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지금도 이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잠깐만요.”
협회 직원이 특수 봉인 케이스의 잠금장치에 손을 댔을 때였다. 강유찬이 그의 손을 가로막았다. 단호하고,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이거 열면 안 됩니다.”
“네? 강유찬 씨, 봉인 해제하고 내용물 확인해야 감정이 진행됩니다.”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백호 길드의 박성준 차장도 미간을 좁히며 유찬을 돌아봤다. 그의 눈은 왜 절차를 중단시키는지 묻고 있었다.
유찬의 품에서 포포가 뽀글, 하고 몸을 떨었다. 주인의 긴장을 감지한 젤리 같은 몸이 케이스 쪽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유찬은 팔로 포포를 감싸며 뒤로 물렸다. 지금은 포포가 나설 때가 아니었다.
“방금 조사관님이 찍은 기록 사진하고 지금 위치가 다릅니다.”
유찬은 침착하게 조사관 쪽 태블릿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봉인 직후 케이스 내부를 찍은 사진이 선명했다. 사진 속 천둥 길드 표식 단검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검은 가루들. 하지만 투명한 케이스 안의 가루들은 그사이에 반대편으로 스르륵 이동해 있었다.
“가루가 움직였습니다. 봉인된 상태에서요.”
그 말에 직원의 눈이 커졌다. 박성준 차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태블릿 화면과 케이스를 번갈아 확인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단을 내렸다.
“강유찬 씨 말대로 해. 케이스 절대 열지 마.”
박성준이 조사관에게 짧게 지시했다. 이내 그는 다른 직원에게 명령했다.
“여기 아래에 오염 검사 끝낸 깨끗한 흰 천 깔아. 봉인 번호 다시 확인하고, 지금부터 모든 각도에서 영상 녹화 시작해. 다들 세 걸음 이상 물러서.”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방금 포장을 뜯은 넓은 흰 천이 깔리고, 그 위에 문제의 케이스가 조심스럽게 놓였다. 여러 대의 휴대폰과 현장 기록용 카메라가 케이스를 향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케이스 안의 검은 가루가 꿈틀, 하고 지렁이처럼 미세하게 움직였다.
정말 눈을 깜빡이면 놓칠 만큼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케이스 밑에 깔린 새하얀 천 위로 검은 점 하나가 똑, 하고 찍혔다. 마치 먹물 한 방울이 한지에 스며든 것처럼.
“……통과했어.”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최고 등급의 봉인 케이스를, 그것도 물리적인 파괴 없이 뚫고 나온 것이다.
천둥 길드 표식 단검과 이 검은 가루는 별개의 위험이었다. 박성준 차장이 즉시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단검이 아닌, 검은 점이 찍힌 천과 케이스에 고정되어 있었다.
“해당 아이템, 위험 등급 재분류. 봉인 후에도 독립적인 활동성을 보이는 미확인 물질로 기록한다. 최초 보고자는 강유찬. 성급한 봉인 해제를 중단시킨 판단도 협회 기록에 같이 올려.”
한쪽에서 조사관이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빠르게 받아 적었다. 그가 쓴 ‘강유찬 기록’이라는 글자가 유찬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기록과 보상은 생각보다 빨랐다.
강유찬의 이름은 백호 길드와 협회 기록에 동시에 등재되었다. ‘봉인 후 검은 가루의 독립적인 움직임을 최초로 보고, 성급한 봉인 해제를 막아 2차 오염 및 잠재적 인명 피해를 방지한 자.’ 거창했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돈도 바로 들어왔다.
“1차 정제 결정 예상가 870만 원 중, 세금 공제하고 600만 원을 우선 지급하겠습니다.”
박성준 차장이 직접 서류를 들고 와 설명했다. 전날 선급 처리비 300만 원이 들어온 뒤에도 통장 잔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나머지 270만 원은 추가 정밀 감정 후에 지급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건 별도 수당입니다.”
그가 내민 명세서에는 ‘특수 위험 흔적 발견 및 확산 방지 기여 수당: 120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합쳐서 720만 원입니다. 계좌 확인해보시죠.”
잠시 후,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KB은행: 입금 7,200,000원]
일단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이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당장 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 본인부담금만 200만 원이 넘었다.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나면, 포포에게 꾸준히 먹여야 할 고농축 영양제 값을 감당하기 빠듯했다.
“차장님, 혹시.”
유찬이 입을 열었다. 박성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CCTV 원본, 해당 시간대 보관실 출입 기록, 관련 근무자 명단 전부 보존 조치했습니다. 같이 보시겠습니까?”
보안 사무실의 대형 모니터에 시간대별 영상이 빽빽하게 떠 있었다. 박성준이 턱짓으로 지시하자 직원이 빠르게 영상을 돌렸다. 유찬은 눈을 떼지 않고 프레임 하나하나를 쫓았다.
