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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에서 나는 냄새 일러스트

계약서에서 나는 냄새

다음 날, 백호 길드의 회의실은 딱딱한 공기로 가득했다. 강유찬은 테이블 위 태블릿에 띄워진 계약서 초안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염 던전 <GE-771> 조건부 임시 관리권 계약서 (초안)`

어젯밤 박성준 팀장이 보내준 파일이었다. 제목만 보면 가슴이 뛸 만했다. 길드원도 아닌 외부인에게 던전 관리권을, 그것도 임시로나마 맡기는 건 파격적인 대우였으니까.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유찬의 미간은 좁아졌다. 그의 무릎 위에서 식빵을 굽던 냥믹이 작게 몸을 꿈틀거렸다.

회의 시간이 되자 박성준과 함께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한 명은 법무팀, 다른 한 명은 안전관리팀 소속이라고 했다. 화면 너머에서는 협회 담당자의 얼굴이 지직거리며 연결됐다.

“강유찬 씨, 어제 보내드린 초안은 잘 검토하셨습니까?”

박성준이 부드럽게 운을 뗐다.

“네, 대충은요.”

“저희 백호로서도, 강유찬 씨의 능력을 높이 사 정식으로 협력 관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 계약은 그 첫걸음이 될 겁니다.”

말은 번지르르했다. 법무팀 소속이라는 남자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계약의 골자는 간단합니다. 해당 던전의 정화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강유찬 씨께서 현장 책임자로서의 권한을 갖는 겁니다. 구역 정리, 오염원 처리 순서 등 모든 운영을 직접 판단하고 지시할 수 있습니다.”

듣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엄청난 기회였다. 하지만 유찬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눈여겨본 조항은 따로 있었다.

`제7조 (책임 소재)`

`1. ‘을’(강유찬)은 본 계약에 명시된 관리 기간 중 발생하는 모든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을 진다.`

바로 그때였다.

킁킁.

어디선가 종이가 타는 듯한, 혹은 오래된 잉크가 비에 번지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찬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이 냄새는…….’

유찬이 무릎으로 시선을 내리자, 얌전히 있던 냥믹의 털이 바짝 서 있었다. 새하얀 수염 끝이 먹물이라도 찍은 듯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냥믹이 앞발을 들어 태블릿 화면 위를 꾹 눌렀다. 사고 책임 조항 바로 위였다. 까만 젤리 자국 같은 발도장이 3초쯤 머물다 연기처럼 사라졌다.

“물론 운영 권한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현장 책임자로서 모든 운영상의 결정과 그 결과에 책임을 지시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죠.”

법무팀 남자의 목소리가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매끄럽게 흘러갔다.

“또한 던전 내에서 수습된 모든 아이템과, 강유찬 씨의 펫이 만들어 내는 2차 산출물은 기존 방침대로 저희 백호에서 감정 후 매입하는 것으로…….”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역한 냄새가 다시 한번 풍겼다.

냥믹이 이번엔 다른 조항을 앞발로 짚었다. `제9조 (부산물의 권리 귀속)`. 또다시 까만 발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냥믹의 목 주변으로 방울 모양의 문양이 아른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유찬은 스크롤을 내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부분을 찾았다.

`제11조 (비용 정산)`

`3. ‘을’의 처리 결과물이 길드 표준 품질에 미치지 못할 경우, 해당 작업에 대한 대가는 지급되지 않으며 폐기 비용은 ‘을’이 부담한다.`

아니나 다를까. 세 번째 발도장이 그 위에 찍혔다.

“……이상입니다. 이 조건에 동의하시면 바로 협회 등록 절차를 진행하고, 오늘부터라도 현장 권한을 이양해 드릴 수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유찬에게 쏠렸다. 박성준마저도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여기서 ‘예’라고 대답하면, 그는 던전 하나를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관리자가 된다.

하지만 덥석 물었다간 목에 걸릴 먹이였다.

유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순간 싸늘해졌다.

“제7조, 책임 소재 조항입니다. 제 권한은 ‘임시’이자 ‘조건부’인데, 책임의 범위는 무한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안전사고’란 어디까지입니까?”

법무팀 남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글자 그대로입니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입니다.”

