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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검은 깃털이 묻은 폐기 루트 일러스트

# 9화. 검은 깃털이 묻은 폐기 루트

백호 길드의 보안 회의실은 공기마저 살균 처리된 듯 차가웠다.

벽도, 테이블도, 의자도 모두 차가운 흰색 아니면 빛을 반사하지 않는 무광 금속 재질이었다. 인간적인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 그 중앙에 놓인 투명한 증거물 봉투만이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감을 뿜었다.

흑철 길드의 폐기 루트가 기록된 장부.

“협회 보안팀과 연락 마쳤습니다.”

박성준 차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회의실의 온도만큼이나 냉정했다.

그의 옆에는 백의를 입은 김 연구원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벼운 방호복으로 무장한 보안팀원 둘이 버티고 섰다. 네 사람의 시선은 모두 한곳을 향했다. 강유찬이 아니라, 테이블 위의 증거물 봉투에 못 박혀 있었다.

“원본은 즉시 길드 중앙 분석실로 이관합니다. 오염 가능성 및 정보 훼손을 막기 위한 표준 절차입니다.”

압류나 마찬가지였다.

발견자는 강유찬이지만, 이제부터 이 물건에 대한 모든 권한은 길드와 협회의 몫이 된다. 여기서 입을 다물고 순순히 물러나면, 이미 받은 협력비 50만원이 전부일 터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 것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이트 내부에서 발견된 미확인 물품의 권리는 복잡했다. 소유권을 주장하는 순간, 길드의 법무팀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수상한 놈으로 찍혀 조사를 받게 될 수도 있고.

유찬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눈앞에서 놓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크르릉….”

유찬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냥믹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낮게 울었다. 솜털 같은 몸이 가늘게 떨렸다. 녀석의 새파란 눈동자 역시 증거물 봉투를 향해 있었다.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냄새가 접힌다.]

머릿속에 냥믹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종이를 접듯, 이 장소가 품고 있던 흔적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대로 가져가면, 길이 죽는다.]

길이 죽는다.

그 한마디가 유찬의 망설임을 베어냈다. 이건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었다. 누구도 몰랐던 사건의 실마리, 그 시작점이었다.

“잠깐만요.”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유찬이 입을 열자, 기계처럼 움직이려던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박성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강유찬 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 장부, 여기서 나가면 안 됩니다.”

보안팀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김 연구원은 노골적으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발견자가 절차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월권이었다.

박성준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유찬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물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해하시겠지만, 이건 단순한 유물이 아닙니다. 미확인 오염 가능성이 있는 위험 물질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현장 보존보다 안전한 곳에서의 정밀 분석이 우선입니다.”

논리적인 말이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오염 때문이 아닙니다.”

유찬은 품 안의 냥믹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봉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유찬에게만 들리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제 펫은 물건에 남은 마력이나 성분만 감지하는 게 아닙니다.”

유찬은 천천히, 하지만 힘주어 말했다.

“그 물건에 얽힌 의도나, 그게 놓여 있던 자리의 ‘흐름’을 쫓습니다. 이걸 다른 곳으로 옮기는 순간, 가장 중요한 단서가 사라질 겁니다. 증발하듯이요.”

“흐름이라니요.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한 주장입니다, 강유찬 씨.”

김 연구원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펫의 능력이 특이한 건 인정하지만, 길드의 공식적인 보안 절차를 막아설 근거는 될 수 없다는 투였다.

“그럼 과학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죠.”

유찬은 김 연구원을 똑바로 쳐다봤다.

“장부에 찍힌 도장을 보셨습니까? ‘회수하지 말 것’과 ‘폐기 처리로 넘길 것’. 두 개의 붉은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불필요한 중복 표기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전 짐꾼 일을 1년 넘게 했습니다.”

유찬의 목소리에 과거의 경험이 실렸다. 지겹도록 폐기품을 나르던 기억, 먼지 쌓인 창고에서 관리자들의 말을 어깨너머로 듣던 기억이 떠올랐다.

“폐기 절차는 간단합니다. 가치가 없으면 ‘폐기 처리’ 도장 하나 찍고 끝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굳이 ‘회수하지 말라’는 도장을 함께 찍는 경우는 없습니다. 의미가 없으니까요. 버리는 물건을 누가 다시 회수하겠습니까?”

유찬은 잠시 말을 끊고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 김 연구원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박성준의 눈빛은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유찬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이건 가치가 없어서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찬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이 물건들의 뒤를 쫓지 못하게, 길 자체를 막으려고 한 겁니다. 이건 단순한 폐기 기록이 아닙니다. 추적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습니다.”

회의실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박성준의 굳게 닫힌 입술, 보안팀원들의 멈칫하는 몸짓. 유찬의 주장이 단순한 억지가 아니라, 현장 경험에 기반한 날카로운 추론이라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다.

유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니 원본의 소유권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협회 분석실로 넘어가기 전에, 봉투가 열리지 않은 지금 상태에서 제 펫의 반응을 기록으로 남길 기회를 주십시오.”

박성준은 몇 초간 말없이 유찬을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계산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하기엔, 유찬의 펫이 이미 누구도 찾지 못한 장부를 찾아내는 엄청난 성과를 보였다.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좋습니다.”

마침내 박성준이 입을 열었다. 그의 결정에 김 연구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강유찬 씨의 주장을 검토할 가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는 보안팀과 김 연구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짧게 명령했다.

