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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관리표가 열렸다 일러스트

첫 관리표가 열렸다

한서 E-12 폐쇄 던전의 지하 바닥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깨진 콘크리트 틈새마다 고인 물은 검푸른 이끼로 뒤덮여 있었고, 낡은 환풍기조차 돌지 않는 지하의 공기는 마력을 머금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탄내와 정제되지 않은 던전 배기가스의 비릿한 냄새가 발목을 집요하게 감아올렸다.

방금 전까지 철판을 찢는 듯한 소리를 내며 벌어져 있던 공간의 틈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굳게 닫힌 틈새 위로 가느다란 흉터 같은 선 하나만 길게 남았다.

그 흉터의 가장자리,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 위에 포포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포포."

유찬이 무릎을 꿇으며 녀석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평소라면 동그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유찬의 품을 파고들었을 녀석이었다. 하지만 3단계 진화형인 회수핵의 힘을 처음으로 개방해 공간의 균열을 막아낸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말랑말랑하던 젤리 같은 몸체는 바닥에 완전히 밀착된 채 굳어 있었고, 투명한 몸 한가운데서 자리를 지키던 푸른 결정핵의 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희미하게 흔들리며 회전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유찬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손을 대고, 조심스럽게 포포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뽀글.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너무나도 미약했다. 평소 녀석이 보여주던 활기찬 떨림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마력을 짜내어 균열의 구멍을 억지로 틀어막았으니 지치는 것이 당연했다. 균열 주변의 차가운 바닥에는 포포의 마력이 엉겨 만든 하얀 결정 조각들이 얼음덩어리처럼 박혀 있었다.

"강유찬 씨! 이거, 정말로 균열이 닫힌 겁니까?"

뒤쪽의 어둠 속에서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서 E-12 현장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최민규였다. 안전모를 비뚤어지게 쓴 그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려 턱끝을 적시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두꺼운 마킹 태블릿이 들려 있었는데, 화면 속의 지도가 요란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최민규는 바닥에 박혀 있는 하얀 결정 조각들과, 포포가 메운 뒤 가늘게 남은 균열의 흔적을 넋을 잃은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매달 최소 1,800만 원씩 꼬박꼬박 빠져나가며 길드의 재정을 갉아먹던 골칫덩어리가, 이 보잘것없는 슬라임 녀석의 몸짓 한 번에 막혔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예. 일단 가장 급한 구멍은 메웠습니다."

유찬이 짧게 대답하며 포포를 두 손으로 받쳐 안았다. 축 처진 녀석의 몸이 평소보다 훨씬 무겁고 차갑게 느껴졌다. 품 안에서 차가운 젤리가 떨리듯 작은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유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최민규는 마른침을 크게 삼키더니 다급하게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려댔다. 화면 위에 붉은색과 노란색 선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던전의 구조도가 떠올랐다.

"저기, 유찬 씨. 진짜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왕 시작하신 김에 여기 좀 봐주시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 골칫덩어리들을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정리하고 싶은데 말이죠."

최민규가 유찬의 시선 앞으로 태블릿을 거칠게 들이밀었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에는 다급함과 절박함이 가득 차 있었다. 화면에는 노란색 경고 표시가 붙은 세 군데의 후보 지점이 어지럽게 깜빡이고 있었다.

"1번은 방금 메우신 균열 바로 옆에서부터 길게 뻗어나가는 좁은 골짜기 모양의 틈새입니다. 그리고 2번은 저 안쪽 어두운 벽 아래에 검은 물 웅덩이가 고인 구역인데, 경보 센서 수치가 아까부터 불규칙하게 날뛰고 있어요. 마지막 3번은 서쪽 벽면 구석자리에 하얀 가루 같은 것들이 얇게 깔려 있는 지점입니다."

최민규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본사에서 내려오는 압박이 장난이 아닐 정도입니다. 하루 지연될 때마다 부과되는 페널티와 보관료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이왕 포포의 회수 능력을 쓰시는 거라면, 이 세 군데도 싹 다 메워 주십시오. 수수료는 제가 올릴 수 있는 데까지 올려 보겠습니다."

유찬은 최민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선은 품 안의 포포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최민규의 제안대로 세 곳을 전부 막아버릴 수만 있다면 한서 측으로부터 엄청난 액수의 정산금을 받아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유찬은 녀석의 내부에 박힌 결정핵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회수핵을 활성화해 던전의 구멍을 강제로 틀어막는 기술은 만능이 될 수는 없었다. 한 번 더 무리하게 마력을 짜내었다가는 녀석의 핵심이 영구적으로 손상될 위험이 컸다.

