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식 의식의 허점
“루카스 에버렛 경, 간식의 기사.”
기록관은 아주 만족스럽게 말했다.
성가대 아이들이 작게 박수쳤다.
릴리아 성녀는 마들렌 반쪽을 든 채 환하게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간식의 기사.
이 세계는 사람에게 너무 쉽게 직함을 준다.
그리고 그 직함은 대체로 내 인생을 더 어렵게 만든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기록관님.”
“예, 에버렛 경.”
“그 칭호는 조금 과합니다.”
“겸손하시군요.”
“아닙니다. 정확한 평가입니다.”
“정확히 겸손하시군요.”
졌다.
말이 두 번 졌다.
릴리아 성녀가 마들렌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정말 천천히 먹었다.
성녀답게 먹으려는 노력이 보였다.
하지만 눈은 전혀 성녀답지 않았다.
그냥 맛있는 걸 먹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게 더 좋았다.
“성녀님.”
수행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다음 리허설 준비가 곧 시작됩니다.”
릴리아 성녀의 손이 멈췄다.
마들렌 조각은 아직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걸 보았다.
수행원도 보았다.
나도 보았다.
성당 전체가 작은 조각 하나를 두고 예의 바르게 긴장했다.
이건 이상한 그림이다.
아니, 아주 이상하다.
“다음 리허설도 금식입니까?”
내가 물었다.
수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문 2절과 손 얹기 예식 전에는 다시 입을 비우셔야 합니다.”
입을 비운다.
무서운 표현이었다.
사람은 입을 비우고도 마음이 비지 않을 수 있다.
특히 마들렌이 눈앞에 있으면 더 그렇다.
릴리아 성녀는 남은 조각을 아주 천천히 내려다봤다.
“그럼 이건…….”
“드시고 마치셔야 합니다.”
수행원이 말했다.
릴리아 성녀는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주 작게.
아주 성스럽게.
그리고 아주 아쉽게.
나는 그 표정을 봤다.
이번에는 못 본 척하지 않았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릴리아 성녀가 바로 웃었다.
“네. 괜찮아요.”
말은 괜찮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봉투 쪽으로 한 번 더 갔다.
몸은 정직하다.
성녀님 몸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수행원을 보았다.
“규칙을 정확히 여쭤봐도 됩니까?”
수행원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금식 규칙 말씀이십니까?”
“예. 의식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물도 안 됩니까?”
“물은 가능합니다.”
릴리아 성녀가 눈을 들었다.
나도 눈을 들었다.
잠깐.
가능하다고?
수행원이 덧붙였다.
“다만 너무 많이 마시면 축복문 발성이 흐트러질 수 있어 적게 드십니다.”
“따뜻한 물은요?”
“가능합니다.”
“꿀물은요?”
수행원이 멈칫했다.
릴리아 성녀도 멈칫했다.
성가대 아이들도 귀를 세웠다.
꿀물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수행원은 신중하게 말했다.
“꿀은 음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향만 낸 따뜻한 물은요?”
“향만요?”
“예. 목을 풀기 위한 따뜻한 물입니다. 삼키더라도 음식이 아니라 발성 보조에 가깝지 않습니까?”
수행원의 눈이 흔들렸다.
사제도 은쟁반을 든 채 이쪽을 봤다.
나는 말을 이었다.
“웨딩홀에서는…… 아니, 행사장에서는 긴 안내 멘트를 하기 전에 따뜻한 물을 준비합니다. 목이 잠기면 행사가 멈추니까요.”
릴리아 성녀가 작게 말했다.
“목이 잠기면 축복문도 멈춰요.”
“그렇죠.”
“축복문이 멈추면 큰일이에요.”
“예. 그래서 물은 필요합니다.”
“따뜻한 물이요?”
“가능하면요.”
릴리아 성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마들렌을 봤을 때와 다른 빛이었다.
희망.
아주 작은 희망.
수행원은 난처한 얼굴로 사제를 보았다.
사제는 턱수염을 만졌다.
“전례상 축복문 전 목을 적시는 것은 허용됩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바로 물었다.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은 안 됩니다.”
“그러면 따뜻한 물은 괜찮습니다.”
릴리아 성녀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조금 편해 보였다.
나는 이어서 물었다.
“그리고 잠시 앉는 건 가능합니까?”
