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 부관의 이름 일러스트

# 부관의 이름

부관의 이름

결계국 임시실 냄새는

늘 비슷했다.

태운 은사 냄새,

젖은 붕대 냄새,

그리고 막 끊긴 명령선이 남기는

쇠 맛.

아델린은 그 냄새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좋아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 냄새는 대개

누군가 너무 늦게 다쳤다는 뜻이었으니까.

세린 베일은

카시안의 왼쪽 어깨에 박힌

반동선 잔흔을 걷어 내며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정확한 손놀림.

짧은 지시.

불필요한 위로 없음.

그래서 아델린은

지금 이 방에 세린이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침착해야 했다.

아델린은 아직

그 역할을 하기엔

조금 늦었다.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부상자 취급이

꽤 거칩니다.”

세린은 손도 멈추지 않고 답했다.

“걸어 나가실 정도면

환자 취급은 끝내 드리죠.”

카시안이 아주 약하게 웃었다.

“협박인데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군요.”

아델린은 그 말을 듣고도

웃지 않았다.

“안심은 나중에 하세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오늘 밤 당신은

미끼가 되는 걸

너무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카시안이 이번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세린이 은침 하나를

상처 가장자리에 밀어 넣자,

그는 입술을 잠깐 다물었다.

아델린은 그 짧은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버티면 되는 얼굴만 하고 있는 방식.

늘 그래 왔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카시안이 한 박자 늦게 말했다.

“팀장님도 비슷했습니다.”

“무슨 뜻이죠.”

“건물이 무너지는데도

계단 대신 창을 계산하셨죠.”

아델린은 바로 잘랐다.

“저는 업무를 했습니다.”

카시안이 그녀를 봤다.

“저도 그랬고요.”

그 문장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델린은 책상 끝을 짚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지금 여기서

감정이 먼저 튀어나오면 안 된다.

기디온 마르체가

문밖에서 대기 중이고,

현장 기록은 이미 올라가기 시작했고,

구조된 계약자 둘은

아직 봉쇄 안에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다.

한 사람에게만 머무를 순 없다.

그런데도 시선은

자꾸 카시안 어깨로 갔다.

붕대 아래에서

아직도 아주 옅게

검은 선이 꿈틀거렸다.

세린이 천을 갈아 대며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좋았다고요.”

아델린이 바로 물었다.

세린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선이 조금만 더 깊었으면

황궁결계 축 반응이

상처를 따라 들어갔을 겁니다.

그럼 지금은 치료실이 아니라

봉인실에 있어야 했어요.”

듣기 싫은 종류의 설명이었다.

아델린은 그 말이

사실이라 더 싫었다.

카시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세린이 그제야 눈을 들었다.

“오늘 밤만 세 번째입니다.

본인 몸 평가를

늘 그렇게 후하게 하시는군요.”

카시안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건 인정에 가까운 침묵이었다.

문이 두 번 두드려졌다.

도로시 펜이었다.

손엔 젖은 천에 감싼 금속 조각과,

급히 베껴 온 현장 메모가 들려 있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쓸모 있는 소식은 있어요.”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금속 조각을 탁자 위에 올렸다.

“깨진 견갑 안쪽에서 나온 표식이에요.

장식 아니고,

부대 내부용 증표 같아요.”

아델린이 손을 뻗으려 하자

도로시가 먼저 덧붙였다.

“그리고 기디온 부팀장이

벌써 1차 기록판 작성 중이에요.

표현을 예쁘게 하진 않았을 걸요.”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델린이 눈길만 옮기자,

문밖 복도 그림자 너머로

기디온이 잠깐 보였다.

급할 때일수록

남의 실수보다

문장 순서를 먼저 보는 얼굴.

그런데도 지금 당장은

그를 내쫓을 수 없다.

증인도,

현장 인력도,

보고 경로도

필요하니까.

아델린은 금속 조각을

손안에 뒤집어 보았다.

표식 한쪽은 타 버렸고,

중앙 문양은 반쯤 긁혀 있었다.

남아 있는 건

부관대 문양 절반과

희미한 숫자 하나.

7.

제7선봉대.

카시안 시선이

그 숫자에 닿는 순간

미세하게 멈췄다.

아델린은 그 짧은 정지를

놓치지 않았다.

“누구였죠.”

그녀가 물었다.

직위가 아니라.