두 번은 없다. 지금 남은 기운으로 손을 댈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능력을 썼다가는 돈을 벌기는커녕 포포의 치료비로 더 큰 금액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전부 맡는 것은 무리입니다."

유찬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은 저희가 확실히 쳐드린다니까요?"

최민규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높였다.

"포포의 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한 곳을 메우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니 자리를 골라야 합니다."

유찬은 최민규의 태블릿 지도를 밀어내고, 어두운 던전 안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어디가 돈이 되고, 어디가 덫인지 봐야 했다.

유찬은 포포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은 채 가장 가까이에 있는 1번 틈새로 다가갔다. 콘크리트 벽면이 쪼개지며 생긴 좁은 틈새 사이로, 은빛을 띤 아주 미세한 마력의 흐름이 실바람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유찬이 품 안의 포포를 그 틈새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포포의 가슴팍 깊은 곳에 박혀 있던 푸른 핵이 느리지만 흔들림 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핵 주위로 맑고 투명한 마력의 고리가 둥글게 형성되었다. 비록 기운은 약했지만,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순환이었다.

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1번 구역은 포포의 남은 힘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안전한 범위였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검은 물 웅덩이가 출렁이는 2번 구역이었다.

벽면에 매달린 오래된 경보 장치가 요란한 적색 불빛을 내뿜으며 삐, 삐, 하는 기계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웅덩이 표면에는 기름 같은 마력 찌꺼기가 둥둥 떠다녔고,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탁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유찬이 웅덩이 경계선에 발을 디디는 순간, 품 안의 포포가 강하게 요동쳤다.

뽀글, 뽀글글……!

포포의 투명하던 몸체가 눈에 띄게 흐려졌다. 푸르스름하던 피부 표면이 순식간에 재를 뿌려놓은 것처럼 칙칙한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차갑게 식어가는 젤리처럼 몸 가장자리가 굳어지며 크기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거부 반응이었다.

동시에 유찬의 발치에 서 있던 냥믹이 등털을 꼿꼿이 세우며 앞발을 멈췄다. 녀석의 꼬리 끝이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물들더니, 콘크리트 바닥을 탁, 탁 거칠게 내려치기 시작했다. 가지 말라는, 당장 그곳에서 물러나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여기에 까악스도 동참했다. 날개를 퍼덕이며 2번 구역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까아아악! 까악!

까악스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거친 울음소리를 내지르고는, 유찬의 어깨 위로 잽싸게 날아와 안착했다. 날갯깃을 잔뜩 세운 채 검은 물 웅덩이를 쏘아보는 녀석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 웅덩이 주변에서는 쾨쾨하고 썩은 듯한 냄새가 났다. 아주 오래전에 실패했던 정제 흔적, 그리고 억지로 균열을 덮으려다가 흘러넘친 마력 폐액의 악취였다.

유찬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포포의 표면이 그제야 원래의 빛깔을 조금씩 회복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서쪽 벽면 아래의 3번 구역이었다. 구석진 콘크리트 바닥 위에 고운 밀가루 같은 하얀 분말이 얇고 평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흰 가루 속에, 날이 이 빠진 채 버려진 단검 한 자루가 비스듬히 묻혀 있었다. 이전 실패한 파티가 버리고 간 장비였다.

유찬이 포포를 그 가루 더미와 단검 위로 가까이 대자, 녀석의 몸에서 작고 귀여운 기포들이 토독, 토독 소리를 내며 피어올랐다. 녀석은 눈도 코도 없는 몸뚱이를 앞으로 쑥 내밀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맛있고 영양가 높은 먹이를 발견했을 때만 나오는 반응이었다.

발치에 있던 냥믹의 꼬리도 다시 반응했다. 검게 물들었던 꼬리가 순식간에 환한 황금빛으로 변하더니,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유찬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하얀 가루 속에 파묻힌 단검을 들어 올렸다. 날을 타고 흐르는 흰 분말이 포포의 몸에 닿자마자 빛나는 하얀 알갱이로 응고되며 후두둑 떨어졌다.

유찬이 몸을 일으키며 태블릿을 쥐고 안절부절못하는 최민규를 바라보았다.

"판단 끝났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 군데 다 손을 대는 겁니까?"

최민규가 기대 섞인 눈빛으로 다가왔다.

