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화. 협의라는 이름의 덫
밤은 짧았다. 잠들기엔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강유찬은 낡은 장판이 깔린 원룸 바닥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놓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어지러운 글자들이 눈을 찔렀다. 어제 게이트에서 입은 옆구리 상처가 욱신거렸다. 싸구려 진통제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나는 헌터 협회에서 보낸 통지서였다. ‘임시 신고 조건부 접수증’. 포포, 정식 명칭 SL-734. 그 작은 슬라임이 일으킨 파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개체명: SL-734(임시)]
[임시 신고자: 강유찬 (F급)]
[특이사항: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유의미한 가치 창출 가능성 확인. 저등급 오염 자원 재활용 특화 개체로 추정. 관련 세무 분류 및 처리권 귀속 분쟁 가능성 높음. 각별한 주의 요망.]
[조치: 관련 법규 검토 및 위험성 재평가를 위해 격리 집행을 7일간 유예함. 기간 내 지정 장소에서 ‘신규 특수 개체 능력 검증’에 출석할 것.]
정식 등록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임시, 모든 것이 조건부였다. 7일. 그 안에 포포의 가치와 안전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그대로 격리였다. ‘격리’라는 단어가 차갑게 박혔다. 협회 연구실의 차가운 실험대 위에서 해부당할지도 모를 포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하나는 민도혁이 보낸 짧은 메시지였다. 법이라는 가면을 쓴 노골적인 협박.
[강유찬 씨. 협회에서 연락 갔을 겁니다. 총 예상 감정가 13,600,000원 중 우리 파티 몫으로 예치된 4,080,000원 관련, 이의 신청 들어간 거. 복잡하게 만들 생각 없습니다. 내일 오전 10시, 우리 길드 사무실로 오세요. ‘협의’합시다.]
[안 오면 절차대로 갑니다. 예치금 묶어두는 건 시작일 뿐이고.]
숨이 턱 막혔다. 유찬은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 놓인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 옅은 푸른빛을 띤 중화수 속에서 포포가 잠들어 있었다. 뽀글, 아주 작은 공기 방울을 내뱉었다. 어제 집하장에서 무리한 탓인지, 평소보다 몸체가 더 작아진 느낌이었다. 색도 살짝 흐려진 것 같았다.
저 녀석을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총 예상 감정가 13,600,000원 중 9,520,000원이 선지급됐지만, 병원비와 약값, 케이스 값이 빠져나가자 숫자는 빠르게 줄었다. 남은 4,080,000원은 민도혁의 이의 신청 때문에 예치금으로 묶여 있었다.
돈을 지키려면, 저들의 판에 들어가 싸워야 한다.
민도혁이 파놓은 함정이 뻔히 보였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지금 물러서면 예치금 4,080,000원은 물론이고, 포포의 소유권까지 물고 늘어질 게 분명했다.
“……가야지.”
유찬은 휴대폰을 들어 짧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 오전 10시, 약속 장소로 가겠습니다.]
* * *
다음 날 오전 10시 정각.
푸른 불꽃 길드 사무실은 변두리 상가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F급 짐꾼인 유찬에게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외부인 접견실. 예상대로 민도혁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상석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양옆으로 어제 봤던 파티원 둘이 버티고 섰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서류 가방을 든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잘 다려진 셔츠. 길드 소속 변호사일 것이다. 접견실 한쪽 끝에는 협회 분쟁조정과에서 나온 직원 한 명이 기록용 태블릿을 들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제대로 판을 깔아두고 기다린 셈이다.
“왔군. 앉아.”
민도혁이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유찬은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차가운 가죽 의자가 등에 딱딱하게 닿았다.
“강유찬 씨,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맙군.”
민도혁이 입을 열었다. 어제의 험악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능숙한 사업가처럼 서류 한 장을 테이블 위로 쓱 밀었다.
“서론은 생략하지. 본론부터 얘기하지. 우리가 버린 단검에서 나온 결정들. 총 감정가가 1,360만 원에 달한다고 들었어. 우리 파티는 그 단검들의 ‘원 소유주’로서, 그 가치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폐기물입니다. 폐기 전 기록에도 직접 서명하셨고, 처리 책임과 권한은 저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유찬이 침착하게 받아쳤다.
“말장난은 그만두지, 강유찬 씨. 폐기물에서 그런 엄청난 가치가 나올 줄 알았다면, 제정신인 헌터가 그걸 버렸을까?”
민도혁 옆에 앉은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내용은 칼날 같았다.
“강유찬 씨. 현행 헌터법 및 게이트 전리품 귀속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게이트 내에서 채집 및 획득에 기여한 파티에 원 소유권이 귀속됩니다. 폐기를 선언했더라도, 그 처리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수준의 경제적 가치’가 발생했을 경우, 원 소유주는 재산권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협회에서 강유찬 씨의 수익금 중 30%인 4,080,000원을 지급 보류하고 예치한 것이 그 법적 근거입니다.”
