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 자의 규정
산 자의 규정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인데도
황실 인사원 임시분류실은
이미 낮처럼 밝았다.
밝아서 더 차가웠다.
긴 탁자 위엔
밤새 넘어온 서류판이
두 줄로 놓여 있었다.
`보호`.
`격리`.
아델린은 그 두 단어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사람 얼굴 대신
칸부터 보게 될까 봐.
세린 베일은
분류실 벽면에 걸린 추적판 앞에서
밤새 잠들지 못한 사람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 갔다.
“기동 흔적 잔류자 열셋.
그중 즉시 진정이 필요한 쪽이 다섯.
재기동 확률은 정오 전까지
한 번 더 튈 가능성이 큽니다.”
도로시가
다른 쪽 판을 두드렸다.
“가족 연동 유예 코드도
전부 살아 있어요.
보상,
주거,
배급,
장례까지 묶였습니다.”
“실무안은 뻔하겠군요.”
기디온 마르체가
기록판을 든 채 말했다.
“위험군 분류 후
가족 선행 격리.”
아델린이
그 말을 바로 받았다.
“이쯤 되면
강제 기동 관리 문서라고 적는 편이
더 정확하겠네요.”
카시안은
분류실 가장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왼쪽 어깨 붕대는
새것으로 갈렸지만
붉은 기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다.
밤새 잘 기색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멀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델린은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린이 추적판에
새 줄을 띄웠다.
빛글자가
허공에 차갑게 떠올랐다.
`임시 처리 권고`
`1. 기동 잔류자 전원 위험군 분류`
`2. 가족 선행 격리`
`3. 봉인기사 0001 동조 안정화 검토`
방 안 공기가
눈에 보이게 굳었다.
도로시가
먼저 욕을 삼켰다.
기디온은 삼키지 않았다.
“실무적으로는 빠른 안입니다.
정오 전에 기준을 못 세우면
이 사람들은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
치안 불안 요소로 넘어갑니다.”
“누가 넘기죠.”
아델린이 묻자
기디온이 담담하게 답했다.
“기준이 비어 있으면
항상 더 강한 부서가 가져갑니다.
이번엔 결계국이 아니라
대시종장 쪽이 먼저 움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시안이
그제야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비틀린 쪽에 가까웠다.
“역시 황궁은 성실하군요.
사람이 살아남자마자
정리 방법부터 논의하니.”
세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아래 문장을 가리켰다.
“빈정거릴 여유가 있으면 좋겠는데,
저 문장은 저희 쪽이 먼저 적은 겁니다.
반발은 이해하지만
재기동 자체는 현실이에요.”
“그래서 절 다시 축으로 세운다?”
카시안의 금빛 눈이
빛글자 끝을 스쳤다.
“말은 임시겠죠.”
세린은
잠깐 침묵하다가
정확한 사람답게
애매한 위로는 하지 않았다.
“네.
말은 임시일 겁니다.”
그 정직함이
오히려 더 냉정했다.
아델린은 탁자 끝에 놓인
빈 명령서를 끌어왔다.
“임시 기준은 제가 씁니다.”
기디온이 고개를 들었다.
“전례 없는 분류를
인사팀 단독으로 강행하시겠다고요.”
“전례가 지금 사람을 지켜주지 못하니까요.”
아델린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첫 줄을 적었다.
`기동 계약 강제 노출 피해자 임시 처리 기준`
기디온이 바로 지적했다.
“피해자라는 단어가 먼저 들어가면
위험군 판정이 뒤로 밀립니다.”
“좋습니다.”
아델린이 다음 줄을 적었다.
`제1항. 강제 기동 흔적은 위협 판정의 자동 근거가 아니다.`
`제2항. 생존 사실은 보호 개시의 기준으로 우선한다.`
도로시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세린은 눈을 내리깔고
문장을 읽었다.
기디온은 펜 끝으로 탁자를 두 번 쳤다.
“이 규정,
밖으로 나가면
정치 문장 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한텐
살 길입니다.”
아델린이 말했다.
