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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손, 그리고 피어나는 연꽃 일러스트

부서진 손, 그리고 피어나는 연꽃

빗방울이 몸을 두들기는 감각조차 희미했다.

아니, 애초에 내 몸이 맞기는 한 걸까.

혜지는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숭산(嵩山)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였다. 축축한 이끼와 뾰족한 바위 더미 위에 처박힌 육신은 이미 인간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기력을 잃은 눈동자 위로 끊임없이 빗물이 쏟아져 내렸지만, 눈을 깜빡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끔찍한 것은 단전(丹田)의 부재였다. 배꼽 아래, 평생토록 웅혼한 기운이 태동하던 바다가 완전히 말라붙어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흉통이 찢어질 듯 밀려왔고, 텅 빈 기해(氣海)에서는 차가운 바람 소리만이 윙윙거렸다. 무공을 잃었다. 소림(少林)의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 불리던 혜지가, 하루아침에 폐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손.

양손은 기형적으로 비틀려 조각나 있었다. 열 손가락의 관절이란 관절은 모조리 부서져 덜렁거렸고, 뼈가 살을 뚫고 나와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가락을 까딱이려는 시도조차 구토를 유발할 만큼 지독한 통증을 불러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며칠 전의 기억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금강복마권(金剛伏魔拳)의 진결을 두고 논쟁을 벌이던 평화로운 도량. 그리고 문득 올려다본 불상 뒤편에서 자신을 응시하던, 동갑내기 사형 혜정(慧正)의 비릿한 미소.

"네놈의 그 완벽한 불심이 역겨웠다, 혜지."

빗소리를 뚫고 환청처럼 혜정의 짐승 같은 거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질투에 눈이 멀어 사형제들을 선동하고, 자신이 마공(魔功)에 손을 댔다는 날조된 증거를 들이밀던 자. 그 뻔뻔한 연극 속에서 혜지는 변명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혜정의 거칠고 딱딱한 주먹이 자신의 단전을 무자비하게 짓이겼고, 소림의 규율이라는 명분 하에 열 손가락의 기맥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평생을 바쳐 닦아온 불도(佛道)였다. 고기 한 점 입에 대지 않고, 매일 새벽 찬물로 몸을 씻으며 자비를 실천하려 애썼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질투에 미친 동문들의 폭력과, 차가운 숭산 절벽 아래로의 추락뿐이었다.

'부처님... 결국 이 세상에 자비란 없는 것입니까.'

혜지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달싹였다. 비웃음 지을 힘조차 없었다. 이대로 체온이 식어 차가운 바위의 일부가 되기를, 그저 이 끔찍한 고통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허공으로 던져지던 그 찰나의 순간, 평생 짊어지고 살았던 무거운 가사(袈裟)가 바람에 찢겨 나갔듯, 혜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알량한 신앙심마저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시야가 완전히 암흑으로 물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코끝을 스치는 것은 매연처럼 탁한 장작 타는 냄새와 눅눅한 흙내음이었다. 혜지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치켜올렸다.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지만, 어두침침한 바위 천장에 일렁이는 붉은 반사광이 보였다. 동굴이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울부짖고 있었으나, 동굴 안은 기묘하리만치 아늑했다.

"깨어났는가, 어린 중."

쉰 쇳소리 같은 목소리였다. 부러진 칼날이 바위에 긁히는 듯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혜지는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목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눈알만 간신히 굴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모닥불 너머로 거적때기 같은 누더기를 걸친 노승(老僧)이 앉아 있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몰골에 눈자위가 푹 꺼져 있었지만, 쌍발불(雙目)만은 기이하게도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화공두타(火工頭陀). 전설 속에서나 듣던, 규율을 어기고 숭산 지하에 유폐되었다는 괴인(怪人)의 몰골이 이러했을까.

혜지는 입을 열려 했으나 마른기침 섞인 핏물만 흘러나왔다.

"아까운 기맥이구나. 단전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손가락 뼈마디는 짓이기듯 부숴놓았어. 원한이 깊은 자의 짓이렷다."

