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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계약으로 팔겠습니다 일러스트

표준계약으로 팔겠습니다

“펫 대여는 안 됩니다.”

화이트보드 제일 위에 적힌 글자였다. 백호 길드 법무팀과 영업팀, 그리고 던전 관리 실무자까지 모인 회의실에서 유찬은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한쪽에서 아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강유찬 씨. 대여 계약만으로도 당장 5억 원을 선금으로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그냥 펫만 빌려주고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데, 굳이 막을 이유가 있습니까?”

영업 담당 실무자였다. 그의 눈은 돈에 굶주려 있었다. 대산 길드와의 계약이 어그러진 뒤에도 다른 길드, 다른 기업에서 문의가 빗발쳤다. 포포 한 마리, 아니 그와 비슷한 슬라임을 빌려만 주면 위험한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유찬은 고개를 저었다.

“펫만 빌려주면 반드시 사고가 납니다.”

“사고라니요?”

“먹이는 순서, 보존해야 할 부위, 폐기할 찌꺼기를 구분하는 기준이 전부 저한테 있습니다. 이걸 무시하고 아무거나 먹이면 펫이 오염되거나, 최악의 경우엔 터져 버립니다.”

회의실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유찬의 시선이 박성준 팀장에게 향했다.

“한빛 공격대 사고 때, 저희는 그걸 눈앞에서 봤습니다. 박성준 팀장도 아시잖습니까.”

박성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강유찬 씨의 판단이 없었다면 한빛 공격대는 전멸했을지도 모릅니다.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유독 가스가 아직도 연구소에 샘플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의 탐욕스러운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돈도 좋지만, 길드원의 목숨보다 중할 수는 없었다.

유찬의 발치에서 꾸벅꾸벅 졸던 냥믹이 몸을 일으켰다. 어제 진화를 마친 뒤로 계속 피곤한 상태였다. 녀석은 어슬렁거리며 테이블 위로 올라가, 계약서 초안이 펼쳐진 곳으로 다가갔다.

‘대여’라는 단어 근처에서 냥믹의 코가 움찔거렸다. 녀석은 그 단어가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앞발로 코를 슥슥 비볐다. 피곤한 탓에 흐릿한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했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박성준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강유찬 씨의 우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여 대신, 정식 서비스로 계약 구조를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직접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유찬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팔려는 건 펫보다 판단의 순서에 가깝습니다.”

유찬이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오염된 마검의 파편이었다. 그는 아주 작은 조각 하나를 떼어 포포의 앞에 놓아주었다.

포포는 유찬의 허락이 떨어지자 뽀르르 다가와 조각을 삼켰다. 잠시 몸을 젤리처럼 떨던 녀석은 두 종류의 작은 결정을 토해냈다. 하나는 마력의 찌꺼기가 뭉친 검은 돌멩이, 다른 하나는 검의 형태를 유지한 희미한 은빛 조각이었다.

“포포는 먹어도 되는 부분과 보존해야 하는 부분을 분리합니다. 이게 첫 번째 기준입니다.”

회의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때 유찬의 등 뒤에서 스르륵, 까마귀 그림자가 나타났다. 까악스는 길게 그림자 부리를 뻗어, 유찬이 다음으로 집으려던 다른 파편을 콕 찔렀다. 검은 선이 잔상처럼 그어졌다.

“만약 저 파편을 먼저 먹였다면, 포포는 저 검은 선처럼 오염되어 터졌을 겁니다. 까악스는 그 금지선을 보여줍니다. 이게 두 번째 기준입니다.”

몇몇 실무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펫 재주처럼 보이던 장면이 사고를 막는 순서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찬의 시선이 다시 계약서 초안으로 향했다. 냥믹은 여전히 그 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결과물 전량 길드 귀속’이라는 문구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가, ‘사고 발생 시’라는 부분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냥믹은 계약서의 위험한 냄새를 맡습니다. 그래서 제 표준계약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유찬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첫째, 처리 전에 현장 샘플을 확인할 권리. 둘째, 처리·보존·폐기를 나누는 명확한 구분표. 셋째,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과 사고 책임의 배분입니다.”