문양이 아니라.

이름을 묻는 방식으로.

카시안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을

금속 조각에서 떼지 못했다.

그 반응은

지금까지 그녀가 봐 온

카시안의 어떤 침묵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모르는 침묵이 아니라,

알아서 더 늦는 침묵.

그때 복도 끝에서

짧은 소란이 났다.

구조된 옛 기사가

다시 깨어난 것이다.

문밖 인원이

그를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 부르지 마!”

갈라진 고함.

“장부로 가!

장부로…”

도로시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저 말,

저만 이상하게 들은 거 아니죠.”

아델린은 즉시 몸을 돌렸다.

“같이 갑니다.”

세린이 짧게 잘랐다.

“상처 정리 끝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아델린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끝내세요.

그리고 감시관은 여기 두지 않습니다.”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끌고 가기 전에

직접 일어나세요.”

그 말에

카시안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린은 아예 한숨을 쉬었다.

“다들 오늘 밤

환자 협조도가 낮군요.”

옛 기사가 누워 있는 방은

임시실 가장 안쪽이었다.

문 앞에는 기디온이 서 있었다.

그는 아델린과 카시안이 함께 오자

아주 짧게 눈썹을 올렸다.

“벌써 공동 진술 체제로 가십니까.”

아델린은 그 말을 받지 않았다.

“상태.”

기디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죽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는 깨어 있는 동안

생각보다 말을 많이 한다는 거죠.”

“쓸모 있는 말입니까.”

“쓸모 있는 쪽에

가깝겠죠.

특히 감시관님이 들으면.”

카시안 표정이

더 굳었다.

아델린은 그걸 본 채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간이 결계침 네 개가 꽂혀 있었고,

옛 기사는 그 사이에 반쯤 몸을 일으킨 채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눈동자는 흐렸지만

공포만은 또렷했다.

그는 아델린보다 먼저

카시안을 봤다.

그리고 바로 몸이 굳었다.

도망치려는 반응도 아니었다.

오래전에 배운 자세로

본능적으로 얼어붙는 반응.

“대장…”

입술이 떨렸다.

“아니.

아니, 오면 안 돼.

여기서 찾으면…”

카시안이 한 걸음 앞으로 갔다.

아델린은 본능적으로

그를 막을 뻔했다.

하지만 옛 기사의 반응을 보곤

멈췄다.

두려워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한다.

공포와 의존이

같은 선에 묶였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카시안이 아주 낮게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압니까.”

옛 기사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

대장.

아니…”

그의 시선이 탁자 위 금속 조각으로 갔다.

순간,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

“그건 부관님 거야.”

아델린이 바로 물었다.

“부관 이름이 뭡니까.”

옛 기사는 대답 대신

목을 움츠렸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말하면 안 돼.”

“왜.”

“장부가 열린다.”

아델린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장부죠.”

옛 기사는 떨리는 손으로

자기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가족.

유예.

먼저 끊겨.”

방 안이 조용해졌다.

도로시가 제일 먼저

얼굴을 굳혔다.

가족.

유예.

그 조합은

회계와 인사 쪽에선

너무 구체적이었다.

카시안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이번엔 비틀지 않았다.

“그 부관 이름.

말해도 됩니다.”

옛 기사는 그 말을 듣고도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허락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결국 입술이

거의 피처럼 마른 소리를 냈다.

“마티아스… 렌.”

아델린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몰기사 보상 봉투.

재심 대기.

잔여금 유예.

시즌1에서

그 이름은 한 번

죽은 사람 쪽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지금,

살아남은 계약자의 입으로

다시 나왔다.

이건 단순 회상이 아니다.

현재 기동과 연결된 이름이다.

옛 기사는 그 이름을 뱉은 직후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

적지 마.

부관님이 적지 말랬어.

이름 적히면

집부터 잡힌다고…”

아델린은 눈길 하나 바꾸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누가 집을 잡죠.”

옛 기사는 대답 대신

머리를 세게 저었다.

기억이 아니라

공포가 먼저 올라오는 상태였다.

더 밀면 깨질 수 있다.

아델린은 거기서 멈췄다.

그 순간 카시안이,

아주 드물게

먼저 물러났다.

그는 침대 곁에서 한 발 물러나

문쪽으로 돌아섰다.

그게 도망은 아니라는 걸

아델린은 알았다.

