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지 않는 벽
3주가 빠르게 지나갔다.
아침. A반 교실.
운소하가 홀로그램 단말기를 탁자 위에 올렸다.
"모의전 세부 규칙. 오늘 공지야."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1학년 반간 모의전 세부 규칙
1. 형식: 거점 점령전
— A반 vs B반, 5인 1팀 × 4팀.
2. 팀 편성:
— 팀장: 교관 지정.
— 나머지 4인: 팀장이 직접 선발.
3. 거점:
— 중앙 거점 1개 + 외곽 거점 2개.
— 총 3개 거점 중 2개 이상 점령 시 승리.
4. 제한:
— 실전 무공 사용 가능.
— 살상 금지.
— 부상에 대한 자기 책임.
5. 교칙 제7조 적용:
— 영웅자율경쟁 원칙.
— 학교는 경쟁 과정 및 결과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
— 살상이 아닌 한
학생 간 자율 경쟁으로 간주한다.
6. 우수 팀 보상:
— 장비실 우선 접근권 1개월.
— 교관 개인 지도 티켓 2매.』
운소하가 홀로그램을 가리켰다.
"5번 항목. 교칙 제7조.
여기 밑줄 쳐."
학생들 손이 일제히 움직였다.
누군가는 진짜로 밑줄을 그었고, 누군가는 사진만 찍었다.
그러다 몇 명은 서로 눈치를 보며 손을 멈췄다.
이 규칙을 적는 순간부터
수업이 아니라 생존 매뉴얼이 되는 기분이었다.
은명이 태블릿에 규칙을 옮기고 있었다.
손이 멈춘 건 5번이었다.
'학교는 경쟁 과정 및 결과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
……이게 뭐야.
"교관님."
아르준 싱이 손을 들었다.
"5번의 범위가 궁금합니다.
모의전 중 과잉 무력 행사가 발생해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운소하가 팔짱을 꼈다.
"그래."
"설마 부상까지 방관하는 건 아니죠?"
"교칙 7조의 원문을 읽어봐.
'살상이 아닌 한 학생 간 자율 경쟁으로 간주한다.'
부상은 살상이 아니야."
교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펜을 놓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즉, 뼈가 부러져도?"
"자기 책임."
아르준의 시선이 운소하의 표정을 살폈다. 장난이 아니었다.
"의식을 잃어도?"
"살아있으면, 자기 책임."
아르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앞줄에서 위노나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제갈린이 드론을 조작하며 홀로그램을 확대했다.
"교칙 7조는 모의전에만 적용됩니까?"
운소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율도고 전체에 적용되는 교칙이야.
모의전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학생 간 경쟁에도 동일하게 적용돼."
뒤쪽에서 조용히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질문이 끝날수록 안심은 줄고 불확실성만 늘어났다.
규칙이 명확해서 불편한 게 아니라, 너무 넓어서 불편했다.
은명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멈췄다.
"……교관님. 한 가지만요."
운소하의 시선이 맨 뒷줄을 향했다.
"2번 항목. 팀장이 팀원을 직접 선발합니다.
팀장은 교관 지정이고요."
"맞아."
"교관이 지정하는 팀장은 어떤 기준입니까?"
"성적 상위자 우선. 그리고."
운소하가 살짝 웃었다.
"학생회 추천서가 반영돼."
교실의 공기가 한 겹 더 가라앉았다.
은명의 태블릿 화면에 메모 하나가 추가됐다.
'팀장 선발: 실력 + 학생회 추천.
= 명문가 편향 가능성.'
아르준이 은명 쪽을 힐끗 봤다.
은명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
A반 복도 게시판 앞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모의전 팀장 명단이 방금 올라왔다.
『A반 팀장 지정
1팀: 제갈린 (성적 1위)
2팀: 마르쿠스 아우레우스 2세
3팀: 키무라 사쿠라
4팀: 에이단 오설리번』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전부 명문가네."
"학생회 추천이 그렇게 세?"
"1학년인데 2학년 학생회가 왜 우리 팀장을 추천해?"
수군거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A반 학생들은 불만이 있어도 소리보다 정리를 먼저 선택했다.
누가 팀장이 되든 결국 같은 편으로 싸워야 하니까.
감정은 뒤로 미루고 배치를 계산하는 얼굴들이
복도 게시판 앞에 늘어섰다.
제갈린이 명단 앞에 서서 드론을 회수했다.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예정된 결과를 확인하는 눈이었다.
은명은 복도를 지나가며 태블릿을 한 번 봤다.
'A반 팀장 4인 중 비명문가 출신: 0인.
표본 수가 적어서 단정은 불가.'
'하지만.'
'우연이라기엔 깔끔한 숫자.'
그 소식이 운동장까지 전해질 무렵,
B반에서도 팀장 명단이 발표됐다.
남궁현이 운동장에서 명단을 읽었다.
『B반 팀장 지정
1팀: 쁘아카오 (성적 1위)
2팀: 아서 펜드래곤 2세
3팀: 클뤼소
4팀: 리오 카르도소 다 실바』
전태산이 팔짱을 꼈다.
