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왕의 규정
강당이 조용해진 건
이자벨라가 단상에 섰을 때부터다.
전교 조회. 아침 8시 10분.
강당에 1, 2학년 전원이 줄을 맞추고 서 있었다.
은명은 맨 뒷줄이었다.
소란도 없고, 웅성거림도 없고, 숨소리조차 정돈된 공기.
누군가 발을 옮기는 소리도 금방 사라졌다.
강당 뒤쪽 출입문이 닫히는 순간
모든 시선이 단상으로 고정됐다.
이 학교에서 침묵은 예의가 아니라 규율에 가까웠다.
이자벨라 폰 합스부르크가 단상 중앙에 멈췄을 때부터 그렇게 됐다.
키 172cm. 플래티넘 금발을 시뇽으로 올리고, 보랏빛 눈동자.
오른손 약지의 합스부르크 인장 반지가
강당 조명 아래서 한 번 번쩍였다.
율도고 학생회장. 2학년 A반.
교복에 주름 하나 없었다.
"공지 사항이 있습니다."
마이크 없이. 그런데 강당 끝까지 닿는 목소리.
성력(聖力)으로 공기를 미세하게 진동시키는 합스부르크식 연설법.
은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술이 아닌데 이 멀리까지 깔리는 건 보통이 아니야.
"모의전 준비 기간 중
학생 자치 활동에 관한 추가 규정을 안내합니다."
이자벨라가 홀로그램 패널을 손끝으로 전개했다.
글자가 공중에 떠올랐다.
『학생회 운영 규정 추가 공지
1. 비공인 학생 모임 금지:
— 학생회 미승인 모임은 즉시 해산 대상.
2. 훈련 시설 및 장비실 사용:
— 학생회 배정표에 따른다.
— 배정 외 사용 시 벌점 부과.
3. 이의 신청:
— 학생회 운영위원회를 통해
정식 절차를 밟을 것.』
"질서가 없으면 혼돈이 옵니다."
이자벨라가 말했다.
"갑자대란이 증거입니다.
질서가 무너진 2일 동안
유럽 전선에서만 민간인 8만 명이 죽었습니다."
강당이 더 조용해졌다.
갑자대란.
이 학교에 있는 모든 학생의
부모 또는 조부모가 싸운 전쟁.
이자벨라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정중했다. 하지만 정중함 뒤에 양보는 없었다.
"모든 학생 모임은 사전 승인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조치입니다."
앞줄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고, 뒷줄 일부는 표정을 지웠다.
같은 문장을 듣고도
누군가는 보호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허가권을 떠올렸다.
공정이라는 단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아침이었다.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메모를 쳤다.
'비공인 모임 금지.
명문가 학생: 가문 네트워크 이미 존재. 영향 없음.
비명문가·편입생: 유일한 연결 수단 차단. 타격 직격.'
고개를 들었다.
이자벨라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제갈린. 학생회 부회장.
은명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1학년인데 학생회의 부회장이라는 건,
그만큼 체제 안에 깊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이자벨라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규정을 지켜주시면
율도고는 반드시 모두에게 공정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앞줄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이 몇 명 보였다.
뒷줄은 반응이 없었다.
……논리는 맞아.
은명이 태블릿을 닫았다.
하지만 누가 승인하느냐가 문제지.
조회가 끝나고 모의전 준비 주간이 시작됐다.
B반 훈련장 장비실.
전태산이 배정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에 붙은 홀로그램 표.
팀별 훈련 시설 사용 시간이 칸칸이 채워져 있었다.
표 자체는 깔끔했다. 색도 정렬도 완벽했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숫자가 반듯할수록 차이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전태산이 손가락으로 줄을 짚었다.
"제갈린 팀, A반 1팀.
주당 10시간. 연무장 A, 장비실 우선 사용."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갔다.
"쁘아카오 팀, B반 1팀.
주당 5시간. 연무장 C."
전태산이 손가락을 뗐다.
"왜 두 배야?"