바로 그때였다.
보관실 복도를 비추는 카메라 영상. 문이 닫히기 직전, 문틈으로 아주 잠깐 검은 형체가 보였다 사라졌다.
“잠깐, 방금.”
유찬이 화면을 가리켰다. 직원이 프레임을 뒤로 돌렸다. 몇 번의 조작 끝에 문제의 장면이 확대되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
복도 구석에서 문틈을 향해 뻗어 있던 손이, 마치 뱀처럼 순식간에 벽 뒤로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유찬의 어깨 위에서 까악스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방금 맡았던 새 냄새. 예전 것이 아니다.]
유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새로운 냄새. 범인은 현장에 다시 접근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주변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박성준 차장은 달랐다. 그는 까악스의 경고를 듣자마자, 감상적인 반응 없이 곧장 행동에 나섰다. 보안 사무실의 직원에게 망설임 없이 지시했다.
“방금 저 복도 CCTV, 시간 특정해서 원본 영상 따로 복사해. 용의자 특정될 때까지 무기한 보존 조치 걸어놔. 출입 기록이랑 대조해서 해당 시간대 건물에 있었던 외부인, 관련 없는 직원 명단 전부 뽑아.”
그의 지시는 빠르고 정확했다. 직원이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채웠다.
유찬은 시선을 돌려 특수 봉인 케이스에 담긴 단검과 검은 가루를 보았다. 저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박성준은 유찬의 시선을 따라오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저건 이제 못 건드려. 협회와 천둥 길드, 우리 길드까지 얽힌 원본 증거물이 됐으니까.”
박성준의 말이 맞았다. 저 케이스를 여는 순간, 모든 게 뒤섞인다. 범인이 남긴 흔적인지, 원래 단검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봉인 후에 생긴 문제인지 누구도 증명할 수 없게 된다. 유찬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손대면 나중에 아무것도 못 따진다. 내 기록도, 보상도, 진실도 전부.
“네, 차장님. 저건 저대로 보존해야 합니다.”
유찬이 힘주어 말했다. 박성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이미 다음 단계를 보고 있었다.
그날 오후, 박성준 차장이 유찬에게 정식으로 계약서를 내밀었다.
“1주일 시험 계약입니다. ‘버려진 구역’의 폐기물을 처리하는 작업이고, 이 시험 기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장기 계약 여부를 결정할 겁니다.”
계약서 첫 장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작업 구역은 ‘버려진 구역’, 계약 기간은 1주일. 모든 작업 내용은 강유찬의 공식 기록으로 남는다. 착수금 300만 원은 회계 처리 후 다음 날 오전에 지급될 예정이라고 했다.
돈이 급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시작해야 했다. 유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들었다.
그가 서명란에 펜촉을 가져다 대는 순간.
“하악!”
냥믹이 계약서 뭉치를 향해 발톱을 세우며 울었다. 정확히는 계약서 뒤에 스테이플러로 찍힌 얇은 별첨 서류를 향해서였다.
동시에 까악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냄새. 종이에서도 난다.]
검은 장갑의 주인이 복도에 남겼던 그 냄새였다. 유찬은 펜을 멈췄다.
“차장님, 이 계약서 원본이 담겨 있던 봉투는 혹시 따로 보관 중이십니까?”
“봉투? 그건 왜 찾지?” 박성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
“혹시 모르니, 원본은 그대로 두고 사본이나 사진으로 내용을 확인했으면 합니다.”
박성준은 유찬의 눈을 잠시 보더니,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지시에 계약서 전체가 빠르게 복사되었다. 유찬은 다른 부분은 건너뛰고 냥믹이 경계하던 별첨부터 확인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글씨로 된 조항이 있었다.
`제7조 2항: 작업 중 확인된 위험 흔적과 그 부속 기록은 백호 길드 내부 검토 후, 외부 기록 반영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유찬이 조항을 소리 내어 읽자, 옆에 있던 행정 직원이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아, 그건 그냥 형식적인 문구입니다. 길드 보안상 중요한 정보일 수도 있어서….”
“제가 찾은 걸, 나중에 제 기록에서 뺄 수도 있다는 뜻 아닙니까?”
유찬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직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원래 다 이렇게 합니다. 보상은 어차피 나가지 않습니까.”
돈은 나간다. 하지만 기록은 사라진다. 범인을 잡을 유일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강유찬’의 이름으로 남을 기록이 길드의 판단 하나로 지워질 수 있었다.
유찬은 말없이 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이 계약은 못 하겠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조항이 유효하다면, 앞으로 증거 가능성이 있는 물건은 위험해서 일절 손대지 않겠습니다. 그냥 폐기물만 처리하죠.”