F급 짐꾼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법과 규정의 압박이었다. 그들은 유찬이 이 거대한 벽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찬은 밤새도록 대비했다.
“그래서 ‘협의’를 하러 온 겁니다.”
유찬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녹음 앱 아이콘이 선명했다.
“시작하기 전에, 이 대화는 양측의 분쟁 해결을 위한 공식적인 자리이므로 모든 내용을 녹취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겠습니까?”
민도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양옆에 서 있던 파티원 하나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굳었다. 변호사만이 표정 변화 없이 유찬을 쳐다볼 뿐이었다.
“……마음대로 해.”
민도혁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이제부터 대놓고 폭언이나 협박은 못 하겠다는 뜻이다.
“좋습니다. 그럼 민도혁 씨 측이 제안하는 협의 내용이 뭡니까?”
“간단해.”
민도혁은 기다렸다는 듯 본색을 드러냈다.
“지금 묶여 있는 4,080,000원. 우리가 이의 신청을 일부 조정해 줄 수도 있어. 적어도 지급 보류를 길게 끌고 가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지.”
당장 월세와 병원비가 급한 사람에겐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그 대가로 조건이 있어. 앞으로 우리 푸른 불꽃 파티가 게이트에서 넘기는 폐기물 처리에 우선 참여해. 독점에 가까운 협력이지. 물론, 거기서 나오는 수익은 지분을 나눠야 한다. 우리가 8, 강유찬 씨가 2.”
옆에 있던 변호사가 부드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저희 파티의 전리품에서 파생되는 2차적 수익이니까요. 합리적인 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슬라임의 능력을 검증하는 협회 테스트 과정에도 저희 파티가 ‘원 소유주’ 및 ‘이해관계자’ 자격으로 참여할 권리를 요구합니다. 협회에도 이미 관련 의견서를 제출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4,080,000원을 미끼로 포포를 자신들의 전용 폐기물 처리 노예로 만들고, 수익의 80%를 착취하겠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능력 검증 과정에 참여해서 데이터를 빼돌리고, 어떻게든 포포의 소유권 분쟁에까지 꼬투리를 잡아 보려는 속셈까지.
평범한 F급 짐꾼이었다면, 이 법적, 물리적 압박에 못 이겨 불공정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찬은 더 이상 과거의 무력한 짐꾼이 아니었다.
“거절합니다.”
단호한 한마디에 접견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뭐?”
민도혁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 분쟁이 길어지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역으로 제안하죠.”
유찬은 똑바로 민도혁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처리 우선권, 좋습니다. 독점 계약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유찬은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말했다.
“첫째, 제가 처리할 폐기물은 반드시 길드 명의로 ‘폐기 선언 및 처리권 위임’ 공식 서류에 서명한 것만 받겠습니다. 구두 약속이나 간이 서류는 받지 않습니다.”
변호사의 미간이 순간 좁혀졌다. 최소한 처리 책임을 누구에게 넘겼는지, 나중에 딴소리하기 어렵게 못 박는 조항이었다. 소유권 다툼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어도, 유찬이 혼자 덮어쓸 위험은 줄어든다.
“둘째, 작업을 시작하기 전, 위임된 모든 폐기물의 사진과 목록을 교차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작업 중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멀쩡한 물건을 폐기물이라고 넘기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셋째, 수익 분배. 8대 2는 말도 안 됩니다. 처리 후 협회 공식 감정가가 나오면, 그 금액을 기준으로 모든 비용을 제외한 순수익을 5대 5로 나눕니다. 처리 과정에 드는 중화수 비용, 제 인건비, 그리고 특수 개체인 포포의 관리 및 유지 비용을 모두 공제한 뒤의 금액입니다.”
민도혁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지 혀로 축이는 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유찬은 잠시 말을 끊고, 눈에 힘을 주었다.
“모든 작업 일정과 처리량은 전적으로 제 슬라임, 포포의 컨디션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결정합니다. 포포가 지치거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작업을 중단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저에게 있습니다. 무리한 작업 지시는 일절 받지 않겠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민도혁의 파티원들은 유찬을 벌레 보듯 쳐다봤다. 저 F급 짐꾼 새끼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감히, 하는 눈빛이었다.
“이,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결국 민도혁이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네놈이 뭔데 우리한테 조건을 걸어? 그 슬라임, 원래 우리 단검 빨아먹고 나온 거잖아! 법대로 따지면 반은 우리한테 떼줘야 할 판에, 건방지게!”
“그럼 법대로 하시죠.”
