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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외부 표준계약 일러스트

첫 외부 표준계약

장비가 멈춘 임시 처리장은 싸늘했다. 작업 중단을 알리는 붉은 경광등만 깜빡이며 대산 길드와 백호 길드 사람들의 얼굴을 비췄다.

강유찬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새로운 선을 그었다. 이전에 그어진 희미한 작업 지시선은 무시했다. 그가 손에 쥔 파란색 스프레이가 ‘치익’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 바닥에 경계를 만들었다.

“잠깐, 강유찬 씨.”

대산 길드의 실무 책임자, 윤도겸이 다가왔다. 그의 표정에는 억지로 짜낸 침착함이 묻어났다.

“그 선은 너무 넓습니다. 그쪽까지 전부 우리 책임 구역으로 잡으면 협회에 보고할 유실률이 너무 커집니다.”

유찬은 묵묵히 선을 그을 뿐이었다. 골드러시의 장비가 폭주 직전까지 갔던 지점, 그 주변에 널린 오염원 파편까지 전부 포함하는 넓은 반원이었다. 그는 파란 선 안쪽에, 더 좁은 구역을 따라 붉은 스프레이를 뿌렸다.

파란 선은 ‘대산 책임 기록 구역’. 그 안의 붉은 선은 ‘안전 검수 후보 구역’이었다.

“계약서에 명시된 기준대로 진행합니다.”

유찬의 짧은 대답에 윤도겸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이건 너무… 현장 실무에서는 어느 정도 융통성이 필요한 법입니다. 오염핵 일부만 표본으로 기록하고 나머지는 폐기물로….”

그때 백호 길드의 박성준 팀장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윤도겸과 유찬 사이에 끼어드는 대신, 주변을 둘러싼 대산의 현장 기사들이 모두 보도록 태블릿 화면을 밝혔다.

“표준계약서 특약 3조입니다.”

박성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모두의 귀에 박혔다.

“‘오염원 판정 기준은 강유찬 씨 측이 보유한 펫의 반응으로 한다.’ 대산 길드 측의 날인도 여기 있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윤도겸은 입술을 깨물었다. 계약서에 직접 도장을 찍은 건 그였다. 여기서 더 토를 달면 길드 간 분쟁으로 번질 판이었다.

그가 잠시 물러선 사이, 다른 쪽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대산의 기록 담당자가 샘플 통 몇 개를 발로 슬쩍 밀었다. 원래 ‘대산 책임 기록 구역’에 있던 것들이었다. 통들은 데구루루 굴러 유찬이 새로 그은 ‘안전 검수 후보 구역’의 경계선을 넘었다.

아무도 못 본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유찬의 시선은 정확히 그 통들을 향했다.

유찬이 다가가 손으로 통 하나를 멈춰 세웠다.

“잠깐.”

나직한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유찬은 멈춰 세운 통들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허공에 손짓했다.

“포포, 까악스, 냥믹.”

작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세 펫이 유찬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포포가 통통 튀어 와 샘플 통 위로 올라앉았다. 젤리 같은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토독.

포포가 몸 한쪽으로 작은 광물 조각 하나를 밀어냈다. 마나석의 원석 파편이었다. 정제하면 돈이 될 물건이었다. 하지만 포포는 그 옆에 있는 다른 파편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몸을 부르르 떨며 그쪽을 피했다. 유찬은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차렸다. 저 파편 안쪽에 오염핵이 남아 있었다.

그 위로 까악스가 날아올랐다. 까악스는 샘플 통에 앉지 않았다. 대신 통이 원래 놓여 있던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고는 바닥에 내려앉아 검은 발자국 하나를 꾹 찍었다.

치이익.

타르처럼 검고 질척한 실패선이 콘크리트 바닥에 새겨졌다. 유찬은 그 발자국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조금 전 사고를 일으킬 뻔했던 골드러시의 장비 쪽이었다. 저 샘플 통이 그 근처에서 수집되었다는 표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냥믹이 나섰다. 2진화를 거친 ‘유인선 냥믹’은 이전과 달랐다. 황금빛 꼬리와 검은 꼬리가 동시에 나타나 있었다.

냥믹은 샘플 통을 보며 황금빛 꼬리를 살랑였다. 포포가 밀어낸 마나석 원석 파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돈이 된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동시에, 냥믹의 검은 꼬리는 다른 방향을 향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꼬리 끝은 샘플 통을 지나, 저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대산 기록 담당자의 태블릿으로 향했다.

