
항상 제일 위험한 라인에 그어져 있었다.
미끼라는 단어를 농담처럼 넘겼지만 저건 농담이 아니었다.
운소하가 필드 중앙으로 돌아가
홀로그램 지도를 띄웠다.
"규칙은 간단해."
필드 전체의 홀로그램 지도가 공중에 펼쳐졌다.
"2인 1조. 상대 팀의 깃발을 탈환해 오면 승리."
여러 개의 점이 지도 위에서 깜빡였다.
"필드 곳곳에 내가 함정을 깔아 놨어.
감지하든 밟든 너희 자유."
"살상은 금지. 그 외에는 뭐든 돼.
도술, 체술, 해킹, 장비.
가지고 있으면 다 써."
"시간 제한 30분. 넘기면 양 팀 다 탈락."
운소하가 하품을 했다.
"질문?"
제갈 린의 목소리가 정돈된 톤으로 물었다.
드론 두 대가 그녀의 양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파트너 교체는 가능합니까?"
"불가."
"알겠습니다."
제갈 린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킹야치나를 한 번 봤다. 키 182. 침착한 눈.
충분하다는 판단인 듯.
태산이 팔짱을 끼고 은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작전 같은 거 있어?"
"……."
은명이 태블릿을 꺼냈다.
홀로그램 지도를 화면에 옮기더니,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로 세 개를 그렸다.
주 경로. 우회 경로. 이탈 경로.
"간단해."
은명이 말했다.
"네가 앞에서 달린다. 맞으면서."
"……맞으면서?"
"네가 주목을 끌면 적의 시선이 너한테 간다.
그 사이에 내가 함정을 감지해서 안전한 길을 만든다."
태산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내가 미끼라는 거야?"
"어제 쁘아카오한테 맞고도 멀쩡했잖아.
너 정도면 좀 맞아도 돼."
"좀 맞아도 된다는 게 작전이야?"
"아프면 더 빨리 달려. 주의력이 높아지니까."
태산이 한 박자 멈추더니 터졌다.
"하하! 미친 작전인데 왜 좀 맞는 것 같지?"
"맞으니까 하는 거야."
은명이 태블릿을 접었다.
"경로 외우지 마. 어차피 안 지킬 거잖아."
"……뭐?"
"네 성격에 경로대로 달릴 리가 없어.
그건 내가 실시간으로 조정한다."
은명이 태블릿 화면을 태산 쪽으로 잠깐 기울였다.
화면 우측 상단에
'충돌 확률', '함정 접촉률', '이탈 보정' 항목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태산은 숫자를 읽지 못했다.
그래도 자기 이름 옆의 빨간 경고 아이콘은 알아봤다.
위험하다는 뜻이라는 건 설명 없이도 충분했다.
태산의 눈이 커졌다.
이틀 전에 만난 놈이 자기 성격을 예측하고 있다.
씩 웃었다.
"야, 너 의외로 재밌네."
"재미로 하는 거 아니야."
통신기 테스트 신호가 두 사람 귀에 동시에 울렸다.
짧은 삑 소리 한 번.
은명은 노이즈를 확인했고, 태산은 소리 크기만 확인했다.
준비 방식부터가 달랐다.
"시작."
남궁현의 목소리.
사이렌이 울렸다.
태산이 달렸다.
작전대로. 아니, 작전 비슷하게.
은명이 말한 주 경로를 3초 만에 이탈했다.
"우회하는 거잖아? 직선이 더 빠르지 않아?"
은명의 귀에 꽂힌 통신기에서 태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명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알았어. 그 직선으로 가."
"오, 허락해 주는 거야?"
"허락이 아니라 포기야."
은명은 혀끝으로 이를 눌렀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빠르다.
경로를 외우게 하는 건 의미가 없고,
저 속도를 따라가며 즉석에서
함정 좌표를 덮어쓰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작전이 아니라 추적.
파트너라기보다 폭주하는 탄환을 유도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태산이 웃으면서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를 뛰었다.
첫 번째 조우.
바리케이드 뒤에서 상대 팀 하나가 튀어나왔다.
B반 학생. 키 큰 금발.
주먹이 날아왔다.
태산이 팔로 막았다.
쿵.
받아치면서 동시에 어깨로 밀어붙였다.
상대가 뒤로 밀렸다.
"왼쪽에 하나 더."
은명의 목소리가 통신기에서 울렸다.
태산이 몸을 꺾었다.
왼쪽에서 날아온 발차기를 정강이로 받았다.