"나 왜 없어?"
남궁현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성적 순위 안에 네 이름이 없으니까."
"성적이 체술만은 아니잖아요."
"이론 과목 포함 종합 순위야.
네 이론 점수가 몇 등인지 알아?"
전태산이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남궁현의 기준은 학생회 추천이 아니라 종합 성적이었다.
A반과 달리, 실력 순서 그대로.
옆에 있던 클뤼소가 작게 콧바람을 불었다.
"체술 빼면 꼴찌잖아, 전태산."
쁘아카오가 다가왔다.
"태산! 내 팀에 와!"
"……생각 좀 하고."
"빨리 해! 다른 팀장이 먼저 데려가면?"
전태산이 멈칫했다.
"내가 선발 대상 순위가 높아?"
쁘아카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론은 모르겠는데, 체술은 네가 제일 재밌잖아!"
남궁현이 옆에서 한마디했다.
"쁘아카오. '재밌다'는 선발 기준이 아니야."
"'과유간'이 선발 기준도 아니잖아요, 교관님!"
"……'과유간'이 아니라 '교관'이다."
운동장 분위기는 A반과 달랐다.
1팀과 4팀에 비명문가 출신이 포함돼 있었다.
쁘아카오 — 태국 무에타이 명가지만 '세가' 급은 아니다.
리오 카르도소 — 브라질 카포에이라 무인 가문.
주류도 아니고 비주류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전태산이 태블릿을 꺼냈다.
학급 게시판.
비공개 작성자의 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반간 모의전 — 거점 점령전 전술 기초 요약.'
전태산이 글을 열었다.
'거점 점령전의 핵심은
동시다발 점령이 아니라
한 곳을 공고히 한 뒤 나머지를 취하는 것이다.
병력을 분산하면 어디에서도 이기지 못한다.'
'다만, 병력이 약한 쪽은 역발상이 필요하다.
정면으로 싸우면 강한 쪽이 이기니까.'
전태산이 코웃음 쳤다.
"또 익명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산의 엄지는 스크롤을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읽고 나서야 화면을 끄는 버릇이 조금씩 붙고 있었다.
스크롤을 더 내렸다.
마지막 줄.
'팀장이 아니어도
전장의 흐름을 읽는 놈이 진짜 위험한 놈이다.'
전태산이 잠깐 멈췄다.
"……이 사람, 누군진 몰라도
나한테 말하는 거 맞지?"
오후가 지나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전태산이 체력 훈련을 마치고 기숙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
2학년 학생 2명이 1학년 남학생 하나를 막고 서 있었다.
전태산이 걸음을 멈췄다.
"야, 선배. 좀 비켜줘야 들어가죠."
2학년이 겨우 전태산 쪽을 봤다.
"1학년은 잠깐만."
"왜요?"
"선도부 순찰이다. 기숙사 출입 통제 중이야."
전태산이 고개를 기울였다.
1학년 남학생의 이름표가 보였다.
'장석현.'
세가 소속이 아니다. 편입생.
"그 친구한테 뭐 물어볼 게 있어요?"
"선도부 규정상 통제 대상이야."
전태산이 한 발 다가갔다.
"무슨 통제요?
저도 1학년인데 저는 안 세우잖아요."
말끝이 올라갔지만 목소리는 크게 떨리지 않았다.
태산도 자기가 화났다는 걸 알았고, 상대도 그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화가 아니라 기준이었다.
누구를 세우고 누구를 보내는지,
그 선을 누가 긋는지가 눈앞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2학년이 전태산의 교복을 봤다.
'전태산. B반.'
그리고 그 밑의 작은 표기.
담양전씨 31대손.
2학년의 태도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아, 전씨세가. 너는 가도 돼."
전태산이 멈췄다.
시선이 장석현에게 갔다.
장석현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먹이 교복 끝을 쥐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태산이 천천히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가도 된다고."
"아니. 그 앞에.
'전씨세가니까'라고 했잖아."
2학년의 표정이 굳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무겁고, 일정하고, 멈추지 않는 보폭.
전태산이 고개를 돌렸다.
키 190cm. 구릿빛 피부. 교복 위의 가죽 전투 조끼.
선도부 완장.
테무진 보르지긴.
2학년 학생 둘이 즉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선도부장님."
테무진이 멈췄다.
시선이 전태산에게 갔다.
바람이 지나가는 사이,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1학년. 뭘 하고 있지."
전태산이 테무진을 올려다봤다. 190cm. 목이 아팠다.
"선도부가 편입생만 골라 세우길래 물어봤습니다."
"순찰이다. 통제 대상은 선도부가 정한다."
"그 기준이 뭔데요?"
테무진이 전태산을 내려다봤다.
"규정이다."
"어떤 규정이요?"
"교칙 제7조."
전태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아침에 들은 문장이 저녁에는 방패처럼 쓰이고 있었다.
같은 규칙인데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무게가 전혀 다르게 들렸다.
전태산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까 아침에 들은 교칙.
