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쇄 던전의 첫 관리권
다음 날 오전. 대산 D-7 임시 협상실의 공기는 얇은 유리창을 넘어온 이른 아침의 성에처럼 서늘했다.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컵에서는 식어 버린 믹스커피의 단내가 희미하게 풍겼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가설 막사 특유의 흙먼지 냄새와 눅눅한 던전의 습기가 회색 벽을 타고 눅눅하게 스몄다. 얇은 천막 지붕 위로 스치는 건조한 바람 소리가 협상실 내부의 무거운 정적을 한층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무거운 철제 테이블 위에는 몇 가지 소품이 복잡하게 널려 있었다.
어제 확인된 B2 통로의 회복길 기록이 담긴 휴대용 단말기. 포포와 냥믹, 그리고 2진화 각성을 마친 까악스의 임시 평가표. 대산 본사 법무팀이 밤새 수정해 들고 온 계약서 뭉치. 마지막으로 헌터 협회의 임시 접수 화면이 띄워진 태블릿이 미세하게 떨리는 차가운 백색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테이블 왼편에 강유찬이 앉아 있었다.
유찬의 어깨 위에는 어제 진화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못한 까악스가 깃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주위를 경계했을 녀석이 지금은 부리를 가슴 깃털 사이에 깊이 파묻고 작게 숨만 고르고 있었다. 어제 너무 많은 마력을 쏟아부은 탓에 깃털 끝이 푸석하게 갈라져 있었다. 유찬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녀석의 작은 날개깃을 쓸어내렸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가 유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녀석의 헌신을 무가치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찬의 무릎 위에서는 초록빛 투명한 포포가 젤리처럼 몸을 파르르 떨며 `뽀글` 소리를 냈다. 맑은 초록빛 액체 속에서 아주 작은 공기 방울이 조용히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유찬의 오른팔 바로 옆에는 냥믹이 노란 눈동자를 빛내며 테이블 위를 뚫어지게 살피고 있었다. 냥믹의 길고 검은 꼬리가 철제 의자 다리를 가볍게 탁, 탁 치며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냈다. 녀석의 기민한 시선은 상대편의 서류 뭉치 위를 정밀하게 훑고 있었다.
유찬의 맞은편에는 대산 본사에서 급히 파견된 법무팀장과 현장 책임자가 앉아 있었다. 법무팀장은 칼처럼 다려진 깃을 세운 중년 남성이었고, 현장 책임자는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는지 눈 밑에 거무스름한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법무팀장의 옷깃에서는 값비싼 향수 냄새가 났으나, 그것마저 협상실 구석의 눅눅한 흙먼지와 섞여 기묘하게 코를 찔렀다.
그들 사이에 백호 길드의 보증자 자격으로 동석한 박성준 팀장과 윤도겸이 자리했다. 테이블 모퉁이에는 협회의 임시 기록 담당자가 묵묵히 디지털 펜을 만지작거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대산의 법무팀장이 굳은 미소를 지으며 수정 계약서 한 장을 유찬의 앞으로 슬그머니 밀어 놓았다.
"어제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강유찬 헌터님. 헌터님과 어깨 위의 그 영리한 사역마 덕분에 B2 통로의 오염 유출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본사에서도 헌터님의 공로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현장 책임자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급하게 말을 보탰다.
"예, 맞습니다. 무엇보다 헌터님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B2 통로처럼 깊고 위험한 구역은 대산의 전문 장비와 숙련된 인력들이 들어가서 복구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헌터님께서는 위험한 일에서 이만 손을 떼시고, 몸을 추스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가 제안하는 사고 수습비와 단기 용역 수수료는 업계 최고 수준으로 맞췄습니다."
대산 측이 내민 서류에는 겉보기에는 아주 그럴듯한 제안이 적혀 있었다. 사고 수습 수수료라는 이름으로 당장 쥐여주겠다는 현금의 액수가 꽤 컸다. 신입 F급 헌터라면 당장의 밀린 방세나 병원비 걱정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밀린 월세와 포포의 영양제 비용, 그리고 까악스의 회복을 위한 특별 사료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이면의 속뜻은 뻔했다. 유찬을 단기 용역이라는 틀 안에 묶어 두고, D-7 던전의 B2 오염 구역에 대한 모든 기록과 권리를 다시 대산의 금고 속에 잠그려는 속셈이었다.
박성준 팀장이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유찬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산 측의 서류를 훑어본 뒤, 차분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유찬 씨. 백호 길드의 이름으로 보증을 서 드린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어제 기록된 B2 폐쇄 통로의 제한 복구 가능 경로는 엄연히 공식 문서에 남았습니다."
