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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냄새 냥믹 일러스트

계약냄새 냥믹

계약서 첫 장에서 낯설고 비릿한 잉크 냄새가 피어올랐다. 인쇄소에서 막 나온 종이 냄새와는 결이 달랐다. 화학약품처럼 코를 찌르는, 까끌까끌한 이물감이 섞인 냄새였다.

회의실 테이블 밑에서 그림자처럼 스르륵 빠져나온 냥믹이 그 앞에 멈춰 섰다. 녀석은 잠시 허공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다, 이내 테이블 위 계약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의 목 아래, 유난히 하얀 털 부분에 새겨진 희미한 방울 문양이 검은 잉크처럼 번졌다 오므라들기를 반복했다.

계약서 위 빼곡한 글자들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듯했다. 아직 고양이 발자국은 찍히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회의실의 침묵이 고작 종이 한 장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대산 길드의 표준 계약 양식입니다.”

정적을 깬 것은 윤도겸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서류를 펼쳐 유찬 쪽으로 밀어주었다. 마치 잘 세공된 상품을 선보이는 점원처럼, 그의 손길은 매끄럽고 망설임이 없었다.

“강유찬 씨가 보내주신 견적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여 작성했습니다. 폐기 처리 위탁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들이지요.”

그의 목소리는 신뢰감을 주도록 조율되어 있었다. 듣기 좋게 울리는 저음이 회의실 공기를 채웠다. 윤도겸의 손가락이 특정 조항들을 짚으며 빠르게 지나갔다.

‘폐기 처리 위탁’, ‘결과물 귀속’, ‘사고 발생 시 책임’, ‘현장 기록 접근권’ 같은 단어들이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윤도겸의 손가락은 그 어떤 항목 위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는 척하면서도, 시선이 그곳에 고정될 시간은 주지 않았다. 설명은 매끄러웠다. 대신 유찬이 붙잡고 읽을 틈은 거의 없었다.

유찬은 그가 짚어주는 금액 부분을 보지 않았다. 그 대신, 계약서 전체의 구성을 훑었다. 조항의 배열, 글자 크기, 여백 같은 것들. 현장에서 숱하게 봐온 방식이었다. 달콤하고 유리해 보이는 조건은 앞쪽에, 큼직한 글씨로 배치한다. 하지만 진짜 책임을 묻고 의무를 지우는 조항은 뒤쪽으로 빼거나, 다른 항목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 작은 글씨로 인쇄한다.

바로 그때였다. 계약서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냥믹이 작게 코를 찡그렸다. 마치 상한 음식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그 순간, 목 아래 방울 문양이 먹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 한순간 진하게 번졌다.

“잠깐만요.”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박성준이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윤도겸의 말을 끊었다. 그의 시선은 유찬에게 향해 있었다.

“내용이 적지 않으니, 강유찬 씨가 직접 검토할 시간을 충분히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물론이지요.”

윤도겸은 당황한 기색 없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아까보다 조금 더 굳어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틀은 저희와 협력하는 다른 업체들과 모두 동일합니다. 특별히 문제 될 부분은….”

윤도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냥믹이 앞으로 나서 종이 가장자리를 앞발로 꾹 눌렀다. 발톱을 세우진 않았지만, 그 행동에는 ‘더는 넘어가지 마라’는 듯한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작고 부드러운 젤리 발바닥이 종이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사를 표시했다.

유찬은 그 작은 앞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윤도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그 말에 윤도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매끄러운 미소가 순간 옅어졌다 사라졌다. 그는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유찬은 그 찰나의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유찬은 계약서 첫 장을 천천히 넘겼다. 사락, 하고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회의실 안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냥믹은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오히려 넘겨진 두 번째 장의 특정 문장 근처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맴돌았다.

바로 그 부분에서, 유찬의 눈에만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냥믹의 새하얀 수염 끝이, 마치 먹물에 젖은 것처럼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한 올, 두 올. 녀석이 고개를 움직여 특정 문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검은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목 아래 방울 문양은 더 이상 희미하게 번지지 않았다. 점차 선명한 검은 고리 모양으로 그 형태를 굳혀가고 있었다.

