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욕의 마당쇠, 은밀한 갈망
따가운 햇살이 속눈썹을 간질였다.
남궁설은 힘겹게 눈을 떴다. 은은한 단향목 향기가 코끝을 맴돌고 있었다. 간밤의 폭우와 사투, 그리고 모든 이성을 앗아갈 뻔했던 그 끔찍하고도 강렬한 감각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며 이불을 걷어찼다.
"내 다리...!"
숨을 헐떡이며 내려다본 오른쪽 허벅지에는 튼튼한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산산조각 났던 뼈가 기적처럼 제자리를 찾은 것은 물론이고, 염증으로 부풀어 올라야 마땅할 환부 주변의 붓기마저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설은 조심스럽게 마룻바닥에 발을 디뎠다.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체중을 싣고 서 있는 것이 가능했다. 하룻밤 만에 복합 골절 환자가 스스로 일어선 것이다. 사천당가나 만장곡의 신의라 할지라도 혀를 내두를 만한 기적적인 회복 속도였다.
'그 남자가 쓴 비술이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기맥을 단숨에 관통하고 뼈를 조립하던 그 송장 같은 손결...'
설의 얼굴이 일순 붉게 달아올랐다. 치료 과정에서 내질렀던 교성과 수치심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그 불경스러운 자를 당장 베어버려야 했다.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찾아 방 밖으로 나섰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판자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무의연구소 앞마당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맑게 갠 하늘 아래, 삐걱거리는 평상 위에서 혜지가 대자로 누워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고스란히 받는 그의 피부는 볕을 보지 못한 송장처럼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고, 목에 걸친 낡은 염주는 무심하게 가슴 언저리에 뒹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번뇌 따위는 초탈해버린 늙은 노승과도 같은 태도였지만, 뿜어내는 기운은 그저 나른한 백수 촌부에 불과했다.
"일어났소?"
혜지가 파리라도 쫓는 양 손을 휘저으며 귀찮다는 듯 눈만 샐쭉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은 주먹을 꽉 쥐고 비틀거리며 한 발짝 다가섰다.
"네놈, 정체를 밝혀라! 무림의 어느 문파에서 그따위 해괴망측한 사술을 익힌 것이냐! 당장 내 검을 내놓지 않으면 남궁세가의 이름으로 네놈의 구족을 멸할...!"
"시끄럽소."
혜지의 건조하고 서늘한 한마디가 설의 격분을 단숨에 잘라먹었다. 그는 느릿느릿 팔을 뻗어 평상 밑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더니, 무심하게 설의 발밑으로 툭 던졌다.
툭. 촤르륵.
마당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진 것은 검이 아니었다. 거친 산죽을 아무렇게나 엮어 만든 조잡한 싸리 빗자루였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 나를 능멸하려는 얕은 수작이라면 당장 거두어라."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니오. 신성한 약방 마당에 간밤에 진흙과 핏물을 잔뜩 묻혀놨으니, 어제 어질러놓은 마당이나 싹 쓸어놓으시오. 진료비 대신 치는 거니까 불만 갖지 말고 꼼꼼히 쓰시오. 구석에 거미줄도 좀 치우고."
설의 눈동자가 깊은 배신감과 수치심에 지진 난 듯 요동쳤다. 황제를 알현할 때조차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안휘성 남궁세가, 그 고결한 핏줄의 차기 가주에게 촌부나 잡는 미천한 빗자루질을 시키다니. 필시 그녀의 기를 완전히 꺾고 모욕을 주기 위함이 분명했다. 설은 단전을 끌어올려 기를 모으려 발악했다. 그러나 부서진 뼈가 억지로 이어붙여진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기맥이 닫혀, 내공은 한 줌도 머물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
지금의 그녀는 검기를 뿜어내던 절세 고수가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근육통에 시달리는 나약한 평범한 계집에 불과했다. 다리가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기도 힘들었다.
설은 수치심에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못해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마당의 흙을 미끄러지듯 쓸어내기 시작하자, 평상에 누워 시원한 산바람을 맞던 혜지는 곧바로 두 눈을 감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호흡조차 일정해진 완벽한 무방비 상태.