'학교는 학생 간 자율 경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거 경쟁 얘기잖아요.
기숙사 통제가 경쟁이에요?"
테무진의 시선이 한 겹 더 차가워졌다.
"선도부의 판단 근거에 대해
1학년이 질문할 권한은 없다."
선도부 내규에는 '학생 안전 순찰 대상 선정은
선도부장의 재량에 따른다'는 조항이 있었다.
재량. 누구를 세울지 정하는 게 재량이라면,
이건 규율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전태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장석현이 작게 말했다.
"괜찮아요, 전태산 학생.
저는…… 원래 이래요."
전태산이 장석현을 봤다.
'원래 이래요.'
그 말이 귀에 걸렸다.
테무진이 2학년에게 고개짓했다.
"보내."
장석현이 풀려났다.
전태산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냥 지나갈 수 있었다.
전태산이 테무진을 봤다.
"선배.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테무진이 멈추지 않았다.
"명문가 학생도 이렇게 세우나요?"
테무진이, 처음으로 돌아봤다.
"규율을 어기면 누구든 세운다."
"그럼. 규율을 안 어기고 편입생이기만 한 경우는?"
침묵. 바람이 불었다.
테무진이 대답 대신 돌아섰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전태산이 장석현에게 말했다.
"야. 다음에 또 당하면 말해."
장석현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고마워요.
근데 괜히 엮이면 전태산 학생한테도 벌점이 와요."
전태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벌점이면 뭐, 보충 훈련이지.
또 네 바퀴 뛰면 되잖아."
농담처럼 던졌지만 장석현은 웃지 못했다.
전태산도 그걸 봤다.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라 겁먹지 말라고 한 말이었는데,
상대에게는 용기보다 위험 신호로 들릴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밤. 기숙사 3층, 홍은명의 방.
태블릿 화면에 새 폴더가 열려 있었다.
'율도고 교칙 제7조 — 관련 사건 기록.'
은명의 손이 타이핑했다.
'사례 1.
모의전 팀장 선발 — 학생회 추천서 반영.
결과: A반 팀장 4인 전원 명문가.
B반 팀장: 비명문가 2인 포함.
단, B반 교관은 학생회 추천 대신 종합 성적만으로 팀장을 선발한 것으로 보인다.'
'사례 2.
선도부 기숙사 통제.
통제 대상: 편입생·비명문가 학생.
명문가 학생 통제 사례: 확인 안 됨.
선도부 내규상 순찰 대상은 선도부장 재량 —
사실상 자의적 집행이 가능한 구조.'
'사례 3. 교칙 7조 원문.'
커서는 깜빡였고,
은명은 문장 사이에 빈 줄을 하나 더 넣었다.
사건 자체보다 사건 사이의 공백이 중요했다.
어디서 반복되고, 어디서 예외가 사라지는지.
패턴은 늘 간격에서 드러난다.
은명이 원문을 불러왔다.
'학교는 학생 간 경쟁의 과정 및
결과에 대해 개입하지 아니한다.
살상이 아닌 한 학생 간 자율 경쟁으로 간주한다.'
은명의 손이 잠깐 멈췄다.
메모를 추가했다.
'이 교칙은 강한 쪽을 보호하기 위한 규칙이다.
약한 쪽을 보호하는 조항은 없다.'
문장을 적고 나서도 곧바로 저장하지 않았다.
한 번 지웠다가, 다시 같은 문장으로 썼다.
감정 섞인 해석인지, 데이터 기반 결론인지
스스로 검증하는 습관이었다.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통신기에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전태산.
'야, 오늘 선도부가 편입생 친구 잡았어.
이거 원래 이래?'
은명이 통신기를 잠시 봤다.
답장을 쳤다.
'원래 그래.'
보냈다.
그리고 다시 태블릿을 들었다.
폴더 이름을 바꿨다.
'교칙 제7조 — 관련 사건 기록.'
에서.
'보이지 않는 벽.'
으로.
태블릿을 닫았다.
어두워진 화면에 은명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늘 같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눈가가 조금 더 날카로웠다.
기록을 쌓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언젠가 기록을 깨뜨릴 타이밍을 재는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
전태산의 통신기.
'원래 그래.'
메시지를 읽은 전태산이 통신기를 내려다봤다.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춰 있었다.
원래 그래.
이 학교에서는 원래 그래.
전태산이 통신기를 덮었다.
창밖 하늘이 어두웠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은명의 방.
방이 어두워졌다.
은명의 눈만 천장을 향해 떠 있었다.
아직 자지 않았다.
복도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지나가고 멈췄다가 다시 멀어졌다.
학교는 밤에도 완전히 잠들지 않는다.
은명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으면 낮에 본 숫자들이 떠올랐다.
팀장 명단, 편향 표본, 선도부 재량이라는 문구.
전부 따로 보면 작은 사건인데
한 줄로 꿰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은명은 이불 속에서 손가락을 한 번 접었다 폈다.
내일은 또 다른 사례가 추가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는 기록만으로 끝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천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질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 작가의 말
3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