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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발령 일러스트

임시 발령

노크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팀장님.”

문 너머의 카시안 목소리는 전과 다를 것 없이 낮고 느긋했다.

그런데 아델린은 이제 그 느긋함이

성격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같은 벽에 부딪힌 사람이

결국 익혀 버린 무감에 가까웠다.

그녀는 책상 위에 펼쳐 둔 청원서를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직원번호 0001 카시안 렘브란트는 본인의

직위를 스스로 해제받고자 청원함.

반려.

본인 의사만으로는 해제 불가.

황실은 그를 충성의 상징처럼 떠들어 왔다.

떠나지 않는 검, 왕좌의 수호자, 창건기의 살아 있는 영광.

그런데 실제 문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남으려고 한 게 아니라, 나가려고 했고, 못 나갔다.

아델린은 청원서를 접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카시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은 여전히 헝클어지지 않았고,

표정은 귀찮은 야근 호출을 받은 직원처럼 무심했다.

다만 눈은 곧바로 책상 위 문서로 향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그걸 어디서 찾으셨죠.”

이번엔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아델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발령국 보관 상자 바닥에서요.

누가 아주 정성스럽게 묻어 놨더군요.”

카시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방 안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몇 장이나 있었습니까?”

“의외군요.

부정부터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는 천천히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아델린은 문서를 치우지 않았다.

카시안은 맨 위 장을 내려다보다가 아주 짧게 웃었다.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이건 오래된 거네요.”

“언제입니까?”

“세 번째 왕이 죽고 네 번째가 즉위한 직후.”

“꽤 구체적이군요.”

“내 서류니까요.”

아델린은 손가락 끝으로 다른 장들을 두드렸다.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겠죠.”

“기억 안 난다는 뜻입니까, 너무 많았다는 뜻입니까?”

카시안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둘 다.”

그 대답은 가볍게 흘러갈 수 없는 종류였다.

아델린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늘 비꼬듯 웃고, 느슨하게 대꾸하고,

자기 얘기는 길게 하지 않는 남자.

그런데 지금은 농담으로 넘길 생각조차 없는 표정이었다.

“왜 숨겼죠?”

“숨겼다고까지 할 건 없습니다.”

“문서가 상자 맨 밑에서 반쯤 탄 채 발견됐는데요.”

“그건 내가 태운 게 아닙니다.”

“누가 태웠죠?”

“보통은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

카시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빠져나가면 곤란한 사람들.”

아델린은 잠시 말을 고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당신 직위가 결계와 얽혀 있어서?”

“그땐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냥 내가 떠나려 하면 꼭 누가 기겁을 했죠.

왕이든, 대신이든, 실무관이든.”

“그래서 포기했습니까?”

카시안이 아델린을 보았다.

그 시선엔 짜증도, 분노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감정을 쓸 자리조차 닳아 버린 사람 같았다.

“처음엔 화를 냈고, 그다음엔 협박도 했고,

그다음엔 부탁도 해 봤습니다.”

그는 손끝으로 가장 오래된 청원서 모서리를 한번 스쳤다.

“끝에는 알게 되죠.

내가 떠나는 건 내 의사만으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아델린은 그 문장을 머릿속에 그대로 적어 두었다.

“떠나는 건 내 의사만으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600년째 퇴사 불가인 직원이 할 만한 말이었고,

동시에 이 나라가 얼마나 비정상인지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뭘요.”

“왜 오늘 나한테 말하지 않았죠?”

카시안이 조금 웃었다.

“팀장님은 첫날부터 나를 자르겠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보통 그런 사람에게 ‘참고로 저 예전에도 스스로 잘라

달라고 몇 번 청원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둘 중 하나죠.

아주 크게 당황하거나, 더 위험한 방식으로 문서를 파헤치거나.”

“저는 어느 쪽입니까?”

“아직 판단 중입니다.”

아델린은 청원서 다발을 정리해 한쪽으로 밀었다.

“판단은 제가 할 일입니다.”

“언제나 그렇죠.”

“좋습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판단을 하나 내리죠.”

카시안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놀라움은 아니고, 경계에 가까웠다.

“지금요?”

“지금.”

“대개 그런 말 다음엔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던데.”

“당신 기준으로는 대부분의 행정 절차가 그렇겠군요.”

아델린은 문서 다발 중 현행 발령 규정집을 골라 꺼냈다.

두꺼운 가죽 표지를 넘기자, 금빛 탭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특정 조항을 펼쳤다.

“황실 인사 비상 조정 규정 제18조.”

카시안이 한숨처럼 웃었다.

