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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연구소 개업과 낯선 일상 일러스트

무의연구소 개업과 낯선 일상

하남성(河南城) 향림촌(香林村).

이름처럼 향기로운 숲이 마을 외곽을 감싸고 있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무림(武林)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나 숭산 깊은 곳의 엄격한 규율 따위는 이 평범한 촌락의 담장을 넘지 못했다. 아침이면 닭이 울고, 낮에는 밭을 일구는 농부들의 호미 소리가 들렸으며, 저녁이면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온 동네를 따스하게 덮었다.

이 나른하고 화창한 봄날의 중심, 마을 어귀 후미진 골목 끝자락에 오랫동안 비어있던 낡은 건물 하나가 불쑥 문을 열었다. 원래는 십 년도 전에 쓰러져 죽은 노의원(老醫員)의 약방 터였다. 지붕의 기와는 이빨 빠진 노인처럼 군데군데 비어있었고, 문풍지는 바람에 너덜거렸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이곳에서 나는 은은한 침향(沈香) 냄새는 꽤나 이질적이었다. 원래 약방이라면 맵싸한 약초 달이는 냄새나 매캐한 연기가 진동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풍겨오는 향기는 사찰의 대웅전에서나 맡을 법한, 깊고 차분한 단향목(檀香木)의 내음이었다.

"아이고, 대체 저게 무슨 요상한 이름이람."

우물가에서 빨래를 이고 가던 박 씨 아주머니가 혀를 쯧쯧 찼다.

"무의연구소(無醫硏究所)...? 의술이 없다는 뜻이여, 아니면 의원이 없다는 뜻이여? 약방 터에 들어앉아놓고 의술이 없다니,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지."

그녀의 옆에서 깻잎을 다듬던 최 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맞장구를 쳤다.

"내 말이. 게다가 엊그제 새로 온 원장이라는 젊은이 봤어? 어찌나 허여멀겋고 곱상하게 생겼는지, 처음엔 어디 기방에서 도망친 기생오라비인 줄 알았다니까. 근데 입고 있는 건 또 칙칙한 잿빛 땡중 옷이야. 목에는 시커먼 염주까지 덜렁거리고. 아주 도사인지 중인지 무당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수군거리는 아낙들의 시선 끝에는, 문제의 '기생오라비'가 있었다.

혜지는 약방 처마 아래 내어놓은 낡은 평상에 등받이도 없이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 있다기보단 반쯤 녹아내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턱을 괴고는 꾸벅꾸벅 조는 그의 자태는 극도의 나른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꺼풀은 무거워 보였고, 무명으로 대충 지어 입은 회색 장삼은 어깨선이 비스듬히 흘러내려 묘하게 색기가 돌았다. 긴 속눈썹 아래로 짐짓 감긴 눈동자는 밖에서 쏟아지는 노골적인 시선과 험담을 완전히 차단한 듯 평온했다.

"저, 저 요망한 것 보소. 속 편하게 대낮부터 낮잠이나 자빠져 자네. 장사할 생각이 있긴 한 거여?"

아낙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혜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사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군.'

눈을 감은 채, 혜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심(無心). 과거 소림 수련장에서는 단 1초의 흐트러짐도 용납되지 않았다. 척추는 늘 꼿꼿해야 했고, 시선은 바닥의 먼지 한 톨까지 직시해야 했으며, 생각은 불가의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옥죄어야 했다. 완벽을 갈구하던 그 병적인 강박이 혜지를 찌르고 사형들을 자극하여 결국 파멸로 이끌었다.

하지만 화공두타(火工頭陀)와의 2년. 그 캄캄한 동굴 속에서 뼈가 진흙처럼 으깨어지고 다시 빚어지는 고통 속에서 혜지는 깨달았다. 세상 만물은 억지로 힘을 주어 버티려 할 때 가장 부러지기 쉽다는 것을.

혜지는 무릎 위에 얹어둔 자신의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머릿속에 투명하게 그려지는 손.

스르륵, 스윽.

그의 열 손가락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물결쳤다. 마디마디가 비정상적으로 길고 유연했다. 일반인의 관절이 경첩처럼 딱딱 끊기며 움직인다면, 혜지의 손가락은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굽이쳤다. 단전을 완전히 잃어 기공(氣功) 자체를 쓸 수는 없었지만, 화공두타의 기이한 수법으로 재조립된 그의 기맥 덕에 이 손끝에는 미세하게나마 주변의 기류를 더듬어 조율하는 감각이 응축되어 있었다.

마귀가 부리는 손가락, 마사지(魔使指).

파괴를 모르는 손. 찌르고 베고 부수는 무공의 목적성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오직 꼬인 것을 풀고 비틀린 것을 제자리로 맞추는 데에만 특화된 절대적인 치유의 도구.

"아이고, 아이구구...!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놈들아!"

