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녀님 귀가 왜 붉으세요
“공녀님, 귀가 조금 붉으십니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시험장은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찻잔의 김마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루카스는 그 정적 속에서 아주 빠르게 오늘의 새 예법을 익혔다.
귀 색은 말하지 않는다.
공개석상에서는 더더욱 말하지 않는다.
공녀님 귀 색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외워라, 루카스 에버렛.
이건 생존 문제다.
아이리스는 잔을 든 채 멈춰 있었다. 손가락은 흰 찻잔 손잡이를 감싸고 있었고, 시선은 루카스를 향해 있었다.
목소리는 차가웠다.
“에버렛 경.”
“예.”
“그런 것은 공개석상에서 말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죄송합니다.”
루카스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사과가 바닥에 먼저 닿을 뻔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이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세라피나는 부채를 반쯤 펼친 채 입가를 가렸다. 웃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녀가 저렇게 눈을 반짝일 때, 대개 루카스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미라벨은 펜을 들었다.
들었다가 멈췄다.
멈췄다가 다시 들었다.
기자로서의 양심과 사교면의 욕망이 펜촉 끝에서 싸우는 중이었다.
카르덴은 이미 작게 중얼거렸다.
“상대의 변화는 가장 먼저 알아차리되, 공개 언급은 금한다…….”
“적지 마십시오.”
루카스가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카르덴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적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그게 더 나쁜 것 같은데.
루카스는 식은땀이 날 뻔했다.
올덴 백작은 문서를 든 채 기침했다.
“흠. 일단 1차 검증은 종료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말에 시험장 안의 공기가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움직인 공기는 전부 아이리스의 귀 쪽으로 몰려가는 것 같았다.
루카스는 보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란 이상하다.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 보인다.
아이리스의 귀는 아직 붉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루카스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원인을 짚었다.
덥다.
긴장했다.
차가 안 맞았다.
혹은 내가 방금 공개석상에서 귀 색을 말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죽었다.
마지막 가능성이 제일 컸다.
루카스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다.
도망치려는 게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그저 시야에서 조금 빠지려는 시도였다. 사람이 당황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유를 캐묻는 사람이 아니라, 잠깐 숨 돌릴 공간이다.
웨딩홀 알바 시절에도 그랬다.
신부 어머니가 울음을 참다가 얼굴이 붉어지면, 왜 우시냐고 묻지 않았다. 물을 드리고, 휴지를 놓고, 다른 하객의 시선을 테이블 번호표로 돌렸다.
사회자는 감동 멘트를 길게 했고, 스태프는 조용히 물컵을 채웠다.
이미 물잔은 있었다.
14화에서 그가 아이리스 옆 작은 테이블에 놓았던 잔이었다. 아이리스가 방금 받아 들었던 그 잔.
문제는 지금 위치였다.
그녀가 잔을 내려놓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쉽게 따라붙을 자리였다.
루카스는 다시 새 물을 청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손을 뻗어 그 잔의 위치만 조금 바꿨다.
올덴 백작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잔의 위치를 바꾸시는 겁니까, 에버렛 경?”
“예. 아니, 특별한 뜻은 아닙니다. 다만 차가 조금 진할 수 있고, 방 안이 덥기도 해서…….”
말이 길어졌다.
위험했다.
루카스는 얼른 줄였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곁에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리스의 손가락이 물잔 근처에서 아주 조금 멈췄다.
세라피나가 낮게 웃었다.
“루카스 경은 참 이상해.”
“제가 또 실례를…….”
“아니. 이상하게 정확하지.”
정확하다니.
무엇이.
루카스는 지금 자신이 틀린 예법을 정확하게 밟고 있는 기분이었다.
루카스는 그 잔을 바로 아이리스 앞에 밀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오른쪽, 손을 뻗으면 닿지만 굳이 마시지 않아도 되는 거리에 놓았다.
권하는 모양이 되면 부담이다.
하지만 아예 멀면 필요할 때 불편하다.
그래서 딱 그 중간.
행사장에서는 이런 위치가 중요했다. 손님이 직접 요청하지 않아도 가져갈 수 있고, 원치 않으면 그냥 둘 수 있는 자리.
루카스에게는 평범한 배치였다.
그러나 시험장 안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요하지 않는 거리.”