수행원이 눈을 크게 떴다.
“앉는 것 말씀이십니까?”
“예. 축복문 전까지 계속 서 계실 필요가 있습니까?”
“성녀님은 보통 서 계십니다.”
보통.
위험한 말이다.
보통은 규칙이 아니다.
현대에서도 그랬다.
‘원래 이렇게 해요’는 대부분 누군가 힘들다는 말을 못 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통 그렇게 해왔다는 것과,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건 다를 수 있습니다.”
성당 안이 조용해졌다.
아차.
너무 똑똑한 척처럼 들렸나?
나는 바로 덧붙였다.
“제가 예법을 잘 몰라서 확인드리는 겁니다. 성녀님께서 잠깐 앉으셔도 의식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다면, 체력 관리를 위해 앉으시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요?”
사제는 잠시 생각했다.
릴리아 성녀는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마들렌보다 중요한 판정이 걸린 얼굴이었다.
사제가 천천히 말했다.
“금식은 육신의 욕망을 잠시 내려놓는 상징입니다.”
“예.”
“하지만 육신을 해치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릴리아 성녀의 눈이 커졌다.
나는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찾았다.
허점.
아니, 허점이라고 하면 불경하다.
정확히는 안전한 해석.
“그럼 성녀님께서 잠시 앉아 따뜻한 물로 목을 적시는 건 가능하겠습니까?”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성가대 아이들이 작게 술렁였다.
릴리아 성녀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정말요?”
사제가 부드럽게 웃었다.
“성녀님, 금식은 쓰러지기 위한 의식이 아닙니다.”
릴리아 성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풀리는 소리 같았다.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저는 가끔 그렇게 생각했어요.”
“예?”
내가 물었다.
릴리아 성녀는 베일 끝을 만졌다.
거짓말할 때 만진다고 했던 습관.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숨을 고르는 동작이었다.
“성녀답다는 건, 배고프지 않은 척하는 거라고요.”
성당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배고픈 건 성녀답지 않은 게 아니라 사람다운 겁니다.”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아.
또 크다.
이 세계에서는 이런 말이 꼭 커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았다.
릴리아 성녀는 나를 바라봤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조금 편해진 얼굴이었다.
“사람다운 것.”
“예.”
“성녀도요?”
“성녀님도요.”
“금식 중이어도요?”
“금식 중이면 더요.”
릴리아 성녀가 웃었다.
이번 웃음은 마들렌을 봤을 때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더 오래 갔다.
수녀가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작은 잔이었다.
은잔도 아니고, 성물처럼 보이는 잔도 아니었다.
그냥 손에 쥐기 좋은 흰 찻잔이었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제발 아무 의미도 없는 찻잔이길 바랐다.
릴리아 성녀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아주 조금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따뜻해요.”
“다행입니다.”
“목도 조금 풀리는 것 같아요.”
“그럼 성공입니다.”
“배는요?”
“그건 리허설 끝나고 해결해야 합니다.”
“마들렌으로요?”
“가능하면 성당 부엌에서 준비한 걸로요.”
릴리아 성녀가 살짝 실망했다.
“루카스 님의 마들렌은요?”
“제 건 이제 위험합니다.”
“성물이 될 뻔해서요?”
“기사 작위까지 만들었습니다.”
릴리아 성녀가 웃었다.
따뜻한 물을 마신 뒤라 그런지, 웃음이 조금 더 편했다.
그녀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정말 잠깐이었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닿지 않게 정리하고, 베일을 고치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그 잠깐이 이상하게 길어 보였다.
성녀가 아니라, 리허설 전에 긴장해서 쉬는 사람처럼 보였다.
릴리아 성녀는 조용히 말했다.
“루카스 님.”
“예.”
“지금은 조금 성녀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말했다.
“그럼 그냥 쉬시면 됩니다.”
“그냥요?”
“예. 쉬는 데도 예식 이름이 필요합니까?”
사제가 뒤에서 작게 기침했다.
필요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릴리아 성녀는 찻잔을 내려다봤다.
“그냥 쉬는 것.”
“예.”
“좋네요.”
그녀는 아주 작게 어깨를 내렸다.
그 동작 하나가 이상하게 크게 보였다.
성녀가 내려놓은 건 찻잔이 아니라 역할의 무게처럼 보였다.
