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연구 계약서의 작은 글씨
오늘 밤은 실험실에서 보내자.
그 말은 오래 남았다.
너무 오래 남았다.
나는 마탑 실험실 문 앞에서 그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오늘 밤.
실험실.
보내자.
세 단어가 전부 위험했다.
하나만 있어도 위험한데 셋이 붙어 있었다.
나는 문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아직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비앙카가 앞에서 돌아봤다.
“응. 그래서 계약서 쓰려고.”
더 위험한 단어가 나왔다.
계약서.
나는 바로 레오나를 봤다.
레오나는 손을 검집 가까이에 둔 채 비앙카를 보고 있었다.
카르덴은 노트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꺼내지 마.
제발 오늘은 종이끼리 싸우게 하지 마.
“계약서라니요.”
내가 물었다.
“공동연구 계약서.”
비앙카는 아주 가볍게 말했다.
“네 예절서 반응을 관찰하려면 형식이 필요하거든.”
“그냥 돌아가면 안 됩니까?”
“그건 형식이 없지.”
“형식 없는 삶도 좋습니다.”
“마탑에서는 안 좋아.”
마탑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실험실 문이 열렸다.
안쪽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수상한 곳은 차라리 수상하게 생겨야 한다.
깨끗한 실험실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 위에 양피지 여러 장.
깃펜.
작은 마력등.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물약 세 병.
나는 물약에서 시선을 뗐다.
보지 말자.
보면 설명을 듣게 된다.
설명을 들으면 마셔야 할 수도 있다.
비앙카는 책상 앞에 앉아 양피지 한 장을 펼쳤다.
“자. 공동연구 계약서.”
“저는 공동연구를 신청한 적이 없습니다.”
“응. 내가 신청했어.”
“그럼 공동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앙카가 잠깐 멈췄다.
“오.”
그만.
오 하지 마.
비앙카의 눈이 반짝였다.
“시작부터 조항을 찌르네.”
“상식입니다.”
“상식으로 마탑 계약서를 찌르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럼 마탑 계약서가 문제 아닙니까?”
“맞아.”
비앙카는 너무 쉽게 인정했다.
나는 더 불안해졌다.
문제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문제를 고치지 않는 경우가 제일 위험하다.
비앙카는 계약서를 내 앞에 밀었다.
“읽어 봐.”
나는 양피지를 내려다봤다.
글자가 빽빽했다.
정말 빽빽했다.
작은 글씨가 아래쪽에 몰려 있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왜 뒤로 가?”
비앙카가 물었다.
“작은 글씨가 있습니다.”
“있지.”
“위험합니다.”
비앙카가 웃었다.
“작은 글씨를 보고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드문데.”
“대부분의 위험한 일은 작은 글씨에서 시작합니다.”
카르덴이 바로 노트를 꺼냈다.
“기록해도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왜 항상 늦습니까.”
카르덴은 진지하게 적었다.
[위험은 작은 글씨에서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 말이 또 종이가 됐다.
이 방은 종이가 너무 많다.
내가 불리하다.
레오나가 계약서를 봤다.
“읽어라.”
“제가요?”
“네 계약서다.”
“그래서 더 읽기 싫습니다.”
“그래도 읽어라.”
맞는 말이다.
싫지만 맞다.
나는 양피지를 들었다.
그리고 첫 줄부터 천천히 읽었다.
[공동연구 대상자 루카스 에버렛은 비앙카 아르클레인의 연구실에 체류하며 예절서 반응, 사회적 관계 반응, 마법적 연동 반응을 제공한다.]
“잠깐만요.”
비앙카가 턱을 괴었다.
“벌써?”
“대상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응.”
“사람한테 대상자라고 쓰면 느낌이 나쁩니다.”
“그럼 뭐라고 써?”
“참여자.”
비앙카는 깃펜을 들었다.
“참여자.”
그녀는 바로 고쳤다.
나는 조금 놀랐다.
“고치시네요?”
“응. 네가 읽는 방식이 재밌어.”
재밌어서 고친다.
나쁜 이유는 아니지만 좋은 이유도 아니다.
나는 계속 읽었다.
[참여자는 연구 중 발생하는 예절서의 모든 반응을 연구자에게 제공한다.]
“이것도요.”
“왜?”
“모든 반응은 너무 넓습니다.”
“넓어야 많이 관찰하지.”
“화장실 갈 때 책이 반응하면요?”
실험실이 조용해졌다.
레오나가 아주 천천히 나를 봤다.
카르덴의 깃펜이 멈췄다.
비앙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바로 후회했다.
예시를 잘못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비앙카가 손뼉을 쳤다.
“맞아. 범위 제한이 필요하네.”
“그렇죠.”
“사적인 예절 반응 제외.”
“예. 그걸 넣어 주세요.”