“규정 번호까지 외우십니까?”

“쓸모 있는 것만.”

“무섭군.”

“제18조.

직위 해제가 불가능하거나 지연되는 고위 위험 인력은,

원직을 보존한 상태에서 별도 감시·보안·준법

직무에 임시 겸직 발령할 수 있다.”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카시안이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무슨 문제라도?”

“그 조항,

원래는 폭주한 마도사나 귀족 사병단 해산 때 쓰는 겁니다.”

“정확하군요.”

아델린이 규정집을 덮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 적합합니다.”

카시안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저를 해고 못 하니 감시관으로 묶겠다고요?”

“정확히는 보안 준법감시관입니다.”

“이름이 길어졌다고 덜 수상해지진 않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아델린은 문을 향해 걸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잘려 나가지도,

방치되지도 않는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 겁니다.”

카시안은 그녀가 문을 열기 직전 물었다.

“팀장님.”

아델린이 돌아보았다.

“예.”

“혹시 이게 복수입니까?”

“아니요.”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업무 배치입니다.”

다음 날 아침, 발령국은 전례 없이 소란스러웠다.

비상 발령은 원래도 조용히 처리되는 문서가 아니었지만,

이번 건은 시작부터 소문이 앞질렀다.

기록보관실 결계 반응, 직원번호 0001,

새 팀장의 첫날 사고.

이미 복도에서는 반쯤 전설처럼 부풀려진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델린이 검은 불꽃을 맨손으로 눌렀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카시안이 결계탑 꼭대기까지 불길을 올렸다고 했다.

둘 다 틀렸지만,

황실 공무원들이 사실보다 소문을 더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그럴듯했다.

아델린은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발령국 중앙 창구로 걸어갔다.

카시안은 그녀 반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서기관 셋이 동시에 손에 쥔 펜을 떨어뜨렸고,

인장 담당관 한 명은 진짜로 의자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앉지 못했다.

발령국 차석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설마 진심이십니까?”

“문장을 끝까지 말해 보세요.”

“직원번호 0001을 임시 발령하겠다는 그 안 말입니다.”

“진심입니다.”

차석은 웃으려다 실패한 얼굴이 됐다.

“이건 인사 배치가 아니라 재난 관리에 가깝습니다.”

카시안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좀 상처가 되는데.”

“듣고 보니 사실이라 더 문제군요.”

아델린은 이미 준비해 온 서류철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위에는 결계국 소견서, 파면심사실 긴급 회의록,

그리고 그녀가 직접 작성한 비상 임시 발령안이 놓여 있었다.

임시 발령 대상: 직원번호 0001 카시안 렘브란트.

발령 직위: 황실 인사팀 산하 보안 준법감시관.

직무 범위: 0001 관련 계약 반동 조사,

고위 계약 현장 동행,

유령직위 및 휴면 계약 사건 현장 보안 자문.

발령국 차석이 문서를 훑더니 거의 신음하듯 말했다.

“팀장님,

이건 자기 사건 피감독자를 조사관으로 넣겠다는 겁니다.”

“조사관이 아닙니다.

보안 준법감시관이죠.”

“단어 장난 아닙니까?”

“법은 원래 단어로 움직입니다.”

주변에 있던 서기관 몇몇이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을 참는 건지, 긴장을 숨기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차석은 아델린 대신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또 왜 가만히 있습니까?”

카시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저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중입니다.”

“거부하십시오.”

“왜요?”

“당신한테도 안 좋으니까!”

카시안이 잠깐 생각하는 척하더니 말했다.

“듣고 보니 흥미가 생기는군.”

발령국 차석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아델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인장 담당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비상 조정 규정 제18조와 발령국

직무 이동 규정 제7조에 따라,

원직 보존 겸직 발령으로 처리합니다.

직위 해제나 원문 변경이 아니므로

0001 본직 계약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즉시 기안하세요.”

인장 담당관이 차석과 아델린 사이에서 눈을 굴렸다.

“차석님…….”

차석은 이를 악물었다.

“원장 승인 없이는.”

“원장 공석 중입니다.”

아델린이 잘라 말했다.

“인사팀장과 발령국 차석 공동 결재면 됩니다.

어제 회의록에도 명시됐죠.

제가 읽어 드릴까요?”

차석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

어제 회의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대충 넘긴

문장이 지금 자기 목을 조르는 꼴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아주 뼈저리게 이해한 얼굴이었다.

“팀장님은 지나치게 성실하십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건 칭찬이 아닙니다.”

“상관없습니다.

서명하시죠.”

발령국 차석은 한동안 버텼지만, 결국 서명했다.