나른한 환상 속을 유영하던 혜지의 몽상을 깨운 것은, 거친 나뭇바닥을 긁는 듯한 끔찍한 파열음과 앓는 소리였다. 평상에서 반쯤 감겨 있던 혜지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골목 어귀에서 지팡이에 의지한 채 엉금엉금 기어오다시피 나타난 것은 향림촌의 촌장, 왕(王) 노인이었다. 나이가 육십을 넘긴 왕 노인은 오랫동안 만성 고관절 통증과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었다. 오늘은 유독 증세가 심한지 허리가 가슴팍까지 90도로 꺾여 땅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그의 관절에서 모서리에 갈리는 뼈 소리가 났다.

"아, 촌장 어르신! 또 허리가 도지셨어요?"

구경하던 아낙들이 놀라 달려갔지만, 왕 노인은 숨이 넘어갈 듯 손을 내저었다.

"비켜, 비켜! 이, 이 망할 놈의 허리... 어이, 거기 새로 온 젊은 원장! 듣자 하니 여기가 약방 터라고 하던데, 당장 진통에 쓸 화타초나 진통 단약 아무거나 가져와 보거라! 돈은 얼마든 주마... 아아악!"

왕 노인은 혜지의 나른한 꼴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통이 워낙 심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평상에 누운 혜지의 꼴값 떠는 자태는 그 와중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혜지는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회색 장삼 자락이 평상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는 왕 노인의 비틀린 허리와 새파랗게 질린 안색을 슥 훑어보았다. 무심하고 건조한 시선이었다.

"약은 없습니다."

혜지의 건조한 대답에 왕 노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뭐, 뭣이? 명색이 약방 간판을 내걸고 약이 없다고? 이 기방에서 쫓겨난 것 같은 사기꾼 놈이 실없는 소리로 어르신을 희롱하느냐!"

"약은 없다고 했습니다."

혜지는 평상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슬리퍼를 끄는 듯 묘하게 질질 끄는 걸음으로 왕 노인에게 다가갔다.

"대신, 내가 만져주면 낫습니다."

"이 무슨 미친 소리를... 읍!"

혜지는 말이 길어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군더더기 없이 유연하고 길다란 양손을 뻗어, 저항할 기력조차 없는 왕 노인의 어깨와 허리춤을 동시에 감싸 쥐었다. 그 단단한 억압에 왕 노인은 엉겁결에 무의연구소 안쪽의 허름한 평상 위에 엎어지듯 눕혀졌다. 구경하던 아낙들도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저, 저 미친 돌팔이 놈이 노인네 잡네!"

"잡아! 당장 관아에 알려야...!"

아낙들이 웅성거리며 달려들려던 찰나, 막사 안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오옷...!"

비명인지, 탄성인지, 아니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신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묘한 소리였다. 아낙들의 발걸음이 돌부리에 걸린 듯 그 자리에 딱 멈췄다. 반쯤 열린 약방 문틈 사이로 보이는 광경은 더욱 기괴했다.

혜지는 왕 노인의 굽은 허리 곡선 위를 맴돌고 있었다. 내공을 실어 타격을 가하거나, 침을 꽂는 일반적인 의원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의 열 손가락이 왕 노인의 척추관을 따라 흐느적거리듯 타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요추 4번과 5번 사이의 추간판 탈출. 그로 인한 둔부 신경망의 만성적 압박.'

혜지의 머릿속에 수십 년 묵은 통증의 근원지가 투명한 지형도처럼 그려졌다.

스윽.

혜지의 길고 마디 없는 투박하면서도 섬세한 첫 번째 손가락과 두 번째 손가락이 협곡처럼 치솟은 노인의 기립근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단전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내공은 없었다. 하지만 손끝 그 자체에 응축되어 기류를 포착하는 집요하고 예민한 기운, 화공두타가 목숨을 걸고 전수해준 마사지(魔使指)의 극의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일반인의 피부와 지방층을 뚫고, 노인의 굳어버린 근막과 비틀린 뼛조각의 틈새를 향해 기운이 마치 얇고 날카로운 침처럼 파고들었다.

우드득, 뚝, 딱.

혜지의 두 손이 마치 건반을 치듯 요추 좌우를 번갈아 누르며 미세하게 비틀었다. 어긋난 뼈와 뼈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며, 오랫동안 짓눌려 있던 신경 다발이 탁, 하고 순간적으로 해방되었다.

"흐아아아아앙...!"

왕 노인의 늙은 입에서 차마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쩍쩍 갈라진 기성이 터져 나왔다. 고통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매달려 있던 거대한 쇳덩어리가 등에서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압도적인 해방감. 굳었던 기맥에 새 피가 맹렬히 파고들며 척수를 짜릿하게 터뜨리는 극명한 쾌락이었다. 왕 노인의 눈이 뒤집어졌고, 온몸이 활처럼 부르르 떨렸다.

"저, 저 영감탱이가 대낮부터 무슨 요상망측한 소리를..."