버티는 방식이다.

지금 바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제일 익숙한 거리 조절.

아델린은 도로시에게

짧게 지시했다.

“유예 장부 쪽부터 봅니다.

마티아스 렌 봉투와

현재 구조자 명부를 대조하세요.”

도로시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끝나기도 전에

싫은 방향으로 이해됐어요.”

기디온이 문밖에서 물었다.

“공식 조사로 돌립니까.”

아델린이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이름 하나가 나왔다고

사람을 다시 묶진 않죠.”

기디온은 무언가 더 적는 얼굴이었다.

그 자체가 짜증났지만,

지금은 다른 쪽이 급했다.

인사원 제한 열람실로 돌아오는 길에

카시안은 거의 아무 말이 없었다.

도로시는 먼저 회계 기록실로 뛰었고,

기디온은 감찰조정팀 쪽에

현장 보존 지시를 내리러 빠졌고,

세린은 반동선 추적판을 챙기러

결계국으로 향했다.

결국 복도엔

아델린과 카시안 둘만 남았다.

해가 뜨기 직전의 복도는

언제나 조금 비어 보였다.

등은 켜져 있는데

사람이 적어서 더 차갑게 느껴지는 시간.

아델린은 걷다 말고

문득 속도를 늦췄다.

카시안도 같이 멈췄다.

그가 먼저 말했다.

“규정엔 증거 없는 신상 특정

금지 아닙니까.”

아델린이 그를 봤다.

“그 규정 생긴 날엔

증거가 너무 많아서 더 문제였겠죠.”

카시안이 아주 약하게 웃었다.

그건 평소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비틀어 넘기려는 농담보다

숨 돌릴 틈을 억지로 만드는 습관에 가까웠다.

아델린은 그대로 잘랐다.

“좋아요.

역사 강의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이름부터.”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 창문으로

새벽빛이 아주 조금 들어왔다.

그 창백한 빛 아래에서

그는 처음으로

육백 년 산 기사보다

밤새 한 번도 자지 못한 부상자처럼 보였다.

아델린은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티아스 렌.”

카시안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 쪽으로 돌아왔다.

“그 부관 맞습니까.”

이번 침묵은

도망치는 침묵이 아니었다.

오래 묻어 둔 물건을

드디어 꺼내야 할 때 생기는,

무게를 가늠하는 침묵에 가까웠다.

그는 아주 늦게 말했다.

“네.”

그리고 몇 걸음 더 간 뒤,

아예 벽 쪽으로 등을 기댔다.

어깨 상처를 피하려고

한쪽만 가볍게 기대는 방식.

아델린은 그것까지 보였다.

그래서 재촉하지 않았다.

카시안이 먼저 말을 골랐다.

“마티아스는

칼보다 장부를 더 잘 다루던 놈이었습니다.

걸음은 빨랐고,

글씨는 깔끔했고,

무엇보다 사람 이름을 안 놓쳤죠.”

아델린은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부관이 됐습니까.”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시켰습니다.

부관 자리는

칼 잘 쓰는 놈보다

사람을 안 놓치는 놈이 더 낫거든요.”

“전황이 나빠지기 시작한 건

북부 회랑 함락 직후였습니다.

사람은 빠지고,

보급은 끊기고,

왕도에선 겉보기 좋은 공문만 내려오던 때였죠.

그리고 그 사이에

다른 문서가 섞여 들어왔습니다.”

아델린이 조용히 물었다.

“휴면 충성 계약.”

카시안이 그녀를 봤다.

“네.”

그가 말했다.

“처음엔 이름이 달랐습니다.

비상 충성 유지안.

예비 축 보존안.

이런 식이었죠.

마티아스가 먼저 읽고

저한테 가져왔습니다.

그날 그놈이

문서를 들고 와서

처음으로 저한테 욕을 했습니다.

검은 맹세를 받는 줄 알았는데,

이건 목줄이라고.”

카시안은 정면을 보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계약 대상자 이름 옆에

가족 명부가 붙어 있었습니다.

유족 배급,

장례 허가,

보상금 유예,

이송 허가.

거부하면 그걸 끊겠다는 식이었죠.”

복도 공기가

한 번 더 식었다.

이젠 상상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한 행정 항목이 붙은 순간,

잔혹함은 훨씬 구체적이 된다.

