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시 사교관 임명장
황실이 내게 사교관 임명장을 보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도망치려던 순간에 도착했다.
나는 다섯 장미 앞에서 공평 예법 반응이라는 이상한 빛을 터뜨린 직후였다.
무도회장은 술렁였고,
사람들은 나를 봤고,
예절서는 조용한 척했다.
나는 그 틈을 봤다.
문.
아주 멀리 있었지만, 문은 문이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도 못 보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냥 숨을 고르는 사람처럼.
그러자 예절서가 품 안에서 팔락였다.
[공식 사교 절차 중 무단 이탈은 결례입니다.]
“숨 쉬러 가는 겁니다.”
나는 작게 말했다.
[무단 이탈입니다.]
“너는 왜 내 호흡까지 관리하냐.”
나는 그래도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때 무도회장 문이 열렸다.
붉은 봉투를 든 황실 전령이 들어왔다.
내가 향하던 바로 그 문으로.
도망길이 전달 경로가 됐다.
나는 멈췄다.
황실 전령은 정확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 순간 알았다.
막혔다.
황실은 문까지 쓴다.
나는 붉은 봉투를 바라봤다.
받으면 끝이다.
안 받아도 끝이다.
요즘 내 인생은 선택지가 둘이어도 결과가 같다.
다만 어느 쪽이 더 품위 있게 망하느냐의 차이만 있다.
예절서가 품 안에서 아주 작게 팔락였다.
[황실 임명장 수령 거부는 중대한 결례입니다.]
알고 있다.
방금 봤다.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책은 늘 내가 싫어하는 말을 반복한다.
마치 친절처럼.
전령은 붉은 봉투를 내밀고 있었다.
무도회장은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다섯 장미 때문에 술렁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숨까지 아껴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었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혹시 그 사이 누가 말려 주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세상은 내가 망하는 순간에는 이상하게 예의가 바르다.
나는 봉투를 받았다.
그 순간 무도회장 어딘가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내가 임명장을 받은 게 아니라, 무슨 왕관이라도 쓴 것처럼.
아니다.
왕관도 싫다.
임명장도 싫다.
둘 다 머리 위에 얹히면 무겁다.
전령이 고개를 숙였다.
“황실 임시 사교관 임명을 축하드립니다.”
축하하지 마십시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입 밖으로 내면 결례다.
예절서는 이미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무도회장에서는 박수도 나오지 않았다.
축하한다고 했는데 아무도 바로 박수 치지 못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사람들이 이게 박수칠 일인지, 숨죽일 일인지 계산하고 있었다.
사교계 사람들은 감정도 계산한 뒤 꺼내는 모양이다.
나는 계산할 것도 없었다.
싫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싫다는 감정은 공식 문장에 넣기 어렵다.
‘싫으니 안 하겠습니다.’
얼마나 명확한가.
그런데 이 세계는 명확한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돌려 말해야 예의고,
돌려 말하면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생기면 임명장이 온다.
완벽한 함정이다.
나는 봉투를 내려다봤다.
붉은 밀랍 인장.
황금 장미 문양.
그리고 내 이름.
루카스 에버렛.
요즘 내 이름은 너무 성실하게 적힌다.
나는 내 이름이 이렇게 부지런한 줄 몰랐다.
세라피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루카스 님.”
“예.”
“놀라셨겠지만, 이건 보호 조치이기도 합니다.”
보호.
그 단어가 나왔다.
위험한 단어다.
보호는 보통 묶는 것과 닮아 있다.
보호라는 말은 부드럽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묶는다는 말은 듣는 순간 경계할 수 있다.
하지만 보호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감사해야 할 것 같은 기분까지 준다.
그래서 더 무섭다.
나는 세라피나를 봤다.
그녀는 정말 나를 해치려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다.
해치려는 사람이라면 피하면 된다.
도우려는 사람은 피하기 어렵다.
특히 그 도움이 황실 인장까지 달고 오면 더더욱.
“보호라면 거절해도 됩니까?”
세라피나는 미소를 유지했다.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라서요.”
“제가 필요하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황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더 나쁘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는 보호도 부담스러운데, 황실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보호라니.
나는 붉은 봉투를 살짝 들어 보였다.
“이걸 받으면 정확히 뭘 해야 합니까?”
세라피나는 잠깐 대답을 골랐다.
