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한다
며칠이 지났다.
소문은 빨랐다.
씨앗처럼 뿌려진 게 아니라 바람처럼 스며든 것이었다.
누가 처음 말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틀 안에 모든 학년이 알았다.
"활빈당이라는 게 있대."
"비공인 조직이래."
"편입생들 도와준다고?"
"누가 만들었어?"
교실. 복도. 식당.
이름이 돌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복도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식당 줄에서 옆 사람이 물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도 이름이 나왔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른 채
이름 하나가 학교 안을 떠다녔다.
정체는 아무도 몰랐다.
네 명이라는 것도, 1학년이라는 것도 확인된 건 없었다.
하지만 이름만은 알았다.
활빈당.
교실에서 장석현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돌아다녔다.
피해자 명단을 들고 한 명씩 만났다.
명단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메모장에 체크만 했다.
메모장은 의무실에서 쓰던 것이었다.
환자 상태를 기록하던 같은 종류의 노트.
장석현에게는 동급생이었지만 동시에 환자이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
"도와줄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놈은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책상 위에 엎드린 척하며 대화를 거부했다.
"정보 더 주면 안 돼요?"
어떤 놈은 몸을 떨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옆자리를 먼저 살폈다.
주변에 누가 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
상위 세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만약 알려지면?"
"몰라요. 근데 이대로는"
장석현이 기다렸다. 강요하지 않았다.
의무실에서 배운 것이었다. 기다리는 것.
붕대를 감아주는 것보다 기다려주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장석현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누군가 입을 열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제각각이었다.
3초인 사람도 있고, 30초인 사람도 있었다.
장석현은 어느 쪽이든 기다렸다.
"……알겠어요."
장석현이 리스트를 정리했다.
7명이 연락처를 줬다. 16명은 거부했다.
그래도 0명보다는 나았다.
장석현은 메모장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를 한 번 톡톡 두드렸다. 습관이었다.
환자 기록을 넣고 나면 항상 하던 동작.
지금은 환자 기록이 아니라 동맹의 기록이었다.
장석현의 리스트가 채워질 무렵
복도 반대편에서 익숙한 금발이 다가왔다.
아서 펜드래곤 2세.
반듯한 자세, 곧은 시선.
교복 단추가 맨 위까지 잠겨 있었다.
걸음걸이에 흔들림이 없었다.
군인처럼 걷는 것이 아니라 기사처럼 걸었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전태산은 알았다.
"전태산."
"오, 아서."
"비공인 조직이라는 소문.
활빈당이 네 거냐?"
전태산이 웃었다.
부정하거나 긍정하기 전에 먼저 웃는 게 태산의 방식이었다.
"내 거는 아니야."
아서가 눈을 내리깔았다.
잠깐 입술이 움직였다가 멈췄다. 말을 고른 것이었다.
아서는 감정보다 단어를 먼저 정돈하는 사람이었다.
"기사도에 어긋나는 방법이지만. 의도는 이해한다."
전태산이 아서를 봤다.
"어긋나?"
"규칙 밖에서 움직이는 건 정도(正道)가 아니니까."
전태산이 한쪽 벽에 등을 기댔다. 팔짱을 꼈다.
가벼운 자세. 눈만은 진지했다.
아서와 대화할 때 태산은 평소보다 말을 아꼈다.
아서의 성실함을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규칙 안에서 23번 보고서 올렸는데
0번 조치됐어. 그게 정도야?"
아서가 멈췄다. 입술이 한 번 떨렸다.
아서도 그 23건을 알고 있었다.
학생회를 통해 제출된 피해 보고서. 전부 기각.
이유는 '증거 부족' 또는 '교내 자율 조정 대상'.
아서는 그 절차가 정당하다고 믿으려 했다.
하지만 정당한 절차의 결과가 0건의 조치라면
그 절차가 정당한 게 맞는 걸까.
"……그건."
"아서. 네 기사도는 존경해.
근데 규칙이 사람을 못 지키면
규칙 밖으로 나가야 할 때도 있잖아."
아서가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내려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 둘이 흘깃 쳐다봤다.
전태산과 아서가 대화하는 모습 자체가 이미 소문의 재료였다.
"너의 말에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동참하지 못한다."
"알아. 강요 안 해."
"대신 방해하지도 않겠다."
전태산이 손을 내밀었다. 아서가 잡았다.
두 사람의 악수는 짧았지만 단단했다.
전태산의 거친 손과 아서의 반듯한 손이
한 번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악수의 힘이 같았다. 서로의 무게를 인정하는 악수.
복도를 지나던 누군가가 두 사람을 봤다.
