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수 더
1월 셋째 주 오후.
빅토르의 방.
3학년 기숙사 복도는 비어 있었다.
대부분의 3학년은 이미 귀향했다.
빅토르의 방 앞에 은명이 섰다.
서버실 지하가 아니다. 장소가 바뀌었다.
제갈린의 추가 메시지. '빅토르 측에서 장소를 본인 기숙사로 변경.'
보안 모니터링 없음 조건은 유지.
문 앞에서 1초 멈췄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체스판이 방 중앙에 놓여 있었다.
흰 말. 검은 말.
나무 체스판이었다. 비싼 것.
말이 무겁고, 바닥에 펠트가 붙어 있었다.
빅토르가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왜 부르셨습니까, 빅토르 선배."
빅토르가 미소 지었다.
"앉아."
체스판을 가리켰다.
"체스를 두자. 대화를 위해서."
은명이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낮았다. 빅토르의 시선보다 살짝 아래.
이것도 계산인가.
빅토르가 흰 말을 옮겼다. e4.
은명이 검은 말을 옮겼다. c5. 시칠리안 디펜스.
1학기 때는 이 오프닝조차 몰랐다.
빅토르가 말했다.
"1년이 지났어."
말을 옮기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네가 활빈당을 만들고
내가 부수려 했고
천기가 그 사이에서 데이터를 수집했지.
1년 치 분열 데이터.
내가 구매하기까지 했어."
은명이 말을 옮기며 말했다.
"선배의 이간은 천기한테 이용당했어요.
아시죠?"
빅토르가 말을 옮겼다.
"알아."
입꼬리가 굳었다.
"불쾌하지.
천기가 내 게임판 위에서 바둑을 뒀어.
내가 짠 분열을 천기가 데이터로 수확했다.
올가를 떠나게 만든 것도, 리오를 의심하게 만든 것도
전부 내 설계였는데, 천기가 그 균열을 측정했어."
빅토르의 눈이 처음으로 판에서 떠났다.
"이건 대전 상대로서의 모욕이야."
은명이 말을 옮겼다.
나이트를 전진.
빅토르가 봤다.
"그래서 결정했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 수 더 두지.
하지만 상대가 바뀌었어."
은명을 봤다.
"너에서 천기로."
은명이 멈췄다.
"선배가 천기를 적으로 삼는다는 건가요?"
빅토르가 미소 지었다.
"적이라기보다 게임 상대야."
손가락이 판 위를 훑었다.
"내 게임판을 이용한 자에게는
더 큰 게임으로 답해야지.
내 정보망이 3년간 쌓은 외부 채널이 있어.
학생회의 내부 자산과 합치면
천기의 외부 네트워크를 추적할 수 있어.
교장실 접근권도 졸업 전까지 유효하고."
은명이 말을 옮기며 물었다.
"그러면 우리와는?"
빅토르가 말했다.
"오해하지 마. 너와 동맹하는 거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다만 당분간 같은 방향을 볼 뿐이야.
천기를 상대하는 동안은.
그 뒤에는 다시 경쟁자야."
은명이 말을 옮겼다.
빅토르의 킹 옆.
"선배."
은명의 검지가 말에서 떨어졌다.
"체크예요."
빅토르가 판을 봤다.
미소.
"흥미롭군.
1학기 때는 오프닝에서 졌었는데.
시칠리안까지 쓰게 됐어?"
말을 옮겼다. 킹을 피하며.
"좋아."
체스판 너머로 은명을 봤다.
"게임은 계속되는 거야."
같은 날 석양. 2학년 기숙사 옥상.
인티와 솔로몬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교복 끝을 흔들었다.
인티의 잉카식 직조 끈이 석양 빛에 물들었다.
손끝에서 황금빛 입자가 미세하게 피어올랐다.
태양이 가라앉기 직전. 마지막 충전.
인티가 물었다.
"결정했어?"
솔로몬이 대답하지 않았다.
5초. 석양이 솔로몬의 금빛 눈동자에 비쳤다.
난간 위에 놓인 솔로몬의 손이 움직였다.
왕은 보호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활빈당의 원칙. 그것이 찾던 답이다.
12월의 합동 방어에서 봤다.
홍은명은 활빈당을 지휘하되 소유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의 왕가가 민초에게 해야 할 일과 같다.
솔로몬이 입을 열었다.
"인티."
시선이 석양을 향했다.
"나도 내려갈게.
활빈당을 지원하겠어. 공식적으로.
전투 지원과 정보 공유.
에티오피아 왕가의 봉인술을 투입한다.
훈련장 접근권도 2학년 권한으로 열어줄 수 있어."
인티가 봤다.
"조건은?"
솔로몬이 말했다.
"왕의 조건이야.
활빈당이 약자를 지키는 한 내가 활빈당을 지킨다."
손이 주먹을 쥐었다.
"지배하지 않고."
인티가 미소 지었다.
"좋은 왕이 되겠네."
석양 빛이 인티의 얼굴을 비췄다.