그 짧은 침묵이 불안했다.
대답이 좋으면 바로 나온다.
대답을 고르는 건 보통 나쁜 소식을 예쁘게 포장하는 과정이다.
“황실 사교 질서 조정에 협조하시면 됩니다.”
“조정은 싫다고 했습니다.”
“협조입니다.”
“협조도 싫습니다.”
“임시입니다.”
“임시가 제일 오래갑니다.”
세라피나의 미소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맞다.
그 말은 맞았다.
임시라는 말은 사람을 안심시키려고 붙지만, 이상하게 오래 산다.
임시 자리.
임시 역할.
임시 보호.
그리고 어느 날 모두가 그걸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여긴다.
나는 속지 않는다.
아마도.
비앙카가 옆에서 붉은 봉투를 보며 말했다.
“임명장에도 반응이 있네.”
“보지 마십시오.”
“이미 보였어.”
“보이면 안 됩니다.”
“봉투가 빛나잖아.”
나는 봉투를 내려다봤다.
정말 빛났다.
아주 희미하게.
붉은빛이 내 손끝을 따라 번졌다.
나는 바로 손을 뗄 뻔했다.
예절서가 팔락였다.
[황실 임명장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중대한 결례입니다.]
“떨어뜨리지도 못합니까?”
[예.]
“대답하지 마.”
책은 조용해졌다.
얄밉다.
말을 걸면 안 듣고, 묻지 않으면 대답한다.
레오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위험한가.”
“임명장이요?”
“황실이 너를 묶는 방식.”
무도회장이라서 그런지, 레오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하지만 단단했다.
나는 그 말에 조금 안도할 뻔했다.
누군가 이걸 위험하다고 말해 주는 건 중요하다.
전부 축하한다고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니까.
세라피나는 레오나를 보았다.
“묶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
“보호하는 명분입니다.”
레오나의 눈이 차가워졌다.
“명분은 묶을 때도 쓴다.”
무도회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황녀와 기사단장.
둘이 한 문장씩 주고받았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그 사이에 있었다.
왜 늘 사이에 있는가.
나는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나를 가운데에 세운다.
아이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임시 사교관이라면, 장미 무도회에서 벌어진 일을 공식 절차 안에 넣겠다는 뜻이겠군요.”
“넣지 마십시오.”
나는 바로 말했다.
아이리스는 나를 보았다.
“루카스 님께 드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넣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이리스는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은 나를 나무라는 게 아니었다.
생각하는 침묵이었다.
“공식 절차 안에 들어가면, 루카스 님을 함부로 해석하기 어려워집니다.”
“그건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동시에 빠져나가기도 어려워지겠지요.”
“그래서 나쁜 말이네요.”
아이리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정직해서 더 아팠다.
그녀는 푸른 장미를 내려다봤다.
“그래도 무방비로 소문 한가운데 서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저는 소문 밖에 서고 싶습니다.”
“이미 안쪽입니다.”
모두가 왜 이렇게 정확한가.
정확한 말은 사람을 도망치지 못하게 한다.
릴리아가 조심스럽게 장미를 내렸다.
“그러면 루카스 님이 사교계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는 건가요?”
“안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세라피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정확히는 황실 보호 아래입니다.”
“더 안 들어가겠습니다.”
비앙카가 웃었다.
“들어갔네.”
“아직 안 들어갔습니다.”
“봉투 받았잖아.”
나는 봉투를 봤다.
받았다.
망했다.
카르덴이 노트를 들고 있었다.
“임시 사교관. 다섯 장미 사이의 공평 조정자.”
“적지 마십시오.”
“공식 명칭은 아닙니다.”
“비공식도 적지 마십시오.”
“하지만 상황 설명에는 적합합니다.”
“상황을 설명하지 마십시오. 설명하면 사실처럼 됩니다.”
카르덴은 멈췄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사실이 되지 않게, 임시 가설로 적겠습니다.”
“적지 말라고요.”
“이미 늦었습니다.”
또 늦었다.
카르덴의 늦음은 이제 세계 법칙 같다.
나는 붉은 봉투를 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라피나가 말했다.
“내용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지금요?”
“예.”
“사람들 앞에서요?”
“공식 전달이니까요.”
공식.
그 단어가 또 나왔다.
나는 공식이 싫다.
