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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 죽은 헌터의 표식이 길을 열었다 일러스트

# 11화. 죽은 헌터의 표식이 길을 열었다

제11화. 죽은 자의 길잡이

까악.

이번에는 아까보다 또렷했다. 소리는 사망한 헌터의 방어복 안감이 담긴 투명 증거 상자 쪽에서 났다.

소리에 반응한 연구원 하나가 무심코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십시오.”

유찬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짧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연구원이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박성준이 나섰다. 그는 부하 연구원에게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명령하고, 유찬에게는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김 연구원, 물러서. 모든 영상 기록 이중으로 저장하고, 협회 쪽 입회인에게 바로 실시간 화면 공유 열어.”

“예, 팀장님!”

상황실의 공기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원본 증거물은 즉시 봉인되었다. 이제부터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니터에 띄운 ‘읽기만 가능한 복사본’뿐이었다.

그때, 유찬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부서진 까마귀의 제단’ 조각과 반응했습니다.]

[그림자 추적 계열 펫, ‘까악스’와 임시 계약을 진행하시겠습니까?]

[계약 시간: 10분]

유찬은 망설임 없이 ‘YES’를 눌렀다.

순간, 그의 발밑 그림자가 일렁였다. 검은 잉크가 물에 번지듯 스멀스멀 피어오른 어둠이 작은 그림자 까마귀의 형상을 빚어냈다.

까악스.

실체는 없었다. 오직 그림자로만 이루어진 존재. 녀석은 날갯짓 한번 없이 유찬의 어깨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앉았다.

“까악.”

녀석의 소리는 물리적인 음성이 아니었다. 유찬의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정신적인 속삭임이었다.

[길… 냄새가 난다….]

까악스는 증거물이 담긴 상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바닥에 떨어진 보이지 않는 실오라기, 상황실에 남은 미세한 흔적을 향해 부리를 작게 벌렸다. 원본을 건드리지 않고도 흔적을 쫓는 펫. 지금 상황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유찬은 까악스의 속삭임을 정답으로 삼지 않았다. 그저 확인해야 할 또 하나의 단서로 삼을 뿐이었다.

그때 박성준의 단말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는 짧게 화면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짚었다.

“재공략팀, 게이트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상부에서도 재촉하는군.”

게이트를 열어 둔 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에너지가 빨려 들어간다. 투입 대기 중인 S급, A급 헌터들의 피로도도 쌓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장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멈추는 것도 싸움이었다.

“지금 들어가면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근거가 있습니까, 강유찬 씨?”

“지금부터 찾아야죠.”

유찬은 대형 모니터를 가리켰다.

“기록 복사본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번엔 장비 파손 상태랑 마지막 기록 위치를 같이 띄워주십시오.”

화면에 여러 개의 창이 동시에 떴다. 사망한 헌터들의 마지막 생체 신호 위치, 그들이 착용했던 장비의 파손 부위 사진, 그리고 공략대 통신 기록의 마지막 몇 줄.

유찬은 가장 먼저 보스방 입구 쪽 기록을 확대했다.

“보스방 문, 개방된 흔적이 없습니다.”

모니터 속 석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억지로 열려 한 흔적도, 전투의 여파로 생긴 균열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스와 교전했다면 최소한 입구 주변이라도 파손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깨끗합니다.”

상황실의 모두가 화면에 집중했다. 유찬의 말대로였다. 보스와의 격전이 벌어졌다고 보기엔 모든 것이 너무 멀쩡했다.

“마지막 생체 신호 위치도 보스방 안이 아닙니다.”

유찬이 지도 위에서 깜빡이는 마지막 좌표를 손으로 가리켰다.

“보스방으로 진입하기 직전, 이 좁은 길입니다.”

어깨 위 까악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같은… 길. 막힌… 길.]

유찬은 까악스의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화면에 떠 있는 누가 봐도 확실한 증거를 짚었다.

“대열이 사용한 로프 기록을 확대해 주십시오.”

김 연구원이 빠르게 키보드를 조작했다. 화면에 로프 장력 그래프가 나타났다. 유찬은 그래프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이상합니다. 대원 숫자보다 한 번 더, 아주 강하게 당겨진 흔적이 있습니다. 마치… 대열 가장 뒤에서 무언가 전체를 잡아끈 것처럼.”

