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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운명은 취소 안 됩니까 일러스트

공동 운명은 취소 안 됩니까

공동 운명.

그 말은 듣기만 해도 위험하다.

공동도 위험하고,

운명도 위험하다.

둘이 붙으면 더 위험하다.

나는 마탑 실험실 한가운데에서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루카스 에버렛.

비앙카 아르클레인.

두 이름은 아직도 살짝 겹쳐 있었다.

아주 살짝.

하지만 살짝 겹친 글자가 이렇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이거 지웁시다.”

내가 말했다.

비앙카는 유리구 옆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깃펜.

다른 손에는 마력 사탕.

그리고 얼굴에는 아주 즐거운 표정.

셋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우고 있어.”

“아직 안 지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연구 중이지.”

“연구 말고 취소를 해 주세요.”

“취소도 연구해야 해.”

나는 눈을 감았다.

마탑에서는 모든 길이 연구로 통한다.

집에 가고 싶다.

물론 집도 아니다.

요즘 나는 기사단, 성당, 마탑을 돌아다니며 남의 오해를 수습하고 있다.

내 인생은 점점 순례길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성스러움은 없고 피로만 있다.

레오나는 내 옆에 서 있었다.

손목에는 아직 하얀 손수건 매듭.

카르덴은 조금 뒤에서 노트를 들고 있었다.

나는 그 노트가 보일 때마다 불안했다.

저기에 오늘 일도 적히겠지.

[공동 운명은 취소 가능한가]

그런 제목이면 정말 울지도 모른다.

비앙카가 계약서를 톡 건드렸다.

“우선 원인을 찾자.”

“원인은 계약서 아닙니까?”

“반은 맞아.”

“나머지 반은요?”

비앙카는 내 품 쪽을 봤다.

예절서.

나는 바로 책을 눌렀다.

“책은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그게 더 수상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절서는 조용했다.

사고를 치고 나면 늘 조용하다.

이 책은 책임감이 없다.

종이 주제에.

비앙카는 책상 아래에서 작은 원형 판을 꺼냈다.

위에는 복잡한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바로 물었다.

“그건 뭡니까?”

“관계 반응 측정판.”

“이름부터 불쾌합니다.”

“정확한 이름이야.”

“정확해서 더 불쾌합니다.”

비앙카는 측정판을 계약서 옆에 놓았다.

눈금 하나가 살짝 움직였다.

나는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불안해졌다.

“방금 뭔가 움직였습니다.”

“응.”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움직여야 측정하지.”

“저는 측정되지 않는 삶을 원합니다.”

“너는 너무 늦게 말해.”

맞다.

요즘 내 인생은 대부분 늦었다.

손수건도 늦었고,

노트도 늦었고,

계약서도 늦었다.

이제는 말하기 전에 이미 측정된다.

비앙카가 손가락으로 측정판을 돌렸다.

작은 바늘이 레오나 쪽으로 움직였다.

하얀 손수건 매듭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나는 보지 않으려 했지만 봤다.

비앙카가 중얼거렸다.

“전우 계열 반응.”

“계열 만들지 마십시오.”

바늘이 카르덴 쪽으로 움직였다.

노트가 살짝 떨렸다.

“학습 계열 반응.”

“그것도 만들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바늘이 내 예절서와 계약서 사이에서 멈췄다.

비앙카의 눈이 반짝였다.

“공동 운명 계열 반응.”

“그건 특히 만들지 마십시오.”

“이미 있어.”

나는 책상에 손을 짚었다.

마탑의 가장 무서운 말은 ‘이미 있어’다.

없어야 할 것이 이미 있다.

그게 이곳의 기본값이다.

비앙카가 손가락을 튕겼다.

공중에 보랏빛 선이 생겼다.

계약서에서 시작한 선은 내 예절서로,

예절서에서 다시 레오나의 손수건 매듭으로,

그리고 카르덴의 노트 쪽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말했다.

“노트는 빼 주세요.”

카르덴이 놀란 얼굴을 했다.

“왜입니까?”

“거기까지 연결되면 일이 커집니다.”

비앙카가 웃었다.

“이미 연결됐어.”

“끊어 주세요.”

“그걸 하려는 거야.”

그녀가 보랏빛 선을 손끝으로 눌렀다.

선이 끊어지는 듯했다.

아주 잠깐.

그러다 다시 붙었다.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방금 더 진해졌는데요.”

“응.”

“왜 그렇게 태연하게 응입니까.”

“실패했으니까.”

“실패를 그렇게 산뜻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비앙카는 종이에 뭔가 적었다.

“계약 취소 시도 1회. 결속 반응 강화.”