아니다.
또 표현이 커진다.
그냥 쉬는 거다.
그냥 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 있을 뿐이다.
성가대 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
“성녀님, 저희도 따뜻한 물 마셔도 돼요?”
수녀가 웃었다.
“너희는 아까 간식 생각만 했잖니.”
“목도 말랐어요.”
“정말?”
“조금요.”
성당 안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릴리아 성녀도 웃었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나는 안심했다.
그때 사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본식 전 대기 방식도 조금 조정해야겠군요.”
본식.
그 단어가 나오자 성당 안의 공기가 살짝 단정해졌다.
나는 다시 긴장했다.
본식은 보통 리허설보다 위험하다.
웨딩홀에서도 그랬다.
리허설에서 넘어지는 건 사고다.
본식에서 넘어지면 양가 어른들이 평생 기억한다.
성당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기 방식이요?”
내가 물었다.
사제는 제단 왼쪽을 가리켰다.
“성녀님은 본식 전까지 저 좌측 대기석에서 서 계십니다.”
나는 그쪽을 보았다.
좌측 대기석.
이름은 얌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벽 가까이에 놓인 낮은 의자 하나와 얇은 발판 하나였다.
앉으라는 건지, 서 있으라는 건지, 버티라는 건지 애매했다.
릴리아 성녀는 그쪽을 보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익숙한 사람의 미소였다.
익숙해서 포기한 사람의 미소이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대기석에 앉으시면 안 됩니까?”
수행원이 바로 답했다.
“본식 전에는 성녀님께서 곧장 일어나실 수 있도록 보통 서 계십니다.”
또 보통.
보통은 오늘의 적이다.
“일어나기 쉬운 높이의 의자를 쓰면 되지 않습니까?”
수행원은 잠깐 멈췄다.
사제도 멈췄다.
릴리아 성녀는 찻잔을 든 채 나를 보았다.
나는 급히 덧붙였다.
“다과회처럼 편하게 앉자는 뜻은 아닙니다.”
성가대 아이 하나가 작게 물었다.
“다과회도 하나요?”
“안 합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너무 빨랐다.
릴리아 성녀가 작게 웃었다.
“언젠가는 할 수도 있죠.”
“성녀님.”
“마들렌이 있는 다과회라면요.”
이건 또 다른 재난의 씨앗이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사제가 턱수염을 만졌다.
“보조석을 하나 두는 건 가능하겠군요.”
“보조석이요?”
“본식 시작 직전까지 잠시 앉았다가 바로 일어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좋다.
아주 좋다.
이건 성스러운 혁명도 아니고, 예법 파괴도 아니다.
그냥 의자다.
사람은 의자에 앉을 수 있다.
성녀도 사람이다.
그러니 성녀도 앉을 수 있다.
너무 당연한 결론인데, 여기까지 오는 길이 왜 이렇게 길었을까.
수행원이 말했다.
“그럼 보조관이 성녀님 옆에서 일어나는 시간을 알려드려야 합니다.”
“보조관은 기존 수행원분이 하시면 됩니다.”
나는 바로 말했다.
이번에도 너무 빨랐다.
수행원이 나를 봤다.
릴리아 성녀도 나를 봤다.
사제도 나를 봤다.
아.
방금 너무 필사적이었나.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성당 의식 보조관을 맡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지나가던…… 아니, 간식의…… 아니, 에버렛입니다.”
말하다가 길을 잃었다.
내 자기소개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릴리아 성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루카스 님은 루카스 님이세요.”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
“저한테도요.”
그 말은 조금 조용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릴리아 성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성녀님으로 불리는 시간이 길어요. 그래서 가끔 릴리아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성당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릴리아는 웃고 있었지만, 이번 웃음은 조금 얇았다.
“그런데 루카스 님은 자꾸 이상한 걸 물어보세요. 앉아도 되냐고, 따뜻한 물은 되냐고, 끝나고 먹어도 되냐고.”
“이상했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좋았어요.”
나는 입을 닫았다.
이건 해명하면 더 이상해지는 종류의 말이다.
릴리아 성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질문들은 성녀님한테 하는 질문 같지 않았거든요.”
“그럼 누구에게 하는 질문 같았습니까?”
“저한테요.”
릴리아.
그 이름이 직접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들린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맞게 물은 것 같습니다.”