박성준이 태블릿 화면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B2 폐쇄 통로 — 제한 복구 가능]`
`[회복길 확인]`
`[기존 무기록 사용 책임: 대산 측 확인 필요]`
`[권리 재협상 필요]`
`[회복 경로 확인 개체: 까악스]`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화면에 새겨진 글자를 보며 박성준이 말을 이었다.
"대산은 이 기록이 협회 본부로 정식 이관되어 오염 검사료나 감정비, 보관료 같은 골치 아픈 비용이 늘어나기 전에 덮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결정은 오직 강유찬 씨의 몫입니다. 대산의 제안을 수용할지, 아니면 기록을 근거로 다른 길을 갈지 본인이 판단하십시오. 저는 강유찬 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대산 법무팀장의 턱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긴장감이 맴도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냥믹이 부드럽게 네 발로 서며 움직였다.
냥믹은 테이블 위로 슥 걸어가더니, 대산이 밀어놓은 수정 계약서 바로 앞에 멈췄다. 그리고 길고 검은 꼬리를 꼿꼿하게 세워 올렸다.
검은 꼬리끝이 마치 정밀한 지시봉처럼 계약서의 특정 구절을 정확히 내리눌렀다.
`[단기 용역]`
`[잔여물 소유권 대산 귀속]`
`[정산 기준 추후 협의]`
`[임의 반출 가능]`
냥믹은 검은 꼬리로 그 네 단어를 콕콕 짚어내며 유찬을 돌아보았다. 냥믹의 노란 눈동자가 위험한 덫을 경고하듯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유찬은 냥믹의 꼬리끝이 가리킨 계약서의 문구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당장 눈앞의 돈을 받고 서명해 버린다면 모든 권리는 대산의 주머니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D-7 던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유권과 앞으로의 복구 과정에서 나올 부산물들의 가치가 모두 대산으로 귀속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누락된 기록을 단순히 덮어두려는 데 그치지 않았다. 던전 폐쇄 기간에 발생할 온갖 이권과 변수를 단독으로 쥐고 흔들겠다는 속셈이었다.
유찬은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폴더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어제 안전 구역과 B2 통로 초입에서 촬영했던 몇 장의 사진들이었다.
첫 번째 사진은 안전 구역 구석에서 냥믹과 포포가 찾아냈던, 정제 과정을 거치지 못한 작은 결정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무릎 위의 포포가 그 사진을 향해 다가가더니 몸을 `토독` 떨었다. 젤리 같은 몸통이 파르르 떨리며 마치 맛있는 먹이를 보고 침을 삼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어 유찬이 두 번째 사진을 늘어놓았다. B2 통로 내부의 오염 유출이 가장 심각했던 원본 구역의 모습이었다. 검푸른 곰팡이와 탁한 기운이 뒤엉킨 어둠의 사진을 보자마자, 포포는 투명한 초록빛 몸을 순식간에 단단하게 굳혔다. 불쾌한 기운을 본 것처럼 잔뜩 긴장한 몸체였다.
유찬이 이번에는 피곤해하는 까악스의 부리 앞에 회복길 지도가 그려진 화면을 가져다 댔다.
까악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더니, 지도의 하단에 표시된 제한 복구 구간을 콕콕 쪼았다. 그 구역에는 까악스의 흔적을 따라 흰 줄이 선명하게 남았다. 하지만 대산 측이 마음대로 그려 넣은 무리한 전체 진입 표시 쪽으로 손가락을 대자, 녀석은 쉰 목소리로 `까악` 낮게 울부짖으며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유찬의 품속으로 더 깊숙이 머리를 묻어 버렸다. 무리하게 전체 영역을 뚫으려다가는 녀석이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냥믹은 대산 측이 적어둔 거액의 사고 수습비 숫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직 '대산 귀속', '추후 협의', 그리고 '임의 반출 가능'이라는 약관에만 연신 검은 꼬리를 흔들며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다.
유찬은 확실하게 중심을 잡았다. 터무니없는 대박을 노리는 욕심쟁이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와 책임을 좁히고, 그 안에서 확실하게 쥘 수 있는 권리만을 정확하게 잡아내야 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확인된 구간과 남은 조각을 7일 동안 대산이 함부로 빼돌리지 못하도록 묶는 장치였다.
유찬은 손을 뻗어 대산의 수정 계약서를 다시 저편으로 밀어 보냈다. 서류가 철제 테이블 위를 미끄러져 법무팀장의 손가락 직전에서 멈췄다.