비앙카가 적었다.
[사적인 생활 중 발생하는 반응은 참여자의 동의 없이 관찰하지 않는다.]
좋다.
아주 중요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괜찮습니다.”
레오나도 짧게 말했다.
“좋다.”
카르덴이 노트에 적었다.
“동의 없는 관찰은 예가 아니다.”
“그건 적어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카르덴이 멈췄다.
“정말입니까?”
“예. 그건 맞는 말입니다.”
카르덴은 감동한 얼굴이 됐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는 그냥 정상적인 말을 했다.
비앙카는 그런 우리를 보며 웃고 있었다.
“셋이 같이 있으니까 반응이 잘 나와.”
“저는 반응이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나와.”
예절서가 품 안에서 살짝 떨렸다.
나는 바로 눌렀다.
“나오지 마.”
비앙카가 말했다.
“방금 책에게 말했지?”
“아닙니다.”
“거짓말.”
“예.”
“빠르네.”
나는 계약서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 읽어야 했다.
빨리 끝내야 집에 간다.
아니, 기사단 숙소로 돌아간다.
집도 아니다.
내 삶이 점점 남의 장소로 채워지고 있다.
[연구자는 필요시 참여자의 일정, 대화 상대, 체류 장소를 조정할 수 있다.]
“안 됩니다.”
나는 바로 말했다.
비앙카가 눈을 반짝였다.
“빠르다.”
“이건 너무합니다.”
“왜?”
“제 일정과 대화 상대와 체류 장소를 왜 연구자가 조정합니까?”
“반응 보기 좋으니까.”
“저는 실험쥐가 아닙니다.”
“응. 그래서 참여자라고 고쳤잖아.”
“참여자는 더더욱 조정하면 안 됩니다.”
비앙카는 깃펜 끝으로 자기 입술을 톡톡 쳤다.
“그럼 어떻게 고쳐?”
나는 잠깐 생각했다.
계약서.
작은 글씨.
마탑.
비앙카.
전부 싫지만, 이 조항은 고쳐야 했다.
“연구자는 참여자의 사전 동의를 얻어 일정 변경을 제안할 수 있다. 참여자는 거절할 수 있다.”
비앙카가 멈췄다.
레오나도 나를 봤다.
카르덴도 나를 봤다.
왜.
나는 평범한 말을 했다.
비앙카가 아주 천천히 웃었다.
“제안.”
“예.”
“거절 가능.”
“예.”
“내가 네 일정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래도 내가 제안할 권리는 남겨 줬네.”
“그게 정상적인 계약입니다.”
“정상적이라.”
비앙카는 깃펜을 움직였다.
글자가 바뀌었다.
“너, 이상하게 선을 잘 그어.”
“선을 안 그으면 끌려갑니다.”
“끌려가는 건 싫어?”
“당연합니다.”
“그럼 같이 가는 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비앙카의 눈이 더 반짝였다.
“상황을 남겨 줬네.”
아.
또 뭔가 이상하게 들렸다.
나는 급히 말했다.
“계약상 표현입니다.”
“응. 계약상.”
비앙카는 웃었다.
“그래서 더 좋아.”
좋아하지 마십시오.
계약서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나는 다음 조항을 읽었다.
[연구자는 연구 효율을 위해 참여자에게 야간 체류를 요청할 수 있으며, 참여자는 원칙적으로 이에 응한다.]
“안 됩니다.”
이번에도 바로였다.
비앙카가 턱을 괴었다.
“이건 왜?”
“원칙적으로 응한다가 문제입니다.”
“밤샘 관찰이 필요한 경우가 있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럼?”
“요청할 수 있다. 참여자는 사유를 듣고 동의 여부를 결정한다.”
“너 진짜 잘 고친다.”
“살려고요.”
“내 실험실에서 살아남는 법을 벌써 아네.”
“살아남고 싶지, 머무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앙카는 깃펜을 움직였다.
“사유 제시. 동의 여부 결정.”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거 꼭 연애 약속 잡는 것 같네.”
“아닙니다.”
“밤에 만날지 말지, 이유를 듣고 정한다.”
“연구 윤리입니다.”
“데이트 예절 같기도 한데.”
“아닙니다.”
레오나의 손이 검집에 가까워졌다.
비앙카는 그걸 보고 더 즐거워했다.
“오. 반응 좋다.”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응.”
정직하다.
정직한 악의는 아니었다.
정직한 호기심이었다.
그게 더 다루기 어렵다.
나는 작은 글씨를 계속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그 전에 중간 조항도 몇 개 있었다.
[참여자는 연구자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한다.]
“이것도 고쳐야 합니다.”
비앙카가 바로 웃었다.
“성실히가 싫어?”
“성실히는 좋은데 범위가 없습니다.”
“질문에 답하는 게 범위지.”
