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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깃발 일러스트

하나의 깃발

새벽 5시, 체육관 앞 두 진영의 경계에

이자벨라가 체제파 병력 일부를 이끌고 도착했다.

선도부원 열두 명. 제갈린의 비트 12기가

머리 위에서 팔각형을 이루며 파란 빛을 내고 있었다.

은명이 서 있다.

얼굴엔 피가 묻었지만 자기 피는 아니다.

철귀대의 유압유가 피처럼 보였을 뿐이다.

전투조끼가 찢어져 있었다.

왼쪽 어깨 부분.

태산이 옆에 섰다. 주먹에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입술의 상처에서 아직 피가 비쳤다.

그래도 웃고 있었다. 이 녀석은 전투 중에도 웃는다.

이자벨라의 뒤에 테무진이 서 있었다.

칼을 옆구리에 차고. 선도부 완장이 보였다.

칼에 기름이 묻어 있었다.

교사동에서 이미 싸우고 온 것이다.

네 사람이 마주했다.

5초.

새벽의 찬 공기가 네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전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자벨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홍은명. 같은 적을 막자."

은명이 이자벨라를 봤다.

금발. 금빛 눈동자. 학생회 완장.

기율 심의에서 맞섰던 사람.

활빈당에 경고 처분을 내렸던 사람.

하지만 지금은 같은 적 앞에 서 있다.

1초.

"조건은?"

"조건 없어. 학교를 지키는 것뿐이야."

은명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 학교를 지키자."

이자벨라가 은명의 손을 잡았다.

악수는 짧았고, 두 사람 눈엔 경계가 남은 채

'같은 적'으로 묶인 임시 동맹만 성립했다.

화해가 아니다. 접착제는 '같은 적'이라는 단어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은.

제갈린이 은명을 보고 있었다.

홍은명. 지금 이 순간 네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아니라. 28%를 인정했던 그 사람이.

안경 너머 시선이 복잡했다.

테무진이 태산을 봤다.

태산이 테무진을 봤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랭킹전에서 주먹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통했다.

테무진이 말했다.

"규율을 어긴 건 잊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전선이다, 전태산."

태산이 씩 웃었다.

"같은 전선이면 됐지.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체육관 내부. 임시 사령부.

농구 골대가 접혀 있었다.

코트 한가운데에 접이식 테이블이 놓였다.

위노나의 태블릿과 제갈린의 태블릿이 나란히 놓였다.

두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테이블 위를 비추고 있었다.

은명이 위노나의 데이터를 펼쳤다.

프록시 추적 경로. 역추적 로그. 인티의 전파 감지 데이터.

제갈린이 체제파 정보를 올렸다.

적 배치 분석. 돌파 지점 평가. 전력 비교표.

두 데이터가 겹쳐지자 전장의 전체 그림이 보였다.

솔로몬이 들어왔다.

188cm의 체구가 체육관 문을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

인티가 옥상에서 전파로 감지한 정보를

직접 전달하러 내려온 것이다.

옥상에서 체육관까지. 전투 구역을 통과해서.

교복에 흠집이 있었다.

"인티의 정보입니다.

서버실에 적 지휘부가 있습니다.

철귀대 전체가 하나의 중앙 통신으로 통제되고 있고,

그 신호의 발신원이 서버실입니다."

솔로몬이 테이블 위의 지도를 가리켰다.

서버실의 위치. 교사동 지하 1층.

"통신 중추를 파괴하면 철귀대가 혼란에 빠질 겁니다.

중앙 통제가 끊기면 개별 판단 모드로 전환되는데,

그 모드에서는 학습된 전술을 쓰지 못합니다."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버실이 핵심이야.

1학기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목표는 서버실."

이자벨라가 말했다.

"하지만 서버실까지 가려면

정면의 철귀대를 돌파해야 해.

교사동 지하까지 복도 세 개. 계단 두 개.

좁은 공간이야. 방어하는 쪽이 유리해."

제갈린이 끼어들었다.

테이블 위에 아르준이 만든 적 분포도를 펼치며.

"정면 돌파는 비효율적입니다.

양동 작전을 제안합니다.

측면에서 견제하며 서버실로 우회."

은명이 끊었다.

