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닫힌 길이 다시 열렸다
B2 폐쇄 통로를 막고 있던 낡은 봉인줄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문 틈에서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왔고, 까악스가 비명처럼 울며 날아올랐다. 검은 깃털 사이로 이전보다 선명한 하얀 빛줄기가 번뜩였다.
탁, 하는 건조한 울림이 밀폐된 지하 보관소의 정적을 깨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굵은 황색 봉인줄은 힘없이 풀려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앉은 시멘트 바닥 위로 흐트러진 줄 끝은 삭아서 끊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찍혔거나, 팽팽하게 잡아당겨 뜯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산 측 현장 관리자인 김 대리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굽혔다.
"어익후, 깜짝이야. 이거 왜 갑자기 떨어지고 난리람."
그가 바닥의 봉인줄을 덥석 쥐려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십시오."
유찬의 목소리가 어두운 통로 안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김 대리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당혹감과 긴장이 섞인 얼굴로 김 대리가 고개를 돌려 유찬을 바라보았다.
"예? 아, 유찬 씨. 이거 그냥 오래돼서 삭은 겁니다. 던전 지하라는 게 늘 습기가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관리 안 하고 몇 년 놔두면 이렇게 결속 부위가 저절로 바스러집니다. 별일 아닙니다."
"삭아서 끊어진 것치고는 끝이 너무 날카롭습니다. 그리고 저길 보십시오."
유찬은 손가락으로 두꺼운 철문 아래쪽을 가리켰다.
철문 아래 문틀에는 회색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쪽만 먼지가 쓸려 나가 맨바닥의 붉은 녹이 드러났다. 최근까지 무거운 카트가 드나든 것처럼 둥근 바퀴 자국이 문틈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박성준 팀장, 기록 장비 켜 주십시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채증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백호 길드의 박성준 팀장이 곁에서 즉각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 초록 녹화 표시가 켜지며 어두운 문틈과 먼지 위의 쓸린 흔적들을 담기 시작했다. 김 대리의 뺨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다급하게 박성준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잠깐만요, 박성준 팀장! 이렇게까지 하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 B2 통로는 이미 3년 전 던전 폐쇄 정리 작업 때 공식적으로 용도 폐기된 곳입니다. 장부에도 엄연히 '폐쇄 완료'라고 도장이 찍혀서 본사에 보고까지 다 끝난 구역이라고요. 괜히 이런 사소한 흔적 하나로 보고서가 복잡해지면 서로 피곤해집니다."
"장부와 현장이 이렇게 다르면 이유를 봐야 합니다. 그게 이번 평가의 핵심입니다."
유찬은 철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문손잡이를 잡고 억지로 힘을 주어 여는 순간, 바닥에 남은 얇은 바퀴 자국과 흩어진 먼지 궤적들이 철문 밑단에 쓸려 훼손될 것이 뻔했다. 현장의 증거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3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철문 앞바닥에 최근에 굴러간 카트의 격자무늬 바퀴 흔적이 이토록 선명하게 남아 있다니. 김 대리님 설명대로라면 이건 유령이라도 지나간 모양입니다."
"그, 그게... 가끔 안전 정밀 점검 때 내부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던전이라는 곳이 언제 어디서 균열이 터질지 모르는데,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점검 일지를 보여주시면 되겠군요. 용도 폐기된 구역의 특별 진입 허가서나 안전 관리 대장 말입니다."
김 대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대답하지 못했다. 비공식적으로 몰래 사용하던 통로에 정상적인 서류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 순간, 유찬의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던 포포가 철문 밑의 틈새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바닥의 미세한 공기 흐름을 타고 좁은 틈새로 콩알만 한 푸른 광석 조각 하나가 또르르 굴러 나왔다. 표면에 거무죽죽한 찌꺼기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가공되지 않은 마나스톤 파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마력이 깃든 물질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다가갔을 포포였다. 하지만 포포는 조각을 향해 조심스럽게 몸을 늘려 냄새를 맡더니, 이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뽀글, 뽀글글... 토독.`
포포의 투명한 몸통 표면이 차가운 젤리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약한 기포 소리마저 뚝 끊겼다. 그 조각에는 맑은 마력 대신 시커멓게 탄 폐광석 찌꺼기가 배어 있었다. 포포가 이렇게까지 피한다면 안쪽에서 무언가를 억지로 뽑아낸 흔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포포, 건드리지 말고 이쪽으로 와라."
