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자의 밥상, 그리고 게시판
점심시간.
율도고 식당은 전쟁터의 휴전 지대 같았다.
A반과 B반이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는 유일한 시간.
전태산이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았다.
오른쪽 구석.
홍은명이 혼자 앉아 있었다.
태블릿 하나. 이어폰 한쪽.
밥을 먹고 있는지 태블릿을 보고 있는지 구분이 안 됐다.
주변 테이블은 빈자리가 넉넉했지만,
은명의 반경 두 자리 안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결계가 쳐진 것 같은 공간.
멀리서 보면 그냥 빈자리였지만 가까이 가면 온도가 달랐다.
은명 주변 두 칸은
누가 먼저 피해 만든 자리인지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익숙해졌을 뿐.
전태산이 식판을 쿵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은명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멈췄다.
"……뭐야."
"밥."
은명이 태블릿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야, 왜 피해?"
"피한 게 아니라 저쪽 자리가 넓어서."
전태산이 식판을 들고 따라가 바로 옆에 식판을 내려놨다.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킥킥거렸다.
"저 B반 애, 홍은명한테 붙으려고 하네."
"죽고 싶은가 봐."
전태산은 듣지 못했다.
아니, 들었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시선의 무게를 잘 모른다.
그래서 상처를 덜 받지만, 그래서 규칙도 늦게 눈치챈다.
"세 번째 옮기면 내가 네 번째로 따라가."
은명이 멈칫.
한숨을 삼키더니 다시 앉았다.
"……앉아. 다시는 안 옮길 테니까."
전태산이 씩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침묵. 젓가락이 식판 위를 오가는 소리만 남았다.
은명의 시선은 태블릿에 고정돼 있었지만,
화면을 스크롤하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전태산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오늘 아서한테 졌어. 3번 다운."
"그래서?"
은명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한 방은 맞췄거든."
"……그게 자랑이야?"
"아니, 보고."
은명의 젓가락이 멈췄다.
"파트너라고 안 했어."
"그러니까 보고.
파트너한테는 안 하고 그냥 아는 놈한테 하는 보고."
은명이 대꾸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전태산이 이어서.
"기둥이 없대. 기본기가.
기둥 없이 지붕만 올렸대."
숟가락이 잠깐 멈췄다.
은명은 시선을 들지 않았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듣고 있었다.
태산이 우스갯소리처럼 던지는 말 안에는
오늘 맞고 온 몸의 무게가 묻어 있었다.
"……비유치가 높은 교관이네."
"그래서 네 바퀴 보충 훈련이야."
"여덟 바퀴 안 나온 게 다행이지."
"그것도 나왔어. 안 하면 여덟이래."
은명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전태산은 보지 못했다.
전태산이 국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근데 아서 그 놈, 검 빼면 더 무섭겠다."
"당연하지. 기사도 체술은 검을 위한 기초거든."
전태산이 고개를 돌렸다.
"너 그런 건 어떻게 알아?"
은명이 태블릿을 살짝 기울여 보여줬다.
화면에는 이미 '아서 펜드래곤 2세 — 체술 전투 기록'이 열려 있었다.
교내 공개 스파링 전적 게시판에서 가져온 데이터였다.
화면 한쪽에는
타격 각도 분포와 이동 궤적이 얇은 선으로 겹쳐져 있었다.
일반 학생에게는 복잡한 그래프지만,
은명에게는 사람의 습관이 숫자로 찍힌 지문처럼 보였다.
전태산이 눈을 깜빡였다.
"……너, 벌써 조사했어?"
"조사가 아니라 읽기야. 공개 데이터거든."
은명이 태블릿을 다시 돌려놓으며.
"신경 쓸 거면 직접 읽어."
전태산이 식판을 밀어내고 기지개를 켰다.
"글보다 주먹이 빨라서."
"그래서 졌잖아."
"……."
전태산이 할 말을 잃었다.
은명은 이미 다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태산은 잠깐 그 얼굴을 봤다.
무표정한데 이상하게 무심하지 않았다.
도와준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이미 도와주고 있는 얼굴.
태산은 그걸 뭐라고 부를지 몰라서 그냥 젓가락을 들었다.
그 시각, A반 세계관 이론 강의실.
갑자대란 이후 율도국의 국제적 위치에 대한 수업.
은명은 맨 뒷자리에서 강의 내용을 태블릿에 정리하고 있었다.
핵심 키워드. 연관 사건. 시험에 나올 법한 포인트.
판서가 넘어갈 때마다 은명의 정리 방식도 바뀌었다.
사실은 짧게, 인과는 길게.
외워야 할 문장은 줄이고, 생각해야 할 문장은 늘렸다.
점수를 위한 필기와 전장을 위한 필기를
은명은 구분해서 적었다.
제갈린이 앞줄에서 드론으로
교수의 판서를 실시간 촬영하고 있었다.
데이터 정리 속도는 제갈린이 빨랐지만,
핵심을 뽑아내는 눈은 은명이 더 날카로웠다.
정리가 끝나자 은명의 손가락이 화면을 탭했다.
