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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령 일러스트

칙령

대강당.

전교생이 모였다. 1교시. 수업 대신 집회.

학생회장 이자벨라가 단상에 올랐다.

은발. 곧은 눈빛.

천이백 명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은명이 2열에 앉아 있었다.

전태산이 옆에서 다리를 떨었다.

"왜 불렀대?"

"……몰라. 근데 느낌은 안 좋아."

이자벨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학생회 명의로 칙령을 발표합니다."

웅성거림이 멈췄다.

칙령.

이 학교에서 칙령은 최고 강도의 공식 명령이었다.

학칙 제12조 특별권한 조항에 근거한 학생회장 직권 발동.

"학생회 칙령 제3호.

비공인 조직 해체 명령."

숨소리가 사라졌다.

"활빈당은 48시간 이내에 자진 해산할 것.

불이행 시 구성원 전원에 대한

선도부 제재 조치를 시행합니다."

대강당이 흔들렸다.

편입생들의 얼굴이 굳었다. 누군가 입술을 깨물었다.

명문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낀 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는 학생도 있었다.

중립파는 서로를 봤다.

"오해 없으시길."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감정이 아니었다. 논리였다.

"활빈당의 의도가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간격을 두었다.

"하지만 — 비공인 조직이 치안을 대행하는 선례를 만들면,

내일은 누가 자경단을 만들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은명의 손이 무릎 위에서 움츠러들었다.

……맞는 말이야.

이자벨라의 논리가 틀리지 않아.

체제 안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체제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전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은명이 팔을 잡았다.

"지금은 안 돼."

"왜!"

"여기서 소리 지르면

이자벨라의 논리가 맞아지는 거야.

감정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조직이라고.

그 프레임에 갇혀."

전태산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앉았다. 주먹이 허벅지 위에서 하얗게 변했다.

은명이 단상의 이자벨라를 봤다.

48시간.

시간을 벌었다? 아니.

시간을 주면서 압박하는 거야.

48시간 안에 스스로 무너지든,

48시간 후에 강제로 무너뜨리든.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아.

……근데. 48시간이면 충분해.

집회가 끝나자 학교가 셋으로 나뉘었다.

교실. 편입생들.

"해체되면 어떡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학생회가 뭘 해줬는데?"

"활빈당이 없으면 또 아무도 안 움직여."

복도. 명문가 학생들.

"비공인 조직이 학교를 어지럽히는 건 맞아."

"규칙은 지켜야지.

좋은 의도라고 무슨 짓을 해도 되는 거야?"

"편입생 편만 드는 것도 문제잖아."

복도 모퉁이에서 두 쪽이 마주쳤다.

편입생 하나가 명문가 학생에게 말했다.

"규칙, 규칙 하는데 그 규칙이 우리를 지켜준 적 있어?"

명문가 학생이 눈을 좁혔다.

"규칙이 없으면 네가 지금 이 학교에 있을 수나 있겠어?"

주변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갈라놓았다.

식당. 중립파.

"둘 다 맞는 말 하는데……"

"싸우지 말고 대화하면 안 돼?"

"누가 대화하게 만드는데……"

학교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건 평화가 아니었다.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참음이 터졌다.

복도가 한산해질 무렵, 장석현이 은명을 찾아왔다.

"은명아."

"응."

"어떡해? 해체되면……"

은명이 장석현을 봤다.

장석현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해체 안 해."

"……진짜?"

"방법을 찾을 거야."

"방법이 뭔데?"

은명이 멈췄다.

"아직……"

침묵.

"48시간이면 충분해."

장석현이 고개를 숙였다.

말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활빈당이 없으면 편입생들은 다시 '참는 쪽'이 된다.

은명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해체하면 안 돼.

복도 끝. 전태산이 벽을 쳤다. 쿵.

"48시간? 그냥 안 한다고 하면 되잖아."

은명이 다가갔다.

"그러면 선도부가 와. 물리적으로.

네가 이길 수 있어?"

전태산이 멈췄다.

"……"

"테무진이야. 2학년 선도부장.

지금 네 실력으로는 이기기 어려워."

전태산의 주먹이 떨렸다.

"그러니까, 머리를 써야 해."

전태산이 은명을 봤다.

"……네 머리를 믿어야 하는 거지?"

"응."

"근데 너 지금 머리가 안 돌아가는 얼굴인데."

은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돌아가. 좀 느리게 돌아가는 것뿐이야."

학생회실.

제갈린이 이자벨라 앞에 섰다.

"칙령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자벨라가 창밖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유는."

제갈린이 태블릿을 들어 여론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홍은명은 논리로 싸우는 사람이에요.

물리적 해체만 하면 여론이 활빈당 편으로 쏠립니다."

이자벨라의 눈이 좁아졌다.

"그러면?"

"공개 토론을 제안합니다."

이자벨라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책상 위를 한 번 두드렸다.

"학생회 vs 활빈당.

전교생 앞에서.

논리로 이기면 여론까지 가져올 수 있어요."

이자벨라가 팔짱을 꼈다.

"네가 이길 수 있어?"

제갈린이 잠깐 멈췄다.

"홍은명은 강합니다."

인정.

"하지만 — 감정에 기대는 순간이 있어요.

그 틈을 찌릅니다."

이자벨라가 생각에 잠겼다.

"좋아.

단, 토론은 48시간 안에.

토론 결과와 관계없이 칙령은 유효해."

제갈린이 끄덕였다.

"물론이죠.

토론은 해체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론의 방향을 잡는 자리예요."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여 승인했다.

학생회실을 나온 제갈린이 태블릿을 열었다.

메시지. 수신자: 홍은명.

'홍은명.

공개 토론을 제안해.

주제: 비공인 조직의 정당성.

내일 방과 후.

수락하면 전교생 앞에서 네 논리를 펼칠 기회를 줄게.'

보내기.

제갈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홍은명.

네 논리가 궁금해.

감정이 아닌 이유로 규칙을 깨는 게 가능하다고 진짜 생각해?

증명해 봐.

은명의 태블릿이 울렸다.

메시지. 제갈린.

읽었다.

전태산이 옆에서 봤다.

"뭔데?"

"토론 제안. 제갈린이."

"토론?"

"전교생 앞에서.

활빈당의 정당성을 논리로 싸우겠다는 거야."

전태산이 고개를 긁적였다.

"그건 네 싸움이네."

"응."

"이길 수 있어?"

은명이 태블릿을 접었다.

"몰라."

전태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몰라?"

"제갈린은 강해.

제갈공명 64대손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야."

"그래도 너잖아."

은명이 웃었다. 약하게.

"그래도 나지. 수락해."

태블릿을 열었다. 답장.

'수락.

내일 방과 후. 대강당.'

보내기.

칙령이 내려왔다.

48시간.

활빈당이 사라지기까지 남은 시간.

하지만 제갈린이 던진 카드가 하나 더 있다.

공개 토론.

내일, 대강당에서.

지면 논리뿐 아니라 여론까지 잃는다.

48시간은 해체 유예가 아니라

활빈당의 존재 자체를 건 시간이었다.

작가의 말

3차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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