소문이 하나 더 늘어나겠지.
전태산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학생회실.
제갈린이 보고서를 올렸다.
종이가 아니라 태블릿이었다.
드론이 직접 촬영한 데이터와 CCTV 동선 분석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자벨라가 읽었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보고서를 읽는 속도가 빨랐다. 두 번 읽지 않았다.
한 번에 이해하는 사람의 속도.
'활빈당. 비공인 조직.
아직 실질적 활동 없음.
구성원 추정 4명.'
이자벨라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태블릿을 정확히 책상 중앙에 맞춰 놓았다. 정돈 습관.
"감시해. 교칙을 넘으면 즉시 해체."
제갈린이 끄덕이며 물었다.
"회장님, 한 가지.
피해 보고 23건이 전부 기각된 건 사실입니다."
이자벨라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손끝이 책상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0.5초.
그리고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알고 있어."
"그러면"
"체제 안에서 해결할 거야.
비공식 조직은 답이 아니야."
제갈린이 입을 다물었다.
드론이 한 번 깜빡였다. 주인의 감정에 반응하듯.
제갈린도 23건의 기각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제갈린의 충성은 체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자벨라에 대한 것이었다.
이자벨라가 체제를 선택한다면 제갈린은 따랐다.
이자벨라가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서 체력 훈련 중인 학생들이 작게 보였다.
땀을 흘리며 뛰는 학생들. 규칙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체제 안에서. 정말 되는 건가.
그 질문은 이자벨라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학생회장이 체제를 의심하는 순간 체제는 무너진다.
의심하되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
그것이 이자벨라가 배운 리더의 규칙이었다.
선도부.
테무진이 보고를 받았다.
"비공인 조직. 활빈당."
"단속 대상이야."
부원이 물었다.
"바로 움직일까요?"
테무진이 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펜이 책상 위에서 한 바퀴 굴러갔다.
테무진은 펜이 멈출 때까지 봤다.
사소한 것을 관찰하는 습관. 선도부장에게 필요한 자질이었다.
"아직.
실질 활동이 없으면 명분이 없어.
물리적 접촉이나 시설 무단 사용이 확인되면
그때 잡는다."
부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자 테무진이 팔짱을 꼈다.
……1학년이 만들었다고?
대담하긴 한데.
산토스 볼리바르의 얼굴이 스쳤다. 3학년.
2학년 때 혼자 반기를 들다가 선도부에 의해 제압된 놈.
그때 테무진은 직접 단속에 나섰었다.
세 번 경고하고, 네 번째에 제압했다.
경고를 세 번이나 한 건 테무진의 예의였다.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가.
테무진이 서랍에서 파일을 꺼냈다.
'전태산' — 체육관 출입 기록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야간 출입이 세 번. 전부 자정 이후.
그리고 출입 기록의 옆에 손으로 쓴 메모.
'행동 패턴: 단독 아님. 동행자 있으나 기록 추적 불가.'
관찰 대상 1순위.
테무진이 파일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잠금장치를 눌렀다. 잠금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이번에도 같을 거야.
교내 소문이 흘러다니는 동안
자정이 지난 체육관 뒤편은 조용했다.
활빈당 4인. 첫 합동 훈련.
풀밭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운동화가 풀을 밟을 때마다 축축한 소리가 났다.
풀 냄새가 밤공기에 섞였다.
낮에는 느끼지 못하는 풀의 냄새.
밤이 되면 풀은 더 진하게 숨을 쉬었다.
은명이 태블릿을 세웠다.
"실전 시뮬레이션.
가상 시나리오 — 기숙사 사각지대에서 편입생이 당하고 있다.
제한시간 30초.
도착, 제압, 대피 완료."
"판정 기준은 피해자의 안전 구역 이탈,
가해자 무력화, 선도부 노출 제로."
은명의 목소리는 작전 브리핑 같았다.
감정이 빠져 있었다. 의도적이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전달하려는 톤.
위노나가 드론을 날렸다.
"정찰 시작. 위치 확인 — 동쪽 복도, 3명."
리오가 기지개를 켰다. 근육이 늘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3명? 쉽네~"
은명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아.
소음을 내면 선도부가 와.
조용히 해결해야 해."
전태산이 이마를 짚었다. 진심으로 곤란한 표정이었다.
"조용히? 나한테 그걸 시켜?"
은명이 전태산을 봤다.
"그래서 네가 제일 어렵다고 한 거야."
리오가 낄낄 웃었다.
전태산이 리오를 한 대 치려다 말았다.
소음이 날 테니까.
시뮬레이션 시작. 은명이 카운트를 셌다.