"1번은 메우겠습니다. 그리고 3번 구역은 현장에서 골라낸 단검을 수거하고, 포포가 처리한 단검에서 나온 정제 결정만 챙겨서 곧바로 철수합니다."

최민규가 이 빠진 단검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단검 말입니까? 하지만 단검 소유가 파티 쪽으로 되어 있으면,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버리기 전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이 단검은 장비 소유권이 포기된 폐기물입니다. 기록만 남기면 정제 결정은 우리 몫입니다. 2번 웅덩이는 성격이 다릅니다."

유찬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 웅덩이는 이전 정제 팀이 무리하게 작업하다가 남긴 폐액에 가깝습니다. 웅덩이 전체를 건드리는 순간, 결정 몇 개보다 책임 문제가 먼저 튀어나옵니다. 이미 마력이 썩어 고여 있는 상태라 억지로 메우면 내부 압력이 옆 벽까지 터뜨릴 수 있습니다."

최민규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2번 구역의 붉은 경보가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그곳은 한서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전 작업의 찌꺼기가 남은 자리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민규가 땀을 닦아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드린 대로만 합니다. 1번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은빛 마력은 포포의 회수핵으로 정제하면 훌륭한 결정 조각으로 바뀝니다. 확실하게 건질 수 있는 몫입니다. 3번의 하얀 가루 역시 수거해서 정제하면 좋은 값이 나갑니다. 버릴 곳은 확실히 버리고, 우리가 챙길 수 있는 안전한 수익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유찬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하지만 최민규는 여전히 갈등하는 얼굴로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속 2번 구역의 적색 경보는 꺼질 줄을 모르고 요란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당장 안전 심사단이 들이닥치면 이 경보음 하나만으로도 현장 폐쇄 명령이 떨어질 수 있었다. 본사 경영진의 불호령이 그의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강유찬 씨, 본사 윗분들은 그런 사정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당장 경보를 끄지 못하면 제 목이 날아갑니다. 어떻게든 2번 웅덩이까지 한꺼번에 덮어버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비용은 원하는 대로 맞춰 드릴 테니……."

최민규가 유찬의 어깨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어왔다. 그의 눈빛에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유찬은 포포를 고쳐 안으며 최민규의 손을 슬쩍 피해 뒤로 물러섰다. E-12 던전의 입구 너머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왔다. 최민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최민규의 손끝이 유찬의 어깨에 닿기 직전, 2번 웅덩이의 경보가 한 번 크게 튀었다.

"까아아아악!"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아간 까악스가 검은 웅덩이 위에 멈춰 서서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녀석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거친 날갯짓과 함께 흘러나온 둔탁하고 매서운 울음소리가 좁은 지하 통로의 차가운 벽면을 타고 메아리쳤다. 최민규가 주춤하며 내밀었던 손을 조심스럽게 거두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유찬 씨, 제발 한 번만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어차피 여기까지 오셨으니 한 번에 봐주시면..."

"안 합니다."

유찬의 대답은 칼로 무를 베어내듯 단호하고 서늘했다. 붉은 경고가 떠 있는 화면 위로 스타일러스가 곧장 미끄러졌다. 2번 구역의 모니터링 수치 창을 가로지르는 굵직한 붉은 엑스 표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2번 웅덩이는 누군가 정화 작업을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덮어버린 흔적이 뚜렷합니다. 저걸 건드리면 결정 몇 개보다 위험 신호가 먼저 터집니다. 제가 왜 남의 실패까지 떠안아야 합니까?"

최민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결국 2번 구역의 시커먼 웅덩이로 떨어졌다. 웅덩이 표면에는 타버린 가죽과 썩은 구리 냄새가 뒤섞인 기분 나쁜 오염의 악취가 짙게 감돌고 있었다. 누군가 서둘러 덮어두고 지나간 실패의 냄새였다.

냥믹이 웅덩이 가장자리를 슬금슬금 맴돌며 킁킁거렸다. 평소에는 부드러운 회색빛을 띠던 녀석의 꼬리가 순식간에 탁한 검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위험한 독이 묻은 가시처럼 꼬리털이 팽팽하게 바짝 섰다. 골치 아픈 책임 냄새를 맡았을 때 나타나는 냥믹의 경고였다.

"본사에서 이번 현장에 내려준 정화 예산이 빠듯합니다. 2번을 이대로 두면 저희 현장 비용이 계속 터집니다. 조금만 유연하게 대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부담은 한서가 처리할 몫입니다. 1번 균열은 안정시키고, 3번의 부산물은 안전하게 회수하겠습니다. 2번에는 제가 손대지 않았다는 표시를 남기십시오. 그래야 뒤말이 없습니다."