그때
분류실 문이 세게 열렸다.
보조 실무관 하나가
거의 뛰어들다시피 들어왔다.
“3격리실에서
이름 확인 거부가 다시 나왔습니다.
가족 연동 문구를 보고
발작하는 환자가 둘입니다.”
보조 실무관은
숨도 못 고른 채
한 줄을 더 붙였다.
“기사단 쪽에선
위험군 전환 없이는 인수 못 한다고 합니다.
가족 선행 격리안도
같이 올리겠답니다.”
아델린은 곧장 몸을 돌렸다.
카시안이 벽에서 떨어졌다.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어깨를 다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린이 그를 한 번 노려봤지만
말리진 않았다.
말려도 들을 얼굴이 아니었다.
3격리실 앞 복도엔
밤새 쌓인 피로와
새로 시작된 공포가
함께 엉겨 있었다.
결계선 안쪽엔
나이도 상처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누운 채, 앉은 채,
혹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기사였던 사람들.
기사의 가족이었던 사람들.
아직 자기 위치를
정리할 틈도 없는 사람들.
젊은 여자 하나가
침상 끝에서
두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 쥐고 있었다.
막 올라온 이름표가
침대 난간에 걸려 있었다.
`리에트 하센`
아래쪽 작은 줄엔
아직 마르지도 않은 붉은 글씨가 있었다.
`가족 확인 대기`
여자는 그 글씨만 보면
숨이 막히는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
보조 실무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인 확인을 위해
가족 관계를 한 번만 더…”
“하지 마.”
카시안이 먼저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방 안이 조용해질 만큼
단단했다.
아델린이 옆에서
차갑게 말했다.
“확인은 필요합니다.”
리에트는
둘 사이를 번갈아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가족 이름 쓰면
찾아와요.”
쉰 소리였다.
밤새 울다
마른 사람 목소리.
“동생이 아직 남았어요.
장부에 이름 올라가면
이번엔 걔를 데려가요.”
아델린은 눈을 내리깔고
이름표를 봤다.
카시안은 여자의 손을 봤다.
손등 안쪽에
희미한 옛 낙인이 있었다.
장부를 쥐던 사람들만
생기던 잔흔이었다.
아델린이 천천히 물었다.
“이름을 안 적으면
동생을 숨길 수 있다고 들었습니까.”
“숨기는 게 아니라
늦출 수 있다고…”
리에트는 고개를 숙였다.
“하루라도 늦으면
사람이 바뀌기도 하니까.”
카시안이 아주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아델린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침대 난간의 이름표를 떼어
뒷면에 직접 무언가를 적었다.
`열람 봉인`
`책임자: 아델린 케스트`
그걸 다시 걸며
말했다.
“가족 이름은 지금 적지 않습니다.
본인 이름만 보존합니다.
열람은 제 서명 없이는 막겠습니다.”
카시안이 옆에서 바로 말했다.
“막는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적지 않으면
이 사람은 보호 명부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들어가는 순간
다른 명부에도 복사됩니다.”
아델린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직접
봉인 겁니다.”
카시안이 짧게 웃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씁쓸했다.
“황궁 문서가
한 장만 남는다고 믿으십니까.”
리에트는
둘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들은 듯했다.
자기 이름이
어디에 적히느냐가
오늘 살아남는 방식과 이어진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떨 수 있었다.
아델린은 더 이상
환자 앞에서 논쟁하지 않았다.
“세린,
이 격리실부터
위험군 표기 빼십시오.
`보호 관찰`로 바꿉니다.”
“공문 서명 없으면
누가 문제 삼을 겁니다.”
“제가 서명하죠.”
그 순간
카시안이 말했다.
“문제는 서명한 뒤입니다.”
아델린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복도로 걸어 나왔다.
걸음을 멈춘 건
격리실 문이 닫힌 뒤였다.
그래도 분노는
금방 닫히지 않았다.
카시안이
두 걸음 늦게 따라왔다.
“방금 그건
공개된 자리에서
제 판단을 뒤엎은 겁니다.”
아델린이 먼저 말했다.
