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이래요
기숙사 복도. 4월 셋째 주. 저녁 7시.
전태산이 기숙사 1층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저녁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쁘아카오와 가볍게 권술을 겨뤘는데 오른팔이 아직 얼얼하다.
……저 녀석 로우킥이 점점 세지는 거 맞지?
복도 끝에서 소리가 들렸다.
웅웅거리는 목소리. 끌리는 소리. 뭔가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전태산의 발이 멈췄다.
공용 공간 앞이었다.
2학년 학생 세 명이 장석현의 짐을 복도로 꺼내고 있었다.
여행 가방. 이불 보따리. 교복이 들어 있는 종이 가방.
전부 공용 공간 바닥에 늘어놓은 채였다.
장석현은 그 앞에 서 있었다. 저항하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장석현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놀람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확인.
전태산이 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봤다.
"뭐야, 이게?"
2학년 중 키가 가장 큰 놈이 돌아봤다.
"기숙사 재배정이야.
이 방은 원래 명문가 학생 배정인데 편입생이 들어가 있어서."
"재배정? 누가 정했는데?"
"학생회 배정표에 따른 거야."
전태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배정표?
아까 훈련 시설 배정표도 학생회가 정했다고 했잖아.
배정, 배정, 배정. 전부 학생회가 정한다.
"장석현."
전태산이 장석현을 봤다.
"너 이 방에 배정받은 거 맞아?"
"네. 입학 때 배정받았습니다."
"그럼 네 방이잖아."
장석현이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전태산 학생. 원래 이래요."
원래 이래요.
전태산의 이가 물렸다.
"아니, 원래 이러면 안 되잖아."
2학년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제일 큰 놈이 앞으로 나왔다.
"1학년이 끼어들 일이 아닌데?"
"편입생 짐을 빼는 게 2학년이 할 일이야?"
"교칙 7조.
학생 간 자율 경쟁의 결과에 학교는 개입 안 해. 자율이야, 자율."
전태산이 한 발 앞으로 갔다.
그리고 장석현의 여행 가방을 들었다.
"이거 방에 갖다 놓을게."
"야."
2학년 셋이 앞을 막았다.
좁은 복도. 정면에 세 명. 뒤에 장석현.
전태산이 가방을 들고 섰다.
오른팔이 아직 쁘아카오한테 맞은 자리가 아프다.
근데 그건 상관없지.
"비켜."
"네가 뭔."
전태산의 눈이 번쩍였다.
피부 위로 은빛 광택이 찰나 스쳤다.
2학년 세 명의 다리가 본능적으로 반 보 물러났다.
그 순간.
"무슨 일이지."
복도 끝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저음. 짧은 문장. 감정이 없는 음색.
전태산이 고개를 돌렸다.
키 190cm. 구릿빛 피부에 가죽 전투 조끼.
왼팔에 선도부 완장.
테무진 보르지긴.
복도의 공기가 달라졌다.
2학년들이 자세를 고쳤다.
장석현이 고개를 숙였다.
전태산만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테무진이 상황을 봤다.
복도에 널린 짐. 장석현. 가방을 든 전태산.
뒤로 물러난 2학년.
시선이 한 바퀴 돌더니 전태산에게 멈췄다.
테무진이 2학년에게 말했다.
"가라."
2학년 세 명이 말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전태산에게.
"따라와."
선도부 건물 사무실은 1층 끝에 있었다.
작은 사무실. 책상 하나, 의자 둘.
벽에 선도부 규정이 붙어 있었다.
테무진이 의자에 앉지 않았다.
서서 벌점 카드를 꺼냈다. 전태산도 서 있었다.
"내가 뭘 했는데요?"
"다른 반 학생의 기숙사 배정에 무단 개입.
물리적 위협. 벌점 3점."
전태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2학년들이 먼저 편입생 짐을 뺐는데요?"
"교칙 7조.
학생 간 자율 경쟁의 결과에 학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건 경쟁이 아니라 괴롭힘이잖아요."
테무진이 처음으로 전태산을 정면으로 봤다.
그리고 이 사람이 처음으로 길게 말했다.
"경쟁과 괴롭힘의 기준을 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규정이다.
그리고 규정은 명확하다."
"선도부 처벌 기준에
'먼저 개입한 쪽을 우선 조치한다'라고 벽에 적혀 있잖아요."
전태산이 벽의 규정을 턱으로 가리켰다.
"신고 접수 없이 현장 적발이면
개입한 쪽이 먼저 처벌 대상이야. 그게 규정이다."
전태산이 주먹을 쥐었다.
"그럼 규정이 틀리면요?"
테무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장갑 낀 왼손이 허벅지 옆에서 한 번 쥐어졌다.
침묵.
그리고.
"규정은 틀리지 않는다."
벌점 카드에 '3'이 찍혔다.
전태산이 카드를 받았다.
뒤돌아서 문을 열었다. 한 발 나가다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명문가 학생이 같은 짓을 하면,
그것도 벌점 3점이에요?"
