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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지 않을 권리 일러스트

손대지 않을 권리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늦은 오후의 붉은 노을이 길게 늘어졌다.

한서 E-12 임시 회의실 안은 탁한 공기로 가득했다.

유찬은 오민석 대리가 내민 태블릿 PC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액정 한구석에 미세한 실금이 가 있었지만, 그 아래로 표시된 굵은 글씨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폐쇄 던전 묶음 처리 후보 — 13건]

목록 맨 윗줄에 표시된 첫 번째 후보지 정보가 냥믹의 하얀 앞발 아래에 짓눌려 있었다.

- 분류: E급 폐쇄 구역 (한서 독점 관할)

- 손실 추정액: 1억 2,000만 원

- 잔존물 유형: 오염 장비, 폐액, 잔해 다수

서기태 부장이 셔츠 깃을 거칠게 펄럭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이마에는 흥건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판세가 유찬에게 완전히 넘어갔음을 직감한 탓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게 바로 미끼 길드가 이번 분기에 가장 공들여 받아 온 구역입니다. 첫 후보 손실액만 1억 2천만 원짜리인데, 제대로 쓸어 담기만 하면 순식간에 적자를 메우고 남을 대어입니다. 다른 길드 놈들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자리를 우리가 통째로 묶어서 관리하고 있는 겁니다."

유찬은 답하지 않았다. 화면에 띄워진 오염 구역의 전경 사진과 폐기 목록들을 가만히 훑어보았을 뿐이다.

사진 속 던전 입구는 거무죽죽한 오염 독기가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상태였다. 그 틈바구니에 썩어가는 가죽 보호구와 부러진 철제 검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뒹굴고 있었다.

"다만 알다시피 이건 한 묶음으로 묶여서 처리해야 하는 조건이오."

서기태가 은근히 유찬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

"쓸 만한 장비가 묻혀 있는 좋은 노다지만 골라내는 얌체 짓은 위에서 용납하지 않소. 흙탕물 속에 처박힌 고철 덩어리까지 한꺼번에 치워주는 게 이번 일의 기본 약속이오. 쓰레기와 알짜배기를 전부 떠안아야 본사 승인이 떨어질 수 있단 뜻이지. 그러니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출발합시다. 밖에서 대기하던 이송 차량도 벌써 준비를 마쳤으니까."

서기태는 계약 조건을 방패처럼 앞세웠다. 한 묶음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이 기회 자체가 날아갈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유찬은 마우스를 내리듯 화면을 한 칸씩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은 서두르지 않았다.

돈이 되는 물건들이 흩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화면에 표시된 오염의 농도와 현장 사진들은 지나치게 기괴했다.

"뽀글……."

유찬의 등 뒤, 배낭 안쪽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울렸다.

포포였다.

최근 무리한 정제 작업을 거쳤던 포포는 지독한 피로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평소처럼 활기차게 주위를 흔들던 탄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배낭 가죽 표면이 젤리처럼 아주 희미하게 떨렸으나, 이내 힘없이 조용해졌다.

포포의 지친 상태를 유찬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무리한 작업을 연달아 지시할 수는 없었다.

그때 냥믹이 이마를 굳혔다.

녀석의 이마 한가운데에 돋아난 황금빛 미끼눈이 깜빡였다. 황금빛 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태블릿의 특정 행들을 훑었다.

냥믹의 미끼눈은 목록의 몇몇 부분에서는 은은하고 맑은 금빛을 내뿜었다. 돈이 될 만한 노다지가 확실히 묻혀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화면을 밑으로 더 내리자, 냥믹의 미끼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개가 급격히 흐려졌다. 어떤 묶음 구역을 가리킬 때마다 녀석의 하얀 앞발 근처로 탁하고 검붉은 어둠이 아지랑이처럼 번졌다.

달콤한 돈 냄새 뒤로, 무거운 사슬이 목을 죄어오는 듯한 위협이 따라붙었다. 녀석의 꼬리가 그 압박을 감지하고 떨었다.

돈을 벌어다 줄 기회와 함께, 목숨을 담보로 삼아야 하는 덫이 한데 얽혀 있다는 뜻이었다.

유찬이 냥믹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냥믹은 앞발을 거두지 않고 유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의 은은한 백색 마력이 손끝을 차갑게 스쳤다.

동시에, 회의실 구석에 앉아 있던 까악스가 길게 울부짖으려다 부리를 탁 닫았다.

까악스는 날카로운 경고음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깃털을 바짝 눕힌 채 숨을 죽이고 유찬의 동태를 살폈다.