카시안은 대답 대신
복도 창가 쪽을 한 번 봤다.
날은 완전히 밝아졌고,
밝아질수록
숨길 수 있는 곳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 여자한텐
이름보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을 벌려면
기준이 필요합니다.”
“기준은 늘 나중에
목줄이 됩니다.”
아델린이
처음으로 그를 정면으로 봤다.
“그럼 뭘 하자는 겁니까.
이름도 남기지 말고,
보호 명령도 올리지 말고,
그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조차
없던 일처럼 두자고요?”
카시안의 눈빛이
단단하게 굳었다.
“없던 일로 두자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궁정 기록 안에
그대로 올리지 말자는 겁니다.”
“전부 비공식으로 숨기면
다음엔 누가 끌려갔는지도
증명 못 합니다.”
“적어 두면
다음에 누굴 끌고 갈지도
더 쉬워집니다.”
짧은 침묵.
그 침묵이 길어진 건
둘 다 상대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아서였다.
아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 이 제도 안에서
지킬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카시안이 대답했다.
“전 이 제도가
먼저 사람을 먹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요.
계속 도망만 치면
끝이 납니까?”
“도망이 아니라
분리입니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날카로워졌다.
“적어도 저 사람들을
다시 한 줄에 묶진 않습니다.”
아델린도
더 이상 낮은 목소리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흩어 놓고 나면
누가 책임집니까.”
“살아 있는 쪽이
직접 고르게 하면 됩니다.”
“이 궁정에서요?”
아델린이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기막힘에 가까웠다.
“선택권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저 방에 누워 있지도 않았습니다.”
카시안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 틈이 오히려
더 아팠다.
아델린은 그가
지금도 결국
혼자 끌어안고 끝내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걸 봤다.
그는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자기 몸 안에서 먼저 찾았다.
남에게 맡기기보다.
제도에 남기기보다.
아델린은 그게
왜 그렇게까지
거슬리는지 알고 있었다.
자기와 닮아서였다.
그때
세린이 급하게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둘 다 여기 있었군요.
안 좋은 소식입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좋은 소식이 아닐 건 분명했다.
“잔류선이
예상보다 빨리 모입니다.
아까 회수한 부관대 표식,
그게 아직 호출점 역할을 하고 있어요.”
세린이 손에 든 작은 봉인함을 들어 보였다.
금속 표식은
얇은 결정 유리 안에서조차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정오 전까지 이 선이 한 번 더 튀면
저 사람들 몇은 버티지 못해요.
기동 반응이 다시 일어나면
저쪽은 피해자냐 위협이냐를 따질 틈도 없이
강제 봉인으로 넘어갑니다.”
아델린이 빠르게 물었다.
“끊는 법은.”
세린은 숨 한번 고르고 답했다.
“둘입니다.
표식을 완전히 태워
남은 선을 동시에 끊거나,
더 강한 축에 잠시 붙여서
흐름을 가라앉히거나.”
복도가 잠깐 조용해졌다.
카시안은 그 둘 중
두 번째 말이 나오기 전부터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아델린은 세린을 봤다.
“표식을 태우면
증거도 일부 사라집니까.”
“네.
그리고 연결된 사람들한테
반동이 갈 수 있습니다.
약한 사람은 견디고,
약하지 않은 사람은… 장담 못 합니다.”
“강한 축은.”
세린이
거의 무표정하게 말했다.
“여기 다들 아는 사람입니다.”
카시안은 웃지 않았다.
“역시 결국 그쪽이군.”
세린이 덧붙였다.
“강제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는
가장 안전한 쪽이 맞아요.
짧게만 걸면 됩니다.”
카시안은
그 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짧게.”
그 단어를
아주 천천히 되뇌었다.
“이번 밤만.
이번 전투만.
이번 구간만.
그 말이 몇 번이나 이어지면
육백 년이 되는지 아십니까.”
세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델린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은
사람이 마음 정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3격리실 안쪽에서
갑자기 비명 하나가 터졌다.