비공식도 싫지만, 공식은 특히 싫다.
공식은 빠져나갈 구멍을 없앤다.
봉투를 열기 전까지는 아직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읽지 않은 문장은 내 책임이 아니다.
아마도.
하지만 읽는 순간, 문장은 나를 붙잡는다.
이 세계의 문장은 유난히 끈질기다.
계약서도 그랬고,
초대장도 그랬고,
이제 임명장도 그럴 것이다.
나는 봉투를 조금 들어 올렸다.
붉은 밀랍이 반짝였다.
“혹시 봉투를 열지 않으면 효력이 없습니까?”
나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었다.
세라피나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이 나빴다.
“효력은 전달 시점에 발생합니다.”
“열기 전인데요.”
“확인은 별도 절차입니다.”
“그러면 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확인하지 않으면 더 큰 결례입니다.”
또 막혔다.
문도 막히고,
창문도 막히고,
봉투도 막힌다.
비앙카가 옆에서 말했다.
“열어 봐. 반응 궁금해.”
“저는 안 궁금합니다.”
“나는 궁금해.”
“제 임명장입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하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마탑과 황실과 예절서가 한자리에 있으면, 사람 하나 빠져나갈 틈이 없다.
나는 결국 봉투를 열었다.
안쪽에는 두꺼운 임명장이 있었다.
금빛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나는 첫 줄부터 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예절서가 팔락였다.
[임명장 수령자는 주요 문구를 확인하십시오.]
“너는 왜 황실 편이냐.”
책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읽었다.
[루카스 에버렛을 황실 임시 사교관으로 임명한다.]
싫다.
다음 줄.
[장미 무도회 및 관련 사교 갈등의 원활한 조정을 위임한다.]
더 싫다.
조정.
갈등.
위임.
내가 피하고 싶은 단어들이 한 줄에 다 모여 있었다.
문장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나.
나는 임명장을 조금 멀리했다.
글자가 작아지면 부담도 줄어들까 싶었다.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세라피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잘 보이지 않으십니까?”
“너무 잘 보여서 문제입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다행이 아닙니다.”
비앙카가 옆에서 말했다.
“사교 갈등 조정이라. 딱 오늘 상황이네.”
“오늘 상황을 제 직업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임시라잖아.”
“임시가 오래간다고 했습니다.”
카르덴이 진지하게 끼어들었다.
“임시 사교관이라면, 첫 춤 문제를 공식적으로 조정할 권한이 생깁니다.”
“권한 싫습니다.”
“책임도 생깁니다.”
“더 싫습니다.”
“하지만 모두를 공평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제일 싫습니다.”
공평.
오늘 하루 그 단어가 너무 많이 나왔다.
공평은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리면 도망칠 수 없는 족쇄가 된다.
다음 줄.
[본 임명은 황실 보호 및 질서 유지를 위한 임시 조치로 한다.]
임시.
또 임시.
나는 임명장을 덮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무도회장이 다시 술렁였다.
세라피나가 나를 보았다.
“지금 바로요?”
“예.”
“이 자리에서요?”
“가능하면 지금 바로.”
예절서가 팔락였다.
[황실 임명 거절은 사유와 예법을 갖춘 문서로 제출하십시오.]
문서.
싫다.
하지만 이건 길이다.
드디어 길이다.
나는 바로 말했다.
“그럼 쓰겠습니다.”
비앙카가 눈을 빛냈다.
“여기서?”
“예.”
“무도회장 한가운데서?”
“예.”
“좋네.”
“좋지 않습니다.”
카르덴이 이미 깃펜을 꺼냈다.
“제가 받아 적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직접 씁니다.”
“왜입니까?”
“받아 적으면 또 이상하게 남습니다.”
카르덴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세라피나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작은 필기대가 들어왔다.
왜 준비되어 있습니까.
황실은 왜 이런 것도 빠릅니까.
필기대는 작고 우아했다.
얇은 다리에 금빛 장식.
윗면에는 새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잉크병도 있었다.
깃펜도 있었다.
심지어 여분의 모래까지 있었다.
완벽했다.
너무 완벽했다.
거절을 예상하고 준비한 것처럼.
나는 세라피나를 봤다.
세라피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황실은 여러 상황을 대비합니다.”
“제 거절도 상황에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가능성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 제가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된 겁니까?”