위원 중 한 명이 작게 말했다.
“거절의 체면을 남기는 배치군.”
또 다른 위원이 받아 적었다.
루카스는 속으로 외쳤다.
아닙니다.
행사장에서는 오른손으로 집기 편한 자리였을 뿐이다.
미라벨의 펜이 결국 움직였다.
사각.
사각사각.
루카스는 그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미라벨 양.”
“아, 저는 아무것도 안 썼습니다.”
“펜이 움직였습니다.”
“펜이 독자적으로 감동했습니다.”
“펜을 내려놓아 주십시오.”
“그럼 감동이 식습니다.”
세라피나가 부채 뒤에서 웃었다.
아이리스는 여전히 정면을 보고 있었다. 다만 손끝이 물잔 쪽으로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루카스는 그 작은 망설임을 보았다.
그리고 보지 않은 척했다.
그는 옆에 있던 작은 티스푼을 일부러 건드렸다.
딸랑.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죄송합니다.”
루카스는 몸을 낮춰 티스푼을 바로잡았다.
“제가 긴장해서 손이 미끄러졌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긴장했다.
손도 미끄러질 뻔했다.
그 틈에 아이리스는 물잔을 들어 아주 조금 마셨다.
아무도 본 척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루카스가 모두에게 볼 일을 만들어 줬다.
위원들은 티스푼의 방향을 보았다.
미라벨은 펜을 숨기는 척했다.
카르덴은 뭔가를 마음속에 새겼다.
세라피나는 다 봤다.
그리고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리스는 잔을 내려놓았다.
귀의 붉은 기가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루카스는 안도했다.
살았다.
아마도.
그때 올덴 백작이 조용히 말했다.
“방금은 실수입니까?”
루카스는 고개를 들었다.
“예?”
“티스푼 말입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올덴 백작은 티스푼을 보았다.
“일부러 시선을 옮긴 것이 아니라?”
루카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들켰다.
서비스직의 작은 꼼수가 200년 전 왕실 예법 다음으로 들켰다.
하지만 여기서 `공녀님이 물을 드실 수 있게 시선을 돌렸습니다`라고 말하면 더 죽는다.
그건 귀 색보다 더 위험한 발언이었다.
루카스는 최대한 평범하게 답했다.
“시험장 분위기가 조금 굳은 듯하여, 제가 먼저 실수한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덴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인의 체면을 낮춰 숙녀의 체면을 높인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오래된 방식입니다.”
또 오래됐다고요.
루카스는 이제 오래된 것이 무서웠다.
이 세계에서 오래된 것은 대개 귀족 예법이거나 함정이었다.
카르덴은 감격한 얼굴이었다.
“스승님, 본인을 낮춰 상대의 시선을 지운다…….”
“카르덴 경.”
“예.”
“그건 연애술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냥…….”
루카스는 잠시 멈췄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하지?
행사장 수습?
손님 응대?
사회생활?
이 중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았다.
“그냥 예의입니다.”
결국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아이리스가 루카스를 보았다.
정확히는 조금 더 오래 보았다.
루카스는 그 시선을 느끼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물론 제가 처음 발언은 예의에 어긋났습니다. 그 점은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에버렛 경.”
아이리스가 말했다.
루카스는 긴장했다.
“예, 공녀님.”
“잠시만.”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시험장 안의 사람들이 모두 반응했다.
세라피나는 부채를 접었다.
미라벨은 펜을 숨겼다. 숨겼지만 손은 이미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르덴은 자세를 바로했다.
올덴 백작은 문서를 내려놓았다.
아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 쪽으로.”
“예.”
루카스는 따라갔다.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시험장 한쪽의 창가. 모두가 볼 수는 있지만, 작은 목소리까지 들리지는 않는 거리였다.
아이리스는 창밖을 보았다.
정원에는 햇빛이 얌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시험장 안의 공기보다 훨씬 평화로웠다.
아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웃지 않으셨습니까?”
“예?”
“제 약점을 보셨습니다.”
루카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약점.
그 단어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이리스는 완벽한 공녀였다. 모두가 그렇게 봤다. 차가운 사람, 빈틈없는 사람, 실수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 귀가 붉어진 것조차 그녀에게는 약점일 수 있었다.