정확히는 패배를 인정했다기보다,

더 큰 책임을 떠안기 싫어하는 표정으로 이름을 적었다.

아델린은 그 옆에 자기 이름을 또렷하게

써 넣고 은빛 인장을 눌렀다.

문서 표면에 잠깐 빛이 흘렀다.

이번에는 검은 불꽃이 튀지 않았다.

단지 원직 직원번호 0001

아래에 가느다란 보조 문장이 새겨졌다.

황실 인사팀 산하 보안 준법감시관, 임시 겸직.

발령국 안에서 누군가 작게 숨을 삼켰다.

실제로 된다.

다들 그 사실이 더 충격인 얼굴이었다.

아델린은 새 문서를 카시안 쪽으로 내밀었다.

“축하합니다.”

카시안은 문서를 받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도 축하를 합니까?”

“직원을 놀리지 않는 건 상사의 미덕이 아닙니다.”

“팀장님은 상사가 아니라 재앙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유감이군요.

공식 문서상 저는 당신 상사입니다.”

아델린은 문서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출근하세요.”

황실 인사팀 사무실에 카시안이 들어오자,

이미 한번 소문을 들은 직원들도 실제 광경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찻잔을 엎었고,

누군가는 결재판을 품에 안은 채 굳어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리 대상 1호였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임시

감시관 명패를 들고 같은 부서로 걸어 들어왔으니 그럴 만했다.

아델린은 가장 비어 있는 책상 하나를 가리켰다.

“거기 쓰세요.”

카시안이 책상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설마 진짜 책상까지 줄 줄은 몰랐군.”

“감시관이 복도에 서서 근무할 순 없으니까요.”

“저는 그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앉아서 일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가 책상 앞에 섰다.

새것은 아니지만 관리가 잘된 책상이었다.

펜꽂이, 빈 문서함, 규정집 두 권, 임시 출입패 하나.

누가 봐도 당장 업무를 시작하라는 배치였다.

카시안은 출입패를 들고 한참 말이 없었다.

아델린이 물었다.

“문제 있습니까?”

“있죠.”

“말해 보세요.”

“육백 년 만에 첫 책상입니다.”

순간 사무실이 아주 조용해졌다.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시안은 웃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웃지 못했다.

아델린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문서철 하나를 그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럼 더 늦기 전에 적응하세요.”

“상당히 박정하시군.”

“업무 시간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그가 출입패를 손에 쥔 채

한 번 더 책상 모서리를 만지는 걸 봤다.

새 가구를 만지는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물건인지

확인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아델린은 그 장면을

모른 척 넘겼다.

다만 다음 문서철을 놓는 손길만

조금 덜 거칠게 조절했다.

카시안은 결국 의자에 앉았다.

앉는 동작조차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잠깐 멈칫했다가,

등받이에 기대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함정인지

아닌지 먼저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아델린은 그 모습을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첫 임무를 설명하죠.”

그녀는 어젯밤 찾은 청원서 사본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카시안의 시선이 굳었다.

“원본은 제가 보관합니다.

이건 사본이고요.”

“친절하시군.”

“오해하지 마세요.

증거 보존입니다.”

아델린은 이어서 다른 문서 다발도 내밀었다.

“이건 당신의 과거 파면 시도 기록입니다.

날짜순으로 정리해 두었고,

왕위 교체기와 숙청 직후가 많았습니다.

누군가 혼란기에 당신을 정리하려 했다는 뜻이죠.”

“또는, 정리하는 척했다는 뜻일 수도 있겠군.”

“저도 그렇게 봅니다.”

카시안이 처음으로 제대로 그녀를 바라봤다.

비꼼 없이 대화가 이어진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

“그래서 감시관이 된 저한테 뭘 원하십니까?”

“기억.”

아델린은 짧게 답했다.

“문서는 거짓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서류보다 덜 한다고 했죠.”

“인용까지 하시네.”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녀는 책상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당신이 언제,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해제 청원을 냈는지 전부 기억나는 만큼 말하세요.

그리고 어떤 시기에 황궁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도요.”

카시안은 한참 말이 없었다.

주변 직원들은 일하는 척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델린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굳이 낮추지 않았다.

이 장면은 일부러 보여 줄 가치가 있었다.

그녀가 카시안을 숨기거나 편애하는 게 아니라,

공적으로 끌어다 쓰고 있다는 증거니까.

“정말 일을 시키는군요.”

카시안이 중얼거렸다.

“왜, 기대와 달랐습니까?”

“조금.”

“당신을 퇴사시키는 데 필요한 일입니다.”