‘법률 조항을 아는 게 아니야.’

유찬은 직감했다. 고양이가 민법과 상법을 구별할 리 없었다.

‘냄새를 맡는 거다. 이 조항 뒤에 숨은 진짜 의도의 냄새를.’

냥믹은 합법과 불법을 가려내지 못한다. 다만 상대가 무엇을 탐내는지, 어떤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지, 그 뒤에 숨은 욕망의 농도를 기가 막히게 감지할 뿐이다. 계약서의 단어 하나하나에 스며든, 집요하고 이기적인 의도의 냄새.

종이 위에 아주 희미하게, 고양이 발바닥 모양의 윤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정식으로 찍힌 표식이라기보다 신기루처럼 어른거리는 흔적에 가까웠다. 유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신호였다.

이건 법정에 들고 갈 증거로 쓸 수는 없다. 그래도 서명하기 전, 어디를 따져 물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냥믹이 가리키는 곳, 그곳이 바로 함정의 위치였다.

“보시다시피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윤도겸이 다시 분위기를 몰아가려 했다. 그는 이제 유찬 대신 박성준 쪽을 보며 말했다. 마치 그를 설득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듯이.

“대부분의 현장직 분들은 세부 조항까지는 꼼꼼히 안 보십니다. 어차피 다 표준 양식이고, 서로 믿고 가는 거니까요. 다들 이렇게 계약합니다.”

바로 그 지점이었다. 냥믹의 수염 끝이 젖어든 곳.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로 교묘하게 책임을 뭉뚱그리려는 바로 그 문장.

유찬은 굳이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았다. 대신, 짧게 받아쳤다.

“그럼 다들, 대산 길드의 모든 현장 기록을 전부 검토하고 그 기록에서 파생되는 책임에 동의했습니까?”

회의실에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그 질문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윤도겸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 했던 ‘사고 발생 시 책임’ 조항과 ‘기록 접근권’ 조항을 동시에 꿰뚫었다.

질문을 들은 박성준이 유찬 쪽으로 계약서를 아주 살짝, 눈에 띄지 않게 밀어주었다. 백호 길드가 지금은 유찬 쪽에 서겠다는 뜻을 조용히 내비친 셈이었다.

윤도겸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능숙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썼지만, 유찬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짧게 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계약서 가장자리에 머물던 냥믹이 테이블 한가운데로 한 발 더 내디뎠다. 녀석의 목에 새겨진 방울 문양은 이제 검은 고리의 윤곽을 거의 다 갖추고 있었다. 진화의 문턱에서, 녀석의 온몸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윤도겸이 거절의 말을 입에 올리기 직전이었다.

냥믹이 테이블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냥.”

낮고 짧은 울음소리.

녀석의 목에 새겨진 방울 문양은 먹물로 그린 듯한 선명한 검은 고리로 굳어졌다. 냥믹의 진화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수염 끝도 짙은 먹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작은 몸이 계약서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종이 위를 토독거리며 걸었다. 마치 인주를 찍은 도장처럼, 녀석의 젤리 발바닥이 지나간 자리에 검은 잉크 발자국이 남았다.

첫 번째 발자국은 제5조, ‘처리 결과물 귀속’ 조항 위에 찍혔다.

두 번째는 제7조, ‘사고 발생 시 책임’ 문단 위에.

세 번째는 제11조, ‘현장 기록 접근권’의 세부 사항을 겨냥했다.

발자국은 단 세 곳에만 선명했다.

윤도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하하, 고양이가 똑똑하군요. 중요한 조항들인 건 어떻게 알고.”

그는 냥믹을 슬쩍 테이블 아래로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유찬이 가볍게 막았다.

“잠깐만요.”

윤도겸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박성준 팀장과 백호 길드원들의 시선도 유찬에게로 모였다.

유찬은 포포가 담긴 샘플 통을 뒤로 밀었다. 먹이기 전에 확인할 일이 먼저였다.