옆에서 쁘아카오가 보호대를 감으며 대답했다.
"학생회가 정한 거래. 뭐, 밖에서 뛰면 되지!"
"밖에서 뛰는 건 좋은데.
같은 모의전인데 왜 조건이 달라?"
쁘아카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는데, 원래 그런 거 아니야?"
말은 가벼웠지만 쁘아카오도 배정표를 다시 올려다봤다.
줄 길이가 다르다는 건 숫자를 몰라도 보인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표정은 평소보다 덜 밝았다.
전태산이 배정표를 한 번 더 봤다.
A반 4개 팀. 평균 주당 9시간.
B반 4개 팀. 평균 주당 5시간.
숫자는 짧고 분명했다. 핑계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태산은 머리로 계산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이 정도 차이는 직감으로도 읽혔다.
같은 모의전을 준비하는데 시작선 길이부터 다르다.
"평균이 거의 두 배잖아."
클뤼소가 뒤에서 끼어들었다.
"불만이면 성적을 올리든가.
배정 기준이 실적이래."
전태산이 고개를 돌렸다.
"실적이면 A반 4팀 에이단보다 쁘아카오가 높지 않아?
근데 시간은 에이단이 더 많아."
클뤼소가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B반 학생 몇 명도 눈만 돌렸다.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표정.
체념은 종종 규정 준수처럼 보인다.
그때 아서가 다가왔다.
검 손잡이를 허리에 걸고, 조용하지만 정확한 말투.
"배정표는 학생회 승인이야.
불만이 있으면 정식 이의 신청을 해."
"이의 신청을 누가 심사하는데?"
아서가 잠깐 멈췄다.
"……학생회."
전태산이 아서를 봤다.
"심판이 한쪽 편이면
그건 경기가 아니라 연출이잖아."
아서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답 대신 검 손잡이를 쥐었다.
검 손잡이를 쥔 손등 힘줄이 얇게 도드라졌다.
아서는 규정을 믿고 자란 쪽이었다.
그래서 규정이 불편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아서는 반박할 문장을 알고 있었다.
규정, 절차, 공식 경로.
그런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문장이 맞는 것과 납득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걸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체감하고 있었다.
그 뒤에 서 있던 2학년 남학생이 가만히 듣고 있었다.
금갈색 머리카락. 장갑을 낀 양손. 녹금빛 눈동자.
피에르 보몽. 2학년 A반.
아서의 시선이 피에르에게 갔다.
"선배."
피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배정표, 보셨죠?"
피에르가 벽의 홀로그램을 봤다.
시선이 A반과 B반 사이를 한 번 오갔다.
장갑 낀 손가락이 접혔다 펴졌다.
"……봤다."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피에르의 시선이 잠깐 바닥을 향했다.
그가 아는 규정과 그가 보는 현실 사이에서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었다.
장갑 낀 손가락이 한 번 더 접혔다 폈다.
기사도에서 배운 질서와 학교에서 작동하는 질서는
같은 말인데 결이 달랐다.
피에르는 그 차이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배정은 학생회 권한이다.
규정에 따른 결과라면 기사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지."
아서가 입을 다물었다.
전태산이 배정표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기사가 아니라 학생이잖아요, 선배."
피에르가 전태산을 봤다.
잠깐.
"……맞다."
피에르가 돌아서며 작게 덧붙였다.
"맞는 말이야."
그 한마디가 끝나자 주변 공기가 묘하게 갈라졌다.
동의한 사람도 있었고 듣지 못한 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숙사 벽의 온도는 같았지만
서 있는 마음의 온도는 달랐다.
걸어가는 피에르의 등 뒤에서 전태산이 쁘아카오에게 말했다.
"밖에서 뛰자. 연무장 C보다 운동장이 넓으니까."
쁘아카오가 이를 드러냈다.
"좋아! 밖이 더 재밌잖아!"
두 사람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선택은 사실상 우회였다.
정면으로 이길 수 없으면 판 자체를 바꿔야 한다.
B반식 생존법은 늘 그랬다.