설명이 끝나자 한 임원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렇게 복잡하게 조건을 걸면, 펫 대여보다 비싸게 받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유찬은 즉시 받아쳤다.

“사고 한 번 막아주는 값은, 대여료 수십 배보다 더 큽니다. 길드원 목숨값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돈만 밝히던 영업팀 실무자조차 입을 다물었다. 유찬의 말 앞에서 돈 계산은 힘을 잃었다. 결국 던전에서 사람이 죽는 문제였으니까.

박성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훌륭합니다. 그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백호 길드의 표준계약서 초안을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앞으로 모든 외부 폐기물 처리 의뢰는 이 표준계약을 통해 진행하는 겁니다.”

그의 말에 몇몇의 눈이 다시 번뜩였다.

‘백호 명의로 모든 계약을 따낸다?’

유찬의 기준을 독점하면, 대산 길드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경쟁 길드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슬쩍 과한 조건을 집어넣어도, 유찬 개인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욕심이 회의실 한쪽에서 터져 나왔다. 백호 길드의 재무를 담당하는 임원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강유찬 씨 개인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라도, 외부 계약은 전부 백호 길드 명의로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가 법무, 보안, 고객 응대까지 전부 맡아서 처리하는 겁니다.”

겉은 번지르르했다. 유찬 한 사람을 위해 길드 전체가 움직여주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말속에 숨은 진짜 의도는 뻔했다. 유찬의 기준과 펫의 능력을 백호 길드의 하청 서비스로 묶어버리려는 속셈이었다.

박성준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유찬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던 냥믹이 코를 찡긋거렸다.

피곤한 와중에도 ‘명의’, ‘일괄 귀속’, ‘별도 협의’ 같은 단어에서 풍기는 불쾌한 냄새를 맡은 것이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계약서의 비릿한 악취였다.

냥믹은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 초안을 향해 앞발을 내밀었다. 발바닥에서 희미한 먹물이 배어 나왔다. 앞서 보여줬던 선명한 족적과 달랐다. 피로가 쌓여 흐릿해진, 거의 보이지 않는 얼룩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먹물 발자국은 정확히 ‘외부 계약의 모든 권리는 백호 길드에 귀속되며’라는 문구 위에 찍혔다.

“냥믹.”

유찬이 나직하게 부르며 손바닥으로 계약서를 덮었다. 더는 무리하게 힘을 쓰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는 냥믹을 고쳐 안으며,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백호 길드의 지원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 기준을 적용하는 일은 백호의 하청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무 임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건 무슨…….”

“별도 정산, 별도 책임 범위. 이게 제 조건입니다.”

유찬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장에서 샘플을 직접 확인하고, 위험도에 따라 견적을 다시 제시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계약을 백호 이름으로 묶으면, 이 과정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는 박성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정중했지만, 담긴 뜻은 단호했다.

“박성준 팀장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한빛 공격대 사고처럼, 현장의 작은 변수 하나가 모든 걸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요.”

박성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 역시 처음에는 길드가 유찬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에 마음이 기울었다. 하지만 냥믹의 희미한 발자국과 유찬의 단호한 태도를 보자, 다른 가능성이 보였다.

만약 유찬을 백호의 틀 안에 억지로 가두면 어떻게 될까.

‘기준’ 자체가 망가진다.

박성준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회의실의 소음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강유찬 씨가 하청으로 묶이면, 이 기준도 같이 흐려집니다. 우리가 독점하려던 무기가 그냥 녹슨 고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비서에게 지시했다.

“회의록 수정해주십시오. ‘강유찬 기준 적용 시 별도 정산 및 별도 책임 범위 설정’ 항목 추가입니다.”

박성준의 지시에 법무팀 직원이 빠르게 태블릿을 조작했다. 회의실 전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새로운 조항의 초안이 떠올랐다.