릴리아 성녀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예. 제가 의식을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대신 사람은 조금 봅니다.”
“웨딩홀에서요?”
“예. 거기서는 신부도 사람이고, 신랑도 사람이고, 하객도 사람입니다.”
“성녀도요?”
“성녀도요.”
릴리아 성녀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이번에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냥 웃음을 숨기려는 것 같았다.
성가대 아이가 작게 속삭였다.
“성녀님이 또 웃으셨어.”
수녀가 아이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봤어도 못 본 척하는 게 예의란다.”
좋은 교육이다.
아주 훌륭하다.
나는 그 수녀님께 박수치고 싶었다.
물론 참았다.
이 정도면 괜찮다.
의식은 망하지 않았다.
성녀님은 쓰러지지 않았다.
마들렌은 성물이 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기사 직함을 받지 않았다.
완벽하다.
릴리아 성녀는 보조석에 잠깐 앉아 있었다.
정말 잠깐이었다.
그런데 성가대 아이들은 그걸 신기한 장면처럼 보았다.
“성녀님도 앉으시는구나.”
아이가 속삭였다.
수녀가 작게 웃었다.
“성녀님도 다리가 있으시니까.”
아이는 크게 깨달은 얼굴이 됐다.
릴리아 성녀는 찻잔 뒤에 얼굴을 숨겼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조금 안심했다.
성스러운 존재가 의자에 앉는다고 성스러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가까워졌다.
물론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면 또 큰일이 난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 배운 가장 안전한 예절이었다.
릴리아 성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루카스 님.”
“예.”
“저 지금 조금 편해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편하다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말해도 됩니다.”
“성녀가요?”
“사람이니까요.”
릴리아 성녀는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성가대 아이들이 또 서로를 보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수녀의 교육이 빠르게 효과를 냈다.
완벽하다.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항상 그다음에 일이 생긴다.
정말로 생겼다.
성당 문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흥미로운 해석이군.”
성당 안의 공기가 정리됐다.
수행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사제도 자세를 바로 했다.
릴리아 성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천천히 돌아봤다.
흰 법복 위에 금빛 띠를 두른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많지 않아 보였지만, 주변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는 분명 높았다.
대신관.
아마도.
아니, 저 분위기면 거의 확정이다.
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무엇을 실례했지?”
대신관이 물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무섭게 차분했다.
“제가 성당 규칙을 잘 모르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르는데도 허점을 찾았나?”
“허점이라기보다는…….”
나는 말을 골랐다.
아주 조심스럽게.
“사람이 다치지 않는 방향을 여쭤본 겁니다.”
대신관의 시선이 릴리아 성녀에게 갔다.
릴리아 성녀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얼굴은 조금 편해 보였다.
대신관은 다시 나를 보았다.
“성녀의 허기를 읽고, 금식의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 육신을 보존했다.”
“읽은 건 아닙니다.”
“그럼?”
“배에서 소리가…….”
나는 말을 멈췄다.
안 된다.
그건 성녀님의 체면이다.
릴리아 성녀가 찻잔 뒤에서 작게 웃었다.
대신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말을 멈추는군.”
“예.”
“왜지?”
“말하지 않는 게 예의일 때도 있어서요.”
대신관은 잠시 나를 보았다.
성당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또 박수치지 마라.
제발 아무도 감탄하지 마라.
대신관이 천천히 말했다.
“에버렛 경.”
“예.”
“그대는 신학을 배운 적이 있나?”
“없습니다.”
“전례를 배운 적은?”
“없습니다.”
“성녀의 몸 상태를 오래 살핀 적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성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맞혔다.”
“그건 행사 진행상…….”
“좋다.”
대신관이 내 말을 끊었다.
좋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권력자가 ‘좋다’고 말하면 대체로 일이 커진다.
대신관은 사제에게 짧게 말했다.
“다음 의식 전 상담 명단에 에버렛 경을 올려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예?”
상담?
무슨 상담?
대신관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성녀의 신탁 상대 후보로.”
릴리아 성녀가 찻잔을 꼭 쥐었다.
성가대 아이들이 숨을 삼켰다.
나는 눈을 감았다.
따뜻한 물은 성공했다.
마들렌도 아직 성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신탁 후보가 됐다.
이 세계에서는 물도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