'이런 굴욕을... 언젠가 내 뼈가 완전히 붙는 날, 저 오만한 목부터 베어버릴 것이다. 남궁의 검이 네놈의 심장을 꿰뚫을 날을 반드시 보게 되리라.'
설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마당쇠 노릇을 이어갔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고, 부러졌던 허벅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명을 질렀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차마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땀방울이 맺혀 턱선을 타고 마당의 마른 흙 위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정오 무렵이 되자, 열려 있던 대문 너머로 향림촌의 촌부들이 바구니를 이고 하나둘 몰려들었다. 소박한 옷차림의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었다. 강호의 피바람과는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순박한 자들이 왜 이 살벌한 색마의 소굴을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인가.
"아이고, 원장님. 밭을 하도 맸더니만 허리가 끊어질 것 같구만유. 오늘따라 진하게 좀 부탁드려유."
"뒷산에서 나물 캐다가 발목을 삐끗했는디, 영 시원찮네. 우리 집 영감이 밤마다 허리가 아프다 패악질을 혀서 나 죽겄다니까."
평상에서 낮잠을 자던 혜지는 부스스 일어나 진료실 안쪽으로 쓰다듬듯 걸어 들어갔다. 그 걸음걸이엔 여전히 어떠한 보법(步法)의 흔적도 없었다. 남궁설은 마당 한구석에서 빗자루를 움켜쥔 채, 은밀하게 문틈 너머로 벌어지는 광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자의 사특한 마공을 낱낱이 파악하여 약점을 쥐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진료실 안에는 흙투성이 저고리를 입은 중년의 촌부가 평상에 엎드려 있었다. 혜지가 소매를 서서히 걷어붙이고 그녀의 뭉친 어깨와 허리춤을 집요하게 눌러가기 시작했다. 무심하고 차가운 백옥 같은 손끝이 촌부의 혈맥을 짚어 꾹 누르는 순간이었다.
그저 평범하게 혈도(穴道)를 짚어 기혈을 풀어주는 시술이라 여겼던 설의 예상은 처참하게 빗나갔다.
"아앗...! 흣... 거, 거기는... 하앙!"
진료실 밖까지 촌부의 치명적인 교성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설은 충격에 휩싸여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놓칠 뻔했다. 남사스러운 신음이었다. 혜지의 손결이 요추(腰椎) 부근의 혈도를 깊게 파고들 때마다, 아낙의 입에서는 고통 섞인 앓는 소리가 아니라 야릇하고 나른한 교태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엎드린 아낙은 열기에 못 이겨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다리를 비틀기까지 했다.
"어이구, 시원혀. 원장님 손결이 아주 그냥 극락이여...! 뼛속까지 녹아내리겄어... 아, 앙... 흑!"
"조금 세게 들어갑니다. 숨 내쉬시오. 기맥이 단단히 뭉쳐 있으니 막힌 곳을 터야 하오."
혜지는 여전히 무심하고 덤덤한 표정으로 촌부의 허리 근육을 강하게 비틀고 혈도를 과격하게 뚫어버렸다. 그때마다 촌부들은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기묘한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땀에 젖은 아낙들이 비틀거리며 진료실을 나설 때면, 그녀들의 얼굴에는 사흘 밤낮을 춘약(春藥)에 절여진 듯한 붉은 화색이 돌고 있었다.
문틈으로 그 끔찍하고도 충격적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던 설의 머릿속에 하나의 명쾌한 공식이 세워졌다.
'확실하다. 확신할 수 있다. 저 자는 틀림없이 여인네의 순음지기(純陰之氣)를 취해 내공을 쌓는 극악무도한 채음보양(採陰補陽)의 색마가 분명하다!'
근골을 맞춘다는 핑계로 불쌍한 아녀자들의 혈도를 희롱하여 음탕한 쾌락을 주입하고, 그 기운을 빨아먹어 수명을 연장하는 마교의 사술. 그러지 않고서야 침도 쓰지 않는 평범한 진료에서 저런 짐승 같은 교성이 날 리가 없었다.
간밤 자신에게 가해졌던 그 말도 안 되는 감각 역시 자명했다. 부러진 뼈를 맞췄다는 것은 그저 표면적인 핑계였고, 실상은 자신의 몸에 쾌락의 마기를 주입하여 타락시키려던 색마의 치밀한 수작이 틀림없었다. 백주대낮에 이런 작은 촌구석까지 흘러들어와 평범한 양민들을 상대로 사술을 펼치다니.