유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리가 없다는 사실은 안전하다는 징표가 될 수 없었다. 녀석이 울음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기이한 덫이 도사리고 있으니, 지금 당장 행동을 멈추어야 한다는 경고로 읽혔다.

위험 요소를 사전에 걸러내지 않고 들어갔다가는 한서가 쳐놓은 늪에 온전히 빠질 판이었다.

"오 대리, 뭘 서 있어? 얼른 이송 준비 지시하고 차 대기시켜!"

서기태가 오민석을 재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예! 부장님.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오민석이 허둥지둥 통신기기를 붙잡으려 했다.

그 다급한 움직임 사이로 유찬이 태블릿 화면을 톡 두드렸다.

"멈추십시오."

그 한마디에 회의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서기태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오민석 역시 송신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허공에 멈췄다.

"유찬 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지금 당장 현장에 가야 구역을 선점할 수 있다고 설명드렸을 텐데요."

서기태의 눈썹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그의 목소리에 억눌린 짜증이 묻어났다.

유찬은 태블릿을 테이블 정중앙으로 밀어 놓았다. 먼지 쌓인 테이블 위로 실금이 간 액정이 붉은 노을빛을 반사했다.

"지금 들어가지 않습니다."

"뭐요? 기껏 책임지고 현장 안내를 맡겠다고 오 대리가 길을 열어줬는데 이제 와서 멈추겠다는 소리요? 계약을 진행하려면 당장 움직여야 한단 말이오!"

서기태가 테이블을 짚으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유찬은 서기태의 조급한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가라앉은 눈빛으로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한서에서 묶어 놓은 13건의 폐쇄 구역을 한꺼번에 다 처리할 생각은 접으십시오. 그렇게는 못 합니다."

"이 친구가 지금 와서 무슨 억지를 부리는 거야! 묶음 계약의 조건은 본사 방침이란 말이오! 맛있는 것만 쏙 빼먹고 나머지는 남겨 두겠다는 거요?"

"예."

유찬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 손댈 곳과 손대지 않을 곳을 먼저 나누겠습니다. 그 구분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봐요, 유찬 씨!"

서기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회의실 벽면에 걸린 낡은 시계 바늘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째깍거렸다. 오민석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두 사람의 눈치만 번갈아 살폈다.

노을이 완전히 허물어지며, 회의실 내부로 어스름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손대지 않을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 한마디에 서기태의 거친 숨소리가 뚝 멎었다.

서기태의 붉으락푸르락하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귀를 의심했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거친 숨을 내뿜었다. 이마의 땀방울이 노을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손대지 않을 권리? 지금 장난하자는 거요? 던전 폐기물 처리라는 건 원래 한 묶음으로 처리해서 깨끗하게 비워내는 게 기본 계약이오. 맛있는 뼈다귀만 골라 먹고 이물질이 잔뜩 묻은 폐기물은 남겨두겠다는 심보를 우리가 왜 받아줘야 한단 말이오? 이건 엄연히 본사 방침이자 대형 길드들도 군말 없이 따르는 규칙이오!"

"그 이물질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유찬은 서기태의 윽박지름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실금이 간 태블릿 액정 화면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이 목록을 보십시오. 첫 후보 손실 추정액이 1억 2천만 원이라고 뭉뚱그려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구역별 상세 비용과 정화 부담액은 교묘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같은 후보 안에서도 오염도가 제각각이라는 뜻입니다."

"그거야 구역마다 환경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지!"

서기태가 책상을 쾅 내려치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와이셔츠 깃 위로 붉은 기가 확 올라왔다.

"하지만 묶어서 치워주지 않으면 우리도 남는 게 없소. 본사 재무팀에서도 일괄 처리가 조건으로 걸려야 예산을 승인해 줍니다. 얌체처럼 구는 헌터들을 배려하느라 작업을 쪼갰다가는, 내 목부터 날아간단 말이오. 좋게 말할 때 당장 출발합시다. 오 대리가 길을 열어줄 때 냉큼 받아먹어야지, 쓸데없이 뻗대서 얻을 게 뭐가 있겠소?"

유찬은 서기태의 조급한 포효를 조용히 흘려보냈다. 화를 낼 가치조차 없는 허세였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 들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펜을 쥔 그의 손끝이 종이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받아들이시려면, 이 다섯 가지부터 확정해야 합니다."

"뭐요?"

"첫째, 먼저 진입하여 정화할 구역은 제가 결정합니다."