호박빛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났다.
"태양은 네 뒤에도 빛을 내릴게."
솔로몬이 말했다.
"태양 아래 왕은 그림자가 없어야 해."
등을 돌렸다.
"가자, 인티. 홍은명한테 전하러."
둘이 옥상을 내려갔다.
계단에서 인티가 말했다.
"솔로몬. 한 가지 더.
내일 해가 뜨면 전파 감지 한 번 돌릴게.
천기의 잔류 신호가 12월 이후로 줄었는지 확인해야 해."
솔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해."
같은 날 밤. 활빈당 아지트.
은명이 돌아와서 멤버들에게 말했다.
아지트에 전원이 있었다. 겨울방학인데도.
카이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올가는 창가, 리오는 바닥, 위노나는 태블릿 앞,
아르준은 서버 콘솔 옆, 태산은 라면 봉지를 뜯고 있었다.
"이자벨라가 활동 유예를 풀었어.
학생회 내규 12조, 교장 결재 완료."
카이가 눈을 떴다.
"진짜?"
은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었다.
"제갈린이 데이터로 인정했어.
123페이지짜리 분석서를 만들었더라.
합동 시너지 47% 상승."
아르준이 휘파람을 불었다.
"제갈린이 그 정도 분량을
한 사람한테 바치다니."
"테무진이 태산 주먹을 인정했어.
전선에서 옆에 있으면 든든한 주먹이라고."
태산이 씩 웃었다.
"당연하지."
카이가 끼어들었다.
"야. 테무진이 인정이면 큰 거야.
그 사람 인정 기준 진짜 높거든."
은명이 마지막으로.
"빅토르 선배는 목표를 천기로 바꿨어.
3년 치 정보망으로 천기의 외부 네트워크를 추적할 거야.
당분간 같은 방향을 본다고 했어. 화해는 아니지만."
올가가 팔짱을 풀었다.
"빅토르가 같은 방향이라.
그건 처음 듣는 말이네."
위노나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빅토르 선배님의 정보망이면
제가 접근 못 했던 외부 서버를 뚫을 수도 있어요.
천기의 통신 경로 역추적에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카이가 소리쳤다.
"와 그거 다 오늘 있었던 거야?!"
리오가 은명을 봤다.
"사건의 남자~"
올가가 말했다.
"조용히 해."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
인티와 솔로몬이 들어왔다.
위노나의 손이 태블릿 위에서 멈췄다.
카이가 일어섰다.
아지트가 조용해졌다.
솔로몬이 말했다.
"홍은명."
아지트를 한 번 둘러봤다.
188cm의 시선이 방 안의 얼굴들을 지나갔다.
"나는 활빈당을 지원하겠다.
전투 지원과 정보 공유.
에티오피아 왕가의 봉인술 투입.
훈련장 접근권도 열어주겠다.
조건은 하나."
은명의 눈을 봤다.
"약자를 지키는 한."
은명이 일어섰다.
"솔로몬 선배. 감사합니다.
그 조건은 활빈당의 조건과 같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위노나가 조용히 말했다.
"은명 씨.
1학기 때 4명으로 시작했죠."
아지트를 둘러봤다.
"지금 보세요."
활빈당 7인. 인티. 솔로몬.
피에르의 조건부 연대. 이자벨라의 활동 유예 해제.
빅토르의 임시 방향 일치.
은명이 벽을 봤다.
구역 분할 전술 v3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 빈 공간이 있었다.
다음 작전도를 붙일 자리.
"넓어졌네. 이 방이."
태산이 말했다.
"방이 넓어진 게 아니라."
은명의 어깨를 툭 쳤다.
"사람이 많아진 거야, 바보야."
은명이 웃었다.
"알아."
밤. 아지트에서 나왔다.
하늘을 올려봤다.
겨울 밤하늘. 별.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웠다.
1년 전에는 혼자였다.
전태산이라는 귀찮은 놈이 옆에 왔고,
위노나가 같이 해줬고, 리오가 따라왔고,
카이가, 아르준이, 올가가 합류했고,
인티 선배가, 솔로몬 선배가 내려왔다.
천기.
너의 질문에 아직 완전한 대답은 못 한다.
하지만 부분적인 대답은 알겠다.
은명이 걸었다.
태산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은명아! 라면 먹으러 가자!
매점 닫기 전에!"
은명이 걸음을 멈췄다.
돌아섰다.
"됐고. 가자."
태블릿이 주머니에서 진동했다.
꺼내 봤다.
'2학기 합동 훈련 일정 확정.
첫 합동 작전 브리핑: 3월 첫째 주 월요일.
전원 참석 필수.
— 운소하'
은명이 태블릿을 넣었다.
3월. 다시 시작이다.
"태산아. 라면 사줘.
할 얘기 있어."
태산이 씩 웃었다.
"네가 사야지!"
둘이 매점을 향해 걸었다.
겨울 밤 복도에 발소리가 두 개.
1년 전에는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