주어진 조건을 욕하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
조건 바깥의 길을 먼저 찾는다.
방과 후. A반 교실.
대부분의 학생이 떠난 교실 뒤쪽에서
은명이 태블릿을 펼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벽' 폴더. 사례가 늘어나고 있었다.
'사례 3.
자원 배분 불균형.
훈련 시설 사용 시간: A반 평균 9h / B반 평균 5h.
배정 권한: 학생회.'
'사례 4.
비공인 모임 금지.
명문가: 가문 네트워크로 대체 가능. 실질 영향 없음.
비명문가·편입생: 유일한 교류 수단 차단. 직격.'
은명의 손이 멈췄다.
"교칙 7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은명이 고개를 들었다.
아르준 싱이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모르겠다.
은명은 태블릿 화면을 본능적으로 기울여 가렸다.
아르준이 웃었다.
"안 봤어. 보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럼 왜?"
"교칙 7조. 영웅 자율 경쟁 원칙.
이론적으로는 좋거든."
은명이 아르준을 봤다. 아르준이 이어갔다.
"자율 경쟁.
공정한 출발선에서 각자의 역량으로 경쟁한다.
이상적이지."
"하지만?"
"출발선이 같지 않으면
자율 경쟁은 강한 쪽의 자유야."
은명은 답하기 전에 아르준의 눈을 잠깐 확인했다.
논쟁을 걸려는 눈이 아니라 검증하려는 눈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구조를 말하는 사람.
그래서 은명은 평소보다 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
아르준이 놀란 표정을 했다.
"의외로 빨리 동의하네."
"맞는 말에 왜 느리게 동의해?"
아르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크샤트리아 가문이야.
인도에서도 이런 구조를 봤어.
규칙은 같은데 결과는 항상 한쪽으로 쏠리지."
은명이 태블릿을 봤다.
"패턴이 보여."
"무슨 패턴?"
"규칙은 같은데 결과가 항상 한쪽으로 몰려.
팀장 선발, 자원 배분, 선도부 통제 대상.
전부 같은 방향이야."
아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이 같다는 것과 공정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은명이 아르준을 봤다.
처음으로 같은 눈높이의 사고를 가진 사람을 본 느낌.
은명은 그 느낌을 말로 만들지 않았다.
말로 만들면 관계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은명은 이름 붙이는 걸 늘 마지막에 했다.
관찰, 검증, 반복.
충분히 쌓인 뒤에야 하나의 결론으로 묶는다.
대신 태블릿에 메모를 하나 추가했다.
'자율 경쟁은 출발선이 같을 때만 공정하다.
— 아르준 싱.'
아르준이 일어서며 말했다.
"데이터가 더 필요하면 말해."
"……뭘 줄 건데?"
"나는 2학년 A반 학생들의 생활 패턴을 꽤 알아.
관찰하는 걸 좋아하거든."
은명이 태블릿을 닫지 않았다.
닫지 않은 게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르준이 나간 뒤 은명의 통신기에 알림이 하나 떴다.
학교 공지.
'금일 선도부 순찰 중 미승인 스터디 그룹 적발.
편입생 2명, 벌점 2점 부과.
— 선도부 집행, 학생회 운영위 확인.'
은명은 하단 타임스탬프를 봤다.
적발 18:12. 운영위 확인 18:19.
7분. 심의라고 부르기엔 너무 빠른 처리 속도.
이미 결론이 정해진 문서에
도장만 찍는 구조일 가능성이 컸다.
은명이 통신기를 봤다.
'보이지 않는 벽' 폴더에 새 사례를 추가했다.
'사례 5.
비공인 모임 적발.
적발 주체: 선도부. 벌점 확정: 학생회 운영위.
적발 대상: 편입생 2인.
사유: 미승인 스터디 그룹.
벌점: 각 2점.'
'명문가 학생의 비공인 모임 적발 사례: 0건.'
은명은 그 줄 아래 작게 괄호를 하나 더 달았다.
'현재 공개 자료 기준.'
