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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적서가 너무 달았다 일러스트

견적서가 너무 달았다

백호 길드의 흰 호랑이 로고가 선명한 머그잔. 그리고 그 반대편, 묵직한 상아색 봉투 위에는 산 모양의 인장이 붉게 찍혀 있었다. 대산 길드. 테이블 양 끝에 놓인 두 사물은 소속만큼이나 분위기가 달랐다.

두툼한 서류 봉투 위로 대산 길드 실무팀 소속이라는 윤도겸의 명함이 반듯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시훈 팀장이 보낸 문의를 이어받아 실무 협상에 나온 인물이었다.

“한빛리커버리 건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희가 너무 늦게 연락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윤도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박성준은 표정 없는 얼굴로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한빛이 무너진 사고는 이미 업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처리 과정에서 강유찬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유찬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견적서로 시선을 옮겼다. 한 장짜리 요약본 위에 찍힌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선금: 30,000,000원.’

처리할 폐기물의 총량은 지난번 백호 길드의 임시 관리 구역보다 세 배는 넓은 면적이었다.

숫자의 크기만큼이나 조건도 간단했다.

‘슬라임 단기 대여 및 폐기물 처리.’

윤도겸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희 대산 길드에서 관리하는 폐기장 중 한 곳을 정리하는 안건입니다. 강유찬 씨의 슬라임이 보여준 능력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첫 외부 거래이신 만큼, 업계 최고 수준으로 맞춰 드린 겁니다.”

‘대여’라는 단어가 귓가에 오래 남았다. 포포를 선반에서 꺼내 쓰는 장비처럼 취급하는 말이었다.

그의 옆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박성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유찬 씨의 작업 방식은 단순한 펫 대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처리 과정 전체를 총괄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물론입니다. 표현이 그랬을 뿐입니다. 당연히 강유찬 씨의 현장 판단을 존중합니다.”

윤도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정정했다. 그는 불편한 말을 부드럽게 넘기는 데 익숙해 보였다. 말투도 표정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유찬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무릎 위에서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냥믹이 소리 없이 바닥으로 쏙 내려갔다. 그러고는 테이블 아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고양이 특유의 식빵 자세로 앞발까지 야무지게 감춘 참이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유찬이 견적서의 세부 조항으로 시선을 옮겼다. 선금 삼천만 원이라는 달콤한 숫자 아래, 개미만 한 글자들이 까맣게 숨어 있었다. 유찬은 그중 두 개의 문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2차 산출물은 대산 길드의 소유로 귀속된다.

- 폐기물 처리 중 발생하는 모든 오염 및 정화 책임은 처리 수행자에게 있다.

한빛리커버리가 무너졌던 바로 그 독소 조항이었다. 모든 권리는 가져가고, 모든 책임은 떠넘기는 교묘한 구조.

유찬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봤다. 윤도겸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강유찬 씨?”

유찬은 손가락으로 두 번째 조항을 툭 짚었다.

“오염 책임 조항이 너무 포괄적입니다.”

“아, 그 부분 말입니까?”

윤도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어차피 버릴 물건들입니다. 현장에서 뭔가 나올 확률은 거의 없으니, 사실상 형식적인 문구라고 보시면 됩니다.”

“형식상 문구면 빼도 되겠군요.”

유찬이 짧게 받아쳤다.

윤도겸의 미소에 순간 실금이 가는가 싶었지만, 그는 곧 더 깊은 웃음으로 표정을 덮어버렸다.

“하하,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군요. 다만 길드 간 계약에서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조항을 넣는 게 일반적입니다. 강유찬 씨의 능력과는 별개로 들어가는 조항입니다.”

윤도겸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조건을 덧붙였다.

“물론, 저희도 파트너에 대한 성의를 보여야겠지요. 계약 즉시 선금 3천만 원을 지급하겠습니다. 강유찬 씨의 생활 안정과 초기 비용을 지원하는 차원입니다.”