학급 게시판.
'세계관 이론 요약 — 갑자대란 이후 율도국.'
업로드.
전문 용어 대신 일상적인 비유로 풀어놓은 글.
이번에도 작성자 이름은 비공개.
수업이 끝나자 아르준이 게시판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올라왔네, 익명 요약.
이번에도 핵심만 정확하게."
아르준은 스크롤을 멈춘 채 문장 배열을 한 줄씩 따라 읽었다.
설명은 쉬운데 논리는 건너뛴 곳이 없다.
누군지 몰라도 수업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해부하는' 사람이 쓴 글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위노나가 이어폰을 빼며 말했다.
"나도 봤어. 공밀레 수준이야. 누가 올리는 건지."
위노나의 토템 드론이 게시판 QR을 한 번 스캔했다.
작성자 정보는 비공개. 로그도 학교 권한 없이는 막혀 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어폰을 다시 꼈다.
"누군지 몰라도 실전형으로 설명하네.
A반 애들 취향은 아닌데."
은명은 가방을 챙기며 지나갔다. 아무 표정 없이.
같은 시각, B반 운동장.
전태산이 달리고 있었다.
1바퀴. 2바퀴.
남궁현이 팔짱을 끼고 트랙 안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전태산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발바닥이 트랙을 때리는 소리가 점점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처음 두 바퀴는 기세로 밀었다.
세 번째부터는 다리가 먼저 항의했다.
허벅지가 당기고 옆구리가 찌르듯 아팠다.
그래도 속도를 내렸다 올렸다 하며 어떻게든 리듬을 붙잡았다.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3바퀴.
쁘아카오가 옆에 나타났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갑자기.
전태산이 헐떡이며 물었다.
"너 보충 아니잖아."
"자율이지!"
"그럼 왜 뛰어?"
"같이 뛰면 덜 지루하잖아!"
쁘아카오가 속도를 올렸다. 웃으면서.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보충 돌리는 놈 옆에서 자율이래."
"저 둘은 진짜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문제인 거 아냐."
전태산이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
쁘아카오는 웃으면서 달렸고, 전태산은 이를 갈면서 달렸다.
같은 속도. 다른 표정.
4바퀴.
남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전태산이 트랙 위에 누웠다.
하늘이 빙글 돌았다. 폐가 타는 것 같았다.
트랙 끝 전광판 숫자가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오늘 기록이 좋든 나쁘든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
끝까지 돌았다는 사실만 몸 안에 남았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별빛 같은 점이 튀었다.
몸이 한계라고 신호를 보내는 방식.
태산은 거친 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트랙 바닥을 쓸었다.
고무 칩 감촉이 손금에 박혔다.
오늘 뛴 거리만큼 몸 안쪽에도 자국이 남는 느낌이었다.
쁘아카오가 옆에 서서 물통을 건넸다.
"내일도 같이 뛰자!"
전태산이 물통을 받아 반쯤 비우고 말했다.
"……제발."
남궁현이 돌아서며 낮게 덧붙였다.
"내일은 도술 호흡 기초도 병행한다.
뛰고 나서 바로 호흡 훈련이야."
전태산이 누운 채로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짧았지만 포기 섞인 대답은 아니었다.
힘들다는 사실과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같은 문장에 들어갔다.
저녁. 기숙사 로비.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을 때, 천장의 홀로그램이 켜졌다.
전체 공지.
『2061학년도 1학년 반간 모의전
실시일: 3주 후
대상: A반 vs B반 (전원 참가)
팀 편성: 교관 지정 + 학생 선택 혼합
세부 규칙: 추후 공지』
로비가 술렁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A반 학생들은 서로를 보며 눈짓을 교환했고,
B반 학생들은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공지 한 장으로 복도 공기까지 바뀌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이미 팀 조합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지난 스파링 패배를 떠올렸다.
3주라는 숫자는 길어 보이지만
연습 일정으로 쪼개면 금방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아서가 공지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검 손잡이를 만졌다.
시선이 날카로워졌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제갈린은 드론으로 공지를 촬영하며 이미 전략을 구상하는 표정.
손가락이 허공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습관.
쁘아카오가 주먹을 들었다.
"이야! 전면전이다!"
그 말에 B반 쪽이 먼저 웃었고, A반 쪽은 먼저 계산했다.
반응의 방향이 달랐다.
한쪽은 부딪칠 생각부터 하고, 한쪽은 배치도를 떠올렸다.
같은 공지를 봐도 두 반이 준비하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마르쿠스가 옆에서 물었다.
"팀 편성이 '교관 지정+학생 선택 혼합'이면 뭔 뜻이야?"
아서가 짧게 답했다.
"일부는 교관이 짜고, 일부는 우리가 고른다는 뜻이지."
전태산이 통신기를 꺼냈다. 메시지를 보냈다.
'야, 모의전 공지 봤어?
또 같이 하는 거야?'
답장이 왔다.
'모르는 번호입니다.'
전태산이 피식 웃었다.
"아, 또 이러네."
통신기를 주머니에 넣으며 씩 웃었다.