"이대로는 서명 안 합니다."
유찬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법무팀장의 찌푸려진 미간 사이로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스쳤다.
"강유찬 헌터님. 수수료 액수가 모자라서 그러십니까? 신입 등급의 헌터분이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예산을 책정해 드린 겁니다. 대산의 후의를 이렇게 무시하셔도 괜찮겠습니까?"
유찬이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받았다.
"계약을 진행하려면 조건이 바뀌어야 합니다. 대산이 다 가져가는 계약서에는 서명하지 않습니다."
"조건이라니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유찬은 미리 정리해 둔 네 가지 조건을 막힘없이 읊었다. 어려운 법률 용어는 쓰지 않았다. 오직 실질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것들만 쉽고 명확하게 늘어놓았다.
"첫째, B2 통로에서 오염을 되돌리는 일은 저희가 먼저 손댈 수 있게 우선권을 주십시오. 제한 복구 우선권입니다. 둘째, 안전 구역에 남아 있는 잔여 부산물들을 저희가 우선적으로 회수할 권리를 주십시오. 부산물 회수권입니다. 셋째, 앞으로 7일 동안 대산이 D-7의 권리 구조를 임의로 바꾸지 못하게 하고, 저희에게 추가 평가 우선권을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이 기간 동안 대산이 던전 내부의 자원이나 무기를 우리 허락 없이 마음대로 빼돌리지 못하게 제한하십시오. 임의 반출 금지입니다."
방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대산 법무팀장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고, 현장 책임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법무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협회의 임시 기록 담당자가 펜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강유찬 헌터님. 아무리 백호 길드가 뒤에서 보증을 서 준다고 해도, F급 개인 헌터에게 던전의 일부 구역에 대한 관리 우선권을 보장해 준 전례는 없습니다. 관리의 책임은 막중합니다. 만약 B2 통로에서 추가 사고라도 터지면 그 책임은 F급 개인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집니다."
대산 법무팀장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협회 담당자의 말에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협회 측 의견이 맞습니다. 백호가 아무리 보증을 서도, 개인 헌터에게 던전의 안전 통제와 제한적 관리 권한을 양도하는 것은 규정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산 측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협상실 안의 팽팽한 대립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대산의 법무팀장이 두꺼운 가죽 표지의 대산 던전 안전 규정집을 철제 테이블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 냄새와 협상실 구석의 눅눅한 흙먼지가 한데 섞여 매캐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개인 헌터가 던전 일부 영역의 관리권을 요구하다니, 협회 규정상으로도, 우리 대산의 내부 안전 기준상으로도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입니다. 제한 복구 구간이라고 해도 그건 사고가 터졌을 때 임시로 수습하는 조치에 불과합니다. 그걸 가지고 우선권을 주장하겠다뇨? 상식 밖의 얘깁니다."
협회 임시 기록 담당자 역시 태블릿에 대고 있던 디지털 펜을 멈추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유찬 헌터님. 대산 법무 책임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F급 개인에게 안전 등급이 확보되지 못한 B2 오염 구역의 관리 우선권을 허가한 전례는 협회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거기서 오염이 다시 터져서 백호 길드나 대산의 인부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F급 헌터인 강유찬 씨가 혼자서 어떻게 지시겠습니까? 책임 소재가 불명확한 계약은 협회에서도 공인해 주기 어렵습니다."
유찬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백호의 윤도겸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유찬의 귓가로 몸을 기울였다.
"유찬 씨, 솔직히 저들이 지적하는 안전상의 한계와 규정 문제는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대산이 제시하는 사고 수습비 액수가 엄청납니다. 신입 F급 헌터로서는 평생 만져보기도 어려운 거금입니다. 굳이 이렇게 위험하고 복잡한 구역을 직접 떠맡아 머리 아픈 책임을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백호 길드 내부에서도 차라리 단기 용역 형태로 확실한 보상을 챙기고 물러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볼 겁니다. 부상당한 몸도 추스르셔야지요."
유찬은 대답 대신 품 안의 포포를 살짝 토닥였다. 무릎 위에 있던 초록빛 포포가 `뽀글` 소리를 내며 유찬의 손가락 끝에 젤리처럼 파르르 떨리는 몸을 밀착했다. 녀석의 따뜻하고 끈적한 촉감이 닿자 굳어 있던 손끝이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유찬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법무팀장과 협회 담당자를 차례로 응시했다.