"양동은 시간이 없어.

밖에서 결계가 계속 무너지고 있어.

교관진이 복구하고 있지만 속도가 안 맞아."

은명이 지도를 가리켰다.

"정면 돌파와 측면 기습. 동시에.

정면이 적 주력을 끌어당기고

측면이 적진을 흔드는 동안

서버실 돌입 팀이 빈틈을 뚫는다."

제갈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견 충돌. 하지만 이번엔 적의가 아니었다.

전술 논쟁이었다. 기율 심의에서의 대립과 달랐다.

같은 방향을 보며 다른 경로를 논하는 것이었다.

밖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체육관 창문이 흔들렸다.

테이블 위의 태블릿이 미끄러졌다.

시간이 없다는 증거가 소리로 들어왔다.

"정면 돌파 팀이 충분히 강하다면."

제갈린이 멈췄다.

안경을 한 번 올렸다. 천천히.

"네 방식이 더 빨라."

은명이 놀란 표정을 숨겼다.

"인정해줘서 고마워, 제갈린."

제갈린이 시선을 돌렸다.

"인정이 아니야. 계산이야."

은명이 웃지 않았다.

하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좋아."

은명이 전원을 봤다.

체육관 안에 모인 얼굴들.

활빈당. 체제파. 3학년. 2학년.

2주 전까지 싸우고 있었다.

지금은 같은 테이블을 보고 있다.

"최종 작전."

밖에서 또 한 번 충격음이 울렸다.

유리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간이 됐다.

"정면 돌파, 태산, 테무진, 산토스, 카를.

가장 강한 물리 라인.

철귀대 주력을 뚫고 교사동 입구까지 연다."

"측면 기습, 올가, 카이, 리오.

체제파 기동대 합류.

적의 측면을 찔러서 돌아서게 만든다."

"서버실 돌입, 나, 제갈린, 위노나.

두뇌 팀. 정면이 뚫리는 순간 진입한다."

"화력 지원, 인티, 마리아, 솔로몬.

인티는 태양 뜨면 합류. 지금은 옥상에서 통신 감시."

"결계 복구, 교관진."

은명이 숨을 들이쉬었다.

체육관 안이 조용해졌다.

금속 소리만 밖에서 들렸다.

"전학년 출격."

새벽 5시 30분. 정면.

태산이 달렸다.

옆에 테무진.

처음이었다. 나란히 달리는 것이.

랭킹전에서 주먹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보폭이 달랐다. 태산은 넓고, 테무진은 빠르다.

하지만 속도는 같았다.

뒤에서 산토스와 카를이 따랐다.

산토스는 전면에, 카를은 후위에.

3학년의 무게가 대형에 실렸다.

앞에 철귀대 주력이 벽처럼 서 있었다.

금속 몸체가 줄지어 빛났다.

코어 라이트가 빨간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전투 모드. 대형을 짜고 있었다.

밀집 방어. 서버실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태산이 주먹을 쥐었다.

금강불괴. 경기가 온몸을 감쌌다.

피부 아래에서 단단한 것이 올라왔다.

뼈가 강철보다 단단해지는 감각.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쿵!

철귀대 한 기가 뒤로 날아갔다.

가슴판이 찌그러져 있었다.

코어 라이트가 꺼졌다.

돌파.

테무진이 그 뒤를 따랐다.

태산이 뚫은 구멍으로 밀려드는 적을 정리했다.

칼이 정확하게 관절 사이를 찔렀다.

기계적으로. 낭비 없이.

한 칼에 하나씩.

태산이 싸우며 외쳤다.

"너 의외로 호흡 맞는데?!"

테무진이 칼을 휘둘렀다.

철귀대의 팔을 잘라냈다.

"규율적으로 움직이면 당연한 거다!"

태산이 웃었다.

"어, 그 대답 좀 멋있는데?"

"입 닫고 전진해라!"

산토스가 전면에 섰다.

3학년. 2년 치 실전이 한 걸음 한 걸음에 담겨 있었다.

자유파를 이끌었던 리더.

빅토르에게 졌고, 동료를 잃었고,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거침없이 돌진했다.

어깨로 첫 번째를 밀고,

팔꿈치로 두 번째를 치고,

발로 세 번째를 걷어찼다.