“생체 신호가 사라진 순서도 이상합니다. 보통 앞에서부터 무너지는 게 일반적인데, 이건 뒤쪽부터 순서대로 끊겼습니다.”

파손된 방어복 사진들이 그 증거였다. 대부분의 손상은 가슴이나 팔이 아닌 등판, 허리, 그리고 로프를 연결하는 고리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앞에서 덮친 게 아니었다.

“선두가 기습당한 게 아닙니다. 대열의 가장 뒤가 먼저 공격당하고, 그대로 끌려 들어간 겁니다.”

상황실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박성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김 연구원.”

“예, 팀장님.”

“같은 던전, 과거 사고 기록 전부 찾아봐. 비슷한 일가 있었는지 확인해.”

“찾아보겠습니다.”

몇 분간 키보드 소리만 울렸다. 이윽고 김 연구원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세 건… 세 건 더 있습니다.”

“전부 보고해.”

“지난 2년 동안 총 세 건의 공략 실패 사고가 더 있었습니다. 각각 천둥 길드, 신화 길드, 그리고 연합 공격대였습니다.”

화면에 세 개의 사고 보고서가 나란히 띄워졌다. 길드도, 장비도, 시기도 전부 달랐다. 생존자가 없었고 회수된 장비의 파손이 너무 심했다. 이전까지는 그저 ‘보스방 공략 실패’로 정리된 사건들이었다. 각기 다른 사고로 치부되었기에, 누구도 연결점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김 연구원이 스크롤을 내렸다. 첫 번째 사고 기록이 화면을 채웠다.

2년 전, 천둥 길드.

사진 속에는 박살 난 장비들이 널려 있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갑옷 조각과 부러진 무기들. 생존자 없음. 보스방 근처에서 일어난 전멸 사고로 종결된 사건이었다. 망가진 장비 기록 외에는 남은 게 거의 없었다.

두 번째 사고 기록이 열렸다.

이번엔 등고선처럼 표현된 3차원 지도였다. 천둥 길드가 쓰던 격자형 좌표 지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다른 길드, 다른 장비 업체. 좌표를 대조하기 전까지는 같은 장소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세 번째 파일이 열렸다. 1년 전의 기록.

사망한 헌터의 생체 신호 기록 위에 찍힌 표식은 해골 모양이 아니었다. 붉은 경고 아이콘. 장비 회사가 쓰는 자체 규격이었다. 앞선 두 사고와는 다른 장비, 다른 표기법. 이것 역시 앞선 사고들과 한눈에 이어 보이지 않았다.

김 연구원은 세 개의 창을 나란히 띄웠다.

첫 번째, 처참하게 부서진 천둥 길드의 장비 사진.

두 번째, 등고선으로 그려진 다른 길드의 지도.

세 번째, 붉은 경고 아이콘이 찍힌 생체 기록.

서로 다른 사건, 서로 다른 기록.

하지만 그가 좌표 기준부터 맞추자, 등고선 지도와 격자 지도의 특정 지점이 소름 돋을 만큼 정확하게 겹쳐졌다.

세 번째 사고의 붉은 아이콘이 찍힌 바로 그 자리였다.

웅성거리던 상황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타이핑을 하던 관제 요원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다른 쪽에서 들려오던 희미한 통신음도 끊겼다.

모두의 시선이 김 연구원의 모니터에 떠 있는 세 장의 기록에 고정되었다.

서로 다른 시간, 다른 길드, 다른 장비.

하지만 단 한 곳을 가리키는 죽음의 기록들.

“네 번의 사고. 그 마지막 위치를 한 지도에 전부 표시해 봐.”

박성준이 명령했다.

잠시 후, 하나의 지도 위에 네 개의 점이 찍혔다.

상황실의 모든 이들이 숨을 삼켰다.

네 개의 마지막 지점은 소름 끼칠 정도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스방 직전 좁은 길.

“이럴 수가….”

김 연구원이 중얼거렸다.

유찬은 보고서의 첨부 사진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멈췄다. 이번 백호 공략대의 장비 사진이었다. 손목 보호대에 달린 작은 보조 스크린. 그 위에 희미하게 떠 있는 길 안내 표식.