세린이 먼저 달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찬 공기와 함께
기동선 특유의 금속 냄새가 확 퍼졌다.
방 안에서는
리에트가 아니었다.
침상 맞은편에 누워 있던
나이 든 남자가
몸을 활처럼 젖힌 채
결계끈을 뜯어내고 있었다.
눈동자는 풀려 있었고,
입 안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옛 명령어가
끊긴 채 새고 있었다.
기사는 자동으로
사람보다 명령을 먼저 따라 하게 된다.
그 버릇이
죽지 않고 남아 있으면
저런 얼굴이 된다.
보조 기사 둘이
억제봉을 들고 다가갔다.
세린이 소리쳤다.
“멈춰요.
지금 그거 박으면
남은 선 다 엉킵니다.”
“그럼 방법이 없잖습니까.”
누군가가 외쳤다.
“위험군 전환하겠습니다.”
아델린이
곧장 그 앞을 막아섰다.
“보호 관찰 중입니다.
억제봉 사용 금지.”
“팀장님,
지금 저 사람 칼만 없지
기동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산 사람입니다.”
아델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방 안에서 가장 먼저
기준선처럼 박혔다.
`산 사람입니다.`
그 말이
이 방에서 오늘 처음
규정보다 먼저 울렸다.
하지만 말만으로
기동선을 멈출 순 없었다.
남자의 손등에서
퍼진 붉은 선이
침상 둘레 결계에 닿자
방 안쪽 다른 침상 세 곳이 동시에 떨렸다.
세린이 이를 갈았다.
“연동됩니다.
지금 안 잡으면
셋이 같이 튀어요.”
아델린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카시안에게 향했다.
그도 그걸 봤다.
그 한 번의 시선만으로
둘 다 알 수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아델린은
이를 악물듯 숨을 들이켰다.
그 다음 말은
그녀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카시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델린은 한 걸음 다가갔다.
“자발적으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오까지만,
이 선만 잠깐…”
말이 거기서 멈췄다.
멈췄는데도
이미 늦었다.
카시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하나 사라졌다.
놀람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었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정오까지만.”
그가 낮게 말했다.
방 안이 너무 시끄러웠는데도
그 말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그 말,
오래됐습니다.”
아델린은 손을 움켜쥐었다.
“전 당신을 장치로 쓰자는 게 아닙니다.”
“방금 그러셨습니다.”
짧고 정확한 대답.
아델린은 그 순간
설명할 문장을 잃었다.
자기가 하려던 말의 뜻은
분명 달랐는데,
그 차이를
당장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았다.
“동의 없는 연결은 금지합니다.
그 문장도 제가 적을 겁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아주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방 안에서 사람이 무너지는 동안
선택권을 묻는 건
대답을 강요하는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아델린의 숨이
짧게 멎었다.
아픈 문장이었다.
그래서 더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도 묻고 남겨야 합니다.”
그녀가 겨우 말했다.
“안 그러면
누가 강요했는지도 사라집니다.”
“남겨 두면
강요하는 쪽이 더 능숙해집니다.”
세린이 뒤에서 소리쳤다.
“둘 다 나중에 싸우고
지금 결정을…”
카시안은 더 듣지 않았다.
그는 세린 손에 있던 봉인함을
휙 가져갔다.
세린이 욕설을 삼키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카시안은 봉인함을 열어
부관대 표식을 꺼냈다.
낡은 금속이
공기 밖으로 나오자마자
방 안 모든 기동선이
한 번에 떨었다.
“카시안!”
아델린이 처음으로
명령이 아니라
거의 붙잡듯 그를 불렀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건 축에 묶는 게 아니라
호출점을 부수는 겁니다.”
“반동 옵니다.”
세린이 외쳤다.
“네 어깨 상태로는…”
“어깨만 망가지면
싼 편이죠.”
카시안은 표식을
자기 피가 묻은 왼손으로 감쌌다.
순간
오래된 문장이
쇳소리처럼 울렸다.
옛 이름,
옛 번호,
옛 전선.
방 안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카시안은 그 금속을
근처 소금결정 화로에
거의 눌러 박듯 집어넣었다.