유찬이 낮게 부르자 포포는 얌전하게 유찬의 바짓가랑이 뒤로 숨어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유찬은 손을 대지 않고 박성준 팀장의 카메라 각도를 낮추게 했다. 이어 작은 격리 표식을 파편 옆에 세웠다. 대산 쪽이 눈치채고 밟아 뭉갤 수도 있었다.
그 곁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냥믹은 박성준의 태블릿 화면에 표시된 서류의 특정 영역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출 기록 없음.`
용도 폐기 구역에서 나오는 어떤 부산물도 외부로 나간 서류가 없다는 공식 기록 카드였다. 냥믹은 그 화면을 바라보며 검고 긴 꼬리를 수직으로 바짝 세웠다. 꼬리 끝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찌릿하게 흔들렸다. 녀석도 알았다. 이 통로 뒤에는 큰 뒤탈이 숨어 있었다.
대산이 숨겨둔 B2 통로는 단순한 안전 불감증으로 보기 어려웠다. 누군가 던전 안에서 나온 위험 부산물을 기록 없이 빼돌린 흔적이 앞에 놓여 있었다.
이 흔적이 공식 기록에 올라가는 순간, D-7의 값도 다시 따져야 했다. 대산은 던전과 함께 숨겨 둔 뒤탈까지 넘기려 하고 있었다.
"끼아아아악―!"
보관소 천장 부근을 맴돌던 까악스가 낮게 하강하며 철문 바닥의 궤적 위를 가로질렀다. 까악스의 검은 깃털 사이에 흐르는 희끄무레한 빛무리들이 바닥의 최근 바퀴 자국을 따라 어지럽게 번뜩였다. 그 빛은 제대로 된 모양을 잡지 못하고 드문드문 끊어졌다 이어졌다. 아직 힘은 모자랐다. 그래도 철문 뒤편의 탁한 마력 흐름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보였다.
"이 안이 확실하군요."
유찬은 철문의 녹슨 이음새 너머를 빤히 응시했다. 빛줄기가 스러지는 좁은 문틈 사이로, 어둠에 잠겨 있던 내부의 형체가 서서히 망막에 맺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게 녹슬어 한쪽 바퀴가 가라앉은 낡은 수거 카트의 모서리였다. 그리고 그 카트 뒤편으로 검은 비닐 시트가 덮인 채 불규칙하게 쌓여 있는 정체불명의 나무 상자들이 기괴한 실루엣을 그리며 늘어서 있었다. 상자 옆면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흘려 쓴 해골 표시와 `분류 미상`이라는 투박한 글자가 덧칠돼 있었다.
"이건... 장부 밖에서 굴러가던 통로였군요."
박성준이 경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태블릿의 줌 렌즈를 최대치로 당겼다. 렌즈 너머의 상자들은 하나같이 번호가 흐리거나 지워져 있었다. 오래 방치된 물건치고는 손댄 자국이 너무 많았다.
B2 폐쇄 통로는 과거에 멈춰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장부의 빈칸 뒤에서 계속 이 길을 굴리고 있었다. 유찬은 그 구멍의 무게를 조용히 가늠했다.
김 대리가 마른침을 삼키며 뒤에 서 있던 대산 소속 기사에게 턱짓을 보냈다.
"어이, 이 기사.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장비 가져와서 안쪽 정리 좀 해 봐. 소장님 말씀대로 먼지나 바퀴 흔적 같은 게 섞여 있으면 곤란하잖아. 일단 통로 안쪽부터 치우고 다시 확인하자고."
김 대리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뒤에 대기하던 체구 좋은 대산 소속 기사가 무거운 철제 연장을 든 채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철문 틈새로 손을 뻗어 문짝을 억지로 밀어젖히려 했다.
"비키십시오."
유찬이 한발 앞서 철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단단한 구두 굽이 바닥의 경계선을 밟았다.
"유찬 씨, 안전 확인을 하려면 일단 문을 열고 내부를 확보해야 합니다. 무작정 막으시면 작업 진행이 안 됩니다."
김 대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안전 확인은 작업 영역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지금 상태에서 문을 함부로 넓히면 바닥에 남은 최근 바퀴 자국이 전부 뭉개집니다. 굳이 흔적을 지우려는 이유가 뭡니까?"
유찬의 차가운 눈빛이 김 대리의 얼굴을 꿰뚫었다. 김 대리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으나, 그의 턱밑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지우긴 뭘 지운다고 그러십니까. 단지 기사들이 들어가서 안쪽 카트나 무너진 상자가 안전한지 보려는 것뿐입니다."
