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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시작 일러스트

겨울의 시작

1월 첫째 주. 율도고.

12월 종업식이 끝난 직후, 기숙사 잔류 기간.

2주간의 겨울방학 전 마지막 일주일이다.

학교에 남은 학생은 전체의 3분의 1.

대부분 해외 출신이라 귀향이 멀다.

학교가 달라져 있었다.

부서졌던 벽은 새 벽이 되었다.

콘크리트 색이 주위보다 한 톤 밝았다.

갈라진 운동장에 새 잔디가 깔렸다.

겨울이라 아직 못 자랐지만 흙은 덮였다.

꺾인 가로등은 새 가로등으로 교체됐다.

LED 조명이 이전보다 밝다.

전투의 흔적은 지워졌다.

하지만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운소하가 복구 보고서를 확인했다.

"결계 95% 복구.

서버실 완전 재구축.

학생 부상자 전원 퇴원.

올가의 왼팔도 완치 판정."

운소하가 레오나르도 교장에게 보고했다.

교장실. 벽면에 율도고 역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 학생들이 달라졌습니다."

운소하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따로 움직이던 아이들이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합동 훈련 3회, 모의전 1회 승리.

1학기 평가 D/S에서 합동 전술 A까지 올라왔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미소 지었다.

"적이 가르쳐준 거지.

직접 가르치면 안 듣더니."

레오나르도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적이 가르치면 듣는 게 학생이야."

레오나르도가 운소하를 봤다.

"하지만 적이 가르쳐준 건 시작일 뿐이야.

이 아이들이 진짜로 달라지려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해."

운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명이 활빈당 아지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벽을 봤다.

1학기, 이 벽엔 체제파 정보만 붙어 있었다.

작전_'선도부 회피 루트'. 작전_'학생회 감시 범위'.

빨간 핀과 노란 포스트잇.

적을 분석하는 벽이었다.

지금은 합동 작전도가 붙어 있었다.

'합동 모의전 배치도'. '구역 분할 전술 v3'.

그 옆에 태산과 테무진의 신호 체계 메모.

'왼=돌파 방향, 반대편 비움.'

제갈린의 필체로 쓴 콤보 데이터 시트.

'팔진도+전자부적, 성공률 100%, 소요 12초.'

적을 분석하던 벽이 아군과의 합동 작전 벽이 됐다.

은명의 손이 낡은 종이 위에 멈췄다.

학교 정원.

피에르 드 보아가 검을 닦고 있었다.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

검에 서리가 앉았다가 닦이면 사라졌다.

하얀 입김이 검날 위로 피어올랐다.

기사는 체제를 수호하는 자.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활빈당은 체제 밖에서 사람을 지켰다.

천기가 쳐들어왔을 때,

12월의 합동 방어에서 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솔로몬이 부상자를 등에 업고 뛰었다.

188cm의 체구가 교사동 계단을 세 칸씩 뛰어올랐다.

태산이 체제파 학생을 밀어서 철귀대의 타격을 대신 맞았다.

등에 맞고도 웃으며 "괜찮냐"고 물었다.

체제 밖의 사람들이 먼저 뛰어나갔다.

그것도 기사의 일이 아닌가?

피에르가 기사도 서적을 펼쳤다.

가죽 표지가 닳아 있었다.

조상, 피에르 드 보아 1세의 기록.

16세기 프랑스의 기사.

'진정한 기사는 왕관이 아니라 민초를 지키는 자.'

피에르의 손이 멈췄다.

선조도 같은 말을 했다.

왕관이 아니라 민초를.

활빈당의 활빈(活貧)과 같은 뜻이다.

500년 전의 기사와 지금의 활빈당이 같은 말을 한다.

피에르가 은명을 찾아갔다.

아지트 앞.

"홍은명."

은명이 돌아봤다.

피에르가 말했다.

"기사의 길은 하나가 아니었어.

체제를 지키는 것도.

체제 밖의 사람을 지키는 것도 기사의 일이야."

은명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 피에르.

그 말을 듣고 싶었어."

피에르가 말했다.

"동맹은 아니야."

시선이 곧았다.

검자루 위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방향이 같을 때는

함께 칼을 뽑을 수 있어."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겨울방학 첫 주. 학교 뒷산.

산토스가 은명을 불렀다.

나무 아래.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에 눈이 쌓여 있었다.