유찬은 품에 꼭 안고 있던 포포의 둥근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포포는 방금 전 중심 균열을 막느라 기력을 상당 부분 써버린 상태였다. 투명한 한천질 몸체의 정중앙에서 회수핵이 평소보다 약간 더딘 속도로 팽팽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녀석의 말랑말랑한 몸이 지하의 차가운 기운에 닿자 젤리처럼 파르르 떨림을 보였다.

"뽀글."

미세한 기포가 포포의 표면으로 솟구쳤다가 톡 터졌다. 녀석은 유찬의 손바닥 안에서 작게 토독 소리를 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지쳐서 몸을 가누기 어려운 와중에도 포포는 유찬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1번 구역의 은빛 마력 흐름을 가만히 응시했다.

유찬은 포포에게 무리하게 힘을 짜내라고 명령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녀석의 부드러운 호흡에 맞추어, 포포가 지닌 고유의 은빛 마력을 잔잔하게 이끌어냈을 뿐이다. 포포의 표면에서 흘러나온 얇고 투명한 은빛 실 가닥들이 1번 균열의 거친 틈새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새 구멍을 억지로 메우지 않고, 중심 균열 옆으로 새던 잔류 흐름만 묶어 두는 정도였다.

"어... 어어? 계측기 수치가 급격하게 변합니다!"

최민규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견고한 현장용 검사 장비를 급히 끄집어내며 비명을 질렀다. 단말기 화면을 채우고 있던 붉은색 경고등이 하나씩 꺼지더니, 이내 차분한 푸른색 안정 신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현장 전체 기준으로 다시 잡으면... 보조 약품 살포 주기가 사흘에서 아홉 일로 늘어납니다! 아홉 일에 한 번만 보강해도 된다니요!"

"소모 약품은 얼마나 줄어듭니까?"

"하루에 열두 통씩 쏟아붓던 고농축 중화제가 이제는 단 네 통으로 충분하다고 계산됩니다. 이러면 현장 운영에 들어가는 고정 비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최민규의 손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그는 화면을 재차 확인하느라 안경을 고쳐 쓰기까지 했다.

"중심 균열이 잡힌 상태에서 잔류 누수까지 묶으면, 월 손실 예상치가 1,800만 원대에서 620만 원대로 떨어집니다. 원래 계획의 삼분의 일 이하입니다!"

"거 보십시오. 2번을 무리하게 건드리지 않아도 이만큼의 이익을 이끌어내지 않습니까."

유찬은 몸을 돌려 3번 구역의 하얀 분말 더미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오랜 세월 지하의 습기에 노출되어 표면이 허얗게 산화된 하얀 가루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루들의 중심에 깊숙이 박힌 채 녹슬어 있는 단검 한 자루가 쓸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냥믹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검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검게 죽어 있던 녀석의 꼬리 깃이 이번에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화사하게 밝아졌다. 위험 냄새보다 챙길 냄새가 앞선다는 신호였다.

"3번은 안전 회수가 가능합니다."

유찬은 화면의 3번 칸에 짧게 적었다. '안전 회수.'

유찬이 허리를 굽혀 분말 속에 파묻힌 단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목을 누르는 철의 무게감과 함께 거칠게 갈라진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염된 마력의 찌꺼기가 덕지덕지 굳어 있어 일반적인 감정으로는 폐기물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무기였다.

그때 유찬의 품에 머물던 포포가 투명한 촉수를 짧게 뻗어 칼자루에 묻은 하얀 가루만 핥듯이 훑었다. 회수핵을 다시 열지는 않았다. 칼날 표면에 붙어 있던 불순물 몇 조각이 우스스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르릉.

단검의 이음새 틈에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결정이 투명하게 빛나며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이미 표면에 붙어 있던 회수물이었다. 유찬이 그것을 받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손끝을 통해 맑고 단단한 정제 결정의 마력 파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 결정은 제가 가져갑니다."

"예, 예. 현장에서 유찬 씨가 골라낸 수거물이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버리기 전 기록에도 잡히지 않은 물건이라 본사에서도 트집 잡기 힘들 겁니다."

최민규는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화면에 뜬 숫자와 2번 웅덩이의 붉은 경보가 그의 말을 막고 있었다. 그는 태블릿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적 압박에 밀려 유찬 씨에게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2번을 억지로 덮었다면 현장 자체가 터졌을 겁니다."