지직,
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방 안 여기저기서
비명과 신음이 한 번씩 튀었다.
아델린은 반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침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세린은 추적판을 열었다.
기디온은
한 걸음 물러서서
오히려 더 정확한 위치에서
모든 걸 보기 시작했다.
표식이 완전히 타기 전에
붉은 선 하나가
카시안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 선은 어깨,
목,
등 뒤를 스치더니
천장 결계로 곧장 튀었다.
세린이 욕을 했다.
“황궁 본결계가 받았어요.”
“뭐라고요.”
도로시가 질렸다.
추적판 위 숫자가
미친 듯 올라갔다.
`직원번호 0001 동조율 상승`
`황궁 중심결계 연계 확인`
`축 대체 가능성 재산정`
아델린은 그 문장 중
딱 하나만 봤다.
`축 대체 가능성`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왜 이렇게까지
숨이 답답한지 알 수 있었다.
카시안이 표식을 놓쳤다.
금속은 화로 안에서
새까맣게 식어 갔지만,
그 대가로
그의 무릎이 먼저 꺾였다.
아델린이 거의 뛰어가
그를 붙잡았다.
왼쪽 어깨 붕대에
붉은 피가 다시 번지고 있었다.
카시안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셋은 멈췄습니까.”
세린이 추적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멈췄어요.
잔류선 내려갑니다.”
방 안 공기가
아주 느리게 돌아왔다.
침상 위 사람들도
하나둘 경련을 멈췄다.
억제봉을 들었던 기사들이
뒤늦게 손을 내렸다.
아델린은
카시안을 부축한 채
이를 악물었다.
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다른 문제가 더 커졌다.
기디온이
기록판을 닫는 소리가 났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또렷했다.
아델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기록 전송 보류하십시오.”
“보류 권한이 애매합니다.”
“지금부터 명확해집니다.
현장 민감 증거와
피해자 보호 관련 자료는
인사팀장 직권으로 임시 봉인합니다.”
기디온이 잠깐 생각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방금 올라간 건
기록이 아니라 수치입니다.
결계국 추적 로그는
여러 부서가 동시에 봅니다.”
세린이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부정하지 못한단 뜻이었다.
아델린은 눈을 감았다가
곧바로 뜨고
카시안을 세린 쪽으로 넘겼다.
“상처부터 보십시오.”
카시안은
손을 빼지 않았다.
“저 사람들부터.”
“둘 다 할 겁니다.”
아델린의 목소리가
너무 차가워서
오히려 떨림이 드러났다.
“지금은 제 말 들으십시오.”
카시안은
아주 잠깐 그녀를 봤다.
그 눈빛엔
고마움도,
미안함도,
방금 전 다툼의 잔흔도
전부 섞여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것도
말로 나오진 않았다.
세린이 그를 데려가고,
도로시는
급히 판을 정리하러 뛰었다.
격리실은
조금씩 다시
사람이 있는 방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델린은
침상 난간에 손을 짚고
한 번 숨을 골랐다.
리에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사람,
괜찮아요?”
아델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는 말은
방금 같은 장면 뒤에 붙이기엔
너무 가벼웠다.
“아직은 모릅니다.”
그 대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들은
위험물로 넘기지 않겠습니다.”
리에트는
이해한 듯,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살리겠다는 말보다
넘기지 않겠다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들리는 아침이었다.
분류실로 돌아오자
이미 탁자 위 문장은
한 번 더 늘어나 있었다.
기디온이 추가해 둔
회의 요청서였다.
`기동 잔류자 처리 기준 긴급 협의`
`안건 2. 직원번호 0001 임시 재배치 가능성`
아델린은 그 종이를 집어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새 명령서를 펼쳤다.
이번엔 제목이 더 짧았다.
`산 자의 규정`
도로시가
숨도 제대로 못 돌린 채
그 제목을 읽었다.
“진짜 제목을 그렇게 쓰실 겁니까.”
“네.”
아델린이 펜을 댔다.