단정은 늦추고, 의심은 유지한다.
그게 은명이 배운 가장 안전한 분석 습관이었다.
태블릿을 닫았다.
은명의 손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태블릿 표면에 손가락 자국이 찍혔다.
힘이 들어간 걸 알아차리자 은명은 손을 한번 폈다.
감정이 분석을 흐리게 만들지 않게.
그런데 감정을 완전히 지우면
왜 기록을 시작했는지도 흐려진다.
그 선을 맞추는 게 요즘 가장 어려웠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안 한다.
이 체제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전태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야, 오늘 훈련 시설 배정표 봤어?
A반이 두 배더라.
이의 신청 해봤더니 학생회가 심사한대.
ㅋㅋ 웃기지 않아?'
은명이 답장을 쳤다.
'웃기지 않아. 원래 그래.'
보내고 나서. 잠깐 멈췄다가 한 줄을 더 쳤다.
'팀장 선발, 자원 배분, 선도부 순찰, 스터디 금지.
전부 같은 방향이야.'
전태산의 답장이 빨랐다.
'그 방향이 뭔데?'
은명은 통신기 화면 위에서 엄지를 잠깐 멈췄다.
단어 하나가 사람을 나누는 칼이 되는 걸 이미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할수록 패턴은 더 선명해진다.
'명문가.'
단어를 보내고 나서 은명은 통신기 화면을 잠깐 뒤집어 놓았다.
짧은 단어 하나가 대화를 끊을 수도, 시작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전태산의 답장.
'ㅋㅋ 알고 있었어.'
그리고 한 줄 더.
'근데 알고 있는 거랑
참을 수 있는 거랑은 다르잖아.'
은명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논문 제목도 아니고 정교한 분석도 아닌데
핵심만 남아 있었다.
태산의 말은 늘 그렇게 왔다.
거칠고 단순한데 이상하게 도망칠 틈이 없는 형태로.
……이 녀석은 참 간단하게 말하네.
답장을 치지 않았다.
통신기를 내려놓았다.
기숙사 방. 불을 끄기 전에.
태블릿을 한 번 더 열었다.
'보이지 않는 벽' 폴더.
사례 5개.
팀장 편향. 선도부 편향. 자원 배분 편향.
모임 금지 편향. 스터디 적발 편향.
전부 같은 방향.
은명이 폴더를 닫으려다 멈췄다.
데이터는 충분해. 문제는 명확해.
그래서?
은명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떠 있었다. 폴더를 닫지 않은 채.
그래서 어쩌라고.
질문은 단순했지만 답은 단순하지 않았다.
문제를 아는 사람은 많다. 문제를 견디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문제를 깨는 쪽으로 첫 발을 내딛는 사람은 항상 적었다.
은명은 아직 자기가 어느 쪽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새 파일 하나를 만들었다.
이름: '미정.'
내용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폴더 안에 빈 파일이 생겼다는 건
아직 닫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은명은 파일 속성을 열어 생성 시간을 확인했다.
23:41. 날짜와 시간까지 남겨 두는 습관.
언젠가 되짚어 볼 때
자기 판단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흐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닫았다.
태블릿에 은명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감정의 온도가 데이터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하지만 틀림없이. 거기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태블릿 발열음만 낮게 울렸다.
은명은 화면을 끈 뒤에도 손을 떼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기록의 단계였다.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아직 이름은 없지만,
이미 시작됐다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방 밖에서 누군가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멀리서 웃음이 지나갔다가 끊겼다.
평범한 기숙사 밤의 소음.
그 평범함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이 이미 그어져 있다는 걸
은명은 알고 있었다.
은명은 통신기를 뒤집어 놓았다.
화면을 닫아도 문장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참을 수 있는 거랑은 다르잖아.'
단순한 문장이 오늘 수집한 데이터보다 더 오래 남는 밤이었다.
천장을 보는 눈은 차가웠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은명은 그 떨림을 기억했다. 지우지 않기로 했다.
✦ 작가의 말
3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