그 말에 박성준 차장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는 유찬을 감정적으로 편들지 않았다. 대신, 실무적으로 판단했다.
“별첨, 다시 써.”
박성준이 행정 직원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이 계약서 최종 송부 로그 확인해. 내가 승인한 원본에 이 조항이 있었는지 대조하고, 원본이 담겨 있던 봉투는 증거물로 따로 보존해.”
누군가 그의 최종 승인 이후, 문서를 실무자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독소 조항을 몰래 끼워 넣은 정황을 즉시 파악한 것이다.
수정된 계약서는 명확했다. 강유찬이 발견한 모든 것은 ‘강유찬 기록’으로 백호와 협회에 동시에 남으며, 어느 한쪽이 마음대로 지울 수 없었다. 펫이 거부하는 물건은 억지로 정제하지 않고, 증거 가능성이 있는 물건은 반드시 사진과 번호를 남긴 뒤 봉인 절차를 거치기로 했다. 펫의 반응은 그 자체로 증거는 아니지만, 정밀 조사를 요청할 충분한 사유가 됐다.
새 계약서에 서명한 유찬은 곧바로 첫 시험 작업에 투입되었다.
‘버려진 구역’의 임시 분류장은 퀴퀴한 먼지와 녹슨 금속 냄새, 정체 모를 액체가 말라붙은 악취로 가득했다. 백호 길드 소속의 작업자 한 명이 폐기물 상자를 통째로 대형 처리기에 넣으려 했다.
“잠깐만요.”
유찬이 그를 막았다. 작업자는 귀찮은 표정으로 돌아봤다.
“뭡니까? 빨리 치워야 다음 구역으로 넘어갑니다.”
“계약서대로 해야 합니다. 작업 전에 모든 물품 사진부터 찍고 번호표를 붙이기로 했습니다.”
유찬은 손에 든 디지털카메라와 번호표 스티커 뭉치를 들어 보였다. 작업자는 ‘그걸 어느 세월에 다 하냐’는 얼굴이었지만, 유찬의 뒤에 선 박성준 차장의 감독관 같은 눈빛을 보고는 마지못해 상자를 내려놓았다.
작업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유찬은 방호 장갑을 끼고 폐기물 더미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먼저 바닥에 깔린 흰 천 위에 올려놓고, 번호표를 붙인 뒤 사진을 찍었다.
토독, 토독. 포포가 유찬의 어깨 위에서 몸을 떨며 재촉했다. 유난히 먹고 싶어 하는 작은 금속 파편이 나오자, 유찬은 포포를 잠시 제지했다.
“기다려.”
그는 파편에 9번 스티커를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펫 반응이 강한 개체. 기록을 마친 뒤에야 파편을 포포 앞에 내려놓았다. 포포는 신나게 달려들어 파편을 정제하며 투명한 결정을 만들어냈다.
“하악!”
그때, 냥믹이 먼지 쌓인 낡은 파우치를 보고 등을 세우며 울었다. 유찬은 즉시 파우치를 집어 따로 빼냈다. 10번 스티커, 사진 촬영, 그리고 붉은색 마커로 ‘펫 반응: 위험’이라고 적은 증거물 봉인 봉투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작업자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까악스가 부리로 웬 장치 옆면을 툭툭 쳤다.
[이거, 냄새. 숨겨둔 냄새.]
유찬은 그 장치 역시 보류 더미로 옮겨 11번 표식을 붙였다. ‘정밀 조사 요청’ 항목에 체크했다. 그냥 버렸으면 영원히 사라졌을 흔적들이었다.
짧은 첫날 작업이 끝났다. 폐기물 처리비 절감 예상액 약 180만 원, 포포가 정제한 결정의 예상 감정가 약 390만 원. 당장 손에 쥐는 현금은 아니지만, 정식 계약에 대한 희망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유찬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 그날의 작업표를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에 들렀다. 박성준 차장도 함께였다. 어제의 성과에 만족한 듯 그의 표정도 밝았다.
“오늘 작업 구역은 C-7입니다. 어제와…”
박성준이 작업표를 넘기다 말고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서류의 한 항목에 고정되었다. 유찬도 고개를 기울여 서류를 들여다봤다.
작업자 명단 아래, 평소에는 없던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특이사항: 외부 참관인 1명 배정 완료.`
박성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이거 승인한 적 없습니다.”
그가 곧장 보안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몇 분 뒤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어젯밤 자정 넘어, 관리자 권한으로 추가된 항목이라고 합니다. 참관인 이름은 비어 있고, 코드만 남아 있습니다.”
그 순간, 유찬의 어깨 위에서 까악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 냄새, 종이에 옮겨 붙었다.]
적은 더 이상 CCTV 화면 속 그림자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찬의 작업표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