“그런 식으로 쓰지 마십시오.”

“그럼?”

“취소 실패. 위험. 중단.”

“너는 기록도 겁먹은 사람처럼 하네.”

“겁먹은 사람이니까요.”

비앙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직한 데이터.”

데이터 하지 마.

나는 사람이야.

비앙카는 두 번째 방법을 꺼냈다.

그 전에 그녀는 내 주변에 떠 있던 보랏빛 선들을 하나씩 번호처럼 짚었다.

“첫 번째는 계약서.”

“예.”

“두 번째는 예절서.”

“그렇겠죠.”

“세 번째는 전우 매듭.”

레오나의 손목으로 시선이 갔다.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보지 말자.

보면 또 누군가 해석한다.

“네 번째는 카르덴의 노트.”

카르덴이 노트를 더 단단히 품었다.

“왜 제 노트가 들어갑니까?”

“루카스의 말을 기록했잖아.”

비앙카가 말했다.

“말이 물건에 남았고, 물건이 관계를 붙들어. 재밌지?”

“재미없습니다.”

나는 바로 말했다.

“말이 물건에 남는다는 표현부터 무섭습니다.”

“하지만 맞아.”

“맞아도 무섭습니다.”

비앙카는 웃었다.

“그래서 더 연구할 가치가 있어.”

“가치 없다고 해 주세요.”

“가치 있어.”

왜 이 사람은 항상 내가 원하는 반대말을 정확히 골라 주는가.

비앙카는 두 번째 방법을 꺼냈다.

작은 은색 칼이었다.

레오나의 시선이 바로 차가워졌다.

“칼을 왜 꺼내지?”

“마력 선을 자르는 도구야.”

“루카스에게 닿나.”

“안 닿아.”

“가까이 대지 마라.”

비앙카는 레오나를 보며 웃었다.

“보호 반응.”

“말 돌리지 마라.”

나는 둘 사이에 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서 있었다.

왜 늘 위험한 대화의 가운데에 내가 있는가.

비앙카는 칼끝으로 계약서 위의 겹친 이름을 살짝 그었다.

은빛 선이 끊겼다.

좋다.

이번엔 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예절서가 팔락였다.

[관계 훼손 방지]

“아니.”

나는 바로 말했다.

“방지하지 마.”

책은 듣지 않았다.

은빛 글자가 계약서 위로 번졌다.

끊어진 이름이 다시 붙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가까이.

루카스의 ‘스’ 끝이 비앙카의 ‘카’ 아래에 겹쳤다.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이거 더 붙었습니다.”

비앙카의 눈이 번쩍였다.

“응.”

“기뻐하지 마세요.”

“안 기뻐.”

“얼굴이 기쁜데요.”

“연구자가 새 현상을 보면 얼굴이 이렇게 돼.”

“그 얼굴을 하지 마십시오.”

레오나가 낮게 말했다.

“그만해라.”

비앙카는 칼을 내려놓았다.

“아직 한 번 더 해 볼 수 있어.”

“그만.”

레오나의 말은 짧았다.

실험실 공기가 차가워졌다.

비앙카는 레오나를 보았다.

그리고 잠깐 조용해졌다.

나는 그 짧은 정적이 의외였다.

비앙카가 처음으로 조금 멈춘 것이다.

“왜 그렇게 막아?”

비앙카가 물었다.

레오나는 답했다.

“루카스가 원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정말 정확합니다.

비앙카는 나를 봤다.

“정말 원하지 않아?”

“예.”

“나랑 이름이 겹치는 게 그렇게 싫어?”

질문이 이상하게 찔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 멈췄다.

싫다.

당연히 싫다.

그런데 그 말은 너무 세게 들릴 수 있다.

비앙카의 얼굴은 장난스러웠지만, 눈은 조금 달랐다.

호기심.

그리고 아주 조금.

기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나는 최대한 정확하게 말했다.

“싫다기보다, 제 동의 없이 관계처럼 보이는 효과가 생기는 게 곤란합니다.”

비앙카가 조용해졌다.

“관계처럼 보이는 게 곤란하다.”

“예.”

“관계 자체가 아니라?”

아.

말을 잘못 골랐다.

실험실의 공기가 이상하게 얇아졌다.

레오나는 조용했고,

카르덴은 숨을 죽였고,

비앙카는 웃지 않았다.

이럴 때가 제일 어렵다.

웃는 사람은 농담으로 밀어낼 수 있다.

정색한 사람은 밀어내면 상처가 된다.

나는 상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상처를 피하려고 말을 고르면, 이 세계는 그 말을 또 관계로 읽는다.

정말 난이도가 높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비앙카 님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비앙카가 눈을 깜빡였다.