“던전은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곳입니다. 제가 통제 불가능한 천재지변급 사고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건 부당합니다.”

“운영 권한을 드리는 만큼…….”

“두 번째 질문입니다.”

유찬은 그의 말을 잘랐다.

“제9조, 2차 산출물 권리 귀속. 이건 제 펫이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그걸 전부 백호 소유로 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 또한 길드 소유의 던전에서 나온 것이니…….”

“마지막 질문입니다. 제11조, 실패 비용 전가. 오염 정화가 늘 성공하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실패했을 때 돈은 못 받고 폐기 비용까지 제가 내라는 건, 단가를 다시 따져 볼 길도 막아 두겠다는 말로 보입니다.”

유찬은 말을 마친 뒤, 회의실에 앉은 모두를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책임은 따릅니다. 대신 권리도 같은 줄에 써야죠.”

정적이 흘렀다. 법무팀과 안전팀 담당자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조목조목 따지고 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안전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강유찬 씨의 권한은 제한적입니다. 그러니 책임도 당연히 그 범위 내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해석해야…….”

“그렇다면 그 제한된 범위가 계약서에 명시되어야 합니다.”

유찬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이 서류는 그렇게 읽히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직전, 박성준이 박수를 한번 치며 나섰다.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강유찬 씨. 저희가 너무 저희 입장에서만 생각했군요.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맞습니다.”

그는 유찬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강유찬 씨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수정안을 제안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법무팀에서 검토 후 다시 논의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결정권을 유찬 쪽으로 돌리는 영리한 한 수였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검토해서 수정안을 보내드리죠.”

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텅 빈 회의실에 남은 유찬은 묵직한 압박감을 느끼며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거대 길드를 상대로 법률 문서를 수정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가 떨어졌다.

그때, 무릎 위에서 나른한 하품 소리가 들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수염 끝이 새하얗게 돌아온 냥믹이 꼬리로 제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유찬은 피식 웃으며 녀석의 턱을 긁어 주었다.

“네 덕에 살았다. 이제 시작이네.”

유찬은 회의실을 나가지 않았다. 그는 태블릿을 집어 든 채 빈 페이지를 열었다. 복잡한 법률 용어와 씨름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는 모든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단 하나의 원칙을 세우기로 했다.

책임을 지우려면 권리도 같이 줘야 한다. 한쪽만 가져갈 수는 없다.

그는 걸리는 조항 셋을 한 줄로 묶을 말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돌려 쓸 생각은 없었다. 몇 번 지우고 다시 쓴 끝에, 그는 완성된 수정안을 박성준 팀장에게 전송했다.

[강유찬: 수정안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성준과 법무팀, 안전팀 담당자가 다시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벌써 다 되셨습니까?”

박성준이 놀란 듯 물었다. 유찬이 보낸 파일에는 복잡한 법률 문장 대신 세 줄의 요구사항만 적혀 있었다.

유찬은 태블릿 화면을 회의실 중앙 모니터에 띄웠다.

`1. 책임: ‘을’은 ‘갑’과 협의하여 지정한 ‘후속 처리 구역’ 내에서 발생하는 직접 사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2. 권리: 해당 구역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2차 산출물의 지분 80%는 ‘을’에게 귀속된다.`

`3. 정산: 해당 구역의 처리 단가는 ‘을’의 제안서를 기준으로 재산정하며, 품질 미달 시 폐기 비용은 ‘갑’이 부담한다.`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법무팀 남자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강유찬 씨, 이건…… 너무 일방적인 요구입니다.”

안전관리팀 담당자가 거들었다.

“책임 범위를 ‘직접 사고’와 ‘구역’으로 한정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던전 내 사고는 연쇄적으로 발생합니다. A구역에서 터진 작은 사고가 던전 전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분리해서 책임을 묻습니까?”

타당한 지적이었다. 그들은 길드의 안전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당연한 말을 하고 있었다.

“구역의 경계가 모호하고, 사고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이 조항은 저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법무팀 남자가 쐐기를 박았다. 그들의 논리는 확고했다. 안전 앞에서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원칙론이었다.

“그 구역의 경계가 모호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유찬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와 통제 불가능한 범위를 명확히 나눌 수 있다면요?”

