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장의 전우 선언
결투장에 노트가 등장했다.
나는 이제 알았다.
종이는 위험하다.
말보다 오래 남고, 변명보다 단단하다.
그리고 이 세계 사람들은 종이에 적힌 글을 보면 일단 믿는다.
특히 카르덴 같은 사람은 더 그렇다.
그는 노트를 가슴에 품고 결투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나는 레오나 뒤에 섰다.
어제와 같은 위치였다.
가장 안전한 자리.
그리고 지금은 가장 책임이 커 보이는 자리.
“정말 해야 합니까?”
내가 조용히 물었다.
레오나는 앞을 보며 말했다.
“카르덴이 원한다.”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너도 관련 있다.”
“저는 피해자에 가깝습니다.”
“조언자다.”
“그 단어가 더 무섭습니다.”
레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결투장 밖에는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보다 많았다.
소문이 돈 것이다.
카르덴이 루카스 경의 가르침을 실전에서 확인한다.
그런 말이 돌았을 것이다.
나는 가르친 적이 없다.
그냥 살라고 했다.
이 세계에서는 살라는 말도 수업이 된다.
카르덴이 노트를 펼쳤다.
“첫째.”
읽지 마.
제발 읽지 마.
“덤비지 않는다.”
기사들이 조용히 웅성거렸다.
레오나가 검을 들었다.
카르덴은 바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좋다.
아니, 좋으면 안 된다.
하지만 다치지는 않을 것 같다.
레오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오지 않나.”
“오늘은 먼저 덤비지 않겠습니다.”
카르덴이 진지하게 말했다.
“루카스 경께 배웠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배우라고 한 적 없습니다.”
내 말은 결투장 가장자리에서 아주 작게 사라졌다.
기사들은 듣지 않았다.
들었어도 다르게 들었을 것이다.
카르덴은 노트를 다시 봤다.
“둘째.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는 또 한 걸음 물러났다.
결투장이 넓어서 다행이었다.
좁았으면 벽까지 갔을 것이다.
레오나는 천천히 걸었다.
카르덴은 같은 속도로 물러났다.
둘 사이의 거리가 이상하게 유지됐다.
그걸 본 기사 하나가 낮게 말했다.
“거리 조절이 완벽하군.”
“단장님의 압박을 받아내지 않고 흘린다.”
“루카스 경의 방식이다.”
아니다.
내 방식은 퇴장이다.
문이 열려 있으면 나간다.
카르덴은 지금 나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카르덴이 노트를 넘겼다.
“눈이 마주치면 먼저 사과한다.”
그 순간 레오나와 카르덴의 눈이 마주쳤다.
카르덴은 즉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결투장이 멈췄다.
레오나도 멈췄다.
나도 멈췄다.
왜 사과가 이렇게 크게 들리지.
카르덴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직 부족한 제가 단장님의 귀한 시간을 빼앗고 있습니다. 또한 불필요하게 다치지 않으려 뒤로 물러난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미리?”
레오나가 물었다.
“예. 루카스 경께서 이유는 나중에 찾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건 길에서 불량배를 만났을 때 얘기다.
단장님 앞에서 예법처럼 쓰라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레오나는 검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않은 채 카르덴을 바라봤다.
카르덴은 고개를 숙였다.
검끝은 서로 닿지 않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기사들이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이 또 무서웠다.
“싸우지 않고 멈췄다.”
누군가 말했다.
“먼저 고개를 숙여 단장님의 검을 멈춰 세웠어.”
“승패보다 생환을 우선한다.”
“역시 루카스 경의 가르침이다.”
아니다.
진짜 아니다.
나는 레오나 뒤에서 작게 말했다.
“기사단장님. 지금이라도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면 안 됩니까?”
“오해인가?”
“예.”
“카르덴은 다치지 않았다.”
“그건 맞습니다.”
“검도 부딪치지 않았다.”
“그것도 맞습니다.”
“좋군.”
좋으면 안 된다.
이상하게 좋으면 더 위험하다.
카르덴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넷째.”
아직 남았나.
제발 끝났으면 했다.
“검을 쥔 손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그 말에 기사들의 시선이 동시에 레오나의 손목으로 갔다.
하얀 손수건 매듭.
아직 있었다.