아.

이 말도 위험했다.

나는 바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카르덴의 깃펜이 움직였다.

“적지 마십시오.”

“중요한 구분입니다.”

“구분하지 마십시오. 아니, 구분은 해야 하는데 적지는 마십시오.”

비앙카가 작게 웃었다.

그제야 실험실 공기가 조금 풀렸다.

나는 안도했다.

안도한 내가 싫었다.

비앙카가 말했다.

“뜻을 고쳐?”

“예. 고칩니다.”

“어떻게?”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레오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카르덴도 노트를 들고 있었다.

비앙카는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최악의 청중이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무슨 관계든, 서로 알고 동의한 다음에 붙는 게 맞다는 뜻입니다.”

실험실이 조용해졌다.

이번엔 나도 알았다.

방금 말은 위험했다.

하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비앙카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서로 알고 동의한 다음.”

“예.”

“너 진짜 이상해.”

“그건 자주 듣습니다.”

“아니. 좋은 쪽으로.”

그 말이 더 위험했다.

비앙카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내 계약서 고칠 때도 그랬지. 선을 긋는데, 상대가 들어올 문은 남겨.”

“저는 나갈 구멍을 만든 겁니다.”

“내가 보기엔 문이었어.”

“해석이 너무 긍정적입니다.”

“마탑주는 가능성을 봐.”

“그 가능성 때문에 제가 위험합니다.”

비앙카는 웃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를 조용히 봤다.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을 꺼냈다.

이번에는 도구 대신 질문을 꺼냈다.

“질투 반응도 확인해 볼까.”

“뭘요?”

나는 되물었다.

비앙카는 레오나의 손목 매듭을 봤다.

그리고 카르덴의 노트를 봤다.

마지막으로 내 예절서를 봤다.

“이름 겹침이 단순 계약 반응인지, 주변 관계에 따라 강화되는지 보려면 변수를 넣어야 해.”

“변수 넣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하지 마십시오.”

“내가 루카스랑 공동 운명이라고 말하면?”

레오나의 손이 검집에 닿았다.

카르덴의 깃펜이 삐끗했다.

예절서가 팔락였다.

나는 바로 외쳤다.

“그 말 취소!”

비앙카의 눈이 빛났다.

“반응했다.”

“당연히 반응하죠!”

“질투?”

“위기감입니다.”

“차이가 있어?”

“많습니다.”

비앙카는 레오나를 봤다.

레오나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비앙카는 카르덴을 봤다.

카르덴은 매우 진지했다.

“전우 관계와 공동 연구 관계가 충돌하는군요.”

“카르덴 경까지 분석하지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하지만 보입니다.”

“보지 마십시오.”

비앙카는 손뼉을 쳤다.

“좋아. 질투는 실험 변수로 쓸 수 있겠어.”

“안 됩니다.”

“왜?”

“사람 감정을 실험 변수로 쓰면 안 됩니다.”

비앙카가 멈췄다.

이번에는 정말 멈췄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까 계약서에 썼죠. 사적인 질문과 사적 관찰은 거절할 수 있다고.”

“응.”

“질투는 사적입니다.”

비앙카는 계약서를 봤다.

그녀가 직접 고친 조항.

내가 요구한 안전선.

그 선이 지금 비앙카를 막았다.

비앙카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내가 만든 계약서에 내가 막히네.”

“정확히는 같이 고친 계약서입니다.”

“같이.”

비앙카가 그 말을 반복했다.

아.

또 위험하다.

나는 급히 말했다.

“법적으로 같이입니다.”

“응. 법적으로.”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이번 웃음은 조금 달랐다.

마냥 장난스럽지만은 않았다.

비앙카는 계약서 위의 겹친 이름을 손끝으로 눌렀다.

“취소하려고 건드릴수록 강화돼.”

“그럼 어떻게 합니까?”

“당장 지우지는 못해.”

“나쁜 소식입니다.”

“대신 더 강화하지 않는 방법은 알 것 같아.”

“좋은 소식입니까?”

“아마.”

“마탑의 아마는 믿기 어렵습니다.”

비앙카는 계약서 옆에 새 조항을 썼다.

그 전에 그녀는 한참 깃펜을 들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썼을 것이다.

비앙카는 생각보다 빠른 사람이다.

말도 빠르고,

손도 빠르고,

사고도 빠르다.

그런 사람이 멈춰 있으니 실험실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안 쓰십니까?”

“문장을 고르는 중.”

“마탑주도 문장을 고릅니까?”

“문장이 법칙을 건드릴 때는 골라야지.”

그 말은 조금 의외였다.