“그걸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박성준이 나섰다. 그는 자신의 태블릿을 꺼내 두 개의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하나는 유찬이 이전에 제출했던 오염원 처리 단가표였고, 다른 하나는 GE-771 던전의 3D 지도 위에 유찬이 직접 그렸던 ‘운영선’이었다.

“강유찬 씨는 이미 증명했습니다. 바로 이 자료들로 말입니다.”

박성준이 지도 위에 그려진 붉은 선을 가리켰다. 유찬이 포포와 함께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이자, 오염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작업 반경이었다.

“이것이 강유찬 씨가 말하는 ‘후속 처리 구역’의 기준선이 될 겁니다. 이 선 안에서의 작업과 그 결과물은 강유찬 씨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이 선 밖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사고는, 기존처럼 길드와 협회가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맞습니다.”

법무팀과 안전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들은 유찬을 펫을 데리고 온 외부 협력자 정도로만 봤다. 이런 작업 계획까지 세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박성준이 말을 이었다.

“단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유찬 씨는 어떤 오염원이 위험하고, 어떤 건 돈이 되는지 숫자로 나눴습니다. 그 표가 없었으면 저희는 어제도 통당 240만 원을 내고 버릴 뻔했습니다. 2차 산출물 권리를 빼면 그 숫자는 다시 죽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우리는 지금 짐꾼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강유찬 씨가 그은 선 하나 때문에 닫힐 뻔한 던전이 돈이 되는 작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걸 기존 계약서 한 장에 구겨 넣을 수는 없습니다.”

박성준의 말이 끝나자 법무팀 남자는 더 이상 펜을 굴리지 못했다. 안전팀 담당자도 운영선 지도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법무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강유찬 씨의 제안을 기준으로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 보겠습니다. 후속 처리 구역을 먼저 박고, 그 안에서 책임과 권리, 정산을 같이 묶는 방향으로요.”

이전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말투가 빠져 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유찬은 도장만 찍는 외부인 취급을 받지 않았다.

한 시간 뒤, 유찬의 앞에는 빨간 수정 표시가 가득한 계약서 수정본이 놓였다. 정식 날인은 법무팀의 후속 검토 후로 미뤄졌지만, 핵심 조건은 이 자리에서 확정한다는 문구가 맨 앞에 붙어 있었다. 법무팀 남자의 셔츠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오염 던전 <GE-771> 조건부 임시관리권 및 후속 처리 위임 계약서`

이제 유찬은 현장 책임자라는 이름표에 갇히지 않았다. 처리 가능선 안에서는 그가 기준이었다.

계약서의 주요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오염 던전 조건부 임시관리권 부여]`

`[구역별 처리 단가: 유찬의 제안서 기준 재산정]`

`[구역 내 2차 산출물 지분: 유찬 8 / 백호 2]`

`[후속 처리 TF 구성: 강유찬 총괄 책임자 등록]`

`[정화 전 원본 증거 보존 및 공동 감정 조건 명시]`

독소 조항을 밀어붙였던 담당자들은 어느새 회의실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책임을 떠넘기려던 문장이 유찬의 권리 목록으로 바뀌는 동안, 그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핵심 조건 합의란에 서명을 마친 유찬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성준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 총괄님.”

“저야말로요, 부단장님.”

유찬이 회의실을 나설 때였다. 박성준이 그의 뒤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GE-771의 성과가 좋으면, 협회에서도 주목할 겁니다. 이런 후속 처리가 필요한 오염 던전은 전국에 널려 있으니까요.”

그때 박성준의 단말기가 짧게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살짝 올렸다.

“벌써 문의가 들어왔군요. 대산 길드 쪽 오염 던전입니다. GE-771 방식을 외부에서도 적용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유찬의 손끝이 잠깐 멈췄다. 합의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같은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복사해서 쓰면 되겠다고 생각하겠네요.”

유찬이 중얼거리자, 박성준이 낮게 웃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선은 강유찬 씨만 그을 수 있겠죠.”

유찬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냥믹이 기분 좋은 듯 꼬리를 살랑였다. 녀석의 목 주변에 아른거리던 방울 문양이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그 문의가 제안인지, 경고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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