테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전태산이 복도를 걸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벽을 한 대 치고 싶었는데 벽이 아까워서 참았다.
"형제. 무슨 일 있었어?"
쁘아카오가 복도에 서 있었다.
무에타이 연습용 반바지 차림.
아마 씻으러 가다 마주친 거다.
"……규정이 좀 이상해."
"규정이?"
쁘아카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태국에서도 그래. 강한 사람이 규칙을 만들잖아."
전태산이 쁘아카오를 봤다.
쁘아카오는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말한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것처럼.
그래서 더 무거웠다.
"……그니까 문제잖아."
"문제? 원래 그런 거 아냐?"
전태산이 입을 다물었다.
원래 그래요.
장석현도 그랬고, 쁘아카오도 그랬다.
원래 이래요.
그 말이 진짜 문제인 건
그게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모두가 받아들였다는 거잖아.
"쁘아카오."
"응?"
"원래 그런 건 없어."
쁘아카오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씩 웃었다.
"형제, 멋진데?"
"멋진 게 아니야. 벌점 3점이야."
"ㅋㅋ 벌점이 뭐, 운동장 뛰면 되잖아!"
전태산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네 바퀴는 괜찮은데
여덟 바퀴부터는 좀 짜증난단 말이야.
기숙사. 밤 10시. 은명의 방.
태블릿 화면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다.
통신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벌점 3점 먹었어.
편입생 친구 도와줬는데 내가 벌점이야.
ㅋㅋ 뭐야 이게?'
전태산.
은명이 메시지를 읽었다.
읽고 나서 태블릿을 열었다.
'보이지 않는 벽' 폴더.
사례 5개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은명이 새 사례를 추가했다.
'사례 6.
기숙사 재배정 사건.
편입생 장석현의 방을 2학년 명문가 학생이 비공식 점유 시도.
전태산 1학년 개입 → 벌점 3점.
2학년 가해 학생 → 벌점 0점.
근거: 교칙 7조.'
은명의 손이 멈췄다.
'교칙 7조 적용 분석.
보호받은 쪽: 기존 질서(명문가 측).
처벌받은 쪽: 개입한 쪽(전태산).
교칙 7조의 기능:
중립적 규칙이 아니다.
기득권을 가진 쪽에 유리하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은명이 한 줄을 더 쳤다.
'규칙이 같다는 것과 공정하다는 것은 다르다.'
그때 학교 공지 알림이 떴다.
'금일 추가 적발 안내.
교내 비인가 자습 모임 1건 해산 조치.
관련 학생 벌점 부과 예정.
— 선도부 집행, 학생회 운영위 확인.'
은명이 알림을 닫고 사례 파일 목록을 내려다봤다.
팀장 편향. 선도부 편향. 자원 배분 편향.
모임 금지 편향. 스터디 적발 편향.
기숙사 재배정 편향.
7건째가 될 공지가 방금 떴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
자동으로 사례 7을 만들고 있었다.
태블릿을 내려놓으려다 멈췄다.
아르준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전태산은 다른 방식으로 말했지만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세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그래서?
은명이 통신기를 들었다. 전태산에게 답장을 쳤다.
'데이터가 하나 추가됐어.
네 벌점 사건.
2학년은 0점, 너는 3점. 교칙 7조 적용.'
전태산의 답장.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같은 짓인데 왜 한쪽만 벌점이야?'
은명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쳤다.
'같은 짓이 아니거든.
네가 한 건 개입이고, 쟤들이 한 건 경쟁이야. 교칙 7조 기준으로는.'
전태산.
'그게 말이 돼?'
은명.
'말이 되니까 규정인 거야.'
전태산.
'그럼 규정이 틀린 건데.'
은명이 통신기를 봤다.
이 녀석, 테무진한테도 같은 말 했겠네.
답장을 치지 않았다.
통신기를 내려놓았다.
다음 날 점심시간. 식당.
전태산이 식판을 들고 은명 맞은편에 앉았다.
은명은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자리를 옮기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야."
전태산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그러면 또 막을 거야."
은명이 젓가락을 멈췄다.
"벌점 또 먹는다."
"여덟 바퀴면 좀 힘들지.
열두 바퀴는 진짜 싫고."
은명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전태산은 밥을 씹느라 보지 못했다.
"근데 너."
전태산이 말했다.
"그 데이터 같은 거. 정리하고 있는 거 맞지?"
은명의 손이 미세하게 멈췄다.
"……왜?"
"아까 답장에 '데이터가 하나 추가됐어'라고 했잖아.
그럼 다른 것도 있다는 거잖아."
은명이 전태산을 봤다.
이 녀석, 생각보다 듣는구나.
"있어."
"많이?"
"7개."
"7개나?"
전태산이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그거 나중에 쓸모 있을 거야."
"……뭐에?"
전태산이 씩 웃었다.
"아직 몰라. 근데 있으면 좋겠지?"
은명이 전태산을 봤다.
이 사람은 답을 모르면서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답을 알아야 움직이는데.
……어떤 쪽이 맞는 거지?
"밥이나 먹어."