“아닙니다. 질문이 너무 넓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잠깐 생각했다.
예시는 조심해야 한다.
화장실 얘기는 이미 한 번 했다.
두 번 하면 내 품위가 정말 위험하다.
“예를 들면, 개인적인 취향 같은 것요.”
비앙카의 눈이 반짝였다.
“좋아하는 색?”
“그런 것부터요.”
“좋아하는 차?”
“그것도요.”
“좋아하는 사람?”
레오나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카르덴의 깃펜이 멈췄다.
나는 바로 말했다.
“그런 질문을 막자는 겁니다.”
비앙카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럼 뭘로 고쳐?”
“연구 목적과 직접 관련된 질문에 한해 답변한다. 참여자는 사적인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 있다.”
“사적인 질문.”
비앙카가 그 말을 천천히 굴렸다.
“안 할 수는 없고, 답하지 않을 수 있다?”
“질문 자체도 자제해 주시면 좋습니다.”
“자제는 어렵고, 거절권은 줄게.”
“그것도 일단은 진전입니다.”
카르덴이 작게 적었다.
[사적인 질문에는 거절권이 필요하다.]
“그건 왜 적습니까?”
“중요한 예입니다.”
“맞긴 한데 왜 불안하죠.”
“중요해서입니다.”
중요한 말은 언제나 불안하다.
비앙카는 조항을 고쳤다.
글자가 바뀌는 걸 보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밝아졌다.
“너, 내 계약서를 망치는 게 아니라 다듬고 있어.”
“망치면 안 되니까요.”
“왜?”
“서명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들어올 자리를 직접 만들고 있네.”
아니다.
나는 나갈 구멍을 만드는 중이다.
그런데 비앙카는 그걸 들어올 문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다음 조항으로 도망쳤다.
[연구자는 참여자의 반응을 필요한 범위에서 공개할 수 있다.]
“안 됩니다.”
“이건 또 왜?”
“공개하면 안 됩니다.”
“학술 발표는?”
“익명.”
“마탑 내부 공유는?”
“최소 인원.”
“흥미로운 반응이 나오면?”
“그래도 동의.”
비앙카가 멈췄다.
“너 진짜 선을 잘 긋네.”
“줄을 그어야 안전합니다.”
“이 정도면 연구보다 생활 설계에 가까운데.”
“생활이 망가지면 연구도 못 합니다.”
비앙카가 손뼉을 쳤다.
“맞아. 연구 대상이 도망가면 연구가 끝나지.”
“참여자입니다.”
“응. 참여자.”
그녀는 순순히 고쳤다.
그 순순함이 제일 이상했다.
보통 사람은 지적받으면 기분 나빠한다.
비앙카는 지적받을수록 즐거워했다.
마치 내가 그녀의 계약서를 고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머릿속 미로에 길을 내는 것처럼.
나는 그 생각을 바로 지웠다.
이런 표현은 위험하다.
말로 꺼내면 또 로맨틱하게 들릴 수 있다.
마탑에서는 생각도 조심해야 한다.
드디어 마지막 줄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멈췄다.
[본 계약의 해석 권한은 연구자에게 있으며, 참여자의 서명은 연구자와 참여자의 공동 운명적 연구 결속을 의미한다.]
실험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앙카는 웃고 있었다.
카르덴은 노트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레오나의 눈이 차가워졌다.
나는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
“이건 안 됩니다.”
비앙카가 웃었다.
“왜?”
“공동 운명적 연구 결속이라는 표현이 너무 큽니다.”
“멋있잖아.”
“위험합니다.”
“위험해서 멋있는 거야.”
“계약서는 멋있으면 안 됩니다.”
카르덴이 바로 적었다.
[계약서는 멋있으면 안 된다.]
“그것도 적지 마십시오.”
“이미 늦었습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차분하게.
정중하게.
계약서는 감정적으로 대하면 진다.
작은 글씨는 특히 그렇다.
“해석 권한은 양측 협의로 합니다. 그리고 공동 운명적 연구 결속은 삭제하십시오.”
“삭제?”
비앙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예?”
“아예.”
“그럼 우리 관계가 너무 건조해지는데.”
“계약서는 건조해야 합니다.”
“나는 촉촉한 계약서가 좋은데.”
“그건 위험한 계약서입니다.”
비앙카는 웃음을 참는 얼굴로 깃펜을 들었다.
“그럼 뭐라고 써?”
“본 계약은 연구 목적의 협의이며, 어떠한 사적 관계의 확정으로도 해석하지 않는다.”
말하고 나서 나는 안심했다.
완벽하다.
사적 관계 차단.
오해 방지.
계약상 안전.
그런데 실험실이 조용해졌다.
비앙카가 나를 빤히 봤다.
“사적 관계의 확정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예.”
“그럼 가능성은 남겨 둔 거네.”