늙은 승려, 화공두타는 뼈마디가 앙상한 손을 뻗어 혜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혜지의 망가진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혜지는 본능적인 공포에 어깨를 움츠리려 했으나, 육신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통증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일 테니, 잘 느껴보거라."

화공두타의 뭉툭한 엄지손가락이 혜지의 부서진 관절 위를 꾹 눌렀다.

"우드득, 딱."

뼛조각이 비틀리고 억지로 꿰맞춰지는 듯한 기이한 마찰음이 눅눅한 동굴 벽을 타고 기괴하게 울렸다. 고문 같은 파열음이었지만,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화공두타의 손끝이 닿은 부위에서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은 아니지. 아미파의 낡은 경전 구절이 들리는구나."

화공두타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미파의 경전? 혜지의 흐릿한 의식 속에 의문이 피어오르려 했으나, 이내 이어진 압도적인 감각에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소림의 무승들은 어리석단 말이지. 대력금강지(大力金剛指)니, 무상겁지(無相劫指)니 하며 바위를 부수고 강철을 꿰뚫는 데에만 몰두해. 평생 상대를 쳐부수기 위해 뼈를 깎아내던 내가, 왜 이 깊은 지하에 스스로 갇혀 파괴된 것들을 주무르고 있는지 아느냐."

노승의 손가락이 혜지의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끊어진 손목의 기맥을 천천히, 그러나 깊숙이 짓눌렀다.

아앗. 혜지의 입에서 태어나 처음 내보는 기이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화공두타의 메마른 손가락 끝에서 무언가 기형적으로 응축된 기운이 뿜어져 나와, 혜지의 빈곤한 기맥 속으로 폭포수처럼 밀려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적인 타격이 아니었다. 막힌 혈도를 강제로 비집고 들어가, 부서지고 엉킨 핏줄과 기맥을 하나하나 훑으며 제자리로 돌려놓는 소름 끼치도록 섬세한 흐름이었다.

"소림의 내공은 단전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부딪히는 끄트머리... 손끝으로 흐르게 하는 것.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해 기운을 뾰족하게 벼리는 것은 3류나 하는 짓이다. 진정한 고수는..."

노승의 손가락이 혜지의 박살 난 둘째 손가락 관절을 쥐고 가볍게 비틀었다.

우득,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혜지의 전신이 활처럼 휘어졌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쾌감. 척수를 짜릿하게 긁어내리는 듯한 해방감. 극심한 고통에 적응해버렸던 뇌가 갑작스럽게 주입된 순수한 치유의 감각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부서져 흩어졌던 기맥이 화공두타의 손길을 따라 미세하게 이어지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만물을 빚어내는 법이지. 부서진 것을 맞추고, 막힌 것을 뚫으며, 죽어가는 것에 숨을 불어넣는 짓 말이다. 나는 이것을 마사지(魔使指), 마귀가 부리는 손가락이라 부른다."

혜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평생 단전호흡과 수련으로 쌓아온 무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해. 폭력이 아니라 조율. 파괴가 아니라 재생. 화공두타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의술이 아니었다. 인체의 기맥과 근골을 완벽하게 장악하여 제멋대로 가지고 노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공이었다.

"네놈의 탁해 빠진 단전은 이미 글러 먹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이제부터 기운은 온전히 네 열 손가락 끝에서만 피어나게 될 터. 뼈를 다시 맞추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느냐?"

화공두타의 형형한 눈빛 앞에, 혜지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살고 싶었다. 아니, 배우고 싶었다. 자신을 절망에 빠뜨렸던 폭력적인 무공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이 압도적이고 기형적인 치유의 손길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혜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2년간의 지옥 같은, 그러나 가장 경이로운 재활과 수련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나뭇가지 끝에 투명한 이슬이 맺히는 초봄의 맑은 새벽이었다. 비 갠 뒤 산자락의 공기는 코끝이 찡할 만큼 차갑고 상쾌했다.