아주 선명하게 있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 매듭은 이제 훈련장 장식물이 아니다.
사건 현장이다.
카르덴은 진지하게 말했다.
“필요할 때만 책임지고 손을 잡는다.”
“그 문장 빼십시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카르덴이 나를 보았다.
“왜입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한 만큼 중요하군요.”
“아니요. 위험해서 빼는 겁니다.”
“중요하지 않다면 위험하지도 않았겠지요.”
말이 안 통한다.
정말 안 통한다.
레오나가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중요하다.”
끝났다.
방금 끝났다.
내가 막으려던 문장이 단장 승인까지 받았다.
카르덴은 노트를 닫았다.
“배움은 충분합니다.”
“그럼 끝입니까?”
내 목소리에 희망이 섞였다.
카르덴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확인입니다.”
희망이 죽었다.
카르덴이 목검을 들었다.
레오나는 검을 들었다.
나는 레오나 뒤에서 한 걸음 더 숨었다.
“시작.”
레오나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카르덴은 먼저 덤비지 않았다.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레오나가 움직이면 물러났다.
눈이 마주치면 사과했다.
검이 가까워지면 몸을 낮췄다.
그 결과는 이상했다.
카르덴이 이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레오나의 검도 멈추는 일이 늘었다.
싸움이 아니라 이상한 춤 같았다.
한쪽은 무섭게 다가오고,
한쪽은 예의 바르게 도망치고,
나는 뒤에서 속이 타들어 갔다.
“좋다.”
레오나가 말했다.
카르덴이 숨을 몰아쉬며 멈췄다.
“감사합니다.”
“전보다 낫다.”
“루카스 경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바로 말했다.
“저는 그냥 안 다치는 법을 말했습니다.”
레오나가 나를 봤다.
“그게 중요하다.”
또 그 말이다.
중요하지 않게 해 달라고요.
카르덴은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 직전의 얼굴이었다.
“단장님. 오늘 저는 처음으로 단장님의 검 앞에서 뼈가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검을 맞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이 비겁함이 아니라 생환의 기술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
레오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는 점점 불길해졌다.
그녀가 동의하고 있다.
계속 동의하고 있다.
카르덴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루카스 경은 저를 살렸습니다.”
“저는 그냥 덤비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저를 살렸습니다.”
기사들이 술렁였다.
아.
이건 위험한 흐름이다.
살렸다.
전우.
손목.
매듭.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줄줄이 이어졌다.
이 훈련장 사람들도 같은 줄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급히 손을 저었다.
“여러분. 저는 아무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카르덴 경이 스스로 조심한 겁니다.”
“조심하게 만든 말이 누구의 말이지?”
레오나가 물었다.
왜 저를 공격하십니까.
“그건…… 제 말이긴 합니다만.”
“그럼 네가 막았다.”
“뭘요?”
“쓸데없는 부상.”
그 말에 기사들이 조용해졌다.
쓸데없는 부상.
기사단에서는 의외로 무거운 말인 모양이었다.
나는 주변을 보았다.
몇몇 기사들의 팔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살짝 굳는 사람도 있었다.
전부 훈련과 결투의 흔적일 것이다.
나는 그런 걸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다.
그냥 보였다.
그리고 보이니까 더 불편했다.
내가 한 말이 정말로 누군가를 덜 다치게 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문제는 좋은 일이 내 책임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이 세계는 칭찬이 곧 족쇄다.
“루카스 경.”
카르덴이 말했다.
“오늘 저는 물러났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카르덴은 노트를 내려다봤다.
“어제까지는 물러나는 것이 패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다치지 않고 다시 설 수 있었습니다.”
“그건…… 좋은 일입니다.”
“예. 그래서 배워야 합니다.”
또 배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반박이 나오지 않았다.
좋은 일이라는 걸 내가 먼저 인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저를 스승으로 삼지는 마십시오.”
“그럼 무엇으로 삼아야 합니까?”
“아무것도 삼지 마십시오.”
카르덴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건 어렵습니다.”
“왜요?”
“이미 도움이 됐으니까요.”
도움.
그 단어도 위험하다.
하지만 싫다고만 하기에는 너무 정직한 말이었다.
나는 결국 입을 닫았다.
입을 닫으면 침묵이 되고,
침묵은 또 깊은 뜻이 된다.