산토스의 숄더백에 짐이 반쯤 들어 있었다.

내일 떠난다.

산토스가 말했다.

"홍은명."

잠시 바람 소리만 흘렀다.

"1년 동안 잘 싸웠어."

은명이 대꾸하지 않았다.

산토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2학년 때 빅토르에게 졌어.

동료를 의심하게 만들어서 자유파가 해체됐지.

자유파 리더였던 내가 동료를 지키지 못했어.

그때 깨달았어. 혼자서는 안 된다."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하지만 너는 의심 속에서도 지켰어.

올가가 떠났을 때도 포기 안 했고.

리오를 되찾았고.

결국 전부 돌아왔어."

입꼬리가 올라갈 뻔하다가 내려갔다.

"나보다 나아."

은명이 고개를 저었다.

"산토스 선배.

선배가 실패한 게 아니에요."

은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선배가 길을 깔아놨기 때문에

우리가 서 있는 거예요.

자유파가 실패했으니까 활빈당이 배운 거예요.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걸."

산토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진지해졌다.

"혁명은 한 번에 안 돼."

바람이 멈췄다.

"살아남아야 다음이 있어."

산토스가 은명의 눈을 똑바로 봤다.

"2학년 때 기억해.

빅토르 이상의 적이 올 수도 있어.

천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때 산토스의 통신기가 울렸다.

짧은 진동.

산토스가 화면을 봤다.

눈이 가늘어졌다.

"빅토르가 교장실에 갔군."

은명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산토스가 통신기를 넣으며 말했다.

"졸업 전, 아직 정리할 게 있는 거겠지.

3학년은 3학년의 전쟁이 있어."

같은 시간. 훈련장.

마리아가 태산과 가볍게 스파링 중이었다.

마리아의 손이 빨랐다.

광탄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해류를 타고 흐르는 궤적.

태산이 막느라 바빴다.

"태산~"

마리아가 주먹을 거두며 물었다.

"1학기 때 너 본 첫인상이 뭐였는 줄 알아?"

태산이 숨 쉬며 대답했다.

"헉헉 뭐였는데요?!"

"덩치만 큰 야단법석~"

태산이 공격했다.

마리아가 피하며 웃었다.

물처럼 유연하게.

"지금은?"

태산이 물었다.

마리아가 진지해졌다.

"덩치도 크고 주먹도 센 야단법석~"

태산이 멈칫했다.

"근데 이제."

마리아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Ate(언니)가 없어도

후배들 지킬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12월에 보여줬잖아.

테무진이랑 등 맞대고 싸웠을 때.

그때 너 진짜 멋있었어."

태산이 멈췄다.

귀가 빨개졌다.

마리아가 말했다.

"졸업하면."

주먹을 내밀었다.

"후배 엄호는 네 몫이야, 태산.

잘 해~"

태산이 주먹을 쥐었다.

"네."

마리아의 주먹에 자기 주먹을 맞댔다.

"Ate."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눈이 교정에 쌓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하나둘 짐을 끌고 정문으로 향했다.

은명이 기숙사에서 짐을 싸고 있었다.

태블릿을 가방에 넣었다.

천기의 대화 로그가 저장된 태블릿.

태산이 옆방에서 나왔다.

라면 한 봉지를 들고.

"은명아. 방학 때 뭐 해?"

은명이 말했다.

"좀 생각할 게 있어. 천기가 물어본 거."

태산이 말했다.

"아 그 왜 같이 있냐는 거?"

어깨를 으쓱했다.

"라면 때문이라고 했잖아."

은명이 웃었다.

"그건 네 대답이지."

짐 가방 지퍼를 올렸다.

"내 대답은 아직이야."

태산이 말했다.

"그래? 그럼 찾아."

씩 웃었다.

"나는 대답 안 바뀌지만."

라면 봉지를 은명에게 던졌다.

"방학 때 먹어. 혼자 먹으면 맛없다는 거 알지?"

은명이 받았다.

신라면이었다.

은명이 짐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

발신: 제갈린.

'홍은명. 방학 중 시간 되면 연락해.

할 얘기가 있어.

콤보 전술 데이터 정리했다.'

은명의 발걸음이 멈췄다.

제갈린이 먼저 연락을 해오다니.

그것도 콤보 전술 데이터를 정리했다면서.

핸드폰을 넣고 다시 걸었다.

겨울 바람이 불었다.

라면 봉지가 가방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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