설은 당장이라도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짐승 같은 자의 만행을 막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그녀의 손에는 명검 대신 조잡한 몽당 빗자루만이 초라하게 들려 있었다. 기맥이 막힌 상태로는 저 기괴한 수법을 도저히 피할 재간이 없었다. 설은 분루를 삼키며 마당 한구석에서 색마의 악행을 가슴속에 철저히 기록해 두었다. 언젠가 한 줌의 무공이라도 돌아오는 날, 가장 끔찍한 형벌로 저자의 목을 쳐 본가에 고발하리라 맹세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피처럼 붉은 노을이 향림촌 일대를 덮기 시작했다. 재잘거리던 동네 아낙들이 모두 돌아간 무의연구소에는 다시금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고된 마당 청소와 낮 동안의 극심한 긴장감 탓인지, 설은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부러진 다리가 맥박이 뛰듯 욱신거렸다. 그녀는 짐승의 시선을 피하듯 진료실 안쪽 가장 깊숙한 침소 모서리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터벅, 터벅.
일정한 간격의 발소리가 적막을 깨고 들려왔다. 진료실 정리를 마친 혜지였다. 그가 나무통에 담긴 맑은 물과 알 수 없는 약재가 담긴 사기그릇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옷자락에서는 낮 동안 아낙들의 땀방울과 섞였을 터인, 기묘할 정도로 짙고 은은한 단향목 냄새가 훅 풍겨왔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설의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이제 들어누우시오. 낮에 무리하게 움직였으니 뼛조각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이탈한 기맥은 없는지 다시 훑어서 제자리에 쑤셔 박아야 하니."
그 덤덤하고 서늘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백련강(白鍊鋼)처럼 단단했던 설의 심장이 주책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상의 깃을 꽉 틀어쥐며 몸을 잔뜩 뒤로 물렸다. 낮에 아낙네들이 지르던 그 끈적하고 남사스러운 신음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며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평범한 아낙들의 기혈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끔찍한 음기를 뽑아내던 자가 아니던가. 하물며 무공을 익혀 순음지기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몸에 다시 그 마공이 닿는다면 어찌 될 것인가. 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돼. 저 사특한 손결에 또다시 농락당할 수는 없다. 남궁가의 자존심이, 나의 무도(武道)가 한낱 색마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저 기괴한 자찰(自察)의 타락한 무공이라 단정 지으며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무림 정파의 기수로서 당장 자결을 해서라도 정조를 지키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입술을 깨물며 버티고 있는 허벅지 깊숙한 곳에서부터, 통증을 덮어버리는 후끈한 열기가 슬금슬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젯밤, 살을 찢고 튀어나왔던 뼛조각을 강제로 쑤셔 넣을 때 혜지의 차갑고 긴 그 백옥 같은 손가락이 파고들던 감각. 그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심연 끝에서 폭발했던, 뇌수를 녹여버릴 듯한 극강의 쾌락이 피부와 신경망에 지독한 화인(火印)처럼 남아있었던 것이다. 두려움과 경멸 속에서 불현듯 피어오르는, 육체가 기억하는 은밀한 기대감.
자신은 저 사술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설은 혼란스러운 자신의 감정에 왈칵 눈물이 솟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꼿꼿한 어깨가 불규칙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혜지가 나무통을 바닥에 툭 내려놓으며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빨리 눕지 않고 뭣 하시오. 내일도 진료비 갚으려면 마당을 쓸어야지. 뼈가 단단히 굳을 때까지는 매일 밤 부지런히 맞춰 놔야 할 것 아니오. 아니면 평생 절름발이로 살 텐가?"
절름발이라는 단어에 설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혜지의 깊고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그 시선에는 정욕은커녕 티끌만 한 동요조차 없었다. 오직 부서진 기계를 수리하겠다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잔인한 장인의 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결국 설은 항복하듯 자신의 더러운 육체와 타락해가는 정신을 소리 없이 경멸하며, 질끈 눈을 감은 채 침상 위로 무너져 내렸다. 폭풍 전야의 밤, 피할 수 없는 두 번째 굴욕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쾌락이 서서히 무의연구소의 좁은 방 안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