김 대리의 신호에 기사는 유찬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억지로 철문 손잡이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삐이익, 하고 쇠가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철문이 억지로 몇 센티미터 더 벌어지는 순간, 불길한 진동이 지면을 타고 올라왔다. 철문 안쪽 어둠 속에서 투두둑 하는 무거운 쇳소리가 나더니, 바닥을 지탱하던 낡은 지지대와 침목이 아래로 푹 꺼졌다. 그 충격으로 비스듬히 멈춰 있던 낡은 수거 카트가 굉음을 내며 기울어졌다. 카트 위에 실려 있던, 검은 비닐이 덮인 오염된 상자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철문 틈새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억!"
문틈에 몸을 들이밀고 있던 대산 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주저앉은 바닥 틈새로 그의 오른발이 발목까지 빠져 들어갔다. 그 위로 시커먼 타르 냄새를 풍기는 오염된 상자 여러 개가 굴러떨어졌다. 상자가 박살 나며 오염된 폐액과 시커먼 광석 가루가 쏟아져 기사의 머리 위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유찬이 즉각 손을 뻗었다. 기사의 두터운 안전벨트 상단을 거칠게 움켜쥐고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터엉!
짧고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대산 기사의 거구는 유찬의 손아귀에 이끌려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찰나의 순간에 기사가 빠져나온 철문 틈새로, 썩은 기름 냄새와 유독성 마나 찌꺼기가 뒤섞인 시커먼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닿은 폐액이 부글부글 끓으며 역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아이고, 사람 잡네!"
김 대리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질렀다. 가슴을 헐떡이며 겨우 살아난 대산 기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끓어오르는 폐액 바닥을 쳐다보았다. 한순간이라도 늦었으면 발목이 으스러지거나 유독성 폐액을 정면으로 뒤집어쓸 뻔한 상황이었다.
까악스가 그 기분 나쁜 마나의 냄새를 맡고 낮게 비행했다. 검은 날개깃 사이로 어지러운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까악스는 바닥에 쏟아진 폐액 너머, 어두운 문틈 안쪽의 검은 실패선을 향해 필사적으로 흰 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안쪽 깊은 곳에서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파괴의 파동 탓에, 길잡이 역할을 하던 흰 줄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
까악스가 쇳소리 섞인 울음을 터뜨렸다.
"까악스, 무리하지 마라."
유찬의 지시에 까악스는 날갯짓을 멈추고 그의 왼쪽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아직은 힘이 모자랐다. 끊어진 길을 억지로 이어붙이려다가는 까악스의 영혼 자체가 오염에 휩쓸릴 수 있었다.
유찬은 포포를 보았다. 포포는 유찬의 발뒤꿈치에 몸을 바짝 붙인 채, 투명한 몸체를 젤리처럼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었다.
`뽀글, 뽀글... 토독.`
포포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기포 소리가 불규칙하게 진동했다. 위험한 불순물에 대한 강한 경계 표시였다. 냥믹 역시 붉은 눈을 번뜩이며 박성준 팀장의 태블릿 화면과 바닥의 오염원을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검은 꼬리가 채찍처럼 단단하게 서 있었다. 대산 측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눈앞의 흔적과 장부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덮을 수 없었다.
"유찬 씨, 얼른 사람들을 더 불러서 안쪽을 정리해야..."
김 대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수습하려 했다. 어떻게든 이 참상을 자신들의 손으로 치워 흔적을 없애려는 수작이었다.
"안으로 진입하지 않습니다."
유찬이 못을 박았다.
"예? 하지만 저렇게 쏟아진 채로 방치하면 오염이 확산될 겁니다!"
"지금 상태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건 위험합니다. 바닥 지지대가 삭아 내렸고, 쏟아진 상자 안의 유독 물질 성분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구역은 백호 길드 책임으로 막겠습니다."
유찬은 박성준 팀장을 돌아보았다.
"박성준 씨, 여기서부터 B2 통로 전체를 무기록 사용 의심 구역으로 묶고, 출입 막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유찬 씨."
박성준 팀장이 태블릿 화면을 빠르게 두드렸다.
박성준 팀장이 화면을 몇 번 두드리자 백호 길드 공식 인장이 붙은 경고 표식이 떠올랐다. 곧 화면에 짧은 문구들이 박혔다.