`[외부 전문가(강유찬) 기술 활용 시 특칙]`

`가. 제3자 의뢰 연계 시, 백호 법무팀의 사전 검토를 거쳐야 함.`

`나. 핵심 산출물 외 부산물의 권리는 별도 협의를 통해 귀속을 정함.`

글자를 본 유찬이 즉시 제동을 걸었다.

“잠깐. 문구는 내가 다듬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법무팀 직원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유찬은 복잡한 법률 용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구르며 익힌,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들을 요구했다.

“이렇게 바꿔. 첫째, 현장 샘플을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투입 불가.”

“……네.”

“둘째, 샘플과 실제 현장 위험도가 다를 경우 즉시 견적 재산정. 셋째,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모든 부산물은 작업 전에 어떻게 나눌지 합의한다. ‘별도 협의’ 같은 애매한 말 말고.”

테이블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냥믹의 귀가 ‘귀속’이라는 단어에서 쫑긋했다. 이어진 유찬의 말에 ‘별도 협의’가 삭제되고 ‘사전 합의’라는 글자가 스크린에 박히자, 꼬리로 바닥을 툭 치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코를 찡그리는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마지막. 제일 중요한 거. 사고 책임은 정보 제공 수준에 따라 나눈다. 엉터리 정보 주고 일 터지면, 정보를 준 쪽 책임이 더 큰 걸로.”

백호의 실무자들 사이에서 작게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러면 우리가 드릴 정보 보고서 수준이 훨씬 빡빡해지는데…….”

“조용히 해. 사고 한 번 나는 것보다 싸.”

웅성거림은 곧 잠잠해졌다.

수정된 조항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박성준은 스크린에 새로 새겨진 네 개의 조항을 말없이 읽어 내렸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합리적입니다. 이대로 확정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논쟁은 끝났다.

펫 대여는 안 된다. 유찬의 기준은 하청이 될 수 없다. 백호 길드는 유찬의 활동을 지원하되, 그의 판단과 펫 운영에 대한 권리는 별개로 인정한다.

회의실 분위기가 빠르게 바뀌었다. 몇몇 실무자들의 눈이 반짝였다. 단순 펫 대여보다 훨씬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실무자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요. 그럼 단순히 펫 대여료 몇 푼 버는 게 아니잖아요. 포포의 분리 및 정제 능력, 까악스의 실패 가능성 표기, 그리고…….”

그의 시선이 유찬의 품에 안긴 냥믹에게 향했다.

“저 녀석이 계약서에서 수상한 조항까지 잡아내잖아요. 이 셋이 붙으면 그냥 처리업이 아니죠. 사고 막고, 부산물 챙기고, 나중에 책임 떠넘기는 것까지 막을 수 있는 장사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기물 더미에서 보물을 건져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위험과 책임까지 관리하는 사업이었다.

유찬은 자신의 펫들이 가진 힘이 단순한 전투 보조가 아님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직원이 들어와 박성준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팀장, 대산 길드 쪽에서 연락입니다.”

박성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벌써 답이 왔습니까?”

“저희가 보낸 수정된 계약안은 검토 중이라고만 하고…… 대신, 다른 처리 업체에 견적을 넣은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화면에는 익숙한 업체의 로고가 떠 있었다. 대산 길드가 자주 이용하던, 실력은 그저 그렇지만 입은 무거운 곳이었다.

“아무래도 저희 쪽 기준을 피해서, 어떻게든 싸게 처리할 방법을 찾는 모양입니다.”

회의실에 싸한 긴장감이 흘렀다. 결국 위험은 덮어두고, 값싼 처리만 고르겠다는 소리였다.

그 순간, 유찬의 품에 안겨 있던 냥믹이 움찔했다.

유찬이 건네주는 최고급 사료에도 입을 대지 않고, 가만히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냥믹의 길고 검은 꼬리 끝이 아주 잠깐, 스르륵 소리를 내며 두 갈래로 갈라졌다. 마치 뱀의 혀처럼.

“냥믹?”

유찬은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는 냥믹을 더 깊숙이 품에 안았다. 지금은 멈춰야 했다. 더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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