“예의 바른 사람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합니다.”
이건 칭찬인가.
아닌 것 같다.
예측 가능한 사람은 조종되기 쉽다.
나는 갑자기 무례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예절서가 품 안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무례도 쉽지 않다.
나는 필기대 앞에 섰다.
무도회장 한가운데.
다섯 장미 앞.
황실 전령 앞.
그리고 수많은 시선 앞.
나는 거절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전에 깃펜을 한 번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사람들이 보고 있어서가 아니다.
아니, 그것도 맞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중한 거절문이라는 게 너무 어렵다.
강하게 쓰면 불충이고,
부드럽게 쓰면 수락처럼 읽힌다.
짧게 쓰면 무례하고,
길게 쓰면 충성스럽다.
나는 어디로 가도 지뢰밭이었다.
비앙카가 옆에서 속삭였다.
“필요하면 문장 봐 줄게.”
“안 됩니다.”
“왜?”
“비앙카 님이 보면 연구 협조문이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안 됩니다.”
카르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보면 충성심이 덜 드러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말부터 이미 충성심이 드러납니다.”
릴리아가 작게 말했다.
“기도문처럼 쓰면…….”
“성스러워지면 더 안 됩니다.”
아이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차갑고 간결하게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나는 잠깐 흔들렸다.
그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세라피나가 바로 말했다.
“황실에는 차갑고 간결한 거절이 도전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끝났다.
모든 문체가 막혔다.
나는 결국 내 방식으로 쓰기로 했다.
가장 정중하고,
가장 낮추고,
가장 안전하게.
안전하다고 믿으면서.
나는 거절문을 쓰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황실에 아룁니다.]
예절서가 조용했다.
좋다.
[소인은 아직 사교관이라는 막중한 역할을 감당할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절서가 살짝 빛났다.
불안하다.
[그러므로 황실의 크나큰 배려와 보호에 깊이 감사드리오나, 임시 사교관 임명을 정중히 사양하고자 합니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됐다.
정중하다.
거절이다.
완벽하다.
그 순간 예절서가 빨갛게 빛났다.
[경고]
나는 손을 멈췄다.
“왜.”
[해당 거절문은 충성 서약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습니다.]
무도회장이 조용해졌다.
빨간빛은 너무 선명했다.
무도회장 조명보다,
황실 인장보다,
다섯 장미보다 더 눈에 띄었다.
하필 경고가 이렇게 공개적일 필요가 있었나.
나는 예절서를 손으로 덮으려 했다.
[경고 은폐는 추가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정말 너무한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비앙카는 이미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뭐라고 떴어?”
“안 보셔도 됩니다.”
“빨간 경고잖아. 봐야지.”
“남의 경고입니다.”
“공동연구 대상 경고지.”
“공동연구 아닙니다.”
“아직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르덴은 숨을 멈춘 채 노트를 보고 있었다.
적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카르덴 경.”
“예.”
“적지 마십시오.”
“이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적지 마십시오.”
“하지만 충성 서약으로 해석될 위험이라면……”
“소리 내서 읽지 마십시오!”
늦었다.
무도회장 앞줄 몇 명이 이미 들었다.
술렁임이 퍼졌다.
나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뭐라고?”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무도회장은 너무 조용해서, 작은 목소리도 멀리 갔다.
몇 사람이 다시 술렁였다.
충성 서약.
그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굴러갔다.
나는 그걸 느꼈다.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느꼈다.
사교계의 소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발을 가진 것 같다.
한 번 바닥에 떨어지면 알아서 달린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제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달리고 있었다.
예절서는 다시 빨간 경고를 띄웠다.
[황실의 크나큰 배려와 보호에 깊이 감사]
[막중한 역할을 감당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 봉사하겠다는 의미로 오독 가능]
나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아니.
이건 아니다.
거절문을 쓰자 예절서가 빨간 경고를 띄운다.
나는 깃펜을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고쳐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감사를 빼면 무례하고,
감사를 넣으면 충성이고,
부족함을 말하면 겸손이고,
겸손은 또 봉사 의지로 읽힌다.
거절문이 아니라 미로다.
그리고 나는 미로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다.
무도회장 한가운데서.
다섯 장미 앞에서.
황실 임명장 앞에서.
예절서의 빨간 경고 앞에서.
정말, 아주 정중하게 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