“먹이기 전에, 먼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유찬은 냥믹이 남긴 세 개의 발자국을 차례로 짚었다. 초능력을 과시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확인해야 할 질문을 발견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제5조. 처리 과정에서 나온 모든 2차 산출물은 대산 길드에 귀속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네, 표준적인 문구입니다.”

윤도겸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런데 제7조. 처리 중 발생하는 모든 사고 책임은 전적으로 저희에게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절차상 문구일 뿐입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유찬이 윤도겸의 말을 잘랐다.

“결과물은 전부 가져가시면서, 그 과정에서 생기는 책임은 왜 저희에게 전부 남겨두시는 겁니까?”

회의실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윤도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유찬은 멈추지 않고 세 번째 발자국을 가리켰다.

“제11조. 현장 기록 접근은 대산 길드의 내부 보안 규정에 따라 제한된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장 기록은 대외비입니다. 협력업체에 전부 공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윤도겸이 방어적으로 말했다.

“그럼 안전 책임은 어떻게 지라는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어떤 위험 물질이 섞여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폐기 결정이 났는지 아무 정보도 없이 작업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고가 나면 저희 책임이라고요.”

유찬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가 던진 질문들은 회의실 한가운데에 비수처럼 박혔다. 폐기물이라고 부르면서 알맹이는 다 챙기고, 위험 정보는 감추면서 책임만 떠넘기는 구조.

냥믹은 법 조항 해석보다 상대가 숨기고 싶어 하는 지점을 먼저 찍어냈다. 그 냄새나는 곳을 정확히 짚어준 셈이었다.

윤도겸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건… 업계의 관례입니다.”

관례라는 단어 외에는 다른 답을 찾지 못한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박성준 팀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더 이상 유찬을 어린 현장 인력으로 대하지 않았다.

“강유찬 씨.”

존댓말이었다.

“방금 짚으신 부분들, 저희 백호 길드도 외부 용역 계약할 때 꼭 보는 부분입니다.”

박성준은 테이블 위 계약서와 유찬을 번갈아 보았다. 단순한 운이나 감으로 짚어낸 수준을 넘어섰다. 수많은 계약을 검토하며 쌓이는 실무자의 감각. 그는 유찬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특히 처리 뒤에 남는 부산물을 누가 가져가느냐, 현장 기록을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 사고가 났을 때 책임을 어디까지 지느냐. 이 세 가지에서 늘 싸움이 납니다. 이대로라면 저희 백호 길드는 이 자리에 끼기 어렵습니다.”

윤도겸은 반박하지 못했다. 대산은 ‘관례’라는 말 뒤에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숨겨둔 셈이었다. 백호 길드 팀장이 그 점을 에둘러 인정한 셈이었다.

냥믹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계약서 위에 그대로 엎드렸다. 진화의 여파인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보였다. 녀석이 남긴 발자국 잉크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유찬은 그 조항들을 눈으로 다시 한번 새겨두었다.

윤도겸은 결국 한발 물러섰다. 그는 흐트러진 표정을 수습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강유찬 씨의 지적,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이 부분은 저희 상부에 다시 검토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정리하는 게 좋겠군요.”

오늘 바로 계약서에 서명하는 일은 물 건너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성준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대산 길드 사람들도 덩달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들이 회의실을 나간 뒤, 박성준은 유찬에게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강유찬 씨. 괜찮으시다면, 저희 표준계약 초안을 참고해서 이번 일을 정식 서비스로 정리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단순히 펫을 빌려주고 건별로 견적을 내는 수준에서 끝내지 말자는 뜻이었다. 아예 ‘정제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판을 새로 짜보자는 제안이었다. 계약서를 먼저 살피고, 현장 샘플을 직접 확인하고, 위험도가 다르면 견적을 다시 낼 수 있게 묶는다면. 대산이 놓친 틈이 보였다.

유찬은 옅어지는 발자국이 찍힌 계약서를 조용히 접었다. 오늘, 그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손에 넣었다. 협상의 주도권, 그리고 새로운 사업의 방향이었다.

그는 박성준을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견적서 대신, 표준계약으로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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