비앙카는 아무렇게나 웃는 사람 같았지만,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조금 불편했다.

상대가 완전히 이상한 사람이면 마음껏 피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이 가끔 맞는 말을 하면, 피할 명분이 약해진다.

비앙카는 깃펜 끝으로 양피지를 톡톡 두드렸다.

“질투를 변수로 쓰지 않는다.”

“좋습니다.”

“사적 감정 반응을 관찰하지 않는다.”

“더 좋습니다.”

“단, 참여자가 먼저 말한 경우에는?”

“안 됩니다.”

“왜?”

“제가 당황해서 헛소리할 수도 있으니까요.”

비앙카가 웃었다.

“자기 헛소리까지 보호하네.”

“요즘 제 헛소리가 너무 오래 남습니다.”

카르덴의 노트가 아주 작게 움직였다.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 예시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카르덴은 노트를 조심스럽게 닫았다.

“오늘은 적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중요해서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게 더 위험합니다.”

레오나가 낮게 말했다.

“종이보다 나은가?”

“둘 다 위험합니다.”

“그럼?”

“잊어 주시면 됩니다.”

셋 다 나를 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왜 아무도 잊어 준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슬퍼졌다.

비앙카는 그 침묵을 보고 다시 웃었다.

“잊히는 건 어려울걸.”

“왜요?”

“네가 한 말이 자꾸 쓸모가 있으니까.”

그건 칭찬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나는 판단을 보류했다.

대체로 내 주변에서 쓸모 있는 말은 나를 더 바쁘게 만든다.

그러니까 반쯤 저주다.

비앙카는 드디어 새 조항을 썼다.

[공동 운명 효과의 추가 강화를 막기 위해, 사적 감정 반응을 실험 변수로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된 문장이었다.

비앙카가 제대로 썼다.

“방금 정상적이었습니다.”

“칭찬이야?”

“예.”

비앙카는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시선을 피했다.

정말 아주 잠깐.

하지만 나는 봤다.

귀 끝이 조금 붉었다.

나는 못 본 척했다.

그게 예의다.

그리고 생존이다.

예절서가 조용히 빛났다.

[사적 감정 변수 제한]

[공동 운명 효과 안정화]

겹친 이름의 빛이 조금 잦아들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비앙카가 바로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

“끝났다고 해 주세요.”

“안 끝났어.”

왜 항상 안 끝나는가.

그때였다.

실험실 바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딱.

딱.

딱.

구두굽 소리.

정확하고,

우아하고,

너무 익숙하게 불길한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계약서를 덮었다.

비앙카가 내 손을 봤다.

“왜 덮어?”

“보이면 또 해석됩니다.”

“이미 늦었을걸.”

“제발 늦지 않았다고 해 주세요.”

“마탑 문 앞에서 저 걸음이면 이미 늦었어.”

이 사람은 왜 늘 사실만 말하는가.

가끔은 거짓말도 예의다.

레오나는 한 걸음 앞으로 섰다.

카르덴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둘 뒤로 가려 했다.

비앙카가 말했다.

“숨지 마. 조사 대상이 사라지면 더 수상해.”

“저는 조사 대상이 아닙니다.”

“황실이 오면 보통 다 조사 대상이야.”

“끔찍한 상식이네요.”

복도 바깥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딱.

딱.

딱.

나는 그 리듬이 너무 반듯해서 더 싫었다.

비앙카의 실험실은 엉망인데, 저 발소리만 너무 정리되어 있었다.

정리된 사람이 엉망인 장소에 들어오면 보통 일이 더 커진다.

그리고 나는 그 가운데에 있다.

항상 그렇다.

구두굽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카르덴이 문 쪽을 봤다.

레오나도 고개를 돌렸다.

비앙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약 손님은 없는데.”

문이 열렸다.

보라색 마탑 문양 위로 황금빛 인장이 먼저 보였다.

황실.

나는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속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문 안으로 세라피나가 들어왔다.

황실의 미소.

정확한 자세.

그리고 너무 밝은 눈.

“실례하겠습니다.”

세라피나가 말했다.

“황실 조사 명목으로 왔습니다.”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더 불길했다.

황실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아도 사람을 얼게 만든다.

세라피나는 실험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계약서.

겹친 이름.

레오나의 손수건 매듭.

카르덴의 노트.

그리고 내 품 안의 예절서.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가늘어졌다.

나는 바로 알았다.

봤다.

전부 봤다.

세라피나가 웃었다.

“생각보다 자료가 많군요.”

자료라니.

나는 사람이 자료가 되는 상황에 너무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큰일이다.

정말 큰일이다.

세라피나가 황실 조사 명목으로 마탑에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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