유찬은 보았다. 검은 꼬리가 그의 태블릿 화면, 그중에서도 ‘미분류’라고 적힌 항목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순간 세 가지 정보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맞춰졌다.

‘이 통 안에는 돈이 될 광물 조각이 있다. 하지만 골드러시 장비 근처에서 나온 오염원이다. 저걸 내가 회수하는 순간, 저 미분류 기록의 책임까지 전부 뒤집어쓸 수 있다.’

대산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겉보기엔 돈이 되는 부산물을 슬쩍 넘겨주면서, 사고 책임까지 같이 떠넘길 속셈.

유찬은 허리를 숙였다. 그는 포포가 밀어낸 안전한 광물 조각만 따로 집어 작은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문제의 샘플 통에 붉은색 태그를 붙였다.

“이 샘플은 제 회수 목록에서 제외합니다.”

유찬은 태그를 붙인 통을 윤도겸 쪽으로 밀어 보냈다.

“대산 길드 기록물로 정식 이관 요청합니다. 분류 사유, 골드러시 장비 인근 오염원.”

윤도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유찬은 감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계약서에 적힌 펫의 판정을 그대로 따랐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바로 그때, 대산의 다른 현장 기사 하나가 창고 쪽에서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팀장! 저, 창고를 정리하다가… 누락된 보조 샘플 박스가 발견됐습니다.”

그 한마디에 임시 처리장의 공기가 바뀌었다. 윤도겸이 감추려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혼선이 있었던 모양이군. 이리 가져와.”

그가 태연한 척 손짓했지만, 박성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유찬은 조용히 포포를 안아 들었다.

문제의 보조 샘플 박스는 대산 길드의 규격품이었다. 하지만 골드러시가 현장에 투입되기 전, 대산이 따로 빼돌린 물건이라는 점이 달랐다. 숨겨둔 기록이었다.

기록 담당자가 재빨리 태블릿을 조작했다. 화면 한구석에 떠 있던 ‘미분류’ 항목 위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지우려는 속셈이었다.

그때, 유찬의 펫들이 먼저 반응했다.

냥믹의 검은 꼬리가 빳빳하게 서더니, 담당자의 손가락과 태블릿의 삭제 버튼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동시에 황금 꼬리는 새로 나타난 보조 샘플 박스를 향해 살랑였다. 저 안에 돈이 있고, 저 손가락질에 위험이 있다는 뜻이었다.

까악!

까마귀의 짧은 울음이 울렸다. 까악스는 박스가 실려 온 동선, 즉 창고에서 D-3 게이트 입구까지 이어지는 바닥을 부리로 콕, 쪼았다. 실패선이었다. 평범한 작업 동선보다 숨겨진 위험이 사고로 되돌아오는 길에 가까워 보였다.

유찬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작업 중지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소란스러운 현장의 모든 소음을 멎게 할 만큼 단단했다.

“표준계약서 특약에 따릅니다. 현장에서 새로운 샘플이 발견됐으니, 작업선을 다시 설정하겠습니다.”

윤도겸의 얼굴이 굳었다. “강유찬 씨, 이건 그냥 현장 혼선으로…….”

“삭제하지 마십시오.”

유찬은 윤도겸의 말을 끊고 기록 담당자를 똑바로 보았다. 냥믹의 검은 꼬리가 가리키는 지점이었다.

“그 기록, 제가 볼 권리가 있습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원본 기록 열람권’입니다.”

담당자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윤도겸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그토록 피하려던 표준계약서의 조항들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뒤통수를 때리는 기분이었다.

박성준이 조용히 손짓하자, 보안 인력 두 명이 기록 담당자의 양옆에 섰다. 아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래도 기록 담당자는 더 이상 태블릿을 건드리지 못했다.

유찬은 보조 샘플 박스로 다가가 뚜껑을 열고 포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안에는 골드러시의 손을 타지 않은, 비교적 깨끗한 마나석 파편들이 있었다. 잠시 파편들을 들여다보던 포포는 앞발로 정확하게 몇 개의 조각을 툭툭 쳐냈다. 먹어도 되는 안전한 결정이었다. 나머지 파편들 앞에서는 젤리 같은 몸이 작게 굳었다.

“이 박스는 대산 길드 기록물입니다.”

유찬이 선언했다. 그는 새로 가져온 파란색 라인 테이프를 풀어, 보조 샘플 박스를 포함한 주변 구역을 넓게 둘러쌌다. 대산의 책임 구역이 더 넓어졌다.

“저희는 여기, 붉은 선 안에서만 작업하겠습니다.”