아니.
왜 그렇게 되지.
“아닙니다. 확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응. 확정은 아니지.”
“그러니까 관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직 확정하지 않는 관계.”
“그런 말 안 했습니다.”
비앙카는 깃펜을 입가에 댔다.
“너 말이 참 재밌다.”
내 말은 왜 자꾸 사람들에게 재미있어지는가.
나는 그냥 살고 싶다.
비앙카가 조항을 고쳤다.
글자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본 계약은 연구 목적의 협의이며, 어떠한 사적 관계의 확정으로도 해석하지 않는다.]
좋다.
좋은 문장이다.
분명 좋은 문장이다.
그런데 비앙카의 얼굴이 너무 밝았다.
밝은 얼굴은 보통 나쁜 징조다.
비앙카는 그 문장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상하네.”
“뭐가요?”
“내가 마음대로 정하려던 걸 네가 막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아.”
“정상적인 계약이 됐으니까요.”
“아니. 내 인생 설계에 누가 빨간 선을 그은 건 처음이라서.”
“빨간 선이 아니라 안전선입니다.”
“그게 더 이상해.”
비앙카는 턱을 괴고 나를 봤다.
“내가 어디까지 가면 위험한지 대신 봐 주는 사람 같잖아.”
“계약서의 불리한 조항을 고친 겁니다.”
“응. 내 쪽에도 불리했을지 모르지.”
나는 말을 잃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또 이상해진다.
비앙카는 이미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까?”
내가 물었다.
“거의.”
“거의?”
비앙카가 계약서 아래쪽을 가리켰다.
“서명.”
나는 깃펜을 봤다.
서명.
이것도 위험하다.
예절서가 품 안에서 아주 작게 떨렸다.
나는 바로 눌렀다.
“가만히 있어.”
비앙카가 웃었다.
“책이 싫어해?”
“제가 싫어합니다.”
“그래도 해야지.”
레오나가 말했다.
“읽었나.”
“예.”
“고쳤나.”
“예.”
“그럼 네가 정한 조건이다.”
그 말은 맞았다.
내가 고쳤다.
내가 선을 그었다.
내가 위험한 부분을 줄였다.
그럼 서명할 수 있다.
아마도.
나는 깃펜을 들었다.
비앙카가 숨을 죽였다.
카르덴도 노트를 멈췄다.
레오나는 내 손을 보고 있었다.
왜 다들 이렇게 보는데.
서명 하나가 뭐라고.
나는 최대한 평범하게 이름을 썼다.
루카스 에버렛.
그 순간이었다.
계약서 아래쪽의 글자가 흔들렸다.
나는 바로 손을 뗐다.
“왜 이럽니까?”
비앙카도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안 했어.”
그 말이 제일 무서웠다.
마법사가 안 했는데 마법이 일어났다.
예절서가 품 안에서 확 펼쳐졌다.
계약서 위로 은빛 글자가 내려앉았다.
내 이름 옆에 비앙카의 이름이 있었다.
그건 원래 있었다.
문제는 그 위였다.
글자가 겹쳐졌다.
루카스 에버렛.
비앙카 아르클레인.
두 이름이 자동으로 서로 겹쳐지더니, 하나의 문장처럼 붙었다.
[공동연구 예법 관계 성립]
나는 굳었다.
레오나의 손이 검집으로 갔다.
카르덴의 노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비앙카는 눈을 반짝였다.
“어머.”
어머가 아니다.
전혀 어머가 아니다.
나는 계약서를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취소됩니까?”
비앙카가 웃었다.
“연구해 봐야겠네.”
그 말이 더 무서웠다.
계약서에 루카스 이름이 자동으로 겹쳐진다.
그리고 아주 작게, 비앙카의 이름 끝에도 내 이름의 획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숨을 멈췄다.
“이건 정말 취소해야 합니다.”
“왜?”
비앙카가 물었다.
“이름이 겹쳤잖습니까.”
“그러니까 연구해야지.”
“연구 전에 지워야죠.”
“지우는 방법도 연구해야 알아.”
완벽한 덫이었다.
지우려면 연구해야 하고,
연구하려면 계약이 필요하고,
계약하면 이름이 겹친다.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작은 글씨를 고쳤는데, 더 큰 글씨가 사고를 쳤다.
나는 오늘 배웠다.
계약서는 읽어야 한다.
작은 글씨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리고 마탑에서는, 고친 뒤에도 절대 안심하면 안 된다.
비앙카는 웃고 있었고,
레오나는 검집에 손을 올렸고,
카르덴은 떨어뜨린 노트를 다시 주우며 뭔가를 적으려 했다.
나는 세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아무도 평범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역시 문제는 계약서만이 아니었다.
이 방 전체가 문제였다.
계약서에 루카스 이름이 자동으로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