A반 학생이 부적을 하나 날렸다.
은명의 손이 움직였다.
태블릿 위에서 부적형 코드가 펼쳐지자,
날아오던 부적이 방향을 틀었다.
부적이 던진 사람의 발밑에서 터졌다.
"뭐?!"
은명의 전자부적 간섭.
상대 부적의 좌표를 실시간으로 덮어쓴 것.
공진(共振) 원리. 같은 주파수를 찾아 신호를 뒤집는다.
태산이 그 틈에 두 사람을 지나쳤다.
"야, 지금 뭐 한 거야?"
"설명할 시간 없어. 달려."
"하하! 좋아!!"
태산이 달렸다.
등 뒤에서 욕설이 터졌고,
어딘가에서 파열음이 두 번 연달아 울렸다.
여러 팀의 통신 채널이 겹치며 잡음이 귀를 긁었다.
필드는 이미 체육 수업이 아니라
작은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두 번째 조우.
구조물 밀집 구역.
바리케이드 사이로 적 팀 두 팀이
겹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네 명.
태산이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대로 바리케이드를 정강이로 찼다.
쾅!
콘크리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적 팀이 흩어지면서 태산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주먹, 발차기, 부적.
태산이 팔로 막고 어깨로 받고
정강이로 쳐내면서 전진했다.
보호대 한쪽이 금이 갔지만 속도는 줄지 않았다.
"오른쪽 3보 뒤에 함정."
은명의 목소리. 짧고 건조했다.
태산이 오른쪽을 피했다.
방금 밟으려던 바닥에서 푸른 빛이 터졌다.
진법 함정. 밟으면 5초간 발이 묶인다.
태산의 눈이 커졌다.
"……야, 이거 어떻게 알아?"
"함정 코드에 주파수가 있어.
패턴만 읽으면 돼."
"아 그래? 대단하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산의 발놀림은 미세하게 달라졌다.
은명이 경고한 박자에 맞춰
반 박자 먼저 무게중심을 옮겼다.
이해는 못해도 신뢰는 시작된 셈이었다.
세 번째 함정을 은명의 경고로 피했다.
"저 팀, 함정도 피하네."
"어떻게? 저 태산이란 놈 눈치 있는 타입 아닌데."
네 번째 함정은 은명이 코드를 역전시켜
적 팀의 발밑으로 돌려보냈다.
"어?! 발이!!"
적 팀 한 명이 자기 함정에 묶였다.
태산이 그 옆을 씩 웃으며 지나갔다.
"미안~."
태산이 지나간 자리 뒤로 흙먼지가 늦게 가라앉았다.
상대 팀은 분명 수적 우위였는데
한 템포씩 계속 늦었다.
정면은 태산이 부수고, 빈틈은 은명이 만든다.
둘 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데
합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맞아 떨어졌다.
필드 반대편에서는 소리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제갈 린과 킹야치나의 팀은 소리 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드론 두 대가 전방 100미터를 스캔하며
적 위치와 함정을 실시간으로 분석했다.
제갈 린이 나직이 지시했다.
"12시 방향, 적 1. 함정 2.
우회. 25도 좌측."
킹야치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 없이 이동했다.
정석적이었다. 깔끔하고, 효율적이고, 무음.
제갈 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 페이스라면 15분 내에 깃발에 도달한다.
드론 화면 한쪽에
홍은명-전태산 팀의 이동 궤적이 겹쳐 떴다.
직선, 충돌, 급회피, 재가속.
정석과는 거리가 멀지만
효율만 놓고 보면 결코 느리지 않았다.
제갈 린은 눈동자만 옆으로 움직여
그 궤적을 1초 더 확인했다.
입꼬리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자기 경로로 시선을 돌렸다.
킹야치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좌측 채널 잡음 증가.
은명 팀 간섭입니까?"
제갈 린이 짧게 답했다.
"가능성 높아. 직접 교전은 미뤄.
우린 깃발 우선."
둘은 더 말하지 않았다.
말을 줄이는 대신 발걸음과 시선으로만 신호를 주고받았다.
정석 팀의 강점은 실수가 아니라 낭비를 줄이는 데 있었다.
태산은 좋은 페이스로 달리고 있었다.
깃발까지 200미터.
은명의 경고로 함정 다섯 개를 피했고,
적 팀 셋을 지나쳤다.
은명의 후방 지원과 태산의 돌파가 묘하게 맞물리고 있었다.
태산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이 꼬맹이, 쓸 만하다.
은명도 느꼈다.
