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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언어 일러스트

각자의 언어

1월 둘째 주 오후. 겨울방학.

학교는 조용했다. 잔류한 학생은 많지 않았다.

복도에 발소리가 울리면 벽에서 메아리가 돌아왔다.

눈이 쌓인 교정에 발자국은 몇 개뿐이었다.

도서관.

제갈린이 앉아 있었다.

합동 전투·훈련 데이터를 정리한 분석서.

123페이지. 마지막 그래프를 그렸다.

안경 너머 눈이 그래프의 곡선을 따라갔다.

12월 합동 방어, 잔적 소탕, 합동 훈련 3회, 모의전 1회.

전부 숫자로 정리했다.

문이 열렸다.

은명이 들어왔다.

코트에 눈이 묻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1초.

은명이 말했다.

"여기 있었어."

제갈린이 대꾸했다.

"겨울방학에도 도서관은 열려 있으니까.

조용해서 좋아."

은명이 맞은편에 앉았다.

제갈린이 분석서를 은명 앞으로 밀었다.

"이걸 봐."

은명이 펼쳤다.

'합동 전투 전후 비교 데이터.

활빈당 자유기동 + 체제파 규율방어의 시너지 효율:

독립 운용 대비 47% 상승.

콤보 전술(팔진도+전자부적) 성공률: 100%.

평균 소요 시간: 12초(초회 18초 대비 33% 개선).'

은명이 말했다.

"47%."

제갈린이 말했다.

"데이터가 증명했어."

손가락으로 그래프를 짚었다.

상승 곡선이 12월 셋째 주부터 급격히 올라가 있었다.

합동 훈련을 시작한 시점.

"너와 내가 함께 움직였을 때

따로보다 낫다는 걸."

침묵.

제갈린이 시선을 내렸다.

안경을 고쳐 썼다.

"인정해. 홍은명.

네 전술이. 네 방식이."

제갈린의 손이 분석서 위에서 멈췄다.

"내 전략과 합쳤을 때 최적이라는 걸."

눈을 피했다.

"데이터가 그렇다고 하니까."

은명이 미소 지었다.

"데이터 덕분이야?"

제갈린이 시선을 돌렸다.

"감정으로 인정하면 객관성이 없어지잖아.

데이터로 인정하는 게 나답지 않아?"

은명이 말했다.

"너답다. 진짜로."

데이터 앞에서도 은명의 이름을 떠올린 건 처음이다.

인정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데이터가 그렇다고 한 것뿐이다.

하지만 123페이지를 다 쓴 건

데이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제갈린이 일어섰다.

"다음 학기에도 합동 훈련 계속해.

데이터가 더 필요하니까."

은명이 웃었다.

"좋아."

의자에서 일어나며.

"라이벌이자 파트너로."

제갈린이 문을 향해 걸었다.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실패했다고 그만둘 거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어."

숨을 들이쉬었다.

"네가 한 말이야."

제갈린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도 그래. 멈추지 않을 거야."

문이 닫혔다.

은명이 빈 자리를 봤다.

분석서가 놓여 있던 자리에 메모가 남아 있었다.

'사본 1부. 은명용.'

미소.

같은 주 저녁. 훈련장.

달빛이 훈련장 바닥에 깔려 있었다.

테무진이 혼자 규율 훈련 중이었다.

검을 휘둘렀다. 정확한 각도. 정확한 속도.

같은 동작을 50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51번째도 1번째와 같았다. 그게 테무진이다.

발소리.

태산이 들어왔다.

어깨에 타월을 걸고.

"혼자 훈련해?

같이 할까?"

테무진이 검을 내렸다.

"원한다면."

1대1 스파링.

신호 체계 없이. 순수한 1대1.

동료가 아니라 경쟁자로.

태산이 먼저 들어갔다. 주먹.

경기가 주먹을 감쌌다.

테무진이 피했다. 반격. 검이 허리를 노렸다.

태산이 막았다. 팔에 충격이 왔다.

주고받았다.

1학기 때 태산이 완패했던 상대.

규율의 벽 앞에서 본능이 깨졌다.

하지만 이번엔 호각이었다.

12월의 전투가 태산을 바꿨다.

등을 맞대고 싸운 경험이 상대의 움직임을 읽게 해줬다.

태산의 주먹이 테무진의 어깨를 스쳤다.

테무진의 검이 태산의 옆구리를 스쳤다.

동시.

테무진이 전투 중에 말했다.

"변했어. 전태산.

1학기 때와는 다른 사람이야."

태산이 웃으며 말했다.

"니가 강해서 강해진 거야.