서기태의 굵은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둘째, 정화와 수거를 포기하고 손대지 않을 구역 역시 제가 고릅니다."

"지금 무슨..."

"셋째, 제가 건드리지 않고 남겨둔 구역의 관리와 사후 오염 책임은 원래 소유주인 한서 측에 그대로 둡니다."

서기태의 숨소리가 한층 더 가팔라졌다.

"넷째, 수거된 물품들의 정산 기준은 현장에 들어가기 전, 문서로 확정하여 잠급니다. 마지막 다섯째, 처리를 마친 뒤에 회수된 잔존물들의 소유 권리는 각 구역별로 명확하게 분할하여 귀속시킵니다."

다섯 가지의 조건이 먼지가 자욱한 회의실 탁자 위로 툭툭 떨어졌다.

서기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옆에 서 있던 오민석 대리는 사색이 된 채 셔츠 소매를 꾹 쥐고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쳤군. 아주 미쳤어."

서기태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강유찬 씨, 당신이 무슨 대형 길드 대표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우리는 미끼 길드입니다. 한서 E-12 독점 관할 구역을 맡아 움직이는 쪽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쉬워서 헌터 개인의 억지에 굽히고 들어갈 줄 알았습니까? 이런 조건에 결재 도장을 찍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 있군요."

유찬이 턱끝으로 오민석을 가리켰다.

오민석의 어깨가 눈에 띄게 크게 움츠러들었다.

"오 대리님은 이 조건이 타당하다고 보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 유찬 씨. 그게 무슨..."

오민석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을 흐렸다. 그의 불안정한 눈동자가 서기태와 유찬 사이를 갈팡질팡 오갔다.

유찬은 오민석의 급박한 심리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E-12 구역의 임시 방벽은 이미 버티는 한계에 가까웠다. 던전의 검붉은 오염독이 방벽 밖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하면, 서기태 부장은 뒤로 빠지고 실무 보고서를 올린 오민석 대리가 가장 먼저 책임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오 대리님."

유찬이 차분하게 쐐기를 박았다.

"이 13개 구역의 임시 방벽 상태가 어떤지 본사에 상세하게 보고하셨습니까? 이틀 내로 처리가 시작되지 않으면 오염 폐액이 지하 하수망으로 침투할 텐데, 그 막대한 사고 부담금을 대리님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건..."

오민석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서기태가 그의 팔통을 거칠게 낚아챘다.

"오 대리! 저 자의 말도 안 되는 협박에 놀아나지 마! 던전 방벽은 본사 관리국에서 규정대로 관리하고 있어. 저까짓 수거 헌터 하나가 겁준다고 흔들릴 셈인가?"

"부장님."

오민석이 떨리는 손으로 서기태의 억센 손아귀를 슬며시 밀어냈다. 그의 눈가에 짙은 피로와 공포가 어려 있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사 방역팀에서 보낸 임시 측정 결과는 이미 경고 수준을 넘었습니다. 유찬 씨가 지적한 대로입니다. 이대로 하루만 더 방치하면 구역 전체가 폐쇄를 넘어 오염 특별 통제 지구로 강제 지정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 팀은 감사실로 불려가 공중분해됩니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살아야겠습니다, 부장님."

오민석이 바지 주머니에서 붉은색 마크가 새겨진 보안 칩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부장님이 금고에 넣어두신 구역별 손실 내역표, 지금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같이 죽습니다."

"이 자식이 미쳤나!"

서기태가 손을 뻗어 칩을 가로채려 했다. 그러나 오민석이 한 발 빠르게 단말기 포트에 칩을 접촉했다.

치지직.

회의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프로젝터가 거친 소음을 내며 빛을 쏘아 보냈다. 회색 콘크리트 벽면 위로 복잡한 숫자들과 빨간색 그래프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서기태가 꼭꼭 숨겨두었던 13개 구역의 정밀 손실표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냈다.

유찬의 시선이 벽면의 붉은 숫자들을 빠르게 훑었다.

오민석이 열어젖힌 손실표는 지독하게 비틀려 있었다. 첫 후보 손실 추정액 1억 2천만 원 중 대부분이 단 3개의 하위 구역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제4구역: 지하수 오염 폐액 정화 비용 4,500만 원]

[제7구역: 붕괴 장비 인양 및 유독 가스 중화 비용 3,800만 원]

[제11구역: 심층부 오염수 처리 책임비 3,000만 원]

냥믹이 앞발로 짚어냈던 검붉은 어둠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서기태는 이 지독한 세 구역의 손실을 뒤로 감춘 채, 쓸 만한 장비와 고철들이 흩어져 있는 나머지 10개 구역을 매혹적인 미끼로 던진 셈이다. 묶음 계약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 아래, 수천만 원에 달하는 오염 처리 책임과 엄청난 정화 비용을 유찬에게 몽땅 덮어씌우려던 속셈이었다.