전태산이 돌진했다. 은명이 손으로 막았다.
"거기 아니야. 우회로."
위노나가 외쳤다.
"왼쪽! 왼쪽 복도 비어 있어!"
리오가 뒤에서 퇴로를 차단했다.
카포에라 슬라이딩.
몸이 풀밭 위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잔디 냄새가 올라왔다.
리오의 움직임은 춤과 격투의 중간이었다.
아름답고, 빨랐다.
전태산이 우회해서 도착. 제압.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을 때
시뮬레이션 상의 가해자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실전이었다면.
은명이 타이머를 봤다.
"45초."
전태산이 숨을 헐떡였다.
"잡았잖아!"
"목표 30초야. 15초 초과.
그리고 네가 벽을 너무 세게 쳐서 소음까지 발생했어."
전태산이 자기 주먹을 내려다봤다.
손등에 시멘트 가루가 묻어 있었다.
선도부가 들으면 시설 파손으로 기록될 만한 흔적이었다.
"……습관이야."
위노나가 드론 데이터를 훑었다.
드론이 기록한 이동 경로가 태블릿에 빨간 선으로 그려졌다.
"전태산의 이동 루트를 바꾸면 상당히 줄일 수 있어."
리오가 손을 들었다.
"나 퇴로 차단 더 빨리 할 수 있어~!
카포에라 슬라이딩으로!"
은명이 끄덕였다.
"다시."
두 번째 시도.
38초.
아직 초과지만 줄어들고 있었다.
7초 단축. 루트 변경만으로 이 정도.
은명의 계산이 맞았다.
은명이 태블릿 분석을 봤다.
"……가능성은 있어. 훈련하면."
전태산이 풀밭에 앉았다.
이슬이 바지를 적셨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풀이 등에 닿으면서 차가운 감각이 땀을 식혀 주었다.
"매일 해?"
"격일이라고 했잖아."
리오가 뛰어올랐다.
"매일 하자~!"
위노나가 고개를 저었다.
"격일이 맞아. 체력 안배."
전태산이 은명을 봤다.
"2 대 2네. 어떡해?"
은명이 잠깐 생각했다.
"……격일. 단, 쉬는 날에는 개인 훈련."
네 명이 끄덕였다.
새벽.
훈련 후 돌아온 은명이 방에서 태블릿을 열었다.
손끝에 풀 냄새가 묻어 있었다.
손을 씻으면 사라질 냄새지만 은명은 아직 씻지 않았다.
기록을 먼저 남기고 싶었다.
활빈당 기록 정리.
'1차 시뮬레이션: 45초.
2차 시뮬레이션: 38초.
목표: 30초.
개선 필요: 전태산 이동 루트, 리오 슬라이딩 타이밍, 위노나 정찰-전달 딜레이.'
4명. 전략, 타격, 정찰, 기동.
부족하지만 시작은 할 수 있어.
전략은 짤 수 있다. 타격은 있다.
정찰은 위노나가 이미 넘치도록 커버한다.
기동은 리오가 춤추듯 해낸다.
부족한 건 경험뿐이었다.
경험은 시간이 채워줄 것이었다.
만약 시간이 있다면.
피해 데이터. 23건.
스크롤을 내렸다.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얼굴이 떠올랐다.
장석현이 의무실에서 치료했던 얼굴들.
아무도 안 움직이면, 우리가 한다.
……정말 되는 걸까.
은명은 자기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대답이 필요 없어서.
되건 안 되건 하기로 했으니까.
결과보다 시작이 먼저였다.
알림. 전태산 메시지.
'야, 오늘 재밌었어. 내일도 하자.'
은명이 답장을 쳤다.
'격일이라고 했잖아.'
전태산: '내일은 개인 훈련이니까 같이 해도 되는 거잖아.'
은명이 멈췄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격일의 기준은 합동 훈련이었으니까.
'……그건 맞는데.
같이 하면 개인 훈련이 아니잖아.'
전태산: '세부사항~'
은명이 한숨을 쉬었다.
태블릿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피곤한 얼굴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알았어. 내일 같은 시간.'
답장을 보내고 태블릿을 접었다.
작은 미소.
천장을 봤다. 어두운 방.
바깥에서 새벽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은명이 눈을 감았다.
같은 시각.
교내 보안 서버.
데이터 로그가 갱신되고 있었다.
화면 없는 서버 룸에서 팬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비공식 조직 결성 확인.
구성원 4명.
관찰 우선순위 상향.
1차 접촉 감시 대상: 전태산(격투 특기).
연관 인물: 장석현(편입생 접촉 다수).'
이 데이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은.
✦ 작가의 말
3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