[B2 폐쇄 통로: 폐쇄 완료 기록과 현장 불일치]
[최근 바퀴 자국 확인]
[반출 기록 없음]
[무기록 사용 의심 / 접근 금지 / 제한 확인 필요]
화면 하단의 등록 버튼이 눌렸다. 방금 본 흔적들이 평가 보고서 한가운데 박혔다.
[대산 D-7 기존 평가안: 보류]
[리스크 재검토 필요]
[백호 측 제한 확인 권한 우선 검토]
그 세 줄이 뜨자, 김 대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박성준 씨! 박성준 씨! 정말 이러실 겁니까? 기록에 이렇게 대놓고 써 버리면 대산과의 신뢰 관계는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저희 쪽 실무자들이 실수한 부분이 있다면 내부적으로 징계하고 조용히 넘어가면 될 일 아닙니까!"
김 대리가 박성준 팀장의 앞을 가로막으며 사정하는 빛을 보였다. 대산의 고위층에게 가해질 책임을 아래 선에서 자르려는 다급한 발버둥이었다.
"실무자 한 명의 실수로 덮을 일이 아닙니다."
유찬이 가로막았다.
"말이 지나치십니다!"
"폐쇄 완료 도장이 찍힌 장부와 현장이 이렇게 다르면 그냥 관리 소홀로 넘길 수 없습니다. 부산물이 기록 없이 나갔거나, 이 구역이 가공 경로로 쓰였을 가능성을 봐야 합니다. 영상도 있고, 펫들의 반응도 남았습니다. 이제 지울 수 없습니다."
유찬은 김 대리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고발장이 아니었다. 대산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박아 넣을 쐐기였다.
대산을 여기서 바로 터뜨리면 D-7 이야기는 길게 꼬인다. 책임 공방이 시작되고, 현장은 멈춘다. 유찬은 현장이 멈추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D-7을 다시 계산하게 만드는 기록을 원했다.
이 기록 하나면 대산은 더 이상 처음 내민 가격표만 들이밀 수 없다.
원래라면 던전의 마나 생산량과 장비값을 따져 돈을 치르면 끝이었다. 하지만 B2가 기록에 올라간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가 이 통로를 썼는지, 무엇을 빼냈는지, 남은 오염을 누가 치울지부터 다시 따져야 한다.
아직 권리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유찬은 중요한 카드를 잡았다. D-7을 맡을지 말지, 어디까지 확인할지, 어떤 구역을 백호 조건으로 잠글지 말할 명분이 생겼다.
김 대리는 유찬의 조용한 눈빛 뒤에 도사린 차가운 계산을 눈치챘는지, 더는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술만 바르르 떨었다.
"유찬 씨...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사에 보고하십시오. B2 폐쇄 통로의 상태가 장부와 다르니, 백호 쪽 조건을 다시 검토하라고요."
유찬의 단호한 목소리에 김 대리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철문 틈새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은 바닥의 낮은 홈을 따라 제한선 앞에 고였다. 박성준 팀장이 임시 차단막을 세우자 더는 밖으로 번지지 않았다. 냥믹이 세웠던 꼬리를 조금 내렸고, 포포도 단단하게 굳었던 몸을 서서히 풀며 `뽀글` 소리를 냈다.
상황이 진정되자, 유찬은 왼쪽 어깨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까악스를 바라보았다.
까악스는 조용히 고개를 갸웃하더니, 유찬의 어깨를 딛고 가볍게 솟구쳐 올랐다. 녀석은 검은 깃털을 가볍게 털어내며 철문 바닥의 폐액 경계선 위로 부드럽게 활강했다. 그리고 썩은 마나의 기운이 멈춰 선 차단선 위, 흙먼지가 뿌옇게 가라앉은 시멘트 바닥에 가볍게 발을 내딛었다.
탁.
까악스가 발을 떼고 다시 날아오른 순간, 유찬의 시선이 바닥의 한 지점에 멈추었다. 시커먼 오염의 흔적이 가득한 그 경계선 바닥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아주 작고 희미하지만 뚜렷한 흰색 발자국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검은 얼룩 위에 찍힌 그 흔적은 너무 작았다. 아직 길이라고 부르기에는 모자랐다. 그래도 까악스가 처음으로 실패선 너머에 남긴 흰 자국이었다.
유찬은 그 작은 흰 발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막힌 줄 알았는데… 막아 둔 쪽이 문제였군요."
어둠 속에 방치됐던 통로가 이제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대산의 빈칸, D-7의 새 가격표, 그리고 까악스가 다음에 밟아야 할 작은 흰 자국. 유찬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통로 밖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