유찬은 그 상세표를 중심에 두고 조용히 펜을 움직였다.

"4구역, 7구역, 11구역."

유찬의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회의실의 정적을 갈랐다.

"이 세 곳은 진입하지 않습니다. 손대지 않겠습니다."

"강유찬!"

서기태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가장 큰 비용이 드는 곳들을 다 빼놓고 가겠다는 말이오? 거길 처리하지 않으면 이번 수거 작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소! 본사가 바보인 줄 아나!"

"본사가 제정신을 가졌다면, 헌터를 헐값에 부려 먹으려던 부장님의 기안서부터 기각했을 겁니다."

유찬이 차가운 눈빛으로 서기태의 일그러진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세 구역의 유독 가스와 폐액 처리는 원래 한서가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할 책임 구역입니다. 그걸 외부 인력에게 묶음 계약으로 몰래 떠넘기려 한 사실이 본사 감사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리한 위탁 처리 문제로 바로 찍힐 텐데요."

서기태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가라앉았다.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으나, 더는 반박할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유찬의 지적은 그의 가장 아픈 구석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오 대리님."

유찬이 오민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즉시 협회 전산망을 열어 주십시오."

"예, 예!"

오민석은 홀린 듯이 단말기 키보드를 두드렸다. 서기태가 딴지를 걸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손가락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삐빅.

회의실 내부의 홀로그램 화면이 한서 내부망에서 협회 공식 사전 검토 시스템으로 변환되었다. 오민석은 유찬이 제시한 다섯 가지 조건들을 차례대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푸른색 시스템 서식이 차례대로 채워졌다.

[폐쇄 던전 묶음 평가]

[정산 기준 초안 작성자: 강유찬]

[손대지 않을 구역의 책임은 원 소유주에게 남김]

[정산 기준 초안: 강유찬 방식 기준]

화면에 글자들이 선명하게 등록되자, 오민석의 단말기에서 곧장 현장 배차표가 새로 떴다.

[진입 제외: 제4구역, 제7구역, 제11구역]

[원 소유주 책임 보류]

[우선 확인 구역: 제2구역 — 회수 가능 잔존 장비 18점]

[예상 회수액: 2,700만 원]

서기태는 깊은 탄식과 함께 의자 깊숙이 등을 묻었다. 가장 골칫거리였던 세 구역의 오염 처리 책임을 유찬에게 떠넘기려던 설계가 화면 위에서 그대로 지워졌다. 이제 그는 본사 재무팀을 설득해 4구역, 7구역, 11구역의 정화 예산을 따로 받아 내야 했다.

오민석은 거의 매달리듯 단말기를 붙잡았다.

"제2구역 방벽 열겠습니다. 4, 7, 11구역으로 가던 차량은 전부 대기선 밖으로 빼겠습니다."

바깥에서 곧장 무전음이 터졌다.

치직.

"제4구역 진입 취소. 제2구역으로 동선 변경. 반복합니다. 제2구역으로 동선 변경."

회의실 창밖으로 보이던 이송 차량 두 대가 느리게 후진했다. 오염 폐액이 고인 검은 통로 쪽으로 향하던 붉은 경광등이 꺼지고, 비교적 마른 바닥이 드러난 오른쪽 통로에 초록색 유도등이 켜졌다.

그 짧은 변화만으로도 현장은 달라졌다.

위험한 곳을 억지로 떠안는 작업에서, 돈이 남는 곳부터 손대는 작업으로 바뀌었다.

"뽀글."

포포가 배낭 틈새로 젤리 같은 둥근 몸을 살짝 내밀었다가 안심한 듯 조용해졌다. 냥믹 역시 은은한 마력을 거두며 유찬의 발치로 내려왔다. 녀석의 황금빛 미끼눈은 이제 어두운 연기 대신 맑은 빛을 띠고 있었다.

유찬은 새로 열린 제2구역 배차표를 확인했다.

폐쇄 던전의 가격표를, 그가 직접 고쳐 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럼, 돈이 남는 구역부터 보겠습니다."

유찬의 나지막한 선언과 함께, 제2구역 방벽의 잠금 장치가 철컥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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