전태산은 지시를 어기는데,
이상하게 핵심은 놓치지 않았다.
머리로 계산한 전술이 아니라 몸으로 읽는 전투 감각.
짜증은 났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멈춰."
은명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소의 건조한 톤이 아니라 날이 선 경고.
"앞에"
태산은 달리고 있었다.
멈추라는 말이 귀에 닿기 전에
이미 두 발짝을 더 나갔다.
바닥이 빛났다.
다른 함정들과 달랐다.
빛이 붉었고, 범위가 넓었다. 반경 5미터.
태산의 두 발이 빛의 원 안에 들어갔다.
쿵.
보이지 않는 벽이 태산의 사방을 감쌌다.
결계.
운소하가 직접 깐 최상급 함정.
지금까지의 함정과는 급이 달랐다.
태산이 벽을 주먹으로 쳤다.
쿵. 쿵. 쿵.
금이 가지 않았다.
태산이 주먹을 폈다 다시 쥐었다.
이것만은 힘으로 안 된다는 걸 세 번째 쿵에서 인정했다.
이마에 땀이 흘렀다.
결계 안에서 공기가 미세하게 무거워지고 있었다.
"……야."
태산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렸다.
씩 웃는 소리였지만, 약간 당혹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걸렸다."
은명은 달리던 발을 멈췄다.
태블릿 화면에 태산의 위치가 떴다.
붉은 점. 결계 안에 갇힌 표시.
그리고 그 너머.
200미터 전방.
상대 팀의 깃발이 무방비 상태로 서 있었다.
은명의 눈이 깃발을 향했다.
"야, 좀 도와줄래?"
태산의 목소리.
"결계가 좀 단단한데, 주먹이 안 통해."
은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깃발까지 200미터. 장애물 없음.
지금 달리면 2분 내에 탈환 가능.
태산의 결계 해제에 전자부적을 쓰면
시간이 소모된다. 해제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깃발을 가져가면 이긴다.
승리 조건은 명확했다.
팀 승리, 반 승리, 평가 점수.
종이에 적힌 규칙만 보면 정답은 하나였다.
지금 달려서 깃발을 잡는다. 그게 가장 합리적이다.
그런데 통신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규칙표 바깥의 소리였다.
쿵, 쿵.
결계를 두드리는 둔탁한 진동.
안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의 호흡.
그리고 애써 가볍게 말하려는 웃음기.
은명은 무의식적으로
입학식 강당에서 스친 장면을 떠올렸다.
시비를 걸고 웃던 얼굴,
한 번도 진지하지 않은 것 같던 태도.
그런데 방금 통신기 너머의 숨은 웃는 소리와 전혀 달랐다.
버티고 있다는 소리였다.
규칙대로라면 버리고 가면 된다.
사람은 남기고, 점수는 챙긴다.
그게 이 학교가 가르치는 효율일지도 모른다.
은명은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두 번 반복했다.
반복할수록 더 메마른 문장처럼 들렸다.
통신기에서 태산이 결계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야, 듣고 있어?"
은명의 시선이 깃발과 태산의 위치 사이를 오갔다.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었다.
전자 숫자가 초 단위로 깎였다.
한 칸 줄 때마다 선택지도 같이 줄어든다.
은명의 손가락은 태블릿 위에서 멈춘 채였고,
통신기 채널에서는 태산의 거친 숨이 짧게 섞여 들어왔다.
결정은 늦을수록 비싸진다.
은명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태블릿 좌측 하단에는 결계 강도 추정치가 떠 있었다.
해제 가능성 41%.
예상 소요 시간 최소 96초. 오차 범위 ±18초.
숫자만 보면 애매했다.
할 수는 있는데, 그 사이에 기회를 잃을 확률도 높다.
은명은 화면을 한 번 확대했다.
결계 외곽에 깔린 회로 패턴이
운소하식 변칙 배열로 꼬여 있었다.
한 번 삐끗하면 태산이 아니라 자기 쪽이 묶일 수도 있다.
손끝이 식었다.
그 감각은 두려움과 비슷했지만
은명은 그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선택지의 순서를 다시 정렬했다.
승리, 생존, 이후.
어느 걸 먼저 둘지 정하는 문제였다.
타이머 숫자는 그런 고민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한 박자만 늦어도 둘 다 놓친다.
은명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결정 직전의 침묵이 가장 시끄러웠다.
화면 숫자가 또 한 칸 내려갔다.
남은 시간은 누구 편도 아니었다.
은명은 눈을 감지 않았다.
숨만 고르며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