유찬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예치금은 몇 년이고 묶여 있겠죠. 저는 그동안 다른 길드 폐기물을 처리해서 돈을 벌면 그만입니다. 아, 협회에서 포포를 ‘저등급 자원 재활용 특화 개체’로 주목하고 있다는 건 아시죠? 푸른 불꽃 길드가 아니더라도, 폐기물 처리 비용을 아끼고 부수입까지 얻고 싶어 할 길드는 많을 겁니다.”
명백한 블러핑이었다. 아직 다른 길드에서 연락이 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민도혁의 탐욕과 조급함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크윽…….”
민도혁은 화를 억지로 삼키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유찬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쟁이 길어져서 좋을 게 없는 건 자신들이었다. 소문이라도 나쁘게 퍼지면 길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갔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변호사가 나섰다.
“잠깐만요, 대표님. 진정하십시오.”
그는 유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강유찬 씨. 제안 내용은 잘 들었습니다. 꽤나 꼼꼼하게 준비해 오셨군요. 좋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강유찬 씨의 슬라임이 그만한 가치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 능력이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지 직접 확인은 해봐야겠습니다.”
변호사가 민도혁에게 눈짓했다. 미리 짜놓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신호였다.
“마침 잘됐군. 그럼 테스트 한번 하지.”
민도혁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우리 길드 창고에 마침 분쟁 소지가 있는 폐기 장비가 몇 점 있거든. 네 슬라임이 정말 쓸모 있는지, 거기서 한번 증명해 봐.”
덫이었다. 협의라는 이름의 덫.
* * *
길드 창고는 서늘하고 먼지 냄새가 가득했다. 한쪽 구석에 파손된 장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민도혁은 그중에서 낡은 방패 하나와 부러진 창, 그리고 산성액에 녹아내린 가죽 갑옷 조각 몇 개를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자, 이거다. 지난번 게이트에서 깨진 것들이지. 폐기 선언은 아직 안 했지만, 어차피 버릴 물건들이야. 한번 처리해 봐.”
유찬은 물건들을 유심히 살폈다. 부러진 창과 가죽 갑옷은 마물의 혈흔과 오염 물질에 심하게 부식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폐기물이었다.
하지만 방패는 달랐다. 표면에 흠집은 많았지만, 마력 회로 패턴이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수리만 잘하면 아직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폐기물 더미에 교묘하게 쓸 만한 장비를 섞어 놓은 것이다.
만약 포포가 완제품도 가리지 않고 분해해 버린다면?
‘네 슬라임이 멀쩡한 장비까지 망가뜨렸다’며 책임을 뒤집어씌울 것이다. 그리고 포포의 능력을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소’로 몰아가 협회 테스트와 소유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유찬은 묵묵히 아크릴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포포.”
말캉.
포포가 케이스 밖으로 나왔다. 젤리처럼 몸을 떨며 낯선 공간의 냄새를 맡는 듯했다.
민도혁과 파티원들의 시선이 포포에게 집중됐다. 저 주먹만 한 게 정말 돈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의심과 탐욕이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포포는 토독, 토독,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기어 폐기물 쪽으로 다가갔다.
먼저 부식된 가죽 갑옷 조각에 몸을 가져다 댔다. 포포의 몸이 은은한 빛을 내며 갑옷 조각을 감쌌다. 지이익. 오염 물질이 녹아내리는 소리와 함께 갑옷 조각이 빠르게 부스러지며 사라졌다.
잠시 후, 포포가 몸을 떼자 바닥에는 검은 먼지 같은 가루만 남았다. 실패였다. 모든 폐기물에서 결정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민도혁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이게 다인가?”
유찬은 대꾸하지 않았다. 포포는 이어서 부러진 창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부러진 창날이 녹아내리고, 잠시 후 포포의 몸 안에서 작고 탁한 마력 결정 하나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가장 낮은 등급의 결정. 가치로 따지면 몇만 원 수준이었다.
“에게. 고작 이건가?”
파티원 중 하나가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포포는 민도혁이 덫으로 섞어 놓은 방패 앞으로 다가갔다.
민도혁의 눈이 번뜩였다. 변호사도 흥미롭다는 듯 지켜봤다.
포포는 방패 주위를 한 바퀴 맴돌았다. 킁킁거리듯 몸의 일부를 부풀렸다. 하지만 이전처럼 달려들어 분해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맛없는 음식을 앞에 둔 아이처럼, 몸을 살짝 부볐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뒤로 스르르 물러났다. 아예 처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야. 왜 안 하는 거지?”
민도혁이 초조하게 물었다.
유찬은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반응이 없습니다.”
그는 민도혁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포포는 ‘완전히 가치를 상실한 폐기물’이나 ‘제거해야 할 오염원’에만 강하게 반응합니다. 이 방패는 아직 수리해서 쓸 수 있는 장비라 처리 대상이 아닌 겁니다.”