3천만 원.

박성준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유찬 역시 잠깐 숨을 멈췄다. 지금껏 만져본 적 없는 액수였다. 그 돈이면 당장의 월세는 물론, 병원비 걱정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윤도겸의 진짜 미끼는 다음에 나왔다.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계약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대산 길드 외부에서 발생하는 폐기 원물 처리까지 맡기려고 합니다. 업계 전체 물량의 20%가 저희를 거칩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실 겁니다.”

유찬은 잠깐 말을 잃었다.

전국 단위의 물량이었다. 제대로만 처리하면 당분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문제는 책임이었다.

선금 3천만 원은 매력적이었지만, 계약을 잘못 맺으면 그대로 빚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박성준이 슬쩍 유찬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판단은 유찬의 몫이었다.

책상 아래, 유찬의 다리에 붙어 있던 냥믹의 꼬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녀석도 긴장감을 읽은 모양이었다.

유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흔들리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윤도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윤도겸은 기다렸다는 듯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는 말을 돌리며 옆에 놓인 작은 아이스박스를 테이블 중앙으로 밀었다. 표면에 냉기가 서린 특수 보관 용기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처리할 폐기물 중 일부를 샘플로 가져왔습니다. 펫에게 직접 보여주시는 게 가장 확실할 겁니다.”

작은 마찰음과 함께 뚜껑이 열리자, 불길한 기운을 품은 단검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오염 마나가 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유찬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포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먹고 싶다. 어서 달라. 녀석의 순수한 식욕이 진동처럼 전해졌다.

하지만 유찬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포포가 담긴 투명한 케이스 위를 손으로 가볍게 덮어 진정시켰다.

샘플을 먹이는 건 나중 문제였다. 먼저 확인해야 할 건 견적서 뒤에 붙은 조건들이었다.

“그전에 몇 가지 질문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유찬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돈이 되는 일인 건 분명했다. 다만 그만큼 따라올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첫째, 제가 폐기할 권한을 갖는 원본 아이템의 목록, 그리고 버리기 전 상태 기록은 누가 보존하고 있습니까?”

“…….”

“둘째, 처리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나 결정체를 어디까지 보고해야 합니까?”

윤도겸의 입가에서 만개했던 미소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유찬은 그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그쪽에서 말하는 ‘오염’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리고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정적이 흘렀다. 예의 바른 미소로 모든 것을 둥글게 넘기려던 윤도겸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그는 대답 대신 마른 입술을 축였다. 질문은 날카롭다기보다 실무적이었다. 폐기물 처리처럼 위험한 작업을 맡기려면 당연히 먼저 확인해야 할 내용이었다.

그 당연한 질문에 즉시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윤도겸이 이내 평정을 되찾고 웃었다.

“하하, 강유찬 씨. 굉장히 꼼꼼하시군요. 물론 다 설명해 드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업계에서 실무적으로 다들 하는 방식이 있으니까요. 다만 이런 세부 사항은 계약서 초안을 보면서 맞추는 편이 빠릅니다.”

그가 은근슬쩍 샘플이 담긴 아이스박스로 턱짓했다.

“일단은 펫의 능력을 확인하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선금 3천만 원이 걸린 일입니다. 저희도 이 샘플 처리 결과로 내부 보고를 올려야 다음 단계로 진행이 되거든요. 능력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 모든 논의가 의미 없지 않겠습니까?”

돈과 실물로 시선을 돌려, 껄끄러운 질문을 덮으려는 속셈이었다. 간단한 테스트만 통과하면 바로 3천만 원을 주겠다는데, 누가 이런 기회를 걷어차겠냐는 자신감이 그의 말투에 배어 있었다.

어깨 위 케이스에서 포포가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단검 조각에서 흘러나오는 오염된 마력이 달콤한 간식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유찬은 포포의 케이스를 단단히 붙잡아 움직임을 막았다.