모르는 번호라지만, 읽는 데 1초도 안 걸린 답장이었다.
태산은 짧게 웃고 말았지만 속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문자 한 줄로 관계가 좋아진 건 아니다.
그래도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라는 신호.
지금의 태산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거절처럼 보이는데 완전한 거절은 아닌 답.
태산은 그 미묘한 온도를 어렴풋이 읽기 시작했다.
은명이 선을 긋는 방식,
그리고 그 선 안쪽으로 조금씩 들여보내는 방식을.
기숙사 3층. 홍은명의 방.
태블릿 화면에 작업 창이 열려 있었다.
'A반/B반 모의전 대비 — 참가자 공개 데이터 비교 분석.'
은명은 교내 공용 훈련 로그와
학년 공개 전적 게시판에서 데이터를 끌어왔다.
학생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용 데이터.
은명의 코드가 한 건 정렬과 분류뿐이었다.
코드 창 오른쪽엔 필터 조건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시간대, 상대 조합, 피격 유형, 호흡 무너짐 추정 구간.
은명은 불필요한 값들을 하나씩 지웠다.
숫자가 많다고 정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쓸모 없는 수치를 걷어낼수록 사람의 습관이 선명해졌다.
A반 전원. B반 전원. 양쪽 모두.
제갈린 — 전술 드론 운용 기록.
아르준 — 진법 기초 응용 데이터.
아서 펜드래곤 2세 — 체술 스파링 영상 분석.
쁘아카오 — 무에타이 기본 패턴.
마르쿠스 — 근접전 체력 지표.
은명의 손이 목록을 천천히 스크롤했다.
스크롤이 멈출 때마다 작은 메모 창이 옆에 떴다.
'반응 속도 우수', '협업 시 시너지 낮음',
'초반 폭발력 높음, 후반 유지력 낮음'.
사람을 한 줄로 정리하는 건 언제나 불완전했지만,
불완전한 지도를 들고 싸우는 게
지도 없이 뛰어드는 것보단 낫다.
그리고 맨 아래.
전태산
— 체술 기초 데이터
— 스파링 전적
— 보충 훈련 기록.
기본기 부재. 패턴 없음. 본능 의존.
남궁현의 소견이 교관 코멘트로 달려 있었다.
'재능은 있다. 뼈대가 없을 뿐.'
은명이 스크롤을 멈추고 화면을 내려다봤다.
기본기 약점은 태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B반 전체가 개인기 의존도가 높고, 구조화된 전투 리듬이 부족하다.
모의전에서 A반이 조직력으로 밀어붙이면
그게 가장 큰 변수가 된다.
은명은 화면을 잠깐 멈추고 A반 쪽 데이터와 겹쳐 봤다.
A반은 평균치가 고르고, B반은 최고치가 튀었다.
정면으로 붙으면 A반이 안정적이고,
혼전으로 가면 B반이 변수다.
모의전의 승부는 결국
누가 전장을 자기 방식으로 바꾸느냐에 달려 있었다.
은명의 시선이 다시 전태산의 데이터로 돌아갔다.
스파링 전적. 3라운드, 전패.
하지만 2라운드에서 아서에게 유효타 1회.
패턴 없는 자가 만들어낸 유일한 틈.
그건 기본기가 아니라 본능이 열어낸 구멍이었다.
은명이 학급 게시판을 열었다. 새 파일 작성.
'체술 기초 — 격투 리듬의 이해.'
전문 용어 대신 일상적인 비유로 풀어놓은 글.
리듬의 박자를 음악에 비유하고,
간격의 관리를 바둑의 호흡에 빗댔다.
작성자: 비공개.
업로드.
태블릿을 닫았다.
통신기 화면에 '모르는 번호입니다'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자기가 보낸 거지만 지우지는 않았다.
은명은 그걸 한 번 보고 화면을 꺼 버렸다.
방이 어두워졌다.
침대에 누운 채 은명은 천장을 봤다.
3주.
모의전까지 3주.
그때까지 저 기둥 없는 주먹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은명은 눈을 감았다.
모르는 번호입니다.
……아직은.
아직은 모르는 번호. 아직은 모르는 변수.
하지만 3주 뒤에는
둘 다 더 이상 모르는 상태로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창문 밖에서
늦은 훈련을 마친 학생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지나갔다.
웃음, 투덜거림, 물병 부딪히는 소리.
학교는 쉬는 시간에도 계속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은명은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머리는 여전히 깨어 있었고,
손끝은 다음 파일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모의전 대비 2차안.'
아직 열지 않은 문서가 이미 머릿속에서 작성되기 시작했다.
통신기 화면은 끝내 다시 켜지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라는 문장은 차단이 아니라 유예에 가까웠다.
은명은 그 유예를 3주짜리 시간으로 받아들였다.
3주 뒤, 같은 번호로 다시 연락할지 혹은 번호를 지울지.
지금 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은 데이터를 쌓고, 변수를 줄이고,
필요할 때 움직이면 된다.
은명은 마지막으로 알람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내일도 빠르다. 잠은 짧을 것이다.
✦ 작가의 말
3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