포포의 한계가 오히려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장비를 굳이 처리 대상으로 삼고 싶다면, 아까 말씀드린 절차부터 밟으십시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이 방패가 폐기 대상이라는 선언과 처리권 위임 서류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포포가 반응할지는 별개입니다. 멀쩡한 장비를 억지로 폐기물이라고 부른다고, 포포가 다 먹어 치우는 건 아니니까요.”
민도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함정에 자신이 빠진 꼴이었다. 서명하는 순간 최소한 ‘멀쩡한 장비를 망가뜨렸다’는 책임 전가는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방패에서 나온 것이 전부 유찬 몫으로 확정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협회 감정과 별도 정산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더 귀찮고, 더 안전했다.
“이, 이 교활한 새끼…….”
“교활한 게 아니라, 정당한 절차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뒤탈이 없지 않겠습니까?”
유찬은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결국 민도혁은 방패에 대한 서명은 하지 못했다. 대신 구겨진 자존심 때문에라도 뭐라도 보여줘야 했다. 그는 아까 포포가 실패했던 가죽 갑옷 옆에 있던, 심하게 파손된 단검 하나를 발로 툭 찼다.
“이건 진짜 버릴 거다! 어디 한번 해봐!”
그는 즉석에서 변호사가 내민 간이 서류에 ‘파손된 단검 1점 처리권 위임’이라고 휘갈겨 썼다.
유찬은 그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품에 챙긴 뒤, 포포에게 눈짓했다. 포포는 기다렸다는 듯 단검으로 다가가 몸으로 감쌌다.
이번에는 빛이 달랐다. 아까보다 훨씬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포포의 몸에서 제법 맑은 빛을 내는 결정 하나가 또르르 굴러 나왔다.
[최하급 마력 결정 (중급 순도)]
[예상 감정가: 140,000원]
큰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금액이 아니었다.
협회 직원이 유찬과 민도혁 앞에 태블릿을 내밀었다.
“현장 중재 결과입니다. 특수 능력 ‘정제’의 유효성 일부 인정. 대상 폐기물 1점의 결정 감정가 140,000원, 기존 폐기 처리 비용 90,000원 절감 효과 확인. 해당 결정과 처리 비용 절감 효과는 본 협의 기록에 따라 강유찬 헌터의 처리 실적으로 인정됩니다.”
민도혁의 얼굴이 굳었다. 고작 230,000원 때문에 자존심을 구긴 셈이었다.
“이의 없으시면, 양측 서명해 주십시오. 본 ‘협회 제출용 협의 기록’은 금일부로 시스템에 등록됩니다.”
임시 메모 따위가 아니었다. 공식적인 중재 기록이었다. 민도혁은 망설였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마지못해 전자 서명을 갈겼다. 이제 이 기록은 유찬의 권리를 방어하는 첫 번째 방패가 될 터였다.
직원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기존에 접수된 4,080,000원 예치금 지급 보류 신청 건입니다. 민도혁 파티 측에서 제출한 ‘소유권 주장’ 근거가 불충분합니다. 따라서 추가 자료가 보완되기 전까지, 협회는 지급 보류 조치를 확대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기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급한 불은 껐다. 민도혁이 더는 억지를 부려 유찬의 돈줄을 틀어막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정식 등록을 위한 현장 실사 테스트는 어떻게 진행할 겁니까?”
민도혁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주도권을 되찾고 싶어 했다.
“원칙대로, 양측이 합의한 장소에서 진행합니다. 단, 테스트 대상은 폐기 선언과 처리권 이관 기록이 확인된 품목으로 제한합니다.”
협회 직원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민도혁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D-14번 게이트, 3구역 폐기물 집하장. 거긴 어떻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찬의 심장이 차갑게 뛰었다.
D-14번 게이트 3구역.
어제 민도혁의 파티가 공략을 마치고 나온 곳이었다.
민도혁은 포포가 폐기물에서 가치를 뽑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봤다. 그러니 그가 노리는 건 단순한 망신이 아니었다.
나오면 나오는 대로, ‘푸른 불꽃 파티가 공략한 게이트에서 나온 부산물’이라며 다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대로, 포포의 능력이 우연이고 실용성이 없다고 깎아내릴 수 있다.
오염 폐기물이나 위험한 잔해에 포포가 무리하게 반응하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통제 불가능한 특수 개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다.
민도혁에게 D-14 집하장은 망신을 주기 위한 쓰레기장이 아니었다.
나오든 안 나오든 유찬을 묶어 둘 수 있다고 믿는, 자기 손바닥 위의 판이었다.
“강유찬 헌터, 동의하십니까?”
협회 직원이 물었다.
유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가까스로 감췄다.
“예. 좋습니다.”
민도혁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쓰레기장으로 유찬을 끌어들였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유찬은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쓰레기장에, 민도혁이 어제 스스로 버리고 나온 돈줄이 묻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 돈줄은, 버린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의 손으로 올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