지금 이걸 먹이면 안 된다. 먹이를 받아먹는 순간, 저들의 페이스에 그대로 말려들게 된다.

그때,

까악-

유찬의 등 뒤, 그림자처럼 기척을 숨기고 있던 까악스가 짧게 울었다.

그의 시야에 순간적인 잔상이 스쳤다.

어두운 지하 폐기장. 유찬과 비슷한 차림의 한 남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다. 그의 발치에는 정화에 실패하고 녹아내린 폐기물 더미가 시커먼 액체를 뿜으며 콘크리트 바닥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환영 너머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남자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위태롭게 들려 있었다. ‘정화 책임 비용 청구서’. [긴급 오염 정화 비용], [토양 중화 처리 비용], [2차 피해 보상금] 같은 항목 아래 터무니없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그의 인생을 통째로 저당 잡을 금액이었다.

잔상은 찰나에 사라졌지만, 등줄기에 남은 서늘함은 선명했다. 비슷한 조건으로 덥석 계약했다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이름 모를 누군가의 말로였다.

유찬은 윤도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샘플 하나로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윤도겸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

“이 샘플이 좋을수록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유찬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산 길드에서 보여주고 싶은 가장 ‘그럴듯한’ 조각일 테니까요. 실제 폐기장 전체의 상태와는 다를 수 있겠죠. 이걸 덥석 처리했다가, 나중에 본 폐기물의 오염도가 훨씬 높으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샘플을 기준으로 모든 책임을 저에게 물으실 것 아닙니까.”

테이블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던 냥믹이 나직하게 ‘그르릉’거렸다. 동의한다는 신호였다.

이제 이야기는 펫 대여 문의를 넘어섰다. 폐기물 처리 권한과 책임을 두고 따져야 할 협상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유찬은 자신의 요구 조건을 분명히 밝혔다.

“계약을 논하기 전에,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 제가 처리할 폐기물을 먹이기 전에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권리. 둘째, 방금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들을 권리. 셋째, 폐기 대상이 될 원본 아이템의 기록을 열람할 권리입니다.”

“…….”

윤도겸의 미소가 사라졌다. 준비해 온 흐름이 틀어지고 있었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박성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유찬의 편에 섰다.

“윤도겸 팀장. 강유찬 씨의 요구는 합리적입니다.”

박성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 계약이 백호 길드의 중개 건으로 계속 진행되려면, 방금 강유찬 씨가 요구한 조건들이 사전 확인 문서에 명시되어야 할 겁니다. 이는 저희 백호 길드의 공식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박성준은 조력자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백호 길드의 이름으로 유찬의 요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윤도겸은 유찬과 박성준을 번갈아 보았다. 펫 한 마리 빌리러 온 아마추어 헌터라고 생각했는데, 판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그가 마지못해 웃으며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방금 전의 견적서와는 비교도 안 되게 두꺼운, 진짜 계약서 초안이었다.

“그럼, 이 계약서 초안을 기준으로 세부 사항을 조정해 보시죠. 강유찬 씨께서 원하시는 내용도 추가하고요.”

윤도겸이 서류철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계획은 틀어졌지만, 계약서 이야기로 끌고 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듯했다.

그때 냥믹이 움직였다.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녀석이 스르륵 기어 나왔다. 소리 없이 테이블 위로 뛰어오른 냥믹은 윤도겸이 내민 계약서 첫 장 근처에서 멈췄다.

녀석은 조심스럽게 앞발 하나를 종이 위에 올리려 했다.

순간, 목 아래의 작은 방울 문양이 검은 잉크처럼 번졌다가 다시 오므라들었다. 계약서 첫 장의 잉크가 아주 잠깐 물결처럼 흔들렸다.

찍힐 듯했던 발자국은 남지 않았다. 대신 ‘갑’과 ‘을’의 권리 조항 위로 희미한 먹물 냄새 같은 기운이 스치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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