“이 사진, 확대해 주십시오.”

화면 가득 손목 보호대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다음 경로를 안내하는 작은 화살표와 함께 고유 번호가 떠 있었다.

[길잡이 표식: A-17-Gamma]

“다른 사고들… 다른 세 건의 사고에서도 길잡이 표식 기록이 남아 있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데이터가 대부분 파손돼서….”

“할 수 있는 만큼 해봐.”

김 연구원의 손가락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천둥 길드의 부서진 헬멧. 신화 길드의 깨진 고글. 연합 공격대의 파손된 단말기. 회수된 장비 사진 속에서, 그들은 기적적으로 마지막 기록을 찾아내려 애썼다.

“찾았습니다! 천둥 길드 헬멧, 전방 표시창 기록 일부 복원 성공했습니다!”

한 연구원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화면으로 쏠렸다. 깨진 바이저 이미지 위로 희미한 글자가 떠올랐다.

[길잡이 표식: A-17-Gamma]

상황실에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화 길드 쪽도! 고글 렌즈에 남은 잔상입니다!”

또 다른 화면에 사진이 떴다. 금이 간 렌즈 표면에 똑같은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길잡이 표식: A-17-Gamma]

마지막 기록만 남았다. 모두가 화면을 바라봤다.

“연합 공격대 단말기… 마지막 송신 기록에…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사진이 앞선 세 사진 옆에 나란히 떴다.

[길잡이 표식: A-17-Gamma]

같은 표식 번호였다.

상황실은 얼어붙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네 개의 다른 팀이, 다른 시간에, 다른 장비를 가지고, 모두 같은 표식을 따라가다 같은 장소에서 사라졌다.

유찬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가장 첫 번째 사고가 언제였습니까?”

“2년 전, 천둥 길드입니다.”

“아마도….”

유찬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2년 전에 죽은 천둥 길드 헌터가 남긴 길잡이 표식이, 아직까지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박성준이 되물었다.

“죽은 헌터의 표식이 말입니까?”

“예. 그 표식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뒤따라 들어간 팀들의 지도에 ‘없는 길’이 나타난 겁니다. 그들은 시스템이 안내하는 길을 의심 없이 따라갔다가….”

죽음의 함정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박성준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재공략 24시간 보류한다.”

박성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황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재공략조, 철수. 즉시 복귀하라.”

“무인 탐사 장비 준비해. 비행기형 드론이랑 무인 탐사 차량, 둘 다 투입한다.”

지시가 오가고, 스태프들의 손이 바빠졌다. 굳은 얼굴로 대기하던 공격조 헌터들은 누구 하나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그들은 방금 전 모니터로 목격한 광경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상황실 안에 찬 기운이 내려앉았다.

유찬은 그 모든 소란 속에서 오직 모니터 화면의 한 지점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보스방 직전 좁은 통로.

기록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평범한 석조 복도였다.

‘저기다.’

남들은 알아챌 수 없는 흔적. 죽은 헌터가 남긴 ‘길잡이 표식’이 아직 저곳에 남아 있는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어깨에 앉아 있던 까악스가 유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주인의 예리한 집중력을 감지한 것일까.

까악.

새는 짧고 날카롭게 울며 온몸의 검은 깃털을 바짝 세웠다.

같은 사고가 반복될지도 모르는 길에 사람을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강유찬 씨.”

“예.”

“이번 일은 길드 기록에 남기겠습니다. 강유찬 씨 이름도 함께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찬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설이 정말 맞는지, 죽은 자의 표식이 아직도 그곳에서 다음 희생자를 부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그때, 어깨 위 까악스가 유찬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까악… 제단이… 부른다….]

박성준이 마이크에 대고 짧게 명령했다.

“재공략 중지. 탐사 드론, 즉시 띄워. 현장 확인조, 5분 내로 장비 착용하고 대기.”

재공략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던 공격조가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누구도 무기를 집어넣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은 여전했다.

유찬의 시선은 모니터 한쪽에 고정되었다.

화면 속, 좁고 비틀린 길.

저 표식이 정말로 아직까지 저기 켜져 있는 걸까.

박성준이 현장 확인을 위한 무인 탐사 장비 준비를 지시하는 소리가 상황실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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