"아, 응."
전태산이 다시 밥을 퍼넣었다.
은명은 태블릿을 닫지 않은 채 식판에 손을 뻗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온 은명이 태블릿을 열었다.
'보이지 않는 벽' 폴더 옆에 새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이름.
'대안.'
폴더를 열었다. 비어 있다.
은명이 화면을 봤다.
벽은 그렸다. 7개의 사례. 전부 같은 방향.
교칙 7조는 중립적 규칙이 아니다.
이건 확실해.
그래서?
넘을 건가. 부술 건가. 우회할 건가.
은명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떠 있었다.
그리고 움직였다.
새 파일 하나를 만들었다.
'대안_초안1.'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파일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는 건
이어갈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태블릿을 닫았다.
전태산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다음에 또 그러면 또 막을 거야.'
빈 폴더. 빈 파일.
하지만 이름이 있고, 번호가 있다.
질문이 시작됐다는 뜻이다.
대안.
아직은 비어 있다.
하지만 비어 있는 채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은명은 태블릿 화면을 끄지 않았다.
거점 경로선 위에 손가락을 올려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끌었다.
외곽 2번 진입 예상 시간.
중앙 전환 예상 시간.
팔진도 예상 전개 속도.
숫자는 차갑게 정리되어 있었고,
차가운 숫자일수록 오차는 더 선명했다.
45분.
아까까지만 해도 선택지였던 동선이
지금은 사실상 강제 루트가 됐다.
한 번 삐끗하면 끝.
외곽 점령에서 3분을 잃으면 중앙에서 5분을 더 잃고,
그 5분은 마지막 판단 한 번을 지운다.
은명은 숨을 들이켰다. 느리게.
필드 반대편 A반 출발선에는
제갈린의 드론이 이미 고도를 맞추고 있었다.
열두 대의 점광원이 한 줄, 두 줄, 세 줄로
정확히 간격을 맞춰 떠 있었다.
저건 전술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한 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사람의 실수 하나쯤은 구조가 흡수해 버리는 형태.
반대로 이쪽은.
쁘아카오는 전방 돌파형.
전태산은 가속형 충돌 전개.
리오는 교란형 기동.
장석현은 불안정한 지원.
그리고 자신.
은명은 마음속으로 다섯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팀이라는 단어가 아직 입에 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싶은 마음도 아까보다 조금 옅어져 있었다.
전태산이 다시 돌아봤다.
"야, 은명."
"뭐."
"시간 줄어도 똑같이 가?"
은명은 대답 대신 태블릿 화면을 잠깐 들어 보였다.
외곽 2번 경로선이 빨간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조금 다르게 간다."
전태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바뀌는 게 더 재밌지."
은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재밌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거야."
"살아남는 게 재밌는 거지."
은명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박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사람은 이런 문장으로 움직이는 타입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어서였다.
필드 스피커에서 출발 30초 전 안내음이 울렸다.
쁘아카오가 손목을 털었고, 리오는 발목을 한 번 더 풀었다.
장석현은 손끝을 모아 짧은 호흡을 맞췄다.
전태산은 어깨를 돌렸다.
은명은 태블릿 화면을 잠그고 주머니에 넣었다.
데이터는 이제 여기까지.
그 다음은 현장이다.
0과 1로 정리된 계획 위에 사람의 선택이 얹히는 순간,
승패는 숫자보다 표정에서 먼저 갈린다.
은명은 고개를 들었다.
안개 너머 제갈린이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짧은 시선이 다시 맞물렸다.
은명은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입안으로만 말했다.
……이번엔, 네 계산대로 안 갈 거야.
운동장 가장자리의 깃발 줄이 약한 바람에 한 번 뒤틀렸다.
빨강, 파랑, 흰색 천이 안개에 젖은 채 서로 얽혔다 풀렸다.
누군가는 그걸 그냥 배경으로 봤고 누군가는 징조처럼 봤다.
장석현이 낮게 물었다.
"은명 학생, 외곽 2번에서 내가 3초 못 버티면요?"
은명은 짧게 답했다.
"2초만 버텨도 돼. 한 박자만 더 벌어."
전태산이 웃었다.
"봐, 1초 할인해 줬잖아.
넌 원래 3초 버틴다고 했고."
장석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긴장이 아주 조금 풀렸다.
리오가 손목을 풀며 중얼거렸다.
"팔진도든 뭐든, 움직이는 건 결국 사람이잖아."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틈이 생겨."
스피커에서 카운트다운이 내려갔다.
10.
9.
은명은 마지막으로 머릿속에서 경로를 접었다.
종이 위 전술은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호흡, 타이밍, 선택.
그리고. 실패해도 다음 수를 남기는 방식.
그게 오늘 은명이 정한 유일한 원칙이었다.
카운트다운 숫자가 줄어들수록 필드 소음은 오히려 줄었다.
떠들던 팀도 입을 다물었다.
각자 자기 방식으로 처음 한 걸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명은 손끝의 떨림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숨을 고르며. 정면으로.
✦ 작가의 말
3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