"방금 그은 선, 잊지 마십시오."

유찬은 낡은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임시 컨테이너 사무실 벽면에 걸려 있는 철제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검은색 마커를 쥐고 거침없이 칠판을 세 칸으로 분할하여 굵직한 세로줄을 그었다.

그 세 칸이 한서 E-12의 첫 관리표가 됐다.

첫 번째 칸에는 '1번 은빛 균열. 월 손실 620만 원대.'라고 적었다. 포포가 겨우 붙잡아 둔 잔류 누수였다.

두 번째 칸에는 '2번 검은 웅덩이. 한서 책임.'이라 적고, 그 옆에 붉은 엑스를 두껍게 그었다. 누구도 슬쩍 떠넘기지 못하게 박아 둔 선이었다.

세 번째 칸에는 '3번 버려진 무기. 잔류 결정 회수.'라고 적었다.

"현금으로 받으면 한 번입니다. 이 선은 다음 현장에도 남습니다."

유찬은 칠판의 붉은 엑스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대금은 줄어든 비용과 회수물을 보고 한 번에 맞추겠습니다. 대신 이 선 안쪽에서 나온 조각은 제가 먼저 챙깁니다. 저 붉은 엑스 너머는 한서가 처리하십시오."

최민규는 칠판의 세 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몇 푼 더 얹어 위험한 구역까지 맡기려던 계산은 더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 남은 게 손해뿐인 판은 피했다. 1번 구역의 비용 절감 숫자는 본사 앞에 내밀 수 있는 확실한 방패가 됐다.

"알겠습니다. 2번은 현장 예산으로 덮지 않고 본사에 따로 올리겠습니다. 유찬 씨 조건도 그대로 넣겠습니다."

유찬은 만족스러운 내색을 비치거나 미소를 짓지 않았다.

이번 현장에서 잡은 예상 가치는 1,360만 원. 감정을 거쳐야 통장에 꽂힐 숫자였다. 당장 밀린 월세와 포포 영양제 값을 모두 해결하기에는 모자랐다. 그래도 오늘은 달랐다. 유찬은 처음으로 한서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 선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느덧 지하 통로의 사위가 완전히 어둑어둑해지고 현장의 복잡한 정리가 대강 마무리될 무렵, 유찬은 먼지 쌓인 픽업트럭의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유찬의 무릎 위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운 포포는 얕고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녀석의 젤리 같은 투명한 표면이 숨결을 탈 때마다 이따금 토독거리며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몸 한가운데의 회수핵은 은은한 광채를 뿜으며 피로를 치유하듯 아주 느리게 맥동하고 있었다.

지직.

적막이 감도는 차 안에서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유찬의 휴대폰이 짧고 묵직한 진동을 울렸다.

유찬이 단말기를 꺼내 잠금을 해제하자, 발신인의 번호가 표시되지 않은 기묘한 제안 메시지 하나가 화면을 채웠다. 지난번 그의 주위를 집요하게 맴돌며 은밀한 제안을 던져왔던 미끼 길드의 그림자가 생생하게 감도는 발신이었다.

[공동 운영 전체가 부담스러우면, 손실 구간만 맡아보시죠.]

단 한 줄의 짧고 건조한 문장이 푸른 액정 화면 위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유찬의 입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전체 공동 운영 대신 손실 구간만 떼어 맡기겠다는 제안. 좋은 말처럼 보였지만, 결국 돈 새는 곳만 넘기겠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조수석 시트에 엎드려 꼬리를 말고 눈을 감고 있던 냥믹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녀석의 온몸이 팽팽한 활시위처럼 굳었다.

스르륵.

냥믹의 꼬리가 하늘을 향해 곧게 치솟았다. 조금 전까지 은은한 광채를 내던 녀석의 꼬리털이 다시금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빛으로 무겁고 짙게 물들기 시작했다. 트럭 안의 건조한 공기 위로 불길한 냄새가 어렴풋이 퍼져 나갔다. 깊은 함정과 뒤틀린 책임의 올가미가 뒤섞인, 지독하게 위험한 돈의 냄새였다.

유찬은 휴대폰의 빛나는 제안 문장을 고요히 응시했다.

유찬은 조용히 화면을 껐다. 오늘 현장에서 배운 선은 바로 써먹을 수 있었다. 돈 되는 곳은 챙기고, 떠넘기려는 곳에는 붉은 엑스를 긋는다. 다음 차례는 저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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