기사 하나가 실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허락하셨다.”
“허락 안 했습니다.”
“그럼 막지는 않으셨군.”
“막고 있습니다.”
“겸손하게.”
나는 하늘을 봤다.
결투장 천장이 있어서 하늘은 안 보였다.
막혔다.
아주 적절한 풍경이었다.
레오나가 결투장 중앙으로 걸어왔다.
기사들이 길을 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는 벽이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레오나는 내 앞에 섰다.
하얀 손수건 매듭이 눈앞에 있었다.
“루카스.”
“예.”
“너는 내 상처를 봤다.”
“피가 보여서요.”
“카르덴의 상처도 막았다.”
“그건 그냥 안 덤비라고 해서…….”
“기사단의 쓸데없는 피를 줄였다.”
말이 점점 커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제가 뭔가 대단한 사람처럼 들립니다.”
“대단하지 않아도 된다.”
레오나가 말했다.
“살아 돌아오게 하면 충분하다.”
결투장이 조용해졌다.
그 말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무거운데 틀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레오나는 천천히 기사들을 돌아봤다.
“들어라.”
기사들이 동시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선언이다.
이건 선언의 자세다.
막아야 한다.
“기사단장님, 잠깐만요.”
늦었다.
레오나가 말했다.
“루카스는 내 전우다.”
훈련장 전체가 멈췄다.
나는 숨도 멈췄다.
전우.
그 단어가 결투장 벽에 부딪혀 크게 돌아왔다.
카르덴은 눈을 크게 떴다.
기사들은 일제히 가슴에 주먹을 얹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아닙니다. 아니, 영광입니다만, 저는 기사도 아니고 검도 못 쓰고 아침에도 약하고 체력도 낮고…….”
“검만 전우의 조건은 아니다.”
레오나가 잘랐다.
짧고 단단했다.
“상처를 본다.”
그녀는 손목의 매듭을 들어 보였다.
“살 길을 말한다.”
카르덴이 고개를 숙였다.
“피를 줄인다.”
기사들이 숨을 삼켰다.
“그것도 전우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반박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전부 위험했다.
상처를 본 건 맞고,
살 길을 말한 것도 맞고,
피를 줄인 것도 맞았다.
문제는 내가 그럴듯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피하고 싶던 상황이다.
레오나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부터 루카스에게 함부로 결투를 청하지 마라.”
오.
그건 좋다.
“그를 건드리는 자는 내 전우를 건드리는 것이다.”
안 좋다.
“내 전우를 건드리는 자는 발트 기사단의 검을 상대한다.”
매우 안 좋다.
기사들이 동시에 외쳤다.
“명 받들겠습니다!”
나는 현기증이 났다.
결투 신청은 줄어들 것이다.
대신 내 이름 앞에 발트 기사단이 붙었다.
이건 보호인가.
아니면 포획인가.
“기사단장님.”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혹시 보호 대상이라는 표현이 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과하지 않다.”
“저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보호한다.”
“조용히가 사라졌습니다.”
“살 수 있다.”
살 수는 있다.
그런데 조용히는 아니다.
나는 삶과 조용함 중 하나를 고르라는 문제 앞에 섰다.
어렵다.
너무 어렵다.
기사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한 명은 결투장 입구 쪽으로 가서 섰다.
다른 한 명은 내 옆으로 왔다.
또 다른 한 명은 레오나의 명령을 기다리는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손을 저었다.
“아니, 여러분.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전우 보호 대형입니다.”
“그런 대형이 있습니까?”
“지금 생겼습니다.”
생기지 마.
내 주변에 대형이 생기지 마.
나는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기사도 같이 움직였다.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그림자보다 성실했다.
“혹시 계속 따라오십니까?”
“보호입니다.”
“감시처럼 보입니다.”
“빈틈없는 보호입니다.”
나는 레오나를 봤다.
“기사단장님. 저는 빈틈이 조금 있는 삶을 선호합니다.”
“위험하다.”
“편합니다.”
“위험하게 편한 것보다 불편하게 안전한 게 낫다.”
그 말은 또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 너무 많다.
그래서 더 도망갈 수 없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바로 옆 기사가 감동했다.
“무거운 책임을 받아들이시는군.”