카시안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충성을 맹세하는 게 아니라,

가족이 먼저 굶거나

묻히지 못하는 쪽을 고르게 만드는 문장이었습니다.”

아델린은 그제야 알았다.

왜 옛 기사가

이름보다 장부를 먼저 무서워했는지.

왜 `가족`, `유예` 같은 단어에

그렇게 즉각 반응했는지.

카시안은 더 낮아졌다.

“마티아스는 그걸 막으려 했습니다.

적어도 이름을 섞어서

누가 누구 가족인지

바로 못 보게 하려 했고,

서명을 늦추려 했고,

문장을 바꾸려 했어요.”

“성공했습니까.”

아델린이 물었다.

카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는 못 했죠.

저는 밖에 있었고,

돌아왔을 땐

서명은 끝나 있었고,

명부 일부는 사라졌고,

마티아스는 전사 처리돼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이

복도에서 가장 무겁게 떨어졌다.

전사 처리.

죽었다는 말과

조금 다르다.

행정이 사람 하나를

결론으로 덮을 때 쓰는 표현에 더 가깝다.

아델린이 아주 조용히 물었다.

“시신은.”

카시안이 쓴웃음을 흘렸다.

“없었습니다.

봉투만 남았죠.”

전몰기사 보상 봉투.

유족 미수령.

잔여금 유예.

이름 하나가

다시 현재와 이어졌다.

아델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낮게 말했다.

“잊은 사람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카시안이 그녀를 봤다.

아주 잠깐,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작게 숨을 뱉었다.

“표정 검수까지 하십니까.”

아델린도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오늘은 해야겠네요.”

그 짧은 문답 뒤에

묘하게 긴 침묵이 왔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종류의 침묵.

카시안은 먼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그 이름만은

장부에서 끝까지 못 내렸습니다.”

아델린은 그 말을

해석하지 않았다.

그냥 기억해 두었다.

제한 열람실엔

이미 도로시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봉투 세 개와

급여 유예 원부,

그리고 오래된 재심 대기 서류철을

탁자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아델린이 들어오자마자

도로시가 말했다.

“싫은 예감이

너무 정확했어요.”

“무엇이죠.”

도로시는 마티아스 렌 봉투를 펼쳤다.

겉면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름.

직위.

유족 미수령.

잔여금 유예.

그런데 봉투 안쪽을

빛에 비추자

겉에선 안 보이던 얇은 덧종이 자국이 나왔다.

누군가 예전에

다른 문서를 끼워 넣었다가

다시 빼낸 흔적이었다.

도로시가 혀를 찼다.

“죽은 사람 봉투에

뭘 숨겨 둔 거예요.”

아델린은 장갑을 끼고

봉투 안쪽 실밥을 더듬었다.

한쪽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두꺼웠다.

붙인 뒤 다시 뜯은 흔적.

그녀는 작은 칼끝으로

실선을 조심스럽게 벌렸다.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반쯤 접힌 채 나왔다.

낡았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표제는 없었다.

대신 맨 위에

숫자와 이름이 섞여 있었다.

제7선봉대

예비 전환 대상 재분류안.

카시안 손이

탁자 모서리에서 멈췄다.

도로시는 빠르게 아래 줄을 읽었다.

“가족 보상 유예 연동.

배급선 조정.

장례권 보류…”

그녀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미친.”

아델린은 문장을 끝까지 읽었다.

거부 시.

유족 지원 전면 유예.

대상 이탈 시.

가족 선행 격리.

기억 저항 강한 대상은

가족 명부 선열람 후 재서약.

아델린은 종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도로시가 마른 입술로 물었다.

“이걸 충성 계약이라고 부른 거예요.”

카시안이 아주 낮게 답했다.

“네.

겉에선.”

그는 종이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거기엔 더 흐린 필체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정식 서식이 아니라,

누군가 급히 덧댄 메모처럼.

`이건 자발 서약이 아니다.

사람을 남기려면 이름부터 숨겨야 한다.`

아델린은 그 글씨를 보는 순간

곧장 알 수 있었다.

공식 필체가 아니다.

현장 사람이 남긴 글씨다.

마티아스 렌.

그 이름을 굳이 적지 않아도

누가 남긴 메모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카시안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저놈 글씨 맞습니다.”

이번엔 `놈`이라는 말이

가볍지 않았다.