반대로 붉은 선, 즉 안전 검수 후보 구역은 눈에 띄게 좁아졌다. 하지만 그만큼 깨끗해졌다. 윤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약서 앞에서 그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박성준이 유찬에게 다가와 작게 말했다.

“강유찬 씨. 백호 중앙 보안팀과 법무팀에 원본 기록 잠금을 요청했습니다. 이제 대산 측에서 임의로 기록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없습니다.”

유찬의 손에 들린 태블릿 작업표에 새로운 태그가 깜박였다.

`[대산 책임 기록]`

`[안전 회수 후보]`

`[검수 보류]`

유찬은 턱짓으로 샘플 통 하나를 가리켰다.

“저것부터 들어 올리세요.”

대산 기사가 마지못해 통을 들자, 까악스가 짧게 홰를 치고 냥믹이 등을 세웠다. 포포는 미미하게 떨었다. 유찬은 태블릿을 눌러 태그를 바꿨다.

“검수 보류.”

다음 통을 들자 세 펫은 잠잠했다.

“안전 회수 후보.”

또 다른 통. 이번에는 유찬이 직접 윤도겸을 보며 말했다.

“이건 숨겨 놓은 폐기물이군요. 대산 책임 기록 구역으로 분류합니다.”

태블릿의 지도 위, 대산이 슬쩍 빼놓은 구역에 붉은 점이 찍혔다. 기록 담당 직원이 `삭제` 버튼에서 손가락을 뗐다. 화면 구석에 뜬 `[원본 기록 잠금]` 표시가 선명했다.

윤도겸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꼭 그렇게까지 세분화해야 합니까? 보고서만 길어집니다.”

유찬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길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짧게 쓰면, 나중에 터질 사고가 제 쪽으로 넘어옵니다.”

좁혀진 안전 검수 후보 구역에서의 작업은 금방 끝났다. 포포가 섭취할 수 있는 안전한 결정 조각들만 신속하게 회수되었다. 폐기물 더미에서 건져낸 것치고는 꽤 양이 되었다.

까악!

까악스가 안전하게 정리된 작업 경로 위에서 짧게 울었다. 더 이상의 실패선은 없다는 의미였다. 냥믹의 검은 꼬리도 힘없이 축 늘어져, 더는 계약서나 사람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았다.

유찬은 회수한 결정 조각 중 하나를 휴대용 감정기에 올려보았다. 잠시 후, 작은 액정에 숫자가 떠올랐다.

[예상 가치: 87만 원]

[오염도: 0.01% 미만 (자연 정화 가능)]

액정에 뜬 숫자는 분명했다. 예상했던 처리 비용보다 회수된 가치가 훨씬 큰 조각들이 섞여 있다는 증거였다. 이것은 당장 손에 쥘 돈보다, 다음 견적서에 찍힐 숫자를 위한 포석이었다.

윤도겸은 복잡한 표정으로 감정기 액정을 바라봤다. 표준계약을 피하려다 더 큰 책임 기록을 남기게 됐지만, 동시에 유찬 덕분에 추가 사고를 막고 예상 밖의 가치를 확인한 셈이었다. 그는 완전히 불복할 수 없었다.

그때, 윤도겸의 개인 단말기가 짧게 울렸다. 대산 길드 상부에서 온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그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유찬에게 단말기 화면을 보여주었다.

[폐쇄 예정 던전 D-7, 가치 재평가 가능 여부 긴급 문의.]

박성준이 다가와 유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강유찬 씨, 이제 처리 현장 다음은 장부 같습니다.”

유찬의 시선은 태블릿에 새롭게 떠오른 던전 정보에 고정되었다.

[던전 D-7 가치 평가 보고서 (최종)]

[예상 총 가치: -2,800,000,000원]

장부상 가치는 마이너스였다. 폐쇄에 들어가는 비용, 남은 오염 물질 처리 부담, 사후 관리 책임 비용까지 전부 떠안아야 하는, 길드가 버리려던 던전이었다.

유찬은 조용히 자신의 펫들을 내려다보았다.

포포가 먹고 정제해서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것.

까악스가 울음으로 피해야 할 길과 무너질 구조를 알려주는 것.

그리고 냥믹이 황금 꼬리로 진짜 돈을, 검은 꼬리로 숨겨진 독소 조항을 물어뜯어 알려주는 것.

이 세 가지가 모인다면, 저 거대한 음수의 자산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뛰었다. 버려진 던전 하나의 가치를 통째로 뒤집는 첫 번째 평가. 그것은 단순한 폐기물 처리와는 차원이 다른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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