세 기가 동시에 쓰러졌다.

그리고 카를 아이젠하르트.

3학년 체제파 최강.

대열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걸음이었다. 달리지 않았다.

검을 뽑았다. 한 번 그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철귀대 넷이 동시에 쓰러졌다.

단면이 매끄러웠다.

한 칼에 넷을 벤 것이다.

"규율을 어긴 자들도, 지금은 규율 안에 있다."

카를의 무표정한 목소리.

"전선을 유지해라."

태산이 카를을 봤다.

무섭다. 체제파에도 진짜가 있다.

저건 나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측면.

올가, 카이, 리오가 체제파 기동대와 합류해

적의 측면을 찔렀다.

올가의 수호벽이 방패가 되고,

카이가 높이에서 찍고,

리오가 기동대와 함께 포위를 좁혔다.

리오의 속도가 기동대의 움직임을 끌고 갔다.

작은 체구가 오히려 유리했다.

철귀대의 팔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배치가 흔들렸다.

철귀대의 일부가 측면으로 돌아섰다.

그 틈에 솔로몬이 움직였다.

편입생들이 밀리는 측면.

인장이 빛났다.

"왕의 재판. 이 선을 넘지 못한다."

봉인 결계가 펼쳐졌다.

금빛 선이 땅 위에 그어졌다.

선에서 황금빛 입자가 피어올랐다.

에티오피아 고대 왕국의 봉인술.

솔로몬의 가문이 전해준 기술.

철귀대 세 기가 선에 부딪혔다.

멈췄다. 한 발자국도 넘지 못했다.

금속 발이 선에 닿을 때마다 금빛 불꽃이 튀었다.

활빈당 측면이 안정됐다.

후방.

마리아가 서 있었다.

밝은 웃음은 전투에서 사라진다.

냉정한 3학년의 화력.

손에 빛이 모였다.

해류의 에너지를 압축한 광탄.

공기가 손 주변에서 뜨거워졌다.

"Hala!"

광탄이 날아갔다.

직선이 아니었다. 곡선.

해류처럼 흐르다가 목표물에 꽂혔다.

철귀대 하나가 상반신이 녹았다.

금속이 흘러내렸다.

"후배들한테 손대지 마."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음 건 안 빗나가."

정면이 뚫렸다.

복도. 서버실로 향하는 길.

은명, 제갈린, 위노나.

셋이 달렸다.

복도의 비상등만 켜져 있었다.

빨간 빛이 세 사람의 얼굴에 번갈아 비쳤다.

발소리가 세 개의 리듬으로 복도에 울렸다.

정면 돌파 팀이 만든 구멍은 오래 열려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서버실 문 앞.

위노나가 태블릿을 꺼냈다.

"서버실 문, 전자 잠금이에요.

7중 암호화와 같은 체계.

하지만 이번엔 패턴을 알아요.

3겹을 뚫으면서 구조를 파악했어요."

손가락이 화면 위를 달렸다.

빠르게. 정확하게.

밤새 울면서 만들었던 역추적 데이터가

지금 이 잠금을 여는 열쇠가 됐다.

"해킹으로 열 수 있어요."

은명이 말했다.

"열어."

제갈린이 은명을 보며 말했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몰라."

은명이 미소 지었다.

"알아. 그래서 네가 같이 온 거잖아, 제갈린."

제갈린이 멈췄다.

안경 너머 시선이 흔들렸다.

1초. 고개를 끄덕였다.

비트 12기가 제갈린의 뒤에서 대기 모드로 떠올랐다.

준비 완료.

위노나가 잠금을 해제했다.

철컥.

서버실 문이 열렸다.

안에서 수십 개의 화면이 켜져 있었다.

서버 랙이 줄지어 서 있었다.

냉각 팬의 소리가 웅웅거렸다.

서늘한 공기가 복도로 밀려나왔다.

중앙에 철귀대 지휘 코어가 청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코어에서 수십 개의 케이블이 뻗어나가

서버 랙과 연결되어 있었다.

코어의 빛이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화면 하나에 아바타가 떠올랐다.

고등학생의 얼굴. 미소.

부드럽지만 공허한 음성.

"아,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홍은명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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