`제1항. 강제 기동 피해자는 생존 사실만으로 보호 대상이 된다.`
`제2항. 가족 연동 문구는 구조 단계에서 효력을 정지한다.`
`제3항. 본인 동의 없는 축 연결 및 봉인 전환 금지.`
세린이 문 쪽에서
붕대 묻은 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제3항,
방금 벌어진 일 때문에
반발 제일 셀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2항은
회계국,
발령국,
결계국까지 다 걸립니다.”
“그래서 지금 쓰는 겁니다.”
기디온은
접힌 회의 요청서를 다시 펴며
아델린을 봤다.
“이 문장들,
예쁘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기 전에
누군가는 읽겠죠.”
아델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사인란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장갑 끝을 한 번 정리하고,
황실 인사팀장 인장을 눌렀다.
은빛 봉인이
종이 위에 번졌다.
그 작은 빛을 보는 동안만
방 안이 조용했다.
그때
문가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을 텐데.”
카시안이었다.
세린이 대충 감아 놓은 새 붕대가
어깨에 더 두껍게 둘려 있었다.
아델린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이 혼자 결론 낼 권리는 없습니다.”
카시안이
가볍게 숨을 뱉었다.
“당신도 없습니다.”
그 한마디가
아까 복도에서 끝내지 못한 싸움을
다시 끌고 올라왔다.
아델린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요.
오늘도 또
당신 몸으로 먼저 막고
나머지는 다 남겨 두겠다는 겁니까.”
카시안의 시선이
문서 제목으로 내려갔다.
`산 자의 규정`
그는 그 네 글자를
읽은 뒤 말했다.
“문장은 좋습니다.”
그는 잠깐 멈췄다가
더 낮게 덧붙였다.
“그런데 이런 건
늘 제가 먼저 피를 낸 뒤에 도착하더군요.”
아델린의 손끝이
문서 모서리를 눌렀다.
“늦어도 남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 방식은
그 순간 사람을 살려도
다음엔 누가 강요했는지
남기지 못합니다.”
카시안은
뭔가 대꾸하려다 말았다.
아델린은 그걸 봤다.
처음으로
그도 이 말에 바로 비웃지 못했다.
말 대신
방 안 공기가 먼저 갈라졌다.
문밖에서
정돈된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급할 이유가 없는 사람의 걸음.
그래서 더 피하고 싶은 사람의 걸음.
기디온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세린은 표정을 굳혔다.
도로시는
아예 얼굴을 찌푸렸다.
문이 열리고
라우렌스 헤일이 들어왔다.
단정한 예복,
흐트러짐 없는 장갑,
늘 그렇듯
누군가 이미 정리한 다음에만
현장에 오는 사람의 냄새.
그는 방 안을
아주 천천히 둘러봤다.
침상은 보지 않았다.
사람 얼굴도 오래 보지 않았다.
먼저 본 건
탁자 위 문장과
벽면 추적판이었다.
특히
아직 꺼지지 않은 수치 줄,
`직원번호 0001 동조율 상승`.
라우렌스의 시선이
거기서 아주 잠깐 멈췄다.
아델린은
그 잠깐이
얼마나 비싼지 알았다.
“대시종장.”
그녀가 먼저 불렀다.
라우렌스는
늘 그렇듯 정중하게
고개만 기울였다.
“케스트 팀장.
밤이 길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침도 길어질 예정입니다.”
“그렇겠군요.”
그는 미묘하게 웃었다.
사람을 위로할 때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정리 대상이 늘어났을 때 쓰는 표정이었다.
세린이 먼저 선을 그었다.
“현장은 아직 봉인 중입니다.
정식 이관 전까지
기록 열람 제한합니다.”
라우렌스는
세린을 흘겨보지도 않고
아델린을 봤다.
“지금 들은 바로는
임시 기준을 작성 중이라지요.”
“작성 완료했습니다.”
아델린이
`산 자의 규정`을 그에게 내밀지는 않았다.
보여주기 위해 쓴 문장이 아니었다.
라우렌스는 굳이 가져가지도 않았다.