그 말에 카시안의 손끝이 아주 작게 멈췄다.

“그 말을 아직도 믿으십니까?”

“저는 믿음보다 문서를 선호합니다.”

“그 문서들이 방금 팀장님께 보여 준 게 뭔데요.”

아델린은 시선을 들었다.

“황실이 당신을 못 내보내는 이유가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도 원한 적이 있다는 것.”

카시안은 웃지 않았다.

대신 낮고 마른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위로가 되진 않는군.”

“위로하려는 게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청원서 사본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더 성가시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선은 잠깐 사본 위에 남아 있었다.

아델린은 그 시선에서

짜증보다 더 오래된 피로를 읽었다.

이 남자는 지금도

도망칠 틈보다

포기해야 할 이유를 더 먼저 세는 사람 같았다.

바로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팀장님, 저 진짜 죽겠어요!”

밝고 빠른 목소리가 분위기를 산산조각 냈다.

커다란 장부 세 권을 양팔에 끼고 들어온 여자는

짙은 밤색 머리를 대충 묶은 채 숨을 헐떡였다.

회계국 파견 완장을 두른 도로시 펜이었다.

그녀는 문턱을 넘자마자 말을 쏟아내다가,

사무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카시안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

모두의 시선이 도로시에게, 다시 카시안에게,

다시 아델린에게 갔다.

도로시가 눈을 두 번 깜빡이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지금 잘못된 방에 들어온 건가요?”

아델린은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요.

왜 왔죠?”

“아, 맞다.”

도로시는 즉시 원래 용무를 떠올렸다.

놀라는 속도도 빨랐지만 회복 속도는 더 빨랐다.

“팀장님이 어제 회계국 지급 이력 전부 다시 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밤새 뒤졌는데요, 이거 이상합니다.

이상한 수준이 아니라 썩었어요.

완전.”

그녀는 들고 온 장부를 책상 위에 쾅 내려놓았다.

먼지가 확 일었다.

“사망 처리된 직원들한테 급여가 계속 나갔어요.

한둘이 아니고, 몇 년치가 줄줄이요.”

사무실 공기가 또 한 번 얼어붙었다.

아델린은 즉시 몸을 돌렸다.

“증빙.”

“여기요.”

도로시는 장부를 휙 펼쳤다.

손놀림이 빠르고 정확했다.

“공식 사망 명단, 급여 지급 장부,

유족 보상 정산표 맞대조했어요.

원래 같으면 죽은 직원은 급여가 끊기고

보상 절차로 넘어가야 하거든요.

그런데 몇 명은 죽은 뒤에도 이름이 계속 살아 있어요.

아니, 이름은 죽었는데 돈은 살아 있달까.”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다시 카시안을 힐끗 봤다.

“어…… 설명은 나중에 할까요?”

아델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확실히요?”

“이쪽은 제 감시관입니다.”

도로시의 눈이 둥그래졌다.

“팀장님, 저 밤새워서 헛것을 보는 건 아니죠?

감시관이요?

저분이요?”

카시안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맞습니다.”

도로시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결국 아주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황실이 드디어 진짜 미쳤네.”

아델린은 그 평가를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로시의 손가락이 특정 이름들 아래를 짚었다.

사망 연도, 지급 지속 개월 수, 승인 인장 번호.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렇게 대놓고는.

아델린이 물었다.

“규모는?”

“지금 확인된 것만 열세 명.

더 나올 수도 있어요.”

“공통점.”

“그걸 찾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도로시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다들 공식적으론 죽었는데,

급여 승인란에 이상한 서명이 하나씩 섞여 있어요.

직함은 있는데 담당자가 없는 이름이에요.”

카시안의 시선이 처음으로 장부 위에 떨어졌다.

“유령직위.”

도로시가 그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네, 바로 그거요.

아시네요?”

카시안은 대답 대신 아주 느리게 장부 한 페이지를 넘겼다.

오래된 전쟁 명단을 보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아델린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녀는 장부를 덮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부터 이 건이 첫 공동 업무입니다.”

도로시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공동이요?”

“회계국 지급 이력은 도로시가 잡고,

현장과 고대 기록은 감시관이 봅니다.

저는 승인선과 직위선을 읽죠.”

카시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출근 첫날부터 일이 과하군.”

아델린은 냉정하게 받아쳤다.

“육백 년 놀았으면 이제 시작해도 됩니다.”

도로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놀람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미 흥미가 이긴 얼굴이었다.

“와.”

그녀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조합, 진짜 피곤하겠네요.”

아델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카시안은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황실 인사팀 사무실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소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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