루카스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리스의 눈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럼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불편해 보이셨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아이리스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루카스는 더 설명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했다. 그는 원래 당황하면 설명이 길어지는 인간이었다.
“사람이 불편할 때는 이유를 바로 묻는 것보다, 먼저 물이나 자리를 챙기는 편이 낫습니다.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특히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아이리스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
다만 손이 창틀 위에 놓였다.
천천히.
“그런 것을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일.”
“예.”
루카스는 순간 멈췄다.
귀족 영식이 어디서 일했다고 말하면 안 되는가?
이미 늦었다.
그는 급히 말을 고쳤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도운 적이 많았습니다. 하객…… 아니, 손님들이 많을 때는 작은 일로도 크게 불편해지니까요.”
아이리스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저는 늘 보이지 않아야 했습니다.”
루카스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흔들리지 않는 것. 당황하지 않는 것. 실수하지 않는 것.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
“그런데 에버렛 경은 보셨습니다.”
루카스는 이번에는 바로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하면, 본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될 수 있었다.
대신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였다고 해서, 모두에게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루카스는 자신이 방금 또 위험한 말을 했다는 걸 느꼈다.
말이 너무 그럴듯했다.
이 세계에서 그럴듯한 말은 거의 항상 사건이 된다.
그는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저는 그냥 물잔을 놓은 것뿐입니다.”
아이리스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정말 아주 조금.
바람이 불면 놓칠 정도였다.
하지만 루카스는 봤다.
미소였다.
작은 미소.
차갑고 완벽한 공녀의 얼굴에 잠깐 생긴, 믿기 어려울 만큼 조용한 미소.
루카스는 안도했다.
다행이다.
화가 풀리셨나 보다.
그 정도로 생각했다.
멀리서 세라피나는 그 미소를 보았다.
그리고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아.”
짧은 탄식이었다.
미라벨은 못 참았다.
“방금 웃으셨죠?”
아이리스의 미소가 즉시 사라졌다.
시험장 온도가 다시 내려갔다.
미라벨은 펜을 뒤로 숨겼다.
“아니, 저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려던 것이지 사교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라피나가 웃었다.
“미라벨, 그 변명은 제목감이 아니야.”
“그럼 고치겠습니다. `차가운 공녀, 창가에서 처음으로 봄을 보이다`.”
“너무 시적이야.”
“`붉어진 귀, 그리고 물 한 잔`.”
“그건 팔리겠네.”
“전하!”
루카스가 놀라서 외쳤다.
세라피나는 아무렇지 않게 부채를 흔들었다.
“왜? 팔리는 제목은 좋은 제목이잖아.”
“팔리면 안 되는 내용입니다.”
“그럼 더 팔리겠네.”
루카스는 머리가 아파졌다.
그는 급히 다른 방법을 찾았다.
기사 제목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재미없는 사실을 잔뜩 제공하는 것이다.
행사장에서 클레임이 터질 때도 그랬다. 감정이 붙은 말에는 불이 붙지만, 물품 수량과 이동 동선에는 대개 아무도 오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루카스는 미라벨을 향해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혹시 꼭 기록하셔야 한다면, 물잔 위치와 티스푼 정리 절차를 쓰시는 편이 낫습니다.”
미라벨이 눈을 깜빡였다.
“물잔 위치요?”
“예. 차가 뜨거울 때 물잔은 잔의 오른편 뒤쪽에 두면 손님이 선택하기 편합니다. 티스푼은 소리가 크지 않게 받침 쪽으로 살짝 옮기고요.”
“그게 제목이 되겠습니까?”
“안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기사화를 막기 위해 일부러 재미없는 설명을 하시는 건가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뜻이었다.
미라벨은 잠시 루카스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공녀의 귀를 지키기 위해 기사까지 재미없게 만들려는 신사.”
“아닙니다.”
“더 좋아졌습니다.”
망했다.
카르덴은 또 감탄했다.
“상대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발언마저 재미없게 낮춘다. 과연.”
“그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없기에 더 깊군요.”
루카스는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을 할수록 장작을 넣는 기분이었다.
아이리스는 창가에서 천천히 돌아섰다.
미라벨은 바로 자세를 낮췄다.
“공녀님, 저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잉크가 젖어 있습니다.”