대신
자기 뒤에 선 시종에게
얇은 기록판 하나를 받았다.
그리고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읽었다.
“황궁 중심결계와
직원번호 0001 사이의
실시간 동조 상승이 확인되었고,
비상 상황에서
복수 기동 잔류자를 안정화한 실적이 발생했으며,
현장 지휘자가 해당 직원에 대한
우선 보호 지시를 공표했다.”
기디온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자기 문장보다
더 큰 문장이 이미 만들어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표정이었다.
아델린이 차갑게 물었다.
“그걸 누가 어떤 순서로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이 됩니다.
대시종장도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라우렌스는 너무 쉽게 동의했다.
“그래서 공개석이 필요합니다.”
복도 끝 어딘가에서
종이 한 번 울렸다.
인사 공고판이
강제 갱신될 때 나는 소리였다.
도로시가 거의 반사적으로
창쪽으로 달려가
외부 게시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진심으로 싫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띄웠네요.”
세린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기디온은
기록판을 완전히 닫았다.
아델린은
굳이 보지 않아도
무슨 문장이 뜰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결국
창가로 걸어갔다.
황궁 중앙 게시판,
모든 부서가 동시에 읽는
그 커다란 빛판 위에
새 문장이 떠 있었다.
`공개 청문 소집`
`안건: 직원번호 0001의 봉인축 복귀 타당성`
`증인석 번호 부여: 0001`
`주재: 대시종장 라우렌스 헤일`
`개시 시각: 금일 정오`
정오.
아까 그녀가
카시안에게 꺼냈다가
스스로도 싫어졌던 바로 그 시간.
아델린은 한순간
손안 문서가 구겨질 만큼
쥐었다가 펴야 했다.
세린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너무 빠릅니다.
황제 쪽 승인도 못 받았을 텐데.”
라우렌스가
그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답했다.
“공개 청문은
승인이 아니라 절차입니다.
황궁이 불안에 대해
답하고 있다는 신호지요.”
“불안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빼고 말이군요.”
아델린이 쏘아붙였다.
라우렌스는 그 말엔 웃지 않았다.
그 대신
분류실 안쪽,
카시안 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직위를 보듯.
“왕좌의 영원한 검.”
그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정오까지 회복하십시오.
이제 당신이
무엇으로 남을지
모두 앞에서 결정해야 하니까.”
카시안은
문가에 선 채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 붕대 아래로
붉은 기가 다시 스며 나오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건
그 눈빛 안쪽에서 식어 가는 것이었다.
냉소도,
피로도 아니었다.
익숙함이었다.
너무 오래 당해서
차라리 낯설어지지 않는 종류의.
아델린은
그 표정을 보고
자기 속 어딘가가
한 번 더 서늘하게 꺼지는 걸 느꼈다.
방금 전 다툼의 상처와는
또 다른 종류였다.
그녀는 손에 든
`산 자의 규정`을
천천히 펼쳤다.
아직 잉크도 덜 말랐다.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분류하자는 문장.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더 늦게 쓰인 문장.
그 위로
창밖 공개 게시판의 빛이
차갑게 번져 들어왔다.
`증인석 번호 부여: 0001`
이번엔 현장이 아니라
공개된 자리에서
카시안을 다시 직위로 만들려 한다.
그리고 그 싸움은
몇 시간 뒤에 시작된다.
아델린은
문서를 접지 않았다.
접으면
지금 막 적은 문장까지
함께 작아질 것 같아서.
대신 더 또렷하게 말했다.
“정오 전에
처리 기준부터 통과시킵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딱 잘라 말하진 않았다.
세린에게도,
도로시에게도,
카시안에게도,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카시안이
아주 늦게 그녀를 봤다.
그 눈빛은 여전히
아까 다툼의 끝에 서 있었다.
믿겠다고도,
믿지 못하겠다고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사람의 눈.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정오의 청문은
카시안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산 자를
증인으로 볼지,
도구로 돌릴지.
그 기준선 자체를
누가 정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제
그 기준은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찢기거나 살아남게 된다.