“한숨입니다.”
“책임의 한숨.”
“그냥 한숨.”
“깊습니다.”
깊지 않다.
폐에서 나온 공기다.
카르덴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전우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잊어 주시면 안 됩니까?”
“그건 예의가 아닙니다.”
예의까지 나왔다.
이제 도망갈 구멍이 없다.
그때였다.
품 안쪽이 뜨거워졌다.
처음에는 식은땀 때문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진짜로 뜨거웠다.
나는 천천히 품 안을 눌렀다.
딱딱한 책등이 손끝에 닿았다.
예절서.
왜 지금.
왜 하필 지금.
나는 책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다.
꺼내면 보인다.
보이면 질문이 온다.
질문이 오면 대답해야 한다.
대답하면 또 사건이 된다.
그러니까 눌러야 했다.
나는 양손으로 옷깃을 꾹 눌렀다.
“괜찮나?”
레오나가 물었다.
“예. 아주 괜찮습니다.”
“품을 누르고 있다.”
“습관입니다.”
“이상한 습관이군.”
정확하다.
이상한 습관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한 습관이라도 필요했다.
책장이 안쪽에서 팔락였다.
팔락.
나는 더 세게 눌렀다.
팔락팔락.
카르덴이 눈을 크게 떴다.
“루카스 경. 품 안에서 무언가 울리는 것 같습니다.”
“심장입니다.”
“책장 소리 같았습니다.”
“제 심장이 요즘 종이처럼 얇아졌습니다.”
레오나가 조용히 나를 봤다.
그 시선은 거짓말을 가르는 검 같았다.
나는 바로 졌다.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지?”
“책 문제입니다.”
“예절서인가.”
“아마도요.”
“보여라.”
“안 보여드리면 안 됩니까?”
“안 된다.”
나는 졌다.
오늘 너무 많이 진다.
나는 조심스럽게 예절서를 꺼냈다.
책은 이미 붉은빛과 은빛을 번갈아 내고 있었다.
기사들이 숨을 삼켰다.
나는 작게 말했다.
“다들 너무 가까이 보지 마십시오. 이 책도 오해를 잘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책장이 혼자 넘어갔다.
[기사단장과의 전우 관계가 공식 선언되었습니다.]
[품위 유지 범위가 확장됩니다.]
[기사단 예법 반응을 감지했습니다.]
“미친 책아, 조용히 해.”
나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예절서는 조용히 하지 않았다.
붉은빛과 은빛이 섞인 작은 문장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기사들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봤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이런 불길한 일은 꼭 누군가 본다.
그리고 정말로.
아주 멀리.
마탑 꼭대기.
보랏빛 머리카락을 대충 묶은 여자가 탁자 위에 엎드려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비앙카였다.
그녀 앞의 계측 장치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비앙카는 눈을 반짝였다.
“어머.”
그녀는 장치를 톡 쳤다.
“예절서 반응?”
장치가 보랏빛으로 빙글 돌았다.
비앙카는 웃었다.
“기사단 선언에 반응했어? 그 고집 센 책이?”
그녀는 책상 위의 마력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오독.
“재밌네.”
절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생겼다.
비앙카는 허공에 손가락을 그었다.
보랏빛 글자가 생겼다.
마탑 호출장.
그 단어가 종이 위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루카스 에버렛.”
비앙카가 웃으며 말했다.
“예절서 반응을 연구해야겠어.”
보랏빛 호출장이 접히더니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결투장에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레오나 뒤는 안전하다.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마탑에서 날아오는 호출장까지 막아 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품 안의 예절서를 내려다봤다.
책은 조용했다.
방금까지 혼자 난리를 치던 책이 이제는 아주 얌전했다.
마치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이.
그 태도가 더 얄미웠다.
“왜 조용해졌습니까?”
책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책이 대답하면 그건 더 큰 문제다.
하지만 이 책은 대답하지 않아도 문제를 만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레오나는 내 앞에 있었고,
카르덴은 노트를 품고 있었고,
기사들은 나를 보호 대형 한가운데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마탑 호출장이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전우 선언은 끝이 아니었다.
다음 사건의 문을 연 것뿐이었다.
나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문은 닫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어서 더 불안했다.
이 세계는 조용할 때 다음 오해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