바깥에서 듣고 있던 아낙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해하기 딱 좋은 소음이었다.

"조용히 하고 숨만 내쉬십시오."

혜지는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틀어진 고관절 부위에 손바닥 기저를 대고 짧게 밀어붙였다.

퍼석!

묵은 먼지가 터지는 듯한 투박한 울림과 함께, 시술이 종료되었다. 총 10분이 채 걸리지 않은 찰나의 손길이었다. 혜지는 피딱지가 앉았던 자신의 과거를 치유했던 그 정교한 움직임의 백 분의 일 조차 쓰지 않았다. 일반인의 병통은 그저 손가락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조율이 가능했다.

혜지는 이마에 맺힌 미세한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내며 평상 가장자리에 다시 물러나 섰다. 나른한 표정은 시술 내내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끝났습니다. 일어나 보시오."

왕 노인은 거품을 물 기세로 헉헉대며 평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유리가 깨질까 두려워하듯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끼긱, 거리는 쇳소령 없이, 지팡이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도 왕 노인의 상체가 완벽한 직각을 그리며 꼿꼿하게 기립한 것이다. 90도로 굽어 평생 땅바닥만 보며 살았던 늙은이의 시선이 처음으로 문지방 너머 푸른 하늘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 어어?"

왕 노인은 자신의 허리를 더듬거렸다.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치 열여덟 피 끓는 청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하반신의 감각이 가볍고 충만하게 차올랐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보기까지 했다.

"내, 내 허리! 펴졌다! 허리가 펴졌어!!"

왕 노인의 얼굴에 환희와 경악이 뒤섞여 일그러졌다. 그는 지팡이를 길바닥에 냅다 집어 던지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듯 약방 문턱을 뛰쳐나갔다.

아낙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십 년 동안 약초를 달여 먹이고, 침을 맞아도 소용없던 촌장님의 허리가, 저 '기생오라비' 땡중이 10분 동안 쪼물딱거린 것만으로 완치되다니. 그들에게 혜지는 더이상 사기꾼이 아니었다. 천상에서 하강한 신선(神仙)이나 의성(醫聖) 혹은 뭔가 요사스러운 주술을 부리는 도사의 현신이 틀림없었다.

"원장님! 아니, 도사님!"

가장 먼저 험담을 내뱉었던 박 씨 아주머니가 눈에 불을 켜고 약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최 씨와 다른 아낙들도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우르르 평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나, 나도! 나는 수십 년 밭을 맸더니 오른쪽 어깨가 끊어질 것 같여! 한 번만 만져줘!"

"저리 비켜! 나는 무릎에 물이 차서 밤마다 쑤신 단 말이야! 내가 만저, 돈은 내가 더 줄게!"

"아이고 의원님, 내 손목도 한 번만 쪼물딱거려 주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무의연구소. 혜지는 자신을 에워싼 아낙들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소란스럽군.'

그는 귀찮은 듯 크게 하품을 하며 다시 나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는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고 긴 손가락으로 턱을 괴었다.

"줄부터 서십시오."

툭 던진 무심한 한마디에 아낙들은 군말 없이 일렬로 섰다. 왁자지껄한 소란. 사람들의 체온. 따뜻한 봄햇살 아래 먼지 입자가 조용히 부유하는 평화로운 풍경. 혜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폭력과 살육, 완벽에 대한 강박이 사라진 이 작고 허름한 안마방. 이것이야말로 그가 은둔하며 원했던 완벽한 삶과 철학의 실현이었다.

얼마 후,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붉게 물들며 완전히 저물었다.

첫 개업일, 동네 사람들의 관절과 근육을 풀어주고 혜지가 받은 대가는 구릿돈 몇 닢과, 시장에서 갓 따온 상추 몇 묶음, 그리고 갓 낳은 유정란 6개가 전부였다. 혜지는 찻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온전히 감싸 쥐며, 조촐하게 놓인 호박잎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은 사형제들에게 배신당했던 서글픔이나 화공두타를 잃은 먹먹함이 아니었다. 오직 소박한 보람, 그리고 부서진 것들을 맞추며 느끼는 생생한 삶의 감각이었다.

'이렇게 조용히 썩어가듯 늙어 죽어도 나쁘지 않겠어.'

혜지는 차창 너머를 응시하며 찻물을 삼켰다. 깊고 무심한 눈동자 속에는 흔들림 없는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적어도 혜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휘이잉-

그러나 멀리 안휘성(安徽省) 쪽에서 남하하여 불어온 밤바람은, 평소의 맑은 솔잎 향 대신 아주 옅지만 비릿하고 불길한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짙은 핏내이자, 피할 수 없는 무림의 업보였다.

혜지의 찻잔 수면 위로 미세한 파문이 일렀다.

조용한 은둔, 코믹하고 평화로운 일상. 하지만 진짜 '불상자'의 피투성이 발걸음이 무의연구소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오고 있음을, 무심한 안마사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저 나른하게 하품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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