“협회 보안팀에 상황 공유하고 임시 보류 승인 요청해. 원본 봉인은 유지한다. 회의실 CCTV, 전부 테이블 쪽으로 돌려. 모든 과정을 다각도에서 촬영한다. 김 연구원은 지금부터 강유찬 씨의 모든 발언과 펫의 행동을 ‘위험 선별 보조 기록’으로 상세히 타이핑해.”

“예, 차장님.”

두말없이 지시가 이행되었다.

다시 유찬에게 시선을 돌린 박성준은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강유찬 씨와 펫은 증거물 봉투에 직접 접촉할 수 없습니다. 둘째, 봉투와 일정 거리를 두고 투명 차폐막 너머에서만 관찰합니다. 셋째, 여기서 나오는 모든 해석은 공식 의견이 아닌, ‘현장 참고 의견’으로만 기록됩니다. 10분 내로 유의미한 추가 단서가 나오지 않으면, 그 즉시 원래 절차대로 협회로 이관합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유찬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소유권이나 즉각적인 보상을 포기하는 대신, 돈보다 중요한 ‘참여권’을 얻었다. 사건의 주변인에서, 절차의 내부로 들어갈 기회였다.

“그럼 시작하시죠.”

박성준의 허락이 떨어지자, 보안팀원이 테이블 한쪽에 멸균 패드를 깔고 투명 차폐막을 세웠다. 유찬은 그 위에 냥믹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작은 솜뭉치 같던 녀석은 패드 위에 내려서자마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낮은 포복 자세로 몸을 낮춘 냥믹은 증거물 봉투와 거리를 둔 채 천천히 냄새를 맡았다. 두꺼운 플라스틱 봉투와 차폐막에 막혀 있었지만, 녀석은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흔적을 쫓고 있었다.

“야옹.”

[죽은 길이다. 일부러 매듭을 지어 끊어놓은 길.]

냥믹의 감상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유찬은 그것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자신이 관찰한 객관적인 현상처럼 바꾸어 설명했다.

“장부의 특정 페이지에서 강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아까 봤던, 귀퉁이에 검은 얼룩이 묻어 있던 페이지입니다.”

유찬의 말에 김 연구원이 자신의 단말기에 기록된 사진과 대조하며 말했다.

“확인 결과, 도장 순서와 폐기 코드 흐름이 일반적인 처리 절차와 다른 지점이 맞습니다. 강유찬 씨의 추론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때, 냥믹이 갑자기 한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젤리 같은 앞발로 봉투 바로 옆의 테이블 상판을 툭, 툭, 가볍게 쳤다.

[새 냄새. 하지만 진짜 새가 아니야. 날갯짓 소리만 남았어. 그냥 냄새만.]

“검은 깃털 같은 얼룩 말입니까?”

냥믹의 행동을 예리하게 지켜보던 박성준이 물었다.

“예. 제 펫의 반응으로 보아,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어떤 표식 같습니다. 이 폐기 루트 전체에 의도적으로 남겨진 표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찬의 말에 박성준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손안의 단말기를 몇 번 두드리더니,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협회 보안팀에 임시 보류 승인 요청을 넣겠습니다. 승인 전까지 원본은 봉인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백호 길드 차원에서 관련 폐기 물품을 먼저 재조사하겠습니다. 이번 건은 조건부 공동 조사로 전환하고, 강유찬 씨는 보조 기록자로 공식 참여시키겠습니다.”

그는 곧바로 스마트 패드를 꺼내 누군가에게 짧은 메시지와 함께 결재를 올렸다.

띵.

곧이어 유찬의 개인 단말기로 알림음이 울렸다.

[백호 길드에서 80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 (현장 보존 협력비)]

이전의 협력비 50만원에 더해 80만원이 추가로 들어왔다. 총 130만원. 아직 월세와 병원비를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돈의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단순 제보자가 아니라, 길드의 공식 절차에 참여하는 ‘기록자’로서 받은 첫 보상. 더 이상 끌려다니는 외부인이 아니라, 사건의 참여자가 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드르륵.

회의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운송팀 직원이 묵직해 보이는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위에는 커다란 회색 밀폐 박스 몇 개가 실려 있었다.

박성준이 박스에 붙은 라벨을 확인하며 말했다.

“관련 물품도 도착했습니다. 2주 전, 공략에 실패한 C급 게이트에서 나온 회수품들입니다. 흑철 길드 폐기 루트와 일부 겹치는 품목이 있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유찬의 시선이 박스 옆면에 붙은 라벨에 박혔다. 인쇄된 글자가 심장을 차갑게 찔렀다.

[실패 공략대 회수품 / 생존자 없음 / 폐기 보류]

‘생존자 없음….’

지금까지 다뤘던, 주인을 알 수 없는 폐기품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였다. 죽음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물건들이었다.

순간, 냥믹이 회색 박스를 향해 몸을 바짝 낮추고 목구멍으로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하아아악-!”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모습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날카로웠다. 단순한 경계가 아니었다. 눈앞의 적을 만난 듯한 극도의 적대감이었다.

[안에 새가 없어. 근데 날개 소리가 나.]

냥믹의 목소리가 유찬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유찬은 저도 모르게 박스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박스 중 하나는 윗부분이 투명한 아크릴로 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전투 중에 찢어진 것으로 보이는 헌터 방어복 상의가 들어 있었다. 질긴 합성섬유 안감이 충격으로 터져 나와, 하얀 솜 같은 내용물이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마치 안쪽에서 바깥으로 살을 뚫고 돋아난 것처럼, 검고 작은 깃털 하나가 기이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새에게서 떨어진 흔적처럼 보이지 않았다.

실패한 길이, 죽은 헌터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리가 형체를 얻어 남은 불길한 메아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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