"B2 구역 전체를 혼자 도맡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유찬의 목소리는 조용히 갈라졌지만, 소란스러운 막사 안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전부 가질 생각은 애초에 없습니다. 까악스가 확인한 회복길, 딱 그 제한 구간만 먼저 확인하고 처리하겠다는 뜻입니다. 범위가 한정적이니 책임 소재도 명확합니다. 제가 맡은 회복길에서 터지는 문제는 오롯이 제가 감당합니다. 하지만 대산 측이 마음대로 임의 반출을 하거나, 저희가 확인을 끝마치지 못한 다른 오염 구역에서 발생하는 문제까지 왜 제가 짊어져야 합니까? 책임을 이유로 정당한 우선권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게 무슨 억지입니까!"
대산 법무팀장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한 구간이든 뭐든, 결국 던전 내부의 자원과 권리는 기본적으로 원소유주인 대산의 몫입니다. F급 헌터에게 우선권을 쪼개어 주는 변칙적인 기록을 남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 대산이 이 협상을 거부하고 법대로 나가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그때, 조용히 팔짱을 끼고 있던 백호의 박성준 팀장이 조용히 커피컵을 내려놓았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성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대산 법무팀장에게 꽂혔다.
"법대로 하자는 말씀, 아주 흥미롭군요."
박성준은 여전히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를 유지한 채, 유찬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강유찬 씨의 판단이 백번 옳습니다. 대산 측에서는 자꾸 규정을 들먹이시는데, 만약 이번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백호 길드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어제 강유찬 씨의 사역마인 까악스가 공식 기록으로 남긴 'B2 통로의 무기록 사용 흔적'을 기억하십니까?"
박성준이 태블릿을 조작하여 어제 대산이 던전 내에서 임의로 사용했던 승인 과정을 거치지 못한 설비들과 폐기 기록을 화면에 띄웠다.
"대산이 승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등록 통로를 가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협회 본부의 정식 조사단에 넘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단순히 던전 권리를 두고 다투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당장 대산 본사가 짊어져야 할 무기록 던전 오염 방치 및 무단 가동에 대한 책임이 먼저 도마 위에 오를 겁니다. 그렇게 되면 대산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하던 오염 검사료와 감정비, 보관료 문제까지 전부 양지로 끌어올려지게 되겠지요."
박성준의 차분한 압박에 대산 법무팀장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윤도겸 역시 박성준의 말을 듣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손익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윤도겸이 대산 측과 백호 측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침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대산 법무 책임자. 박 팀장의 지적이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지금 강유찬 씨가 요구하는 범위는 명확합니다. 오직 제한된 B2 복구 구간의 우선권과 7일 동안의 임시 잠금장치만 걸어두자는 겁니다. 대산 본사 상부에서도 괜히 무기록 가동에 대한 법적 책임이 크게 불거져서 대규모 소송이나 던전 폐쇄 처분을 감당하는 것보다, 이 정도의 제한적인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고 전체 리스크를 덮는 편이 실무상 훨씬 유리합니다. 양쪽 모두 손해를 최소화하는 길은 이것뿐입니다."
곁에 앉아 있던 대산의 현장 책임자 역시 사색이 되어 법무팀장의 옷자락을 다급히 움켜잡았다.
"맞습니다, 법무 책임자. 여기서 조사가 더 크게 번지면 저부터 먼저 목이 날아갑니다. 강유찬 헌터가 제시한 네 가지 조건은 던전의 알맹이를 통째로 뺏어가겠다는 억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어차피 7일이 지나면 임시 평가 기간도 끝나지 않습니까. 우선권만 7일간 내어주는 셈 치고 이쯤에서 마무리하시지요."
법무팀장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 눈앞의 F급 헌터를 돈 몇 푼으로 찍어 누르고 B2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려던 대산의 시나리오가 완전히 어그러진 순간이었다.
그들은 유찬의 끈질긴 시선과 박성준이 밀어붙이는 무기록 책임이라는 벼랑 끝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결국 법무팀장이 떨리는 손으로 넥타이를 거칠게 느슨하게 풀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좋습니다. 그 조건대로 진행하지요."
협상실 구석에서 펜을 멈추고 눈치를 보던 협회의 임시 기록 담당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태블릿 위로 바쁘게 디지털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합의된 내용대로 협회 공식 임시 기록 문구를 작성하겠습니다."