앞에 벽이 있으면 부수고 싶잖아."

스파링 종료. 무승부.

둘 다 주저앉았다.

땀이 달빛에 번졌다.

겨울 밤공기가 땀을 식혔다.

그때 훈련장 경보등이 한 번 깜빡였다.

붉은 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테무진이 시선을 올렸다.

"결계 정기 점검 신호야.

12월 이후로 매주 돌아간다."

태산이 중얼거렸다.

"천기 때문이지?"

테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올 수 있으니까.

천기의 로그에 '다음 접촉 예정'이 있었다고 했잖아."

경보등이 꺼졌다.

정적이 돌아왔다.

테무진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전태산."

시선이 곧았다.

"규율을 어긴 건 용서 못 한다.

너는 규율의 적이야."

태산이 말했다.

"알아."

테무진이 말을 이었다.

태산의 눈을 봤다.

"하지만 네 주먹은 인정한다.

전선에서 옆에 있으면 든든한 주먹이야."

태산이 1초 봤다.

씩 웃었다.

"그거면 됐지."

테무진이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태산이 잡았다. 일어섰다.

테무진이 말했다.

"다음에 규율 어기면 직접 벌을 준다.

이번엔 선도부장이 아니라 개인으로."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태산이 웃었다.

"기대하지 뭐.

그때도 안 지겠지만."

둘이 나란히 훈련장을 나갔다.

말없이.

달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나란히 늘렸다.

같은 주 밤. 학생회실.

형광등이 차갑게 빛났다.

벽에 학생회 연간 일정표가 걸려 있었다.

1월은 거의 비어 있었다. 겨울방학이니까.

이자벨라가 은명을 호출했다.

은명이 들어왔다.

"학생회장님이 부르시면 가야지."

이자벨라가 봤다.

"비꼬는 거야?"

은명이 말했다.

"아니. 진심이야."

이자벨라가 서류를 내밀었다.

"활빈당 활동 공식 유예 해제."

은명의 시선이 서류로 내려갔다.

교장 직인이 찍혀 있었다.

"비공인 조직 상태는 유지하되

활동 제한을 풀어."

이자벨라가 덧붙였다.

"학생회 내규 12조

'긴급 협력 단체 활동 보장' 조항.

교장 결재 완료.

12월 합동 방어 실적이 근거야.

교관진 모의전 승리 기록도 첨부했어."

은명이 서류를 봤다.

"이유가 뭐야?"

이자벨라가 말했다.

"견제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시선이 차가웠다.

"인정은 아니야.

너희가 멋대로 돌아다니면 통제가 안 되니까

차라리 공식 채널 안에 두는 게 나아.

그게 정치야."

은명이 미소 지었다.

"견제할 가치. 그거면 충분해."

이자벨라가 말했다.

"하나 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합동 훈련은 2학기에도 계속해.

천기가 다시 올 때를 대비해서."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 같이 싸우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이자벨라가 멈췄다.

"효율이 아니야."

은명을 봤다.

창밖의 눈이 이자벨라의 금발에 빛을 반사했다.

"같이 싸우면

더 많은 사람을 지킬 수 있으니까."

시선을 돌렸다.

"그것뿐이야."

이자벨라가 체스 말이 아니라 사람을 말했다.

빅토르의 체스판 위에서 자란 사람이

판을 내려다보는 대신 사람을 봤다.

이자벨라가 말했다.

"나가. 겨울방학에 학생회실 부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은명이 문 앞에서 멈췄다.

"이자벨라. 고마워."

이자벨라가 등을 보인 채.

"고맙다는 말 듣고 싶어서 한 거 아니야."

은명이 학생회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걸었다.

형광등 불빛이 복도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각자의 언어.

데이터. 주먹. 견제.

전부 같은 말이다.

인정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인정을 건넨 하루.

태블릿에 메시지가 떴다.

'은명 씨.

빅토르 드라쿨레스쿠 선배가 만나자고 합니다.

내일 오후.

제갈린을 통해 공식 채널로 요청이 왔습니다.

학생회 공식 전달 규정에 따른 중개입니다.'

발신자: 제갈린.

은명이 멈췄다.

제갈린이 중개. 빅토르가 공식 채널로 요청했다.

사적 접촉이 아니라 공식 전달 규정.

빅토르답다.

태블릿 화면 아래에 추가 메시지.

'장소: 서버실 지하 2층.

단독 면담 조건.

보안 모니터링 없음.'

은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버실 지하. 천기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곳.

보안 모니터링 없음.

왜 거기서? 그리고 왜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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