“종이가 먼저 울었습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기자에게는 종종 됩니다.”
아이리스가 한 걸음 다가갔다.
미라벨은 펜을 품에 넣었다.
“장미일보는 사실만 씁니다.”
“사실을 수상하게 배열하지 마십시오.”
“그건 저희 사훈에 가까워서 어렵습니다.”
루카스는 조용히 끼어들었다.
“미라벨 양, 혹시 기사가 나가야 한다면 제 실수 위주로 써 주십시오. 공녀님 이야기는 빼 주시고요.”
미라벨의 눈이 빛났다.
“공녀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실수만 남기는 신사.”
“아니요.”
“공녀의 붉은 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티스푼이 된 남자.”
“절대 아닙니다.”
카르덴이 조용히 말했다.
“스스로 티스푼이 되는 경지…….”
“카르덴 경도 아닙니다.”
세라피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짧고 맑은 웃음이었다.
위원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눈빛에는 즐거움보다 의심이 더 많았다.
올덴 백작이 문서를 정리했다.
“에버렛 경.”
“예.”
“오늘의 1차 검증 결과는 위원회에서 정식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예.”
“다만 몇 가지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
루카스의 속이 가라앉았다.
역시 끝난 게 아니었다.
시험이 끝났다는 말은 이 세계에서 다음 시험을 준비한다는 뜻이었다.
“추가 확인이라면…….”
올덴 백작은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장갑 예법, 찻잔 교대, 그리고 숙녀와 나란히 걷는 걸음의 간격입니다.”
루카스는 잠시 안도했다.
걷기.
그건 할 수 있다.
사람은 걷는다.
그냥 왼발 오른발 움직이면 된다.
물론 이 세계는 방금 차도 함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걷기 아닌가.
루카스는 자신을 설득했다.
걷기다.
걷기 정도는 괜찮다.
그때, 옆 테이블 위에 있던 예절서가 바람에 넘어갔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있었다.
루카스는 읽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눈이 갔다.
`장갑을 낀 숙녀와 세 걸음 이상 나란히 걸을 경우, 첫 걸음의 폭과 시선의 높이는 동행 의사의 공개 표시로 간주될 수 있다.`
루카스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늦었다.
이미 읽었다.
아이리스가 그 모습을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괜찮습니다.”
루카스는 정중하게 웃었다.
웃음은 거의 구조 요청에 가까웠다.
“걷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방금 알았습니다.”
아이리스는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주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루카스도 확실히 봤다.
그 웃음은 짧았다.
하지만 시험장의 모든 사람이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미라벨의 펜이 다시 움직였다.
사각.
사각사각.
루카스는 눈을 감았다.
이번 제목은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올덴 백작이 옆의 위원에게 낮게 말했다.
“다음 검증 준비를 앞당기겠습니다.”
“오늘 바로 말입니까?”
“아니요. 오늘은 너무 많은 것이 드러났습니다.”
루카스는 눈을 떴다.
너무 많은 것.
그 말이 무서웠다.
그가 드러낸 것은 물잔 위치와 티스푼 정리뿐이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위원들은 다르게 보았다.
한 명은 장갑 상자를 확인했고, 다른 한 명은 길이를 재는 얇은 끈을 꺼냈다. 또 다른 위원은 찻잔 받침을 세 개나 겹쳐 놓고 각도를 맞추고 있었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살짝 떼었다.
“혹시 다음 검증은 많이 어렵습니까?”
올덴 백작은 예의 바르게 웃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걷고, 잔을 들고, 장갑을 끼는 정도입니다.”
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차를 마시는 일도 공개 구혼 직전까지 갔다.
그렇다면 걷고, 잔을 들고, 장갑을 끼는 일은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아이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에버렛 경.”
“예.”
“다음 검증 전에는 예절서를 미리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리스는 잠시 멈췄다.
아까보다 귀는 덜 붉었다.
대신 목소리가 아주 조금 부드러웠다.
“물잔은…… 적당한 위치였습니다.”
루카스는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몰랐다.
하지만 일단 고개를 숙였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아이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수건 케이스 위에 올려 둔 손가락이 한 번, 아주 작게 움직였다.
미라벨의 펜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사각.
루카스는 이제 체념했다.
장미일보와 예절위원회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은 아직 예절서에도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