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야의 진료, 무너지는 철벽
깊은 밤, 산골 마을인 향림촌에는 벌레 우는 소리조차 잦아들 정도로 기나긴 적막이 내려앉았다.
무의연구소의 진료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좁은 침소. 그곳에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숨을 몰아쉬는 남궁설이 누워 있었다. 얇은 무명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그녀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짐승을 경계하는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단결 같던 머리카락은 차가운 식은땀에 젖어 이마와 목덜미에 들러붙었고, 입술은 하도 세게 깨문 탓에 핏기가 맺혀 있었다.
낮 동안 문틈으로 훔쳐보았던 그 끔찍하고도 치명적인 광경이, 아낙네들의 벗은 살결과 농염한 교성이 각인된 환영처럼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어놓았다.
'여인네의 순음지기(純陰之氣)를 탐하여 내공을 쌓는 마교의 색마. 저 사특한 자찰(自察)의 타락한 무공에 두 번 다시 농락당할 수는 없다.'
설은 단전을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안휘성을 호령하던 남궁세가의 가전 심법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부러진 다리 탓에 기맥이 꼬여 내공을 일으킬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외부에서 침투하는 사특한 기운을 막아낼 정신적인 방어벽 정도는 세울 수 있을 터였다. 무림 정파의 기수로서 정조를 잃느니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것이 마땅했다.
끼기기긱.
그때, 밖으로 통하는 낡은 미닫이문이 신경질적인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터벅, 터벅.
일정한 간격의 무심한 발소리가 좁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혜지였다.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창백하고 서늘한 이목구비는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의 한 손에는 맑은 물이 담긴 나무 대야가, 다른 한 손에는 알 수 없는 약초를 짓이겨 만든 시커먼 고약이 들려 있었다.
그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낮 동안 촌부들의 몸에서 배어 나온 땀 냄새와, 혜지 특유의 짙은 단향목 냄새가 훅 끼쳐왔다. 설은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방에 불도 켜지 않고 궁상맞게 뭣 하시오. 죽은 귀신이라도 부를 참인가."
혜지의 건조한 목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그는 대야를 바닥에 툭 내려놓고는 품에서 부시를 꺼내 머리맡의 낡은 초롱에 불을 밝혔다. 일렁이는 황색 불빛 아래, 혜지의 투명한 백옥 같은 피부와 감정 한 점 섞이지 않은 칠흑 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시선은 설의 아름다운 자태가 아니라, 오직 부러진 오른쪽 허벅지 쪽을 향해 처박혀 있을 뿐이었다.
"이불 걷으시오. 낮에 부지런히 빗자루질을 시켰으니 부골(붙은 뼈) 주변으로 근육이 어지간히 뭉쳤을 터. 기맥을 다시 열고 어혈(瘀血)을 빼지 않으면 내일 아침엔 퉁퉁 부어올라 다리를 잘라내야 할지도 모르니."
다리를 잘라낸다는 끔찍한 협박에도 설은 이불을 꽉 쥔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닥쳐라, 이 짐승 같은 색마놈...! 낮에 네놈이 무지렁이 촌부들을 상대로 벌인 그 더러운 사술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어디서 그 사특한 손가락을 함부로 들이대려 하는가!"
설의 일갈이 좁은 방 안을 매섭게 울렸다. 당장이라도 눈빛으로 상대를 베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혜지의 얼굴에는 당황은커녕 파리라도 쫓는 듯한 지독한 귀찮음만이 떠올랐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목에 걸친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본가에서 오냐오냐 자라서 그런지 망상이 아주 깊구만. 색마라니, 나는 그저 돈 받은 만큼 근골을 고쳐주는 평범한 의원일 뿐이오. 밥을 얻어먹었으면 치료에 협조를 해야 할 것 아니오. 이불 걷기 싫으면 그냥 그 위에서 다리를 분지르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지의 손아귀가 벼락같이 뻗어 나와 설의 이불 채로 오른쪽 허벅지를 우왁스럽게 움켜쥐었다.
"아악...!"
자비 없는 악력에 설은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는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반사적으로 이불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혜지는 그 틈을 타 이불을 걷어내고, 부목이 대어진 설의 하얀 허벅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싸늘한 밤공기가 다리에 닿자 설은 수치심과 공포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혜지는 대야의 물에 손을 씻고는, 그 지독하게 길고 창백한 열 손가락 끝에 내공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귀를 부리는 손가락, 마사지(魔使指)의 비묵이 은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힘 풀고 숨이나 고르시오."
혜지의 손끝이 설의 허벅지 피부에 닿았다.
"흣...!"
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에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평생 사내의 손길이라곤 무기를 부딪칠 때의 살기 어린 스침이 전부였던 그녀였다. 하물며 아무리 의원이라 한들, 간밤에 이어 외간 사내의 손길이 이토록 은밀하고 연한 맨살에 직접 닿는다는 것은 버텨내기 벅찬 정신적 고문이었다.
혜지의 손가락이 피부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부러진 대퇴골 주변의 뭉친 근육결과 단단하게 닫혀버린 혈도(穴道)의 위치를 섬세하게 짚어내기 시작했다. 거스러미 하나 없는, 그 지독하게 매끄러운 손가락 끝에서 기이한 파동이 일었다.
그의 손길은 어떤 정욕도, 색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장 난 기계를 해체하고 분석하는 무심한 장인의 그것퍼럼 차갑고 기계적이었다. 하지만 설의 몸이 느끼는 감각은 달랐다. 혜지의 굳은살 하나 없는 손끝이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의 연한 살결을 파고들 때마다, 척수를 타고 오르는 소름 끼치는 전율이 전신을 지배했다.