오래 알고,

오래 잃어버린 사람에게만

나올 수 있는 호칭이었다.

아델린은 곧장 도로시에게 말했다.

“현재 구조자 명부와

유예 원부 대조.

같은 계열이 남았는지 봐요.”

“이미 보고 있었어요.”

도로시는 다른 장부를 펼쳤다.

“오늘 외곽에서 구조된 둘,

둘 다 가계 보조 이력에

이상한 끊김이 있어요.

직접 본인 기록은 멀쩡한데,

가족 쪽 급여와 배급선에

오래전 유예 코드가 한 번씩 껴 있어요.”

카시안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아델린은 그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 탓이라고 말하면

잘라 냅니다.”

도로시가 눈을 들었다가

다시 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카시안은 뜻밖에도

곧장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늦게,

마른 웃음처럼 말했다.

“요즘 팀장님 협박은

점점 정교해지는군요.”

아델린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효율이 좋아야 하니까요.”

카시안이 낮게 숨을 뱉었다.

그제야 조금,

사람다운 소리가 났다.

그들은 다시

옛 기사 쪽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금속 조각과

숨겨진 재분류안을 함께 들고.

옛 기사는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아까보다 눈은 더 깨어 있었다.

아델린은 종이를

그에게 바로 들이밀지 않았다.

먼저 묻고,

대답할 수 있는 만큼만 받는다.

그게 지금 필요한 방식이었다.

“마티아스 렌.”

아델린이 말했다.

“그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죠.”

옛 기사는 한동안

천장만 보았다.

그러다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끝까지…

이름으로 부른 사람.”

카시안이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옛 기사는 떨리는 숨으로 말을 이었다.

“다들 번호로 바꿀 때도.

기동표로 부를 때도.

부관님은 이름을 읽었어.

그래서 더 오래 버텼지.”

아델린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왜 장부를 무서워합니까.”

옛 기사는 이번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델린 손에 든 문서를 보다가,

거기 적힌 `유족`, `유예`라는 글자를 보자

눈동자가 한 번 크게 떨렸다.

그리고 마침내,

거의 기어 나오듯 말했다.

“우린 충성 맹세 안 했어.”

방 안이 멎었다.

옛 기사는 숨을 몰아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애들 명부를 올려놨어.

어머니 묻힌 자리도.

배급표도.

안 하면,

먼저 거길 끊는다고…”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부관님이

자기 이름으로 돌리려 했어.

우리 이름 가리려고.

근데 늦었지.”

아델린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답은

이미 나왔다.

휴면 충성 계약은

이름과 맹세로 묶인 게 아니다.

가족과 생계와 장례를 쥔 공포로

묶였다.

카시안이 처음으로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서 아직도

이름보다 장부를 먼저 두려워한 거군.”

옛 기사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이 오면

다시 서게 만든다고 했어.

검이 있으면

다시 명령이 이어진다고…”

카시안은 더 앞으로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침대 난간을

천천히 쥐었다가 놓았다.

아델린은 그 손동작 하나를 봤다.

그는 지금

그 사람을 위로할 수도,

변명할 수도,

자기 죄책감을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그저 듣고 있었다.

아델린은 그게

오히려 더 어렵다는 걸 알았다.

방을 나와

복도 끝 창가에 멈춰 섰을 때,

해는 완전히 뜨지 않았는데도

빛은 이미 회색에서 흰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밤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하나도 안 끝났는데도.

도로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전 유예 코드 전부 다시 볼게요.

이건 회계국이 아니라

인질 명부 수준이네.”

세린은 결계국 쪽에서 보내온

추적판을 넘겨받으며 짧게 말했다.

“내부 기준 충돌 납니다.

오늘 안에 누가 먼저

처리 우선순위 잡자고 할 거예요.”

기디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미 새 기록판을 열고 있었다.

아델린은 그 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다음 싸움은

현장이 아니라 기준선에서 벌어진다.

이 사람들을 위협으로 먼저 볼지,

피해자로 먼저 볼지.

카시안을 증인으로 세울지,

다시 봉인축으로 몰아넣을지.

충돌은 이제 피할 수 없다.

아델린은 손안 문서를

다시 펼쳤다.

맨 아래 가장 작은 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거부 시 유족 지원 전면 유예.

대상 이탈 시 가족 선행 격리.`

충성은 없었다.

공포만 남아 있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