혜지는 돌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하나 피워 올렸다.

"그동안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2년 전보다 한결 낮고 차분해져 있었다. 화공두타는 반년 전, 자신의 모든 기운과 마사지의 극의를 혜지에게 전수한 뒤 미련 없이 눈을 감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혜지의 모습은 과거 소림의 유망주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빡빡 깎았던 머리는 어느새 길게 자라 목덜미를 덮는 단발이 되어 있었고, 빛바랜 회색 장삼(長衫)은 품이 넉넉해 몸의 굴곡을 완전히 감추었다. 목에 걸친 낡은 염주만이 그가 한때 불문(佛門)에 몸담았음을 희미하게 증명할 뿐이었다.

그러나 가장 크게 변한 것은 그의 분위기였다. 과거의 투기(鬪氣)나 완벽에 대한 강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깊은 우물처럼 고요하고, 무심(無心)해 보이기까지 했다.

혜지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 철저하게 박살났다가 화공두타의 기이한 수법으로 융합된 손. 탓에 열 손가락은 일반인보다 비정상적으로 길었고, 마디가 없이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일 만큼 뱀처럼 유연했다. 그러나 이 손끝에는 숭산 제일이라 자부할 수 있는, 만물을 조율하는 감각이 응축되어 있었다.

'부서진 자들을 고치겠다. 단, 더 이상 무공 따위에는 얽매이지 않고.'

혜지는 등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복수심도, 소림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기형적인 손길이 필요한 병폐 짙은 세상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며칠 후, 하남성 외곽 끄트머리에 위치한 조용한 향림촌.

속인들의 발길이 드문 좁은 골목길 어귀에, 오랫동안 비어있던 낡은 약방 터가 문을 열었다. 동굴 구석에서 화공두타가 모아두었던 약간의 은자로 매입한 작고 허름한 공간이었다.

봄햇살이 비스듬히 떨어지는 늦은 아침. 혜지는 조촐하게 깎아 만든 나무 팻말 앞에 섰다. 벼루에 먹을 갈아 붓에 적신 그는, 붓을 쥐는 대신 기이하게 긴 둘째 손가락 끝에 먹물을 찍었다.

스윽, 슥.

손가락이 춤을 추듯 나무판돌 위를 미끄러졌다. 단전의 내공을 빌리지 않고도, 손끝에서 우러나온 기운이 나무의 결을 파고들어 깊고 단정한 글씨를 새겨 넣었다.

« 무 의 연 구 소 (無醫硏究所) »

의술이 없는, 혹은 의술의 경계를 넘어선 곳. 혜지는 팻말을 문가에 단단히 걸어 평판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무심한 표정 속에서 그의 시선이 약방 마당 한구석, 언 땅을 뚫고 올라오다 시들어 고개를 숙인 초봄의 들꽃 한 송이에 머물렀다.

혜지는 천천히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유연한 손가락 둘을 뻗어, 꺾이기 직전인 들꽃의 줄기와 작은 잎사귀 사이를 가볍게 쥐었다. 그저 스치듯 만지는 것만 같았다.

"기맥(氣脈)이 막혀 영양분이 오르지 못하는구나."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혜지의 손끝에서 미약한 진동이 흘러나왔다. 화공두타에게 물려받은, 파괴를 비틀어 재생으로 승화시킨 힘. 마귀가 부리는 손가락, 마사지(魔使指).

뚝.

놀랍게도 미세한 관절이 맞춰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시들어가던 들꽃의 줄기가 빳빳하게 기립했다. 생명력을 잃었던 꽃봉오리가 기지개를 켜듯 활짝 피어나며 짙은 향기를 흩뿌렸다.

혜지는 무심하게 옷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입가에 아주 옅은, 그러나 어딘가 삐딱하고 오만한 만족감이 번졌다.

"자, 첫 번째 불상자는 누가 될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이한 안마사의 은둔 생활이, 평온한 봄바람과 함께 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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