'참아야 한다.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 이 사특한 미혼(迷魂)의 진에 홀려서는 안 돼. 저자의 목적은 나의 순음지기를 빨아먹어 취하려는 수작이다. 여기서 무너지면 남궁의 자존심은 끝이다.'
설은 입술을 꽉 깨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씹으며, 혜지의 손끝이 혈도를 파고들 때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묘한 자극을 오직 악에 받친 고통으로 억눌렀다.
혜지의 손놀림이 점차 빨라졌다. 그는 허공에서 무형의 검을 쥐듯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휘더니, 뼈의 부서진 파편을 제자리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엉켜버린 근육의 결을 쥐어짜듯 강제로 찢어발기며 풀어헤쳤다.
"끄으읍... 으... 흐윽..."
참혹한 통증이었다. 맨정신으로 뼈와 살이 뒤틀리는 감각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이빨을 빠드득 갈며 버티던 설의 입에서 결국 짐승 같은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시울이 시큰거렸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아냈다. 하지만 혜지는 그런 그녀의 뼈아픈 인내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야멸차게 허벅지 안쪽의 요혈을 찌르며 기맥을 후벼 팠다.
"아직 굳은 피가 반도 안 빠졌소. 이빨 꽉 깨무시오."
순간, 혜지의 두 손가락이 설의 허벅지 안쪽 기해혈(氣海穴) 부근의 핵심 기맥을 강하게 내리눌렀다가, 비틀어 올리듯 튕겨냈다.
펑-!
설의 체내에서 무언가 거대한 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파음이 울렸다.
막혀있던 사음(邪陰)의 기맥이 강제로 열리며, 낮 동안 뭉쳐있던 악혈과 피로의 기운이 단숨에 정화되어 쓸려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죽을 것 같았던 끔찍한 고통의 심연 끝에서 무엇인가가 맹렬하게 폭발했다.
"아아아앗...!! 하앙...!"
고결한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강호 무림을 호령하던 얼음 요정의 입에서 이성을 잃은 농염하고 색정적인 교성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고통이 쾌락으로 강제 치환되는 마사지의 극의. 짓눌러왔던 통증의 감각이 순식간에 임계점을 돌파하며, 뇌수를 직접 녹여버리는 듯한 미친 극강의 쾌락으로 돌변한 것이다.
척수액이 펄펄 끓어오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강제로 열린 혈도 사이로 혜지의 차갑고 집요한 손가락 감촉이 증폭되어 밀려 들어왔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가 자신의 신경세포를 직접 악기처럼 튕겨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흐읏...! 아, 아아... 그, 그만...! 제발...!"
설은 이성을 다잡으려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으나, 그녀의 육체는 이미 완벽하게 색마의 사술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허리가 활구처럼 아치형으로 휘어지고, 허벅지는 경련하듯 잘게 떨리며 오히려 혜지의 손을 애타게 갈구하듯 얽혀 들었다.
이빨을 깨물며 버티던 인내의 사슬은 한낱 젖은 종이조각처럼 찢겨나갔다. 눈꼬리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맺혀 흐르고, 꽉 다물렸던 입술은 통제 불능의 교성을 뱉어내느라 벌어진 채 침을 흘렸다. 전신이 환희에 찬 고문에 휩싸여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광란의 지옥 속에서도, 혜지는 놀랍도록 냉담했다.
"다리에 힘 풀라고 방금 말하지 않았소. 근육이 경직되면 뼈가 틀어진단 말이오."
혜지는 눈물범벅이 되어 교태를 부리는 여인의 비참한 꼴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설의 허벅지 안쪽 여린 살을 탁, 쳐서 쳐치며 긴장을 풀게 만들었다.
그 모멸감 넘치는 접촉에 설은 수치심으로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가는 것은 "하응...! 더...!"라는 짐승 같은 간청뿐이었다. 자신의 더러운 육체가 이 끔찍한 색마의 손길에 완벽하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절망감에, 그녀는 쾌락 속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혜지가 부러진 부위를 검은 고약으로 두껍게 덮고 다시 부목을 동여맨 뒤에야, 지옥 같던 쾌락의 형벌이 멎었다.
"끝났소. 내일 아침이면 어지간해서는 통증이 없을 테니, 일어나자마자 마당 쓸고 장작도 좀 패시오."
혜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로 툭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야를 들고 방을 나섰다.
끼이익. 탁.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다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침상 위에 널브러진 설은 땀과 알 수 없는 황홀감의 잔재로 범벅이 된 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사지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허벅지에 발라진 고약에서는 화끈거리는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가문의 보검은 잊힌 지 오래였다. 정파의 기수라는 알량한 자존심은 혜지의 손길 단 몇 번에 처참하게 박살 났다. 그저 쾌락에 절여져 발정 난 암캐처럼 교성을 지르고 허리를 비틀어댔다는 지독한 수치심이 짐승처럼 그녀를 물어뜯었다.
설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끅끅거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미치게 만들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알량한 이성이 쏟아내는 자책감 너머로, 자신의 속절없는 육체와 기맥이 혜지의 그 파멸적인 쾌락과 짐승 같은 손길을 내일 밤 또다시 애타게 갈망하고 있다는 끔찍한 진실이었다.
밤의 심연 속에서, 무림의 얼음 요정은 그렇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철저하게 굴복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