사각사각, 액정 위를 미끄러지는 펜촉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잠시 후, 협회 담당자가 작성을 마치고 태블릿 화면을 테이블 중앙으로 돌려놓았다. 은은한 푸른빛의 액정 화면 위로 선명한 검은색 활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D-7 B2 제한 복구 및 안전 구역 잔여 부산물 회수 우선권: 강유찬 기준 적용]`
`[추가 평가 기간 7일]`
`[대산 임의 반출 금지]`
유찬은 그 문구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현금은 없었다. 대산이 제시했던 수수료 봉투는 날아갔고, 여전히 그의 주머니는 가벼웠다.
하지만 유찬은 자신이 받아낸 보상의 실질적인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단기 용역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이제 그는 D-7 던전의 B2 제한 복구 구간과 안전 구역의 잔여 부산물을 대산보다 먼저 확인하고 회수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리 보유자로서 이름을 올린 셈이었다. 협회의 공식 문서에 이 기록이 선명하게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앞으로 대산이 유찬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묶어둘 가장 강력한 자물쇠나 다름없었다.
대산 법무팀장은 서명란 바로 위에 펜촉을 올려두고도 선뜻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이 서명 하나로 대산이 D-7 던전을 적당히 수습하고 이권을 빼돌리려던 꼼수가 완전히 막혔음을 실감한 탓이었다.
현장 책임자 역시 허탈한 낯빛으로 길게 탄식을 뱉었다. 자신들이 쳐 둔 그물 때문에 대산 본사가 7일 동안 임의 반출도, 권리 변경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됐다.
박성준이 유찬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강유찬 씨. 정식으로 권리가 기록되었습니다. 백호 길드 역시 이번 7일의 평가 기간 동안 유찬 씨의 기준이 철저하게 지켜지도록 보증인으로서 눈을 떼지 않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박 팀장."
유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에 자신의 서명을 꾹 눌러 새겼다.
마침내 계약이 완료되었다.
오후 늦은 시간. 백호 길드의 임시 사무실로 돌아온 유찬은 책상 위에 몸을 웅크린 펫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창문 틈새로 비쳐 들어오는 주황빛 노을이 책상 모퉁이를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
포포는 오늘 하루 동안 기운을 많이 썼는지 초록빛 몸체 속에서 작은 공기 방울을 `뽀글` 터뜨리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까악스는 유찬의 어깨에서 내려와 책상 모퉁이에서 날개를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직 냥믹만이 노란 눈동자를 빛내며 책상 위에 놓인 단말기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유찬이 단말기를 켜자, 협회 공식 망을 통해 그에게 들어온 두 건의 새로운 의뢰 문의가 화면에 떠올랐다.
첫 번째 문서는 평범한 의뢰였다.
최근 공식 폐쇄 판정을 받은 어느 일반 던전의 정밀 평가 요청서였다. 첨부된 던전 내부의 오염 사진을 화면에 띄우자, 조용히 졸고 있던 포포가 살짝 몸을 `토독` 떨며 호기심 어린 반응을 보였다. 까악스 역시 잠결에 날개를 펄럭이더니, 지도의 위험 경로에 아무런 실패의 흰 선을 긋지 않았다. 위험 요소가 적은, 전형적인 안전 구역 중심의 의뢰라는 뜻이었다.
유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문서를 열었다.
두 번째 문서는 조금 특이했다. '공동 운영 제안서'라는 굵은 제목이 적힌 서류였다.
대형 길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외곽의 한 던전을 개인 헌터와 공동으로 운영하자는 묘한 제안이었다. 첨부된 던전 중심부의 사진을 띄우자, 포포의 몸체 속 초록빛 젤리가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대산 D-7의 결정 조각들을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맑은 반응이었다. 까악스 역시 지도의 중심 경로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어떠한 위험 경고나 실패선도 찍지 않았다.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유찬이 서류를 내려받으려던 순간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냥믹이 갑자기 네 발로 벌떡 일어서더니 책상 위로 걸어왔다. 그리고 길고 검은 꼬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냥믹은 단말기 화면 맨 아래쪽에 적힌 마지막 조항을 검은 꼬리끝으로 세차게 콕콕 내리눌렀다. 냥믹의 노란 눈동자가 어두운 밤 고양이의 그것처럼 번뜩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유찬은 냥믹의 꼬리가 가리키는 화면의 구절을 읽어 내렸다.
`공동 운영 수익 배분: 정산 기준은 추후 협의.`
유찬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대산 측이 내밀었던 계약서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덫이 다른 얼굴을 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찬은 냥믹의 꼬리 아래에 새겨진 교묘한 문구